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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일반판 (2disc)
김지운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두 개의 <달콤한 인생>이 있다. 우선, 1960년 칸에서 대상을 받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고전명작 ‘La dolce vita’가 있다. 제목만으로 보면 그야말로 달콤한 인생이다. dolce는 라틴어로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 김지운이 느와르로 만든 영화의 영어로 된 제목은 ‘The bittersweet life’, 달콤 씁쓸한 인생이다. 플롯과 내러티브, 등장인물과 배경이 모두 판이한 두 영화는 공유하는 제목조차 엇갈리지만 영화의 정조는 dolce와 bittersweet를 한 길로 흐르게 한다. 상류사회의 타락과 막연한 두려움을 흑백화면에 담아낸 펠리니의 달콤함이 감미로운 것도 부드러운 것도 아니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김지운이 펠리니의 제목을 끌어온 것, 그리고 bittersweet라고 붙여놓은 것은 일리가 있는 패러디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장화, 홍련>을 연출했던 김지운은 기왕에 보여준 그 독특함들을 <달콤한 인생>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유명한 선禪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맺는 것이 그렇다. 바람에 버드나무가 휘날리는 장면 위로 선우(호텔 매니저, 조폭 2인자:이병헌 분)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흐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선승에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냐,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냐 물었더니, 선승이 흔들리는 것은 네 마음이라 했다는 그 이야기. 여기서 선승은 달마를 시작으로 이어져온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祖師 혜능慧能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조폭이지만 이 고급한 선지禪志를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다. 흔들리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자신이 모시는 두목의 젊은 애인(첼리스트:신민아 분)을 사랑하게 된 그 마음. 영화는 그의 고요한 비련悲戀을 느와르 특유의 선혈을 뚝뚝 흘리며 진행시킨다. 잔인하고 비열하지만 화면은 아름답다. 그의 사랑은 이해가 가며, 동정을 끌어낼만하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도 버드나무도 아닌 자신의 마음이라고 시작했으므로, 그것이 선가禪家의 웅숭깊은 화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그의 처참한 복수는 단지 조폭들의 ‘개싸움’이 아니다. 흔들린 마음에 대한 응징이다. 흔든 것들에 대한, 그리고 흔들린 자신에 대한.
흔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바람이 있고, 나뭇가지가 있는 한. 그러나 흔들리지 않을 수는 있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승들이 화두로 삼을 만큼 ‘흔들리지 않음’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무소유를 상징한다. 선우는 가질 수 없는 사랑을 가지려 했으며, 그로 인해 대가를 치른다. 가지지 않았어야 했다. 무소유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그것을 제목으로 삼은 책까지 써냈던 유명한 현대의 한 선승이 쓴 인도여행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인도여행기는 이상하게도 ‘목욕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점철된 고단한 여행의 기록처럼 읽혔다. 이것이 오독誤讀이 아니었다면 그의 무소유 화두는 풀리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3천년 이전의, 무소유를 실천해낸 한 철학자의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개 같은 학파犬儒學派’를 이끌었던 고대 희랍의 철학자(디오게네스)가 주인공이다. 지혜를 얻기 위해 그를 찾아간 한 왕자(알렉산더)는 그에게서 햇볕을 가리지 말라는 힐난을 듣고 “내가 왕자가 아니라면 기꺼이 그가 될 터인데…”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그 철학자는 길거리의 통 속에서 자거나 개집에서 개와 함께 잤다. 그가 가진 것은 물을 떠먹는 그릇이 유일했다. 어느 날 한 어린애가 손으로 물을 떠먹는 걸 보고 그는 그 그릇마저 버렸다. 비로소 완전히 ‘개’가 되었고, 소유하지 않는 자가 되었다.
<달콤한 인생>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그를 무소유의 길로 인도한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즉, 폭력계의 기린아 선우가 두목의 어린 애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조건’들을 제거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사랑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한 킬러(에릭 분)의 출현은 운명, 혹은 신의 선택이라고 할 만큼 난해하고 불성실한 결말처럼 보이지만, 몸에 힘을 빼고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거니와 명료하다. 실은 운명이나 신을 끌어올 필요도 없다. 에필로그 속의 그 한 단어, ‘꿈’으로 충분한 것이다. 잠에서 깨어 눈물짓는 제자에게 스승이 묻지 않는가. "왜 우느냐?"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꿈이었더냐? 슬픈 꿈이었더냐? 무서운 꿈이었더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느냐?" "그것은,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