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이란의 한 어린 소년이 가게에서 빵을 훔쳤다는 혐의로 즉결처분을 받는 모습을 연속촬영으로 찍은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트럭 옆에 납작 엎드린 소년은 겁에 질려 울고 있었고,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소년의 팔을 트럭 앞바퀴 밑에 끌어다놓고는 그 위로 트럭을 지나가게 했다. 그보다 더 며칠 전, 전세계의 네덜란드 대사관에서는 네덜란드 국적을 취득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한 특이한 시험이 치러졌다.  그 시험들 중에 단연 '돋보인 것'은 농도 짙은 2시간짜리 포르노 영화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의 국적 취득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계'라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실제로 많은 수의 아랍인들이 네덜란드 국적 취득을 포기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이보다 조금 더 전, 덴마크의 한 언론사가 폭탄으로 만들어진 모자를 쓴 마호메트의 만화를 게재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이런저런, 우리가 접하는 뉴스들은 아랍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못하다. 서방의 시선으로 재단된 이슬람 문화권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근본주의적 성향에 매몰된 것으로 비쳐진다. 이것 전부가 실상의 왜곡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정부분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정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세폴리스>를 읽는 일은 아마도 이런 부정적인 정보를 수정해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 같다. 만화라서 그렇기도 하고, 주인공이 소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갖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아랍은 없다. 

* 참고로, 이런 만화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은 'B급좌파' 김규항의 블로그http://gyuhang.net를 통해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사진가론 - 1900-1960, 열화당미술신서 62
육명심 지음 / 열화당 / 1987년 4월
평점 :
절판


▲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브레송 특유의 사진

1952년 앙리 까르띠에-브레쏭은 이제까지 찍어 온 사진들을 추려서 한 권의 사진집으로 묶어 펴낸다. [결정적 순간]이라는 이름의 이 사진집은 앙리 마티스가 손수 장정을 맡은 매우 호화로운 사진집이었다. 오늘날 이 사진집은 소형 카메라에 의한 캔디드사진의 결정판으로, '결정적 순간'이란 비단 그의 사진집 이름일 뿐만 아니라 캔디드 사진미학의 용어로 통할 만큼 사진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여느 사진가들이 사진의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카메라를 소형과 중형 그리고 대형들을 고루 갖추고 그 밖에 여러 사진기재들을 총동원하는 것과는 달리, 오직 일생 동안 소형 카메라만을 사용하여 소형 카메라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진미학을 이룩하였다. 그의 사진집이 캔디드사진의 성전이라고까지 높이 평가되는 것은, 소형 카메라의 전문적인 사용만이 아니라 남다른 다큐멘터리 사진의 추구에 있다. 모두가 신문이나 잡지사의 편집자가 지시하는 대로 충실하게 찍는 하수인의 신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그는 오직 사적인 자기 감정에 충실한 자기 사진만을 고집한 것이었다. 그가 이룩한 사진의 업적은 사진사에게 한 시대의 역사적 과업의 완성이었다.(p.205)

▒ 막심 고리끼는 <이탈리아 이야기>에서 "가난한 사람의 사진이 신문에 나오는 것은 범죄를 범했을 때 뿐이다"라고 썼다. 고리끼의 이 말은 사진이 지니는 정치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사진작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사진의 정치성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고 몸부림을 쳐왔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을 찍었을 때, 우리는 신문에서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 가령 그들의 때절은 손, 해진 옷깃, 낡은 구두, 혹은 더없이 맑은 미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어떤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인지 헛갈리곤 한다. 종종 예술가들의 사진이 '결정적'이긴 하지만, 과장스럽게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이다. ▒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절단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라는 이름의 매우 길고 지루한 시간여행의 핵심을 짚어내고 그 방향을 설정해준다. 한 장의 사진이 서술하는 것은, 간혹, 어떤 대하소설보다 유장하다. ▒ "렌즈의 먼지를 털어내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의 먼지를 털어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카메라 십계명'의 하나다. 하지만 자신의 눈에 덮인 먼지를 아무리 잘 털어내도 렌즈의 먼지를 깨끗하게 털어내지 못했다면, 그가 찍어낸 사진은 실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사진가와 대상을 연결하는 매체인 카메라 - 그는, 거의, 인간 사회에서 신(神)이 하는 역할을 한다.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거나, 혹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시비의 대상이 되는 존재,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은조화 - 기린총서 30
오쇼 라즈니쉬 지음 / 기린원 / 1989년 1월
평점 :
품절


 

지혜는 전적으로 건조한 영혼이 되는 데에 있다. 이해하도록 하라. 건조하다는 것은 무감각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든가 무관심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고 주의하면서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관심은 결코 걱정이나 불안이 되지 않는 관심이다. 건조한 영혼을 가진 자는 아내나 친구, 딸, 아들, 남편, 또는 부모님이나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모든 힘을 다 기울여 돌보아 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모두 다 받아들인다. 절망한다든가 좌절하는 일이 없다. 가능한 것은 모두 다 한다. 그때 어떻게 좌절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이러저러해야 했을 걸하고 후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p.225)

 

▒ 건조해진다는 것은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뉘앙스를 지닐 때 건조나 단순이라는 어휘는 촉촉함과 풍부함을 포함한다. 건조하면서 촉촉하고, 단순하면서 동시에 풍부한 것 - 여기에 영혼의 비밀이 있다. ▒ 사막에선 쉬 길을 잃는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까지 있었던 길은 없어지고, 새로 난 길은 당연히 낯설다. 아무리 비싼 지도(地圖)를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 ▒ 가부좌를 틀고 앉은 곳은 사막이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길은 내일의 길이 되지 않는다. 선좌(禪坐)에 드는 자들은 지도를 가지지 않은 채로 사막으로 떠난다. 그 사막의 입구엔 문이 없다. 무공방(無孔房)은 사막을 상징한다. ▒ 선수행자가 아닌 인간의 삶은 풍성한 숲이다. 기름진 들이다. 그곳은 건조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인간은 그 숲과 들에서 땀을 흘리고, 눈물을 삼키며, 풍요를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으로 찾아온 풍요의 일부를 제물로 바치며, 풍요를 선사한 신에게 감사한다. 선수행자도 신에게 감사를 하지만 그 이유가 다르다. 그가 머리를 숙이는 이유는 풍요가 아니라 고통과 갈증 때문이다. 그에게 신이 건네준 것은 풍요가 아니다. 선수행자가 아닌 인간의 삶은 안식 그 자체다. 선수행자는 그 숲과 기름진 들과 안식을 스스로 버렸다. 그리고 그는 사막으로 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비로소 풍성해지고 기름지게 되는 것이다. 숲만이 풍성하고 들만이 기름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풍성해지고 기름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건조와 단순의 비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 1500∼1800 책세상총서 13
린 헌트 지음, 조한욱 옮김 / 책세상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창녀는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이다. 창녀는 포르노그라피가 탄생하던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최초의 포르노그라피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아레티노의 [논리]는 두 명의 창녀가 나누는 대화이다. 가장 중요하고 지속력이 있는 포르노그라피 텍스트 중의 하나인 [쾌락의 여성의 회고록]의 여주인공도 창녀다. 창녀는 포르노그라피 세계의 극치인 사드 후작의 세계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의 가장 긴 소설 [쥘리에트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창녀의 방탕함이다. 르네상스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창녀들은 외설 문학을 채우고 있다. 즉 그녀의 삶과 사랑이 수많은 포르노그라피 텍스트의 재료를 이루고 있다. 창녀의 전기나 고백은 이 장르에서 매우 보편적인 형식, 대체로 창녀 자신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방황하는 창녀]에서 [패니 힐]까지, 마르고에서 쥘리에트에 이르기까지 창녀의 수다 자체가 서구 포르노그라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남성이건 여성이건, 포주이건 난봉꾼이건 외설성의 세계에서 그녀와 지위를 다툴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p.275)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기실 정도의 차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포르노그라피로 상징되는 ‘외설적 묘사’들은 동양과 서양에 고루, 그리고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과거의 그것은 문학으로도 뛰어난 것이 많았고, 회화에 있어서도 어떤 ‘성과’라고 해야 할 정도의 '작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늘 그것은 예술과 충돌했는데,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의 지위 향상에 일정부분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예술의 근대성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 초기 포르노그라피의 거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캐릭터였던 창녀는, 당연히, 포르노그라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역사를 가진다. 구약성서에도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의 하나로 인정되기도 한다. 결국 거슬러올라가면 포르노그라피의 역사, 적어도 그것의 역사적 성격은 창녀의 기원과 거의 같다고 봐야 하며, 이는 포르노그라피의 물리칠 수 없는 정신이자 이념인 '관음증'과 하나의 광맥을 이룬다. 인류의 모든 문명이 지니고 있는 신화에서 남녀의 성적행위(나아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성행위)를 훔쳐보는 이야기는 반드시 삽입되어 있다. 문학으로든 회화로든,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자체가 이미 관음이다. 이런 논리에 의한다면, 결국 모든 신화는 포르노그라피 혹은 포르노그라피적이라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떤 열린 의식을 지닌 문명론자도 신화가 수용하고 있는 남녀의 성적 결합과 그것에 대한 묘사를 두고 포르노그라피 혹은 포르노그라피적이라고 명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근대까지 여전히 그러했다. 물론 격렬한 논쟁에서 번번이 패퇴하여 억압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열린 의식의 예술가들에 의해 '고무찬양'된 포르노그라피 혹은 포르노그라피적 작품들은 하나같이 훗날 지극한 예술로 인정받았고 예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고무찬양' 되어졌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격렬한 전장으로부터 귀환한 포르노그라피의 오늘은 어떤가? 그것은 여전히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 유치원생까지 마음만 먹으면, 아니 굳이 마음을 먹지 않아도 아무런 거침없이 구경할 수 있게 된 '작품들'에 대해 뭐라고 떠든다는 것은 중언부언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대중문화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예술의 발전인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은, 한낱 헛기침에 불과한 것이다. ▒ 이제, 포르노그라피를 대상으로 놓고 논쟁을 벌이는 짓은 더 이상 예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불행한 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 역시, 불행하게도, 중요하지 않다. 완전히 우리의 손을 떠난 것이다. '현대' - 그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버렸듯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담유 2006-02-2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어제 읽은 오쇼 할아버지 왈,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감상자의 태도, 즉 성욕 발생 유무에서 판가름 난다네요...저는 엄청 공감했어요^^

책먹는하마 2006-02-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포르노그라피에 심드렁한 것은 외설의 범예술화에 기여하는 태도가 되네요...반대도 가능하고...ㅋㅎ
 
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는 건 일단 겸손이다. 겸손을 제쳐놓으면 곧 '도발'이 드러난다. 바보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들을 향한 '야유'가 곧이어 쏟아져나온다. 스스로를 'B급'이라 하거나 '좌파'라고 부르거나 나아가 '불온'하다고 말하는 것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는 것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자칭(自稱)은 겸손하지만 도발적이고, '온건한 자'들을 향해 야유와 독설을 퍼붓기 위한 견고한 포석이다. 그러나 그 야유와 독설은 어떤 정연한 주장과 진언보다 정직하다. 그래서 김규항은 우리 시대에는 보기 드문 'A급 좌파'이며, '극히 온건하다': 그리 많은 글을 쓰지 않거나, 여러 매체에 비교적 짤막한 글들을 쓰게되는 사람의 글들을 모아 만드는 책에서 일관성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물론 일관성이란 게 그리 중요한 덕목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김규항은 글의 명쾌함만큼이나 일관성을 갖추고 있고, 더구나 풍부한 재미를 선사한다. 진정한 B급의 문체를 가진 김어준의 재미와는 또 다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