바람이 불 때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39
레이먼드 브릭스 글, 그림 |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 / 199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일 지구가 종말한다 해도 난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그림책 <바람이 불때에>에 등장하는 영국인 노부부는 정년퇴직 후 호젓하고 한적한 시골 생활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은퇴 후에도 매일 도서관을 오가며 국제 정세를 파악하려 애쓰고 부지런히 신문도 읽고 현재의 삶과 작은 행복을 만끽하며 조금은 따분하지만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 보장될 수 없는 형편이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불안한 상황과 비상식량을 구할 수 없을만큼 눈 앞에 닥친 공포. 그러나 그런 눈 앞의 불길한 조짐 앞에서도 두 부부는 어린 시절 겪었던 2차대전의 악몽을 추억처럼 떠올리고, 도서관에서 가져 온 정부의 지침대로 대피소를 만들고 비상식수를 챙기며 지금 닥친 어려운 시기가 곧 지나갈 거라 믿는다. 그들은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며 그들 나름대로의 소박한 대피처를 만들고 정부와 높은 관리들의 정책을 철썩 같이 믿으며 핵전쟁을 준비한다. 이런 노부부의 노력이 헛된 것이면 좋으련만. 적군의 군함과 비행기기 출격하고 핵탄두를 실은 핵미사일이 발사되는 상황에 이른다.

 

   순간이었다. 짧은 찰나의 순간.

   강렬한 폭발과 빛이 뿜어져 나오고 후끈한 열기가 노부부을 휘감는다.

 

 엉망으로 변한 집 안, 깨져버린 유리창. 부인이 아끼던 커텐의 망가짐. 단수, 단전, 연락없는 구조대, 이런 일련의 불길한 상황들 속에도 그들의 일상은 지침대로 계속된다. 방문을 벽에 60도로 걸쳐 만든 임시 대피소에서 잠옷을 갈아입고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 곧 지금의 고통와 공포가 사라질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은 그들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면 좋으련만.  핵폭발 이후의 상황은 불길하기만 하다.

 

집 밖의 도로는 열기에 녹아내리고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던 식물은 모두 메말라 버린다. 핵폭발 후 낙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그들은 간이 의자를 끌고 나와 엉망으로 변한 그들의 정원에서 햇볕을 쬔다. 준비했던 물도, 우유도, 식량도 떨어져가고 기다리던 정부의 발표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다. 적군보다 먼저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구조대도 감감 무소식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지만 두 부부의 소망과 희망은 꺽이질 않는다. 이유없이 찾아오는 두통과 구토, 설사. 몸에 생겨난 푸르스름한 반점들.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식욕이 사라지고 움직일 기운조차 없는 방사능 오염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은 꿈꾼다. 내일 아침이면 상황이 달라질거라는 믿음.

 

그렇게 그들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밤을 잊어 버려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기도를 하며 보낸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났다.

 

 밝고 경쾌하고 소박하고 부지런한 두 부부. 끝까지 품위를 지키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고 그런 아름다움이 한 방의 핵무기로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것이 섬뜩할 정도이다. 그림책 <바람이 불때에> 제일 뒷장에 "3~9세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합니다"라는 구문이 보이지만 이 그림책은 어른들이 봐야할 책이라 생각된다. 육체적 힘은 다 빠져버린 늙은 노부부지만 삶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들의 처절하도록 긍정적인 대처법과 희망을 잃지 않는 마지막까지의 모습은 읽는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정부의 핵전쟁 긴급 대응방침과 노부부의 대처방법이 우리에게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보장할 수 있는가? 높은 관리들이 우리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책의 속표지가 온통 시꺼먼 색으로만 채워진 것처럼 아무것도 확신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씁쓸하고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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