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 (CD + DVD) - [초특가판], Movie & Classic, Anton Bruckner - Symphony No. 9 D minor (Dem Lieben Gott)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던 날, 나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5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일곱 가구 스물다섯 명의 ‘도그빌’ 주민들이 갱단의 기관총에 비참하게 쓰러질 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주춤주춤, 연전 가을의 그 냉소와 굳은 침묵을 기억하면서. 하지만 <도그빌>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 눈에 고인 눈물은 그때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때의 침묵과 냉소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시에 대한 혐오가 가라앉은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혐오가 미국이나 미국인에 대한 혐오로 쉽게 전이되는 ‘불유쾌한 자동장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내 눈에는 왜 눈물이 고인 것일까? 나는 아직 그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도그빌>은 미국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혐오감을 극화한 첫 번째 작품”이라는 사전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 시간 동안 줄곧 내 의식은 미국과 미국에 대한 혐오감의 상징들을 좇는 데 바빴다. 그 분방한 추적은, 연극무대를 끌어온 형식실험과 니콜 키드만(여주인공 그레이스 역)의 ‘아름다운’ 연기, 내레이션을 모두 따라잡지 못하는 자막의 한계 같은 것으로 뻗어가던 생각의 가지를 쉽게 잘라내 버렸다. 그렇게 상징물의 추적에 몰두한 결과 내가 개인적으로 얻어낸 것은, ‘도그빌’이, 유럽의 이민들로 구성된 근대국가로서의 미국을 성립시킨, 그리하여 오늘날 현대의 유일 강국으로서의 미국을 가능하게 한 두 개의 중요한 질료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둘은 톰 에디슨 주니어(폴 베타니 분)로 상징되는 어설픈 지성과 톰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그빌 주민들이 지닌 ‘먹고살기’의 근대적 표현인 노동가 정신이다. 후자는 종종 신성한 노동이나 프론티어 정신과 혼용되기도 한다. 물론 시각장애인 맥카이(벤 가자라 분)의 예술가연한 고독, 빌(제레미 데이비즈 분)의 기술에의 맹목적 경도, 리즈 핸슨(클로에 세비니 분)의 지극히 개인적인 남성혐오 내지 페미니즘, 운송업자 벤(젤리코 이바넥 분)의 후안무치식 상업성, 과수업자 척(스텔란 스칼스가드 분)의 패배적 자연애와 구즈베리숲을 가꾸는 진저(로렌 바콜 분)의 호사가적 자연애도 각각의 질료들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또한 위의 두 개의 질료 속에 제각각 편입되어도 큰 하자는 없다. 이렇게, <도그빌>에서 어떻게든 미국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그빌을 근대(혹은 현대)의 미국으로 상정하는 일은 트리에의 3부작과 관련시켜 보자면 아귀가 맞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트리에 자신이 <도그빌>을 미국 3부작의 첫 작품이라고 말한 진술 자체는 영화 <도그빌>을 ‘미국에의 혐오’만으로 읽어버리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전제를 던지지 않았을 때 <도그빌>은 인간악의 원류를 치밀하게 탐색하고 있는, 한층 차원 높은 심리적 스릴러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트리에 자신이 인터뷰에서 “도그빌이 미국일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어느 마을일 수도 있다”(시네21, 413호, 47쪽)고 피력하고는 있지만, 그의 이 말은 뻔한 에두름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도그빌>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그빌이 미국으로 못박아놓고 얘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트리에가 3부작의 하나로 만들었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얘기할 것인가 - 이 둘 중에서 아무래도, 전문 평론가들은 차치하고 일반관객들조차, 감상의 무게중심을 전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찜찜함이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여섯 날의 창조를 끝내고 하루를 쉬었을 때, 세상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세상에는 없는 게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잉태의 수고를 담당할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뜯어내 만들어낼 때까지로 창조의 기간을 연장한다면 더더욱 신이 이 세상을 위해 준비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먹을 것과 쉴 곳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과,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진 하루와 그 하루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네 개의 선명한 계절로 대변되는 자연 - 이 둘은 다른 두 개가 아니었다. 삶과 자연은 하나였다. 자연은 결코 훗날 신의 피조물들이 엮어낼, 피와 욕망으로 얼룩지는 ‘커뮤니티’가 아니었다. 신의 자식들의 숫자가 불어나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커뮤니티는 단순한 ‘사회’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진화를 거듭해 마침내 ‘국가’를 이루어낸다. 여기서 삶과 자연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신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었지만 그가 만든 인간은 그곳을 ‘영토’라고 이름지어놓고,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호미 대신 창과 칼을 만든 것이다. 적군의 늑골을 찌르는 창과 목을 베어낸 칼을 신전 앞에 내려놓고 신의 은총과 가호를 운운한 것은 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세상에는 더 이상 신이 창조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비열한 것이 바로 ‘국가’였다. 인간은 국가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그 안에서만이 의미 있는 존재였다. 인간이 저지르는 악은 국가에 의한 것이었고, 똑같은 악도 국가를 위해서는 선이 될 수 있었다. 인간은 그런 국가의 ‘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개였다. <도그빌>의 라스트신에서 하늘을 보며 짖어대던 그 개처럼. 도그빌(dogville)은 문자 그대로 개의 마을이고, 그런 개의 국가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의지 자체를 배신한 그 국가를 불태우고 그 시민들을 총살시킨 그레이스(Grace=은총)는 신의 사자, 혹은 신 자신이다.


사실, <도그빌>의 딜레마를 만들어내는 ‘도그빌’이 미국을 상징한 것이냐 아니냐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영화 <도그빌>에서는 도무지 ‘커뮤니티’의 악 따위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그빌>에는 연민에서부터 사악함까지 골고루 갖춘 스물다섯 명의 ‘신의 자식’들만이 존재한다. 도그빌은 에덴과 다르지 않으며, 그레이스는 ‘선악의 과일’로 명명된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경전이 이르듯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의 형상을 닮게 했다는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레이스 또한 한 대표적 인간이다. 신의 징벌처럼 보이는 그의 마지막 학살은 ‘복수’의 그럴듯한 치장에 불과하다. 그레이스는 도그빌이라는 ‘커뮤니티’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다만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가능성이라는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인 인간들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편입되어 들어왔을 뿐이다. 예수가 미구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인간들 속으로 걸어왔듯이. 하지만 예수는 복수 따위를 하지 않았지만, 그레이스는 이름만 그레이스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빈 라덴’이란 말인가?


영화 <도그빌>은 있지만, ‘도그빌’은 없다. ‘도그빌’은 허상이다. 국가가 허상이듯이. ‘나’는 ‘너’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국가는 그 누구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지만, 국가와의 사랑은 일방적이다. 오직 우리만이 국가를 사랑할 뿐이다. 국가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허상과의 사랑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존재란 상호성을 의미한다. 국가는 일방적이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뿐이다. “국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던 케네디의 연설은 독재자의 국가주의적 선동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세계 무역센터의 붕괴와 함께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내가 완강하게 침묵을 지킨 것은 그것이 국가의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인간악의 온상인 미국이라는 국가. 하지만 도그빌의 주민들이 살해될 때 눈물을 흘린 까닭은 그들의 죽음이 개의 죽음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갱단의 기관총에 쓰러지는 그들 가운데서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지 못한 국가를 위해 밤낮으로 헌신하는 한 마리의 개. 간혹 달(허상)을 향해 컹컹 짖어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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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6-11-1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권력)은 왜 폭력(권력)에 의해서밖에 제압당하지 않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게 기억납니다. 물론 그레이스의 마지막 권총에 결코 동감할 수 없었고요. 심성 곱고 예쁜데다 세상 판도를 뒤집을 수도 있는 권력까지 가졌다니 너무하잖아욧! ㅋ

책먹는하마 2006-11-16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복(說伏/說服)이란 말이 있긴 하죠...무척 드물긴 하지만, 최치원이 창 하나 들지 않고 격문으로 반란을 진압했다는 얘기가 설복의 가능함을 증거할 텐데...옛날얘기기도 하거니와, 드라마는 액션 판타지라, 설복을 그려내기가 또한 가능하지 않은 일일는지도...ㅎㅎ...니콜 키드만은 너무 차가워서(조디 포스터보다는 덜했지만) 좋아하질 않았었는데, 도그빌 보고나서 오히려 좋아졌다는 거, 이유가 그레이스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어쨌든, 라스트 씬 전까지는 천사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