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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2disc)
이창동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http://image.cine21.com/cine21/poster/2007/0515/M0010003_ss_POSTER_finalsmall.jpg)
1. 제목
<밀양>의 '밀양'은 그저 한국의 한 소도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지만, 영어 제목인 'Secret Sunshine'이 드러내듯 이성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신, 혹은 난마처럼 얽힌 존재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밀스런 햇볕'이라는 것은 영화의 주제와 썩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하지만 '밀양'은 어디까지나 엄연히 실재하는 한국의 소도시이며, “밀양이 어떤 곳이냐?"는 신애(전도연)의 물음에 대해 종찬(송강호)이 아무런 주저없이 대답하듯 한국의 어느 소도시와도 특별히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동네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양은 세련된 외모의 정우성이 완전 망가진 모습으로 출연했던 곽경택의 <똥개>의 무대로서의 밀양에 훨씬 가깝다. 농익은 경상도 사투리가 지배하는 이 촌스런 동네를 ‘신과 존재’라는 무거운 주제를 탐구할 공간으로 선택한 이창동의 발상은 ‘바람을 피우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아이와 함께 내려와 살기로 작정한' 여자(신애) 만큼이나 엉뚱하다. 하지만 이 엉뚱한 발상은 ‘신과 존재’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보편적 지평을 강하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논리적으로 정연한 발상이기도 하다.
밀양이 '비밀스런 햇볕'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은 비밀秘密이라고 할 때의 그 '密'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하지만 密이란 글자는 '비밀스럽다'는 뜻과 함께 '빽빽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한자어 사전에는 이 뜻이 맨 먼저 나와 있다. 밀림密林이라고 할 때의 그 밀 - 그렇다면 혹시, '밀양'이란 '비밀스런 햇볕의 공간'이 아니라 '유난히 볕이 가득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건 '뉘앙스의 문제'일 뿐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밀양을 '햇볕 가득한'이라는 의미의 'Full of Sunshine'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 생뚱맞은 생각은 신애의 집 누추한 마당 한 구석에 가득 햇볕이 내리쬐는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들었는데, 내가 본 것은 '비밀스런 햇볕'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듯 '풍성한 햇볕'이었다. 만약 그것이 '비밀스런 햇볕'이라면 여전히 거기에는 햇볕으로 상징되는 신의 불가해한 은총, 혹은 풀길 없는 존재의 얽힘만이 남을 것이다. 그건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풀어낼 수 없는 신비이며, 그런 식의 신비는 신애를 교회로 끌어들인 약사가 말하던 "보이지 않는 것에도 역사하는 하나님"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용서하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용서해야 하지 않는냐는 신애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고뇌를 무참하게 짓밟는다. 비밀이란 감추어져 있고, 끝내 풀리지 않는 무엇이다.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만이 그 비밀을 풀 수 있고, 그러나 그렇게 풀린 비밀조차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비밀은, 가히, 문학적 은유의 결정체다. 소설가인 이창동에게는 딱 어울리는 어의語意다. 하지만 나는 밀양이 '비밀스런 햇볕의 공간'이 아니라 '햇볕 가득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이 소망은, "이게 끝이야?" 라는,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조용히 들려오던 몇몇 관객들의 속삭임이 그들의 부족한 문학·예술적 소양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세속적 신에 저항하다 피투성이가 된 가련한 한 여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발현으로 읽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과 동행한다.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이 소망이 <밀양>이라는 영화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2. 연기
<밀양>을 보고 있으면, 연기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점이 명료해진다. 전도연이 '칸'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든 이유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 하나고, 송강호가 연기상을 받지 못한 이유 역시 (쉽지는 않지만) 납득이 간다는 게 다른 하나다. 수상의 엇갈림 만큼이나 두 배우의 연기와 관련된 조건들 역시 미묘하게 엇갈린다. 우선 캐릭터.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는 '범세계적 공감 가능 캐릭터'였다. 한국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는 말이다. 특히 아이를 유괴로 잃는 상황은 동서양을 막론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반면, 열연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할 정도로 완벽하게 재연된 송강호의 종찬은 '지극히 한국적인 캐릭터'였다. 다른 동양인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양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행간行間'이 존재하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연기라는 생각도 들지 않거니와, 그러니 '잘한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송강호는 종찬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종찬이라는 한 사내가 송강호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송강호와 종찬은 <밀양> 안에서 완벽하게 한 사람인 것이다. 결국, 연기상이 글자 그대로 연기에 주는 상이라면 연기를 하지 않은 그가 그 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 된다. 웃기는 일이지만.
2004년 임찬상 감독이 만든 <효자동 이발사>에는 주인공인 이발사 성한모(송강호)의 연기 파트너로 통치자 박정희를 연기한 '조영진'이라는 낯선 배우가 등장한다. 그는 그때까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박정희 역을 단골로 맡았던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기왕의 배우들이 만들어놓은 박정희의 이미지를 일정부분 따르면서도 '단골 배우'들과는 달리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그만의 '박정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왕의 '박정희 배우'들이 강한 카리스마를 연기하기 위해 '강단'에 치중했다면, 그는 외모와 음성의 부드러움을 십분 활용하면서 그에 상반되는 선병질적 기질을 표정의 드러냄과 감춤을 적절히 조정하면서 캐릭터의 이중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밀양>에서 그가 맡은 박도섭이라는 인물 역시 그런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배우 조영진의 캐스팅은 기막힌 것이었다. 웅변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면, 길거리에서 불량소녀인 딸을 후려잡는 장면, 회식자리에서 신애를 배웅하는 장면, 그리고 신애로 하여금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사투를 벌이게 만드는 면회실에서의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더," 라고 읊조리는 장면까지 - 그는 박도섭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이중적 면모를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이 경우 역시, 송강호의 그것처럼, 연기라기보다는 인물의 창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는, 한국현대극의 한가운데에 있는 극단 '연희단 거리패'의 배우장인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대한민국연기대상에서 조영진이 조연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것은 좀 의문이다)
전도연의 수상과 송강호의 연기에 묻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지만 조연들의 연기는 <밀양>을 더욱 풍성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기실 이런 사례는 오늘 한국영화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밀양>에서의 조연들(+보조연기자들)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의상실 사장과 그녀의 친구들, 약사와 그녀의 남편, 교회 사람들, 부흥회 목사와 집회 참석자들 - 이들이 집단적으로 연출해낸 이른바 '기독교 환자' 역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밀양>은 좋은 영화의 공통점 중 하나가 조역들의 좋은 연기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해주는 영화다.
3. 기독교
<밀양>의 시사회장에서 한 기자가 이창동 감독에게 "혹시 기독교에 감정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이창동의 답변은 "그런 거 없다"는 거였지만 이것이 얼마나 정직한 답변인지는 오직 이창동만이 알 뿐이다. 하지만 이 답변의 정직성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질문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자가 "현재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 행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을 했더라면 아마도 그로부터, 적어도, "일정부분 그렇다"는 답변은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때 그의 답변은 '꽤' 정직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오늘 한국 기독교'에 대해 가진 불만은 그의 영화 곳곳에 파편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밀양>은 그 '집대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의 부인인 양홍자(김여진)는 기독교 신자였고, 교회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심방)해 예배를 보는 자리를 영호는 박차고 일어난다. 비웃음과 신경질이 뒤섞인 영호의 표정은 '기독교에 대한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기독교 신자를 '환자'로 명명하는 오늘 비기독교인들의 냉소를 대변하며, 이는 상당부분 이창동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초록물고기>와 <오아시스>에는 주요 등장인물이 가진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들은 별로 자애롭지 못하며, 더러는 아주 비열하며, 그러면서도 입만 뗐다 하면 '하나님'과 '사랑'을 들먹인다. 하지만 그 인물들이나 그들의 이율배반은 극의 내용이나 플롯에 크게 관여하지 않거니와 극적 반전이나 활발한 전개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반면 <밀양>에서 '기독교', 혹은 '기독교 신자'는 주인공 신애의 존재와 깊게 관련되어 있으며, <밀양>의 한 주제, 즉 고통스런 삶에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이창동은 신애로 하여금 무신론자와 광신자, 신비주의자와 회의주의자의 영역 모두를 경험하게 만듦으로서 '존재'라는 관념적 문제의 형상화에 몰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종교든 인생이든 신이든, 문제의 핵심은 그 본질에 있으며, 본질에 대한 고뇌, 고민, 분석, 이해를 문제삼는 이창동에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나 냉소의 여부를 묻는 것은 지극히 말초적이며 대중적 흥미를 노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본질을 문제삼는 이에게 오늘 기독교(인)의 행태가 곱게 보일 리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고장인 서양보다 유별나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밤이면 가로등 갯수보다 더 많이(!) 켜지는 붉은 네온십자가는 한국 기독교의 '선정성'을 상징하며, 빈번하게 벌어지는 부흥회는 전교(전도)의 신성한 의미보다는 광신적 기미를 드러낸다. <박하사탕>에 잠깐 등장했고, <밀양>에 꽤 많이 등장하는 '심방' 역시 한국 기독교 특유의 행태 중 하나이며 그것은 종교 본연의 엄숙한 수행이나 박애의 실천이기보다는 개인 혹은 구역의 복락福樂을 집단적으로 기원하는 제의에 가깝다. 이러한 기복적 신앙은 종교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 행태야말로 오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며 일상적인 모습이다.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밀양>의 주제나 목적은 아니지만, 신애의 존재론적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이런 행태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비판적인 시선은, 다시말해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일반적 행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은, 실은 기독교에 대한 나쁜 감정이 아니라 가장 애정어린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