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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2disc)
이창동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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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

<밀양>의 '밀양'은 그저 한국의 한 소도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지만, 영어 제목인 'Secret Sunshine'이 드러내듯 이성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신, 혹은 난마처럼 얽힌 존재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밀스런 햇볕'이라는 것은 영화의 주제와 썩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하지만 '밀양'은 어디까지나 엄연히 실재하는 한국의 소도시이며, “밀양이 어떤 곳이냐?"는 신애(전도연)의 물음에 대해 종찬(송강호)이 아무런 주저없이 대답하듯 한국의 어느 소도시와도 특별히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동네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양은 세련된 외모의 정우성이 완전 망가진 모습으로 출연했던 곽경택의 <똥개>의 무대로서의 밀양에 훨씬 가깝다. 농익은 경상도 사투리가 지배하는 이 촌스런 동네를 ‘신과 존재’라는 무거운 주제를 탐구할 공간으로 선택한 이창동의 발상은 ‘바람을 피우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아이와 함께 내려와 살기로 작정한' 여자(신애) 만큼이나 엉뚱하다. 하지만 이 엉뚱한 발상은 ‘신과 존재’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보편적 지평을 강하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논리적으로 정연한 발상이기도 하다.

밀양이 '비밀스런 햇볕'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은 비밀秘密이라고 할 때의 그 '密'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하지만 密이란 글자는 '비밀스럽다'는 뜻과 함께 '빽빽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한자어 사전에는 이 뜻이 맨 먼저 나와 있다. 밀림密林이라고 할 때의 그 밀 - 그렇다면 혹시, '밀양'이란 '비밀스런 햇볕의 공간'이 아니라 '유난히 볕이 가득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건 '뉘앙스의 문제'일 뿐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밀양을 '햇볕 가득한'이라는 의미의 'Full of Sunshine'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 생뚱맞은 생각은 신애의 집 누추한 마당 한 구석에 가득 햇볕이 내리쬐는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들었는데, 내가 본 것은 '비밀스런 햇볕'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듯 '풍성한 햇볕'이었다. 만약 그것이 '비밀스런 햇볕'이라면 여전히 거기에는 햇볕으로 상징되는 신의 불가해한 은총, 혹은 풀길 없는 존재의 얽힘만이 남을 것이다. 그건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풀어낼 수 없는 신비이며, 그런 식의 신비는 신애를 교회로 끌어들인 약사가 말하던 "보이지 않는 것에도 역사하는 하나님"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용서하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용서해야 하지 않는냐는 신애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고뇌를 무참하게 짓밟는다. 비밀이란 감추어져 있고, 끝내 풀리지 않는 무엇이다.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만이 그 비밀을 풀 수 있고, 그러나 그렇게 풀린 비밀조차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비밀은, 가히, 문학적 은유의 결정체다. 소설가인 이창동에게는 딱 어울리는 어의語意다. 하지만 나는 밀양이 '비밀스런 햇볕의 공간'이 아니라 '햇볕 가득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이 소망은, "이게 끝이야?" 라는,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조용히 들려오던 몇몇 관객들의 속삭임이 그들의 부족한 문학·예술적 소양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세속적 신에 저항하다 피투성이가 된 가련한 한 여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발현으로 읽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과 동행한다.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이 소망이 <밀양>이라는 영화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2. 연기

<밀양>을 보고 있으면, 연기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점이 명료해진다. 전도연이 '칸'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든 이유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 하나고, 송강호가 연기상을 받지 못한 이유 역시 (쉽지는 않지만) 납득이 간다는 게 다른 하나다. 수상의 엇갈림 만큼이나 두 배우의 연기와 관련된 조건들 역시 미묘하게 엇갈린다. 우선 캐릭터.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는 '범세계적 공감 가능 캐릭터'였다. 한국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는 말이다. 특히 아이를 유괴로 잃는 상황은 동서양을 막론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반면, 열연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할 정도로 완벽하게 재연된 송강호의 종찬은 '지극히 한국적인 캐릭터'였다. 다른 동양인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양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행간行間'이 존재하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연기라는 생각도 들지 않거니와, 그러니 '잘한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송강호는 종찬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종찬이라는 한 사내가 송강호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송강호와 종찬은 <밀양> 안에서 완벽하게 한 사람인 것이다. 결국, 연기상이 글자 그대로 연기에 주는 상이라면 연기를 하지 않은 그가 그 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 된다. 웃기는 일이지만.

2004년 임찬상 감독이 만든 <효자동 이발사>에는 주인공인 이발사 성한모(송강호)의 연기 파트너로 통치자 박정희를 연기한 '조영진'이라는 낯선 배우가 등장한다. 그는 그때까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박정희 역을 단골로 맡았던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기왕의 배우들이 만들어놓은 박정희의 이미지를 일정부분 따르면서도 '단골 배우'들과는 달리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그만의 '박정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왕의 '박정희 배우'들이 강한 카리스마를 연기하기 위해 '강단'에 치중했다면, 그는 외모와 음성의 부드러움을 십분 활용하면서 그에 상반되는 선병질적 기질을 표정의 드러냄과 감춤을 적절히 조정하면서 캐릭터의 이중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밀양>에서 그가 맡은 박도섭이라는 인물 역시 그런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배우 조영진의 캐스팅은 기막힌 것이었다. 웅변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면, 길거리에서 불량소녀인 딸을 후려잡는 장면, 회식자리에서 신애를 배웅하는 장면, 그리고 신애로 하여금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사투를 벌이게 만드는 면회실에서의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더," 라고 읊조리는 장면까지 - 그는 박도섭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이중적 면모를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이 경우 역시, 송강호의 그것처럼, 연기라기보다는 인물의 창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는, 한국현대극의 한가운데에 있는 극단 '연희단 거리패'의 배우장인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대한민국연기대상에서 조영진이 조연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것은 좀 의문이다)

전도연의 수상과 송강호의 연기에 묻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지만 조연들의 연기는 <밀양>을 더욱 풍성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기실 이런 사례는 오늘 한국영화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밀양>에서의 조연들(+보조연기자들)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의상실 사장과 그녀의 친구들, 약사와 그녀의 남편, 교회 사람들, 부흥회 목사와 집회 참석자들 - 이들이 집단적으로 연출해낸 이른바 '기독교 환자' 역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밀양>은 좋은 영화의 공통점 중 하나가 조역들의 좋은 연기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해주는 영화다.


3. 기독교

<밀양>의 시사회장에서 한 기자가 이창동 감독에게 "혹시 기독교에 감정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이창동의 답변은 "그런 거 없다"는 거였지만 이것이 얼마나 정직한 답변인지는 오직 이창동만이 알 뿐이다. 하지만 이 답변의 정직성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질문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자가 "현재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 행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을 했더라면 아마도 그로부터, 적어도, "일정부분 그렇다"는 답변은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때 그의 답변은 '꽤' 정직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오늘 한국 기독교'에 대해 가진 불만은 그의 영화 곳곳에 파편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밀양>은 그 '집대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의 부인인 양홍자(김여진)는 기독교 신자였고, 교회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심방)해 예배를 보는 자리를 영호는 박차고 일어난다. 비웃음과 신경질이 뒤섞인 영호의 표정은 '기독교에 대한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기독교 신자를 '환자'로 명명하는 오늘 비기독교인들의 냉소를 대변하며, 이는 상당부분 이창동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초록물고기>와 <오아시스>에는 주요 등장인물이 가진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들은 별로 자애롭지 못하며, 더러는 아주 비열하며, 그러면서도 입만 뗐다 하면 '하나님'과 '사랑'을 들먹인다. 하지만 그 인물들이나 그들의 이율배반은 극의 내용이나 플롯에 크게 관여하지 않거니와 극적 반전이나 활발한 전개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반면 <밀양>에서 '기독교', 혹은 '기독교 신자'는 주인공 신애의 존재와 깊게 관련되어 있으며, <밀양>의 한 주제, 즉 고통스런 삶에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이창동은 신애로 하여금 무신론자와 광신자, 신비주의자와 회의주의자의 영역 모두를 경험하게 만듦으로서 '존재'라는 관념적 문제의 형상화에 몰두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종교든 인생이든 신이든, 문제의 핵심은 그 본질에 있으며, 본질에 대한 고뇌, 고민, 분석, 이해를 문제삼는 이창동에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나 냉소의 여부를 묻는 것은 지극히 말초적이며 대중적 흥미를 노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본질을 문제삼는 이에게 오늘 기독교(인)의 행태가 곱게 보일 리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기독교의 본고장인 서양보다 유별나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밤이면 가로등 갯수보다 더 많이(!) 켜지는 붉은 네온십자가는 한국 기독교의 '선정성'을 상징하며, 빈번하게 벌어지는 부흥회는 전교(전도)의 신성한 의미보다는 광신적 기미를 드러낸다. <박하사탕>에 잠깐 등장했고, <밀양>에 꽤 많이 등장하는 '심방' 역시 한국 기독교 특유의 행태 중 하나이며 그것은 종교 본연의 엄숙한 수행이나 박애의 실천이기보다는 개인 혹은 구역의 복락福樂을 집단적으로 기원하는 제의에 가깝다. 이러한 기복적 신앙은 종교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 행태야말로 오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며 일상적인 모습이다.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밀양>의 주제나 목적은 아니지만, 신애의 존재론적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이런 행태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비판적인 시선은, 다시말해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일반적 행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은, 실은 기독교에 대한 나쁜 감정이 아니라 가장 애정어린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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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 [할인행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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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호러, 탐미적 스릴러라 불릴 만한 독특한 장르영화를 생산하는 일련의 연출가들, 가령 데이빗 린치David Lynch나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의 계열에 속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의 2002년 작품 <스파이더Spider>의 포스터에 선명한 공백으로 드러나는 퍼즐 한 조각은 영화의 내용을 응축하고 있을 뿐아니라 집착과 분열, 고독과 공포, 죄의식과 절망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구성하는 가장 가슴 아픈 조건들을 상징한다. 저 한 조각의 퍼즐이 빠져나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든 그보다 더 우울하고 처절하다. 가령, 영화 속의 주인공 스파이더(랄프 파인즈Ralph Fiennes)가 자신의 친어머니를 창녀인 계모로 착각하고 살해하는 것 같이.

2007년 봄, 한국 영화계의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었던 스크린쿼터가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극장가를 유린했던 '거미인간' 세번째 이야기의 포스터가 보여주는 좌우대칭의 분열 이미지는 사실, 상당히 촌스러웠다. 하기야 최첨단 그래픽과 현란한 스턴트로 중무장하긴 했지만 스토리는 여전히 20세기 중반의 만화에서 빌어오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그 '고전성'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한국의 관객들이 이 거미인간에게 열광한 이유가 '고전에의 희구'일 리는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화려한 그래픽과 현란한 스턴트가 관객동원의 주요인이라 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화려하고 현란한 많은 영화들을 보아온 관객들이 아니었던가. 참 알 수 없는 것이 그 '취향'이라는 것일 텐데, 그래도 <스파이더맨3>에게 보여준 하루 관객 50만은 너무 과한 열기였다.

거미는 날벌레들을 포충망으로 잡아 천천히 뜯어먹고 산다. 대부분의 거미는 단독생활을 하고, 그린란드와 같은 극한지역이나 히말라야 같은 고산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적당한 크기의 벌레'들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존이 가능하다. 거미하면 거미줄이 연상되지만 거미줄을 치는 조망성 거미와는 달리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배회성 거미도 있다. 늑대거미는 배회성 거미에 속하지만 그 중에는 배회하면서도 줄을 치는 것도 있고, 줄을 치면서도 돌아다니는 거미도 있으며, 남의 거미줄에 '빈대붙어' 사는 더부살이 거미도 있다. 창거미 같은 놈은 더부살이에 만족하지 않고 주인거미나 그의 새끼를 잡아먹을 정도로 잔혹한 동족살해범이다. 여러 모로 보아 인간은 거미와 비슷하다. 악착같은 생명력과 안면몰수의 동족살해까지.

<스파이더>를 통해, 유년의 고통스런 기억이 끈질기게 한 인간을 물고늘어지는 장면들을 보여준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일찍이 영상의 힘에 압도된 사회의 비극(<비디오드롬Videodrome>)과 무소불위의 권능을 갖고 싶었던 한 과학자의 참혹한 말로(<플라이The fly>)를 섬뜩한 영상에 담은 바 있다. 자동차의 충돌과 성욕의 함수를 풀어낸 <크래쉬Crash>나 인간내면에 잠재한 폭력성, 혹은 폭력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흥미롭고도 가슴 아프게 그렸던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역시 영락없는 '크로넨버그표 영화'였다. 문득, 그가 만약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이런 상상은 터무니도 없고, 별 소용도 없다. 그에게 <스파이더맨>을 맡길 제작자가 있을 리 만무하고, 맡긴다 해도 십중팔구 그가 맡지 않았을 것이다.

<스파이더>의 거미인간과 <스파이더맨>시리즈의 거미인간은 똑같이 삶을 고뇌한다. 다수의 관객은 더 뻔하고 공허한, 화려하고 현란하게 과장된 거미인간의 고뇌를 선택한다. 이것이 종합예술이라는 영화에 대한 향유자들의 압도적 취향이다. 그리고 이 압도적 취향은, <스파이더>를 비치하고 있는 비디오가게를 찾는 일이 사막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과 고가의 디비디 타이틀을 구입하기 위해 담배값을 아끼거나 지갑이 얇은 영화광들로 하여금 마냥 '곰TV'의 '무료영화 상영관'에 이 영화가 걸리기를 기다리게 한다는 것, 혹은 뛰어난 영화적 안목과 자비심을 동시에 가진 불법 업로더(!)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우울한 현실에 충분하고도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그리고 그것은 수준높은 예술영화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또한 크게 일조하는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영화예술의 진전과 예술영화의 진전이 서로 다른 길이라는 사실은, 그러나, 새삼스런 일은 아닐 것이다. <스파이더>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나서, 그리 오래지 않아 이런 영화에 투자할 제작자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암울한 상상에, 뜬금없이 가슴을 철렁 내려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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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SE - [할인행사]
미디어체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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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심각한, 지루한, 복잡한, 말도 안 되는, 형편없는 스토리라면 더욱 그렇다. 어차피 두어 시간 후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거칠게 간추려 얘기하자면, 딱 이 이유 밖에 없다. 그러나, 그래서, 편한 만큼, 딱 그만큼 영화는 부족하다. 영화의 구성은 너무 늘여놓았거나 너무 줄여놓은, 둘 중의 하나다. 완전한 구성을 보이는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그래서, 그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영화'가 찾아질 때의 느낌은, 형언하기 힘들다.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어서 온몸이 저릿한, 뭐 그런, 언젠가는 이별을 선고받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진 채 사랑을 하는 것 같은, 쾌감과 통증이 겹쳐져 있는, 이상야릇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소크라테스를 아내 크산티페가 찾아와 "당신은 부당하게 처형당하는 겁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럼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처형당하기를 바라는 거요?"라고 되물었다. 이 유명한 답변은 한 못생긴 철학자가 보여준 많은 당당함의 하나에 불과하다.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를 오르던 예수는 비통한 얼굴로 다가선 그의 어머니에게 "이제 내가 어떻게 되는지를 잘 지켜보세요,"라고 말했다. 이는 한 젊은 광신도의 온몸에 깃든 온유의 한 자락일 뿐이다. 무표정한 얼굴의 이발사 에드 크레인은 사형집행장으로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라는 독백을 남긴다. 이 독백은 세상의 수다와 번잡을 정관(靜觀)한 자의 암묵적 시편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당연히 과묵하다. 줄담배를 피운다면 그보다 훨씬 더 과묵하거니와, 그런 그의 과묵은 그를 사색적 인간으로 분류하는 데 주저치 않게 한다. 영화 속에서 에드 크레인(빌리 밥 손튼)은 끊임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있으며, 그의 목소리가 덮인 내레이션은 그의 침묵을 요령 있게 설명해준다. 사실 침묵은 한 가지가 아니다. 가령, 롱펠로가 <모리노스의 세 가지 침묵>에서 분류해놓은 걸 빌어다 쓰면, 말의 침묵이 그 하나요, 욕망의 침묵이 그 둘이며, 생각의 침묵이 그 셋이다. 이 세 가지 침묵을 완전히 실행해내는 과묵자의 존재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거의 거기에 가까운 사람은 없지 않다. 에드 크레인은 그 중의 하나다. 그는 우선 담배를 줄지어 피우기 때문에라도 말의 침묵자다. 친구에게 협박편지를 보내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필요한 만큼 적정한 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욕망의 침묵자로서 자격이 있다.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하는 소녀 버디 어번더서(스칼렛 요한슨)를 피아노 선생에게 데려가는 대목에서 그의 생각의 침묵자적 단면이 발견된다. 물론 진정한 생각의 침묵이란 생각을 끊어내는 선승에게서나 발견되는 것이겠지만, 생각의 완전한 침묵자가 되기 바로 직전의 상태가 ‘흐르는 대로 생각을 놓아두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한다면 그는 생래적으로 그런 상태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다.

없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있지 않다’라는 것만을 없음의 유일한 의미로 묶어버린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없음’은 아무 것도 없다. 가령, 집을 떠나는 자에게 더 이상 집은 없다. 그러나 그가 떠났다고 해서 집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없음은 있음의 그림자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다. 있음 때문에 없음이 완성될 수 있고, 삶으로 인해 죽음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님’이다. 에드 크레인은 살인의 이유를 찾아가는,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의 존재함으로부터 자신의 부재를 깨닫는다. 역으로 그의 존재함으로부터 그들의 부재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거부하게 한 것은 바로 있음과 없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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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들) (Camel(s))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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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느리다. 그리고 못생겼다. 낙타는 사막에 살며 등에 혹을 가지고 있다. 등에 혹이 하나가 있는 단봉낙타는 두 개가 있는 쌍봉낙타보다 빠르며 발바닥이 연해서 사막에 살기에 적합하다. 쌍봉낙타는 발바닥이 단단해서 상대적으로 바위나 자갈이 많은 구릉지에 산다. 낙타의 등에 물이 들어 있어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건 낙타에 관한 가장 흔하게 범하는 상식의 오류다. 낙타의 등은 물이 아니라 지방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사흘쯤 굶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한다. 물이 들어 있는 곳은 모두 세 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낙타의 위장 중 첫번째 방이며, 그 덕분에 사흘쯤 물을 마시지 않아도 지장이 없단다. 모래바람에 견디기 위해 낙타의 눈꺼풀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성적 노리개인 '낙타눈썹'이 어떤 모양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모양을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황석영의 단편소설 <낙타누깔>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속이 좀 매스꺼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어떤 사람을 낙타라고 한다면 그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느린 사람? 못생긴 사람? 사막에 사는 사람? 등에 혹이 난 사람? 그러나 낙타는 사람을 비유하는 데 썩 좋은 재료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낙타 같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 <낙타(들)>에서 낙타는 무슨 의미로 쓰인 것일까?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영화 속(내용)에도, 밖(홍보용 카피)에도. 낙타의 의미는 차치하고, 표제로 쓴 '낙타'에 복수형인 '들'을 괄호 안에다 묶어놓은 건 또 무슨 뜻일까?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두 사람만이 나온다. 40대를 막 지난 남자와 곧 40대로 진입하는 여자. 이 둘 중 누가 낙타일까? 둘 다 낙타일까? '들'을 괄호에다 묶어놓았으니, 둘 중 하나만 낙타일 수도 있고, 둘 모두 낙타일 수도 있다. 어쨌든, 느리기로 치면 둘 모두 느리고, 둘의 '관계맺음' 역시 무척이나 느리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인내하도록 만들 정도로.

그러고 보면 영화의 두 등장인물이 낙타인 것이 아니라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는 롱테이크, 그 미칠 것 같은 지루함 그 자체가 낙타다. 즉, <낙타(들)>이라는 영화 그 자체가 낙타인 것이다. 영화는 마치, 90분 동안 두 마리의 낙타가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인데……이게, 정말이지 믿기지 않을 일이지만, 다 보고나면 뭔가, 서늘해진다. "이걸 내가 다 봤단 말이지?" 라고 반문하며, "나도 참 대단한 인간이군……"하고 중얼거리며 그 서늘함의 정체를 궁리하게 된다. 그 정체가 '집요함'이라는 사실을, 나는 꽤 오랜 궁리 끝에 발견했다. 모든 느린 것은 집요하다. 낙타는 느리고, 그리고 집요하다. 집요함이 없었다면 <낙타(들)>도 없고, 그것을 끝까지 보아낸 관객도 없다. 그런데, 집요하다는 건, 미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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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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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지 않은 젊은 생이란 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괴로움이야말로 진정한 삶이지, 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궁기'에 팍 절은 인생이다. 얼마든지 괴롭지 않고도 진정성 넘치는 젊은 날을 구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 그는 '궁기'가 뭔지를 X도 모르는, 그래서 진정과는 한참 거리가 먼 얼치기다. 최규석의 만화들은 대부분이 그렇지만 <습지생태보고서>는 특히나 '젊은 날'의 '궁기'와 진정한 삶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는 데 바쳐진다. 작가가 걸음마를 뗄 때 젊은 날을 궁기의 고뇌라는 장아찌 항아리에 목만 겨우 내놓고 살아봤던 사람의 가슴을 쓱쓱, 박박, 문질러버린, 예술! (<사이시옷>에 실린 단편 '창窓'에서 이미 진면목의 일부를 확인했더랬는데...<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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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7-03-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눔은 바로 장바구니루다...ㅋ

책먹는하마 2007-03-1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꾸로, 그러니까 요즘 <한겨레21>에 연재되고 있는 '대한민국 원주민' 시리즈부터 보게 되었는데, 본질로 찔러 들어가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는...하나만 담아도 장바구니 그득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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