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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ㅣ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평점 :
자살을 선택하는 자가 처한 것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사려깊고, 면밀히 통찰하고, 뒤집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더욱 명료해지지 않으면 자살의 문제를 쓸 수도,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간곡한 어조로 읊조리는, 얇지만 무거운 책. 자살의 고전인 에밀 뒤르켕의 <자살론>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딛고 가기를, 혹은 이미 건너갔었다면 되돌아와 디디고 가기를 권하고 싶은 책. '앙리 미쇼' 전공자라는 저자의 이력에 끌려(ㅆ긴 했지만 실은 부피 때문에) 흔쾌히 넘기기 시작했다가 얘기 하나하나의 중량에 가슴을 마구 짓눌렸던 책.
다음은 깊고 오랜 사색을 요구하는, 이 책 에필로그의 한 부분이다.(p.84-86)
나는 단 한 번도 자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자살에 관해서는 수도 없이 생각하긴 했지만 말이다. 몇 년 전에 한 젊은이가 안타깝게도 이국에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난 그 소식을 접하면서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보다 약 2개월 전에-아마 2004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일어났던 다른 살인 사건이 생각났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이라크에서 경호 요원으로 일하던 피브리지오 콰트리치가 '예언자의 녹색여단'이란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돼 살해당한 일이 그것이었다. 알자지라가 소지한 피살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면 죽기 직전 복면의 사나이에게 그가 묻는다.
"도대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답변은 조금은 장황하고 지저분했지만 이탈리아군의 완전철군이 요구라는 요지였다. 그러자 36세의 콰트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아는 철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잘 봐 두어라. 이탈리아인이 어떻게 죽는지 보여주겠다."
그리고 콰트리치는 목 뒤에 권총을 맞고 숨졌다...(중략)...나는 콰트리치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렇지, 이탈리아엔 '영웅적인' 자살의 전통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생각은 '도대체 그가 그런 말을 남기면서 무엇을 구하려고, 혹은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였을까' 하는 데에 머물렀다. 나는 그 장려한 말을 남긴 의미를 아직 모른다. 결정의 순간에 그가 남긴 그 외침에는 확실히 명쾌함과 장엄함이 있다. 한순간 허공으로 한껏 솟구쳐 올랐다가 다음 순간 폭발하여 산산히 흩어져버리는 격렬함도 있다...(중략)...그가 적어도 그 순간에 포기한 것은 몇 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 조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의 마지막 행위가 인간의 비참한 존재 조건을 상기시키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