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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의 발명 -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 1500∼1800 ㅣ 책세상총서 13
린 헌트 지음, 조한욱 옮김 / 책세상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창녀는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이다. 창녀는 포르노그라피가 탄생하던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최초의 포르노그라피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아레티노의 [논리]는 두 명의 창녀가 나누는 대화이다. 가장 중요하고 지속력이 있는 포르노그라피 텍스트 중의 하나인 [쾌락의 여성의 회고록]의 여주인공도 창녀다. 창녀는 포르노그라피 세계의 극치인 사드 후작의 세계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의 가장 긴 소설 [쥘리에트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창녀의 방탕함이다. 르네상스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창녀들은 외설 문학을 채우고 있다. 즉 그녀의 삶과 사랑이 수많은 포르노그라피 텍스트의 재료를 이루고 있다. 창녀의 전기나 고백은 이 장르에서 매우 보편적인 형식, 대체로 창녀 자신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방황하는 창녀]에서 [패니 힐]까지, 마르고에서 쥘리에트에 이르기까지 창녀의 수다 자체가 서구 포르노그라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포주이건 난봉꾼이건 외설성의 세계에서 그녀와 지위를 다툴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p.275)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기실 정도의 차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포르노그라피로 상징되는 ‘외설적 묘사’들은 동양과 서양에 고루, 그리고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과거의 그것은 문학으로도 뛰어난 것이 많았고, 회화에 있어서도 어떤 ‘성과’라고 해야 할 정도의 '작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것은 예술과 충돌했는데,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의 지위 향상에 일정부분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예술의 근대성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 초기 포르노그라피의 거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캐릭터였던 창녀는, 당연히, 포르노그라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역사를 가진다. 구약성서에도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의 하나로 인정되기도 한다. 결국 거슬러올라가면 포르노그라피의 역사, 적어도 그것의 역사적 성격은 창녀의 기원과 거의 같다고 봐야 하며, 이는 포르노그라피의 물리칠 수 없는 정신이자 이념인 '관음증'과 하나의 광맥을 이룬다. 인류의 모든 문명이 지니고 있는 신화에서 남녀의 성적행위(나아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성행위)를 훔쳐보는 이야기는 반드시 삽입되어 있다. 문학으로든 회화로든,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자체가 이미 관음이다. 이런 논리에 의한다면, 결국 모든 신화는 포르노그라피 혹은 포르노그라피적이라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떤 열린 의식을 지닌 문명론자도 신화가 수용하고 있는 남녀의 성적 결합과 그것에 대한 묘사를 두고 포르노그라피 혹은 포르노그라피적이라고 명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근대까지 여전히 그러했다. 물론 격렬한 논쟁에서 번번이 패퇴하여 억압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열린 의식의 예술가들에 의해 '고무찬양'된 포르노그라피 혹은 포르노그라피적 작품들은 하나같이 훗날 지극한 예술로 인정받았고 예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고무찬양' 되어졌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격렬한 전장으로부터 귀환한 포르노그라피의 오늘은 어떤가? 그것은 여전히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 유치원생까지 마음만 먹으면, 아니 굳이 마음을 먹지 않아도 아무런 거침없이 구경할 수 있게 된 '작품들'에 대해 뭐라고 떠든다는 것은 중언부언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대중문화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예술의 발전인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한낱 헛기침에 불과한 것이다. ▒ 이제, 포르노그라피를 대상으로 놓고 논쟁을 벌이는 짓은 더 이상 예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불행한 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 역시, 불행하게도, 중요하지 않다. 완전히 우리의 손을 떠난 것이다. '현대' - 그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