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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SE - [할인행사]
미디어체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를 보는 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심각한, 지루한, 복잡한, 말도 안 되는, 형편없는 스토리라면 더욱 그렇다. 어차피 두어 시간 후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거칠게 간추려 얘기하자면, 딱 이 이유 밖에 없다. 그러나, 그래서, 편한 만큼, 딱 그만큼 영화는 부족하다. 영화의 구성은 너무 늘여놓았거나 너무 줄여놓은, 둘 중의 하나다. 완전한 구성을 보이는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그래서, 그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영화'가 찾아질 때의 느낌은, 형언하기 힘들다.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어서 온몸이 저릿한, 뭐 그런, 언젠가는 이별을 선고받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진 채 사랑을 하는 것 같은, 쾌감과 통증이 겹쳐져 있는, 이상야릇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소크라테스를 아내 크산티페가 찾아와 "당신은 부당하게 처형당하는 겁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럼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처형당하기를 바라는 거요?"라고 되물었다. 이 유명한 답변은 한 못생긴 철학자가 보여준 많은 당당함의 하나에 불과하다.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를 오르던 예수는 비통한 얼굴로 다가선 그의 어머니에게 "이제 내가 어떻게 되는지를 잘 지켜보세요,"라고 말했다. 이는 한 젊은 광신도의 온몸에 깃든 온유의 한 자락일 뿐이다. 무표정한 얼굴의 이발사 에드 크레인은 사형집행장으로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라는 독백을 남긴다. 이 독백은 세상의 수다와 번잡을 정관(靜觀)한 자의 암묵적 시편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당연히 과묵하다. 줄담배를 피운다면 그보다 훨씬 더 과묵하거니와, 그런 그의 과묵은 그를 사색적 인간으로 분류하는 데 주저치 않게 한다. 영화 속에서 에드 크레인(빌리 밥 손튼)은 끊임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있으며, 그의 목소리가 덮인 내레이션은 그의 침묵을 요령 있게 설명해준다. 사실 침묵은 한 가지가 아니다. 가령, 롱펠로가 <모리노스의 세 가지 침묵>에서 분류해놓은 걸 빌어다 쓰면, 말의 침묵이 그 하나요, 욕망의 침묵이 그 둘이며, 생각의 침묵이 그 셋이다. 이 세 가지 침묵을 완전히 실행해내는 과묵자의 존재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거의 거기에 가까운 사람은 없지 않다. 에드 크레인은 그 중의 하나다. 그는 우선 담배를 줄지어 피우기 때문에라도 말의 침묵자다. 친구에게 협박편지를 보내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필요한 만큼 적정한 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욕망의 침묵자로서 자격이 있다. 베토벤의 월광을 연주하는 소녀 버디 어번더서(스칼렛 요한슨)를 피아노 선생에게 데려가는 대목에서 그의 생각의 침묵자적 단면이 발견된다. 물론 진정한 생각의 침묵이란 생각을 끊어내는 선승에게서나 발견되는 것이겠지만, 생각의 완전한 침묵자가 되기 바로 직전의 상태가 ‘흐르는 대로 생각을 놓아두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한다면 그는 생래적으로 그런 상태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다.
없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있지 않다’라는 것만을 없음의 유일한 의미로 묶어버린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없음’은 아무 것도 없다. 가령, 집을 떠나는 자에게 더 이상 집은 없다. 그러나 그가 떠났다고 해서 집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없음은 있음의 그림자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다. 있음 때문에 없음이 완성될 수 있고, 삶으로 인해 죽음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님’이다. 에드 크레인은 살인의 이유를 찾아가는,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의 존재함으로부터 자신의 부재를 깨닫는다. 역으로 그의 존재함으로부터 그들의 부재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거부하게 한 것은 바로 있음과 없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