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허공이라는 것은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오. 틈의 시간은 둥근 원이오. 세상의 질서는 직선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소. 직선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분리됨으로써 존재하오. 나는 너와 분리됨으로써 존재하고, 나비는 사람과 분리됨으로써 존재하오. 삶 역시 죽음과 분리됨으로써 존재하고 있소. 난 오랫동안 틈을 몰랐소. 세상이 틈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더 많은 업적,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직선으로 치닫는 세상의 눈에 틈이란 쓸모가 없는 공간, 해악의 공간일 뿐이오. 그러나 둥근 시간은 부드러운 융화의 세계이오. 그 속에서는 너와 내가 융합되어 있소. 사람과 나비가 융화되어 있으며,  삶과 죽음이 융화되어 있소.  <깊은 강 中>

 

"나에게 20대는 뭐라고 할까, 절대와 완전에 대한 과대망상적 집착으로 점철된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정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한계를 몰랐던 시절이었지.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무엇이나 다 되어보고 싶었고, 온갖 것을 다 사랑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삶의 모습은 언제나 날아오르는 자세였지"

"나에게 30대란 치욕의 시간이었어. 힘의 한계를 깨달을 수 밖에 없는 시간. 온갖 가능성 대신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 날아오르는 자세에서 발을 땅에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이 30대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런 나의 모습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어. 환상은 언제나 강한 법이니까. 환상을 만든 존재보다. 그래서 일기장과 수첩, 비망록을 소각하기 시작했던 거야."    <베니스에서 죽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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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나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왔다. 즉, 열정과 확신, 자기 내면의 이념들에 의해서 말이다. 라슬로 코바취를 알게 된 후, 나는 우리를 격려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바로 열정이라는 관용어이며, 우리의 행동을 추동하는 힘도 순수한 의지가 아니라 의지에 대한 상투어들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상투어들에 대한 경험이 진짜 경험인 것처럼 인식되어 우리가 언어의 보호 아래 둥지를 틀 수 있게 되면, 마침내 가상에 불과한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124p>

 

하지만 좀더 가까이 다가가면 아스베이크가 이 죄없는 찻주전자를 어떻게 일종의 고문도구처럼 변형시켰는지 알게 된다. 주전자의 부리는 활짝 열려있는 주둥이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맞붙어 있는 입술 한 쌍으로 변해 있고, 뚜껑은 두툼한 아교 덩어리로 주전자에 고정되어 있다. 안에 든 내용물을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은 손잡이 바로 위에 있는, 비틀어진 모양의 조그만 귀때 뿐이다. 얼핏 부드러운 장밋빛 줄무늬처럼 보이는 건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여러번 반복되고 있는 문장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대. 안으로 들어간 것은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  <209p>

 

때때로 저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시간에 제자리를 지키며 각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각자의 인생이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각자의 인생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만나는 교차점이니까요. 이러한 교차점이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인간일 겁니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은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을 테니까요. 그저 가치를 상실한 채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사건,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풀어진 실타래처럼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생을 가진 사람만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삶속에서 하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 순간의 그 무수한 다양함 속에서도 역사의 일관성을 알아차릴 수 있지요. 그런 인간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253~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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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최고 기대작이라는 설문조사 결과와 송강호, 문소리라는 두 배우가 나온다길래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담고 있었던 영화였다.

그러던 중에 가족의 달, 어버이날을 맞이하야, 싼값에 때울 생각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극장에 갔더랬다. 

최악의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혹시라도 이 영화의 시대배경이 그때라는 것과, 11번을 웃긴다는 카피에 속아 부모님을 동반할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몇가지 짚고 넘어가기를 권한다.

당신 부모님이 박정희에 대해 어떤 향수를 갖고 있느냐와, 지지정당이 혹시 한나라당이 아닌가 한하는 점이다.

사사오입으로 낙안이를 낳을 때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우리 식구들의 분위기는 마리구스병 운운하면서 슬슬 어색해지더니 낙안이가 고문받을 때에 가서는 앞뒤 관객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험악해졌다. 

'저런 게 어딨어', '말도 안돼'라며 불편해하던 우리 아버지... 결국 중간에 나가버리셨고, 내 돈 내고 들어온 영화는 끝까지 본다는 신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 역시도 엔딩 크레딧이 채 올라오기도 전에 극장을 나서고야 말았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 향수의 실체인가.

영화의 질과 상관없이 불편한 기억으로 남을 영화 '효자동 이발사'

단순히, 표어 식으로 말하자면,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소시민의 삶을 그린 블랙 코미디' 이다.

 77년생인 내 기억속 최초의 대통령은 전두환이고, 박정희가 어땠는지 그 비서실장이 얼마나 죽일 놈이었는는지는 알 바도 알고 싶지도 않다. 90년대를 넘어 밀레니엄을 사는 내게 사사오입이니 유신이니 하는 것은 국사책 맨 뒤 챕터에 실려 시험에도 나오지 않았던 흘러간 노랫가락보다도 못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 일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로도 기대와는 사뭇 다른 영화긴 했다. 기본적으로 정치색이 들어있는 영화는 싫어할 뿐더러 내가 알고싶지 않은 어둡고 더러운 우리 사회의 어느 한 모습을 애써 드러내는 것 또한 질색이다. 게다가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천연덕스러운 웃음기까지...

특히, 낙안이가 전기고문을 즐기는 장면에서는 나역시도 일어나고 싶을 정도였다. 소리지르고 찢기는 장면보다 더 소름끼치고 징그러운 판타지. 그 아역 배우에게는 뭐라 설명하고 그 장면을 찍었을까...아무 것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는 어린 배우에게 너무나 잔인한 연기가 아니었을까...

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낙안이를 일으키기 위한 성한모의 노력과 박정희의 몰락을 낙안이의 운명과 연관시키며 결국 부성으로 엔딩으로 끌고가는 뒷부븐은 다소 식상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생뚱맞기도 한 것이...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영화 자체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 시작부터가 나와는 또 우리 부모님과는 맞지 않았던 '효자동 이발사'. 어쩌면 좋은 영화 한편을 놓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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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꼬박꼬박 나갈 곳이 없는 처지인데다 주로 집에 박혀있다보니,

낮에 같이 시간을 때워줄 사람이 필요한 친구년들의 대기조 1순위가 되어버렸다.(차라리 영화속 '홍반장'처럼 일당제로 했음 책값은 벌었을게다)

그것도 당장 오늘 저녁이나 내일 점심같이 미처 스케줄표(물론 이런 거 안 키운다)를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확답을 해야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런 갑작스런 전화에 항상 OK를 하는 것은 내가 진짜 한가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질문 순서가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일 점심에 불편한 자리에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는 상황이라면...

"나 내일 누구 만나러 가는데 좀 불편하거든. 같이 가줄래?"

가 먼저 나와야지 내가 일의 경중과 플러스마이너스를 따져서 가부간에 결정을 내릴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의 영악한 친구년들은 꼭 이렇게 묻는다.

" 낼 점심에 뭐해?" " 낼 약속있어?"

그럼 천성이 정직한 나는 '아무 일도.", " 없어"

라고 대답을 하고...,

그러면 비로소 중요한 얘기를 꺼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가줄래?'가 아니라 "가자"가 되어버린다.

.....

그리하야 나는 내일도 또 쭐레쭐레 불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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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속한 것 중에 가장 처치곤란한 것, 뭔가 운영체계가 달라졌음 좋겠는 게 있다면 바로 두 팔이다.

생긴 것 자체가 몸뚱아리에서 쭉 삐져나온 것이 고정되어 있지가 않고 덜렁거린다.

가만히 서 있을때, 특히 어려운 사람 앞이라던가 엄숙한 자리, TV 카메라가 나를 비추고 있을 때(아직 그런 경험은 없지만) 도저히 이 두 팔을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해진다.

차려 자세로 양옆에 내리고 있는 건 아무 조치도 안 한 것과 마찬가지고,

앞으로 모으고 있자니 영 답답하고 소심해 보이고,

열중쉬어 자세로 뒤로 가져가면 휑하게 드러내놓은 가슴과 배가 민망하고...

움직일 때도 마찬가지다.

걸을 때 이런 경험 한번쯤은 있을거다. 팔과 다리가 같이 움직이는 뻣뻣한 움직임.

오죽하면 교련, 체육 시간에 시험을 다 봤을까...

뛸 때는 더 가관이다. 내가 100m를 20초에도 못 뛰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 두 팔을 어떻게 흔들어야하냐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그렇다고 잠잘 때라고 편안한가? 결코 아니다.

나는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야지 잠이 온다. 그것도 여러번 뒤척여야 겨우 제자리는 잡는다.

그렇게 잠자리를 몇번씩 뒤척이는 이유는 어이없게도 팔 때문이다.

옆으로 누우면 밑에 깔린 팔에 아플 뿐만 아니라 나머지 한 팔의 위치도 애매해지고,

엎드렸을 때도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렸다 접었다 폈다 별 짓을 다해도 영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다시 옆으로 돌아눕게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엉뚱한 상상!

팔이 접탈식 구조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떼었다 붙었다 할 수 있다면 이런 불편은 없지 않을까... 아님 잘 때 만이라도...

아, 일단 떼어내버리면 다시 붙일 팔이 없겠군.

밤에 자다가 물건을 집어야 한다면 것도 문제겠고...

결정적으로 두 팔이 없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남자가 뒤에서 양팔로 안아주는 것)가 일단 한번의 단계를 거쳐야 이뤄질테니... 걔가 귀찮아할거야.

오늘도 내 육중한 몸에 깔려 저릿저릿한 팔을 붙잡고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상상에 빠져본다.

팔을 떼어낸 몸, 게다가 징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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