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없다
U.G.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홍성규 옮김 / 마당기획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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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 가운데서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많을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일 듯싶다. 하지만 한번쯤은 대답하려고 노력을 기울여볼 필요가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빈 종이 한 장이 필요하다. 종이의 한켠에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한다. 종이 한 장으로 부족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다 적고나면 그 목록들의 반대편에다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적어나간다. 사랑, 미움, 질투, 거룩함, 비겁, 히스테리, 열망, 고통... 이렇게 적어나가다 보면 갑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중 어느 한쪽이 더 많(혹은 적)다는 걸 찾아내서 뭐하자는 얘기인가, 라는 물음이 물어질지 모른다. 이 질문은 일종의 덫이다.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적어도, 하나의 질문에 대답하려는 꽤 진지한 나의 행위를 막아버린다는 점에서. [깨달음은 없다]를 읽는 일은 다른 어떤 책을 읽는 일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이것이, 혹, 덫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덫에 채이는 것이 훌륭한 경험이라는 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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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하룻밤의 지식여행 15
다리안 리더 외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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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학이나 수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리즈에 재미들렸던 김영사의 '오버판' - 이른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촘스키, 양자론, 푸코, 진화심리학, 포스트페미니즘, 기호학, 프로이트, 라캉...하룻밤에 한 권을 읽는다는 꼬드김에 말려들었다가는 심하게 낭패볼, 지식의 한판 굿거리. 만화풍의 그림, 수십(혹은 수백)쪽의 논거를 단 몇 줄로 쥐어짜낸 놀라운 솜씨의 전시장...음...그래도 이런 책이 있으니 지적 고뇌자들의 땀내 밴 옷자락이라도 만져볼 수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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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땅의 사계
알도 레오폴드 지음, 이상원 옮김 / 푸른숲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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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전 속의 '현대'와 '지금'은 우리에게는 현대도 지금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고전이라고 할 때 그 속에 놓인 현대와 지금은 통시(通時)적 가치로서의 시간을 의미하고, 우리가 현대나 지금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고전에 명시된 지금은 우리의 지금과 동일한 것이다. 1949년에 초판이 발행된 [모래땅의 사계]는, 오늘날 우리가 가장 주목하는 분야이기도 한 환경에 관한 최고의 고전이며, 이 책에서 저자(알도 레오폴드)가 문제삼는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지금이 지닌 문제로 고스란히 이행되며, 불행하게도 문제의 심도는 1949년에서 2004년의 물리적 심도(55년)만큼 깊어져 있다. 종종 환경관련서적을 읽고나면 희망보다는 절망감을 훨씬 더 많이 가지게 되는데, [모래땅의 사계]에서 알도 레오폴드가 읊어주는 숱한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들로부터 이토록 크나큰 절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너무도 슬프다.

"신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주고는 다시 그것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더 이상 신이 주고 거두어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의 먼 선조가 삽을 발명했을 때 인간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나무를 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끼가 발명되자 거두는 존재까지 될 수 있었다.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나무를 심을 땅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 스스로 깨닫건 깨닫지 못하건 간에 식물의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영역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다.

그 후에도 선조들이 다른 도구들을 많이 만들어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좀더 정교해졌을 뿐 기본적인 두 가지 도구, 곧 삽과 도끼의 보조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우리는 사람들을 직업에 따라 분류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 내다 파는 사람, 수리하는 사람, 날카롭게 벼리는 사람, 혹은 어떻게 그 도구를 사용해야 할 지 가르쳐주는 사람 등. 그런 식의 구분을 통해 우리는 도구가 잘못 사용되었을 경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특별한 영역도 하나 있다. 철학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또 바라기만 하면 사실 누구나 어떤 도구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철학은 생각하고 바라는 바에 따라 도구를 사용하게 될 때 그것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는 존재 또한 인간이라는 점도 안다."(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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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1-13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마저 슬프네요 - '식물은 자살할 줄을 모른다'던 어느 한 소설가의 문장이 생각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것처럼, 나무들, 식물들의 반란이 일어난다면 세상이 한 번쯤은 바뀔 것도 같은데요...

에레혼 2004-11-13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 놓은 구절들이 님의 말씀처럼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분류와 철학의 역할에 관한 시각도 흥미롭구요......
가끔 올리시는 리뷰를 맛있게 천천히 음미하고 있습니다.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사족입니다만, 지금 제가 100번째 방문객이라고 하네요...2100]

 

 


책먹는하마 2004-11-17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본 또 한 권의 슬픔, 혹은 절망: 스콧 니어링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 갈 것인가]

우리말로 옮겨논 제목이 좀 위협적인 듯하지만(원제:Man's search for good life)...결국 되돌아가지도 않을 거고 니어링이 얘기하는 '굳-라이프'를 찾지도 않을 거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절망적...라일락와인님의 100번째 방문에 감사와 환영을... 식물과 자살...음...산다는 것이 죽음으로 간다는 사실을 식물은 확연히 알고 있는 듯...그러니 굳이 자살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코끼리를 쏘다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실천문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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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날 오후, 야간철책근무를 마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깬 나는 고향의 친구가 보내온 소포를 받았다. [문학사상] 1984년 1월호. 거기에는 김병익이 번역한 조지 오웰의 장편 [1984]가 깨알같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조금씩 '쏠듯이' 읽던 그때의 감동과 전율은 그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조지 오웰에게서는, [요한시집]의 장용학에서 그러하듯, 짙은 고독감이 느껴진다. 그들에게서는 또한 사색가의 병적 심각함, 혹은 정신병적 기질, 음울, 우울, 비통, 염세주의 - 이런 부정성의 기미가 짙게 스며난다. 그것들은 종종 그들의 심연을 향한 탐구와 비범한 통찰을 덮어버리곤 한다. 가령, [코끼리를 쏘다]에 나오는 한 에세이-'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을까'-의 이같은 대목. "아무리 친절하고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병원에서 죽는 것은 잔인하고 비참한 것이다. 다시 말해, 너무 사소하여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서두름, 복잡함,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 섞여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장소에 비인간성이 만들어내는 지독히 고통스런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이 병원에서의 죽음이다."(61쪽) 옮긴이의 꼼꼼한 성의가 더불어 돋보이는, 조지 오웰 소설의 핵(核)같은 에세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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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금석문 연구 - 돌에 새겨진 사회사
김용선 지음 / 일조각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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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연구가 김용선의 최신작. 알뜰살뜰한 문학애호가답게 햄릿을 인용해 놓은 그의 '연구후기' 첫머리가 인상적.(실은 후기 외엔 아직 이렇다 하게 읽어보질 않았음...음...) 부제에서 밝힌 바대로 이 책이  '돌에 새겨진 사회사' 란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결국 죽은 자의 행적을 고구(考究)하는 자체가 이미 존재론적 탐색이 아닌지. 그러니 이 책이 전작인 [고려묘지명집성]과 아울러 죽은 자를 통해 지금 산 자의 성찰에 값함은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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