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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들) (Camel(s))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낙타는 느리다. 그리고 못생겼다. 낙타는 사막에 살며 등에 혹을 가지고 있다. 등에 혹이 하나가 있는 단봉낙타는 두 개가 있는 쌍봉낙타보다 빠르며 발바닥이 연해서 사막에 살기에 적합하다. 쌍봉낙타는 발바닥이 단단해서 상대적으로 바위나 자갈이 많은 구릉지에 산다. 낙타의 등에 물이 들어 있어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건 낙타에 관한 가장 흔하게 범하는 상식의 오류다. 낙타의 등은 물이 아니라 지방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사흘쯤 굶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한다. 물이 들어 있는 곳은 모두 세 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낙타의 위장 중 첫번째 방이며, 그 덕분에 사흘쯤 물을 마시지 않아도 지장이 없단다. 모래바람에 견디기 위해 낙타의 눈꺼풀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성적 노리개인 '낙타눈썹'이 어떤 모양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모양을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황석영의 단편소설 <낙타누깔>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속이 좀 매스꺼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어떤 사람을 낙타라고 한다면 그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느린 사람? 못생긴 사람? 사막에 사는 사람? 등에 혹이 난 사람? 그러나 낙타는 사람을 비유하는 데 썩 좋은 재료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낙타 같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 <낙타(들)>에서 낙타는 무슨 의미로 쓰인 것일까?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영화 속(내용)에도, 밖(홍보용 카피)에도. 낙타의 의미는 차치하고, 표제로 쓴 '낙타'에 복수형인 '들'을 괄호 안에다 묶어놓은 건 또 무슨 뜻일까?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두 사람만이 나온다. 40대를 막 지난 남자와 곧 40대로 진입하는 여자. 이 둘 중 누가 낙타일까? 둘 다 낙타일까? '들'을 괄호에다 묶어놓았으니, 둘 중 하나만 낙타일 수도 있고, 둘 모두 낙타일 수도 있다. 어쨌든, 느리기로 치면 둘 모두 느리고, 둘의 '관계맺음' 역시 무척이나 느리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인내하도록 만들 정도로.
그러고 보면 영화의 두 등장인물이 낙타인 것이 아니라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는 롱테이크, 그 미칠 것 같은 지루함 그 자체가 낙타다. 즉, <낙타(들)>이라는 영화 그 자체가 낙타인 것이다. 영화는 마치, 90분 동안 두 마리의 낙타가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인데……이게, 정말이지 믿기지 않을 일이지만, 다 보고나면 뭔가, 서늘해진다. "이걸 내가 다 봤단 말이지?" 라고 반문하며, "나도 참 대단한 인간이군……"하고 중얼거리며 그 서늘함의 정체를 궁리하게 된다. 그 정체가 '집요함'이라는 사실을, 나는 꽤 오랜 궁리 끝에 발견했다. 모든 느린 것은 집요하다. 낙타는 느리고, 그리고 집요하다. 집요함이 없었다면 <낙타(들)>도 없고, 그것을 끝까지 보아낸 관객도 없다. 그런데, 집요하다는 건, 미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