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검사와 스폰서 편이 방송된 지 어느새 1년, 사태는 대강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몇몇 검사의 징계와 고발자의 구속이 결과인데, 검찰 내부 문화와 권력 문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듯싶다. 그간 몇몇 책이 나와 일정한 호응을 얻었지만 고발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스폰서 정용재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사IN 정희상,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가 정리한 이번 책은 50여 명에 이르는 관련 검사 실명을 직접 내보인다는 점에서 PD수첩 이후 가장 폭발력이 큰 이야기가 될 거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뜨거워지지는 말자. 이 책 역시 폭로와 고발에 그친다면 언제 새로운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이제는 PD수첩을 '떠나게 된' 최승호 PD의 추천사와 세 명의 저자가 전하는 서문을 공개한다. 책은 11일 월요일에 나오는데 문제 없이 독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추천사] 

‘검사와 스폰서’ 방영 후 1년… 그리고 이 책  
- 최승호, MBC PD 


<PD수첩> ‘검사와 스폰서’(2010년 4월 20일 방송)가 방송된 지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방송 1년이 지난 지금 검사들의 스폰서 행태를 고발한 정용재 씨는 수감자의 신분이고 나 역시 <PD수첩>을 타의로 떠났다.

검찰에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수십 명의 검사들이 특검 수사를 받았고 일부는 기소됐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박기준·한승철 두 검사장은 면직 처분됐다. 박기준 씨는 면직처분 취소소송을 냈지만 기각됐다. 특검 기소가 무죄 판결을 받는 상황에서 나머지 일부 검사들을 대상으로 한 징계가 ‘조용히’ 이뤄졌다. 정직, 감봉 등의 징계가 내려졌다. 이렇게 스폰서 검사 파문은 정리되어가고 있다. 검사들은 당분간 그들이 받은 ‘섹검’의 수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곧 위엄을 갖추고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검찰 위상을 회복할 것이다.

지난 1년간 그 난리를 쳤지만 사실 검찰이 인정한 것은 별로 없다. 그저 증거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최근의 몇 차례 향응을 인정했을 뿐 스폰서 정씨가 수백 명에게 제공했다는 성 접대는 한 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엄연히 있는 증거와 증인도 없는 것처럼 묵살하고 은폐했다. 검찰이 다른 사건을 수사할 때도 이렇게 한다면 우리 국민은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심각한 은폐·왜곡이 저질러졌다.

그 한 예로 검찰은 인터넷에서 이름만 검색하면 어디에 있는지 지도까지 나오는 식당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PD수첩>은 쉽게 찾아낸 과거 업주들 중 상당수도 찾을 수 없었다는 한마디로 은폐해버렸다. 어찌 보면 검찰이 제대로 조사를 했더라도 업주들이 과거 정용재 씨가 얼마나 검사들을 자주 접대했는지 밝히기를 꺼렸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검찰의 비위를 상해가면서 오래 된 과거 일을 굳이 진술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검찰은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검찰이 찾아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없다고 결론을 내버린 것이야말로 검찰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말해준다고 믿는다. 검찰이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그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검찰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PD수첩>이 검찰의 진상은폐를 통렬하게 고발하는 ‘검사와 스폰서3’을 방송했지만 검찰 조직은 묵묵부답이었다. 일언반구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느껴지는 것은 “너희는 떠들어라. 우리가 묵살하면 결국 그뿐이다”라는 오만함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이렇게 버틸 경우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가 그들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정용재 씨는 이때 큰 상실감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검찰을 고발한 결과가 이런 용두사미 특검이라는 데 분노했다. 그런 그를 두 언론인이 찾아왔다. 이 책은 검찰의 검사 스폰서 사건 은폐·왜곡을 향해 정용재 씨와 그를 취재하던 두 언론인이 보내는 고발장이다. 《시사IN》 정희상 기자,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이 두 분은 나와 함께 정용재 씨를 취재하던 기자들이다. 특검의 수사가 결국 의혹만 남기고 정리될 즈음 이들은 정용재 씨를 만나 이 책을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검찰의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순조로웠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책이 태어난 것이다.

원고를 읽어보니 새로운 사실이 많다. 게다가 거의 실명을 공개했다. 저자들은 “일부 고위직 검사들뿐 아니라 일반 검사들조차도 스폰서 문화에 포획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어서” 실명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검찰뿐 아니라 경찰, 군 등 과거 정용재 씨의 스폰을 받은 다른 부문의 고위 인사들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증언을 한 정용재 씨는 지금 가족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어쩌면 이번 증언은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과연 그의 처지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사회가 가진 축복이다. 비록 그것이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천형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와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저자 서문] 

인터넷 국어사전은 ‘스폰서sponsor’를 이렇게 설명해놓고 있다.

1. 행사, 자선사업 따위에 기부금을 내어 돕는 사람.
2.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 따위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광고주.

하지만 스폰서는 이런 사전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의미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스폰서는 국회의원, 판·검사 등 사회에서 힘이 있는 사람을 뒤에서 돈 등으로 뒷받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경우 스폰서는 대부분 사업가다. 마치 권력과 돈이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검사 스폰서’ 사건은 그러한 성격의 스폰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기였다.

우리는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진 때를 전후로 수차례 정용재 씨를 부산 현지에서 만났다. 정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한때 부산·경남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던 건설업자였다. 정씨에게는 젊은 나이라는 약점을 보완해줄 힘(권력)이 필요했고, 정씨는 아버지 때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검사’를 선택했다. 정씨는 사업이 몰락한 이후에도 ‘검사 스폰서’ 노릇을 멈추지 않았다. ‘스폰서 중독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권력에 돈 쓰는 맛’, 그 대가로 ‘권력에 호가호위하는 맛’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정씨는 자신이 20여 년 동안이나 검사 스폰서였다고 고백했다. 검사들에게 정기적으로 밥과 술을 사고, 촌지를 돌렸을 뿐 아니라 수시로 성 접대까지 해왔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쓴 접대비만 당시 돈으로 10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특히 검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날 때면 전별금과 함께 순금으로 만든 마고자 단추를 선물했고, 심지어 검사들이 제 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경찰 헬리콥터를 띄우기도 했다. 떠나는 검사가 부임하는 검사에게 정씨를 소개해주는 ‘스폰서 인계’ 문화는 검사─스폰서 유착관계의 원동력이었다. 정씨는 접대가 “보험 성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사들이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분위기였다”며 “하지만 어떤 검사도 이러한 접대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놀라운 증언도 나왔다. 부산의 한 모델에이전시에 소속된 모델들을 불러 ‘원정 접대’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 호송차의 호위를 받았다는 얘기다. 경찰도 ‘검사 스폰서’의 손아귀 안에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공권력이 검사 접대를 위해 움직인 것은 정씨가 ‘검사’스폰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검사 스폰서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검사의 어두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씨가 증언한, 술자리에서 보여준 검사들의 행태는 차마 글로 옮기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검사의 어두운 얼굴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에도 불구하고 검찰 진상규명위원회와 특검의 활동은 그야말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이들의 활동은 스폰서 검사들에게 면죄부만 줬다는 지적을 받았다.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긴 데서 예고된 결과였다. 특검에 파견된 현직 검사들은 날마다 변호사 출신인 특검보들과 싸워가며 조직의 치부를 덮기에 바빴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중순 우리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스폰서 검사 건은 이제 막을 내리는 것 같다. 모든 진실이 묻혀버리고 정의가 사라지고 무소불위의 검찰은 자성의 기미가 전혀 없다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그동안 계속 정씨를 취재해온 우리도 ‘막을 내리는 검사 스폰서 사건’ 앞에 아쉬움이 컸다. 고민한 끝에 정씨의 증언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구속집행정지 상태였던 정씨를 다시 부산에서 만나 수차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정씨를 취재해왔던 내용과 그때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엮은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정씨가 접대했던 검사들의 이름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한두 번 접대받은 검사들 이름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위의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졌을 때 공개된 일부 고위직 검사들뿐 아니라 일반 검사들조차도 ‘스폰서 문화’에 포획된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이 검사들의 ‘실명 공개’다. 수사검사로 8년 6개월간 검찰에 몸담았던 김용원 변호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폰서 문화’를 이렇게 독하게 꼬집었다. 그의 독설은 우리의 검사 실명 공개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해준다.

“여자 접대도 하고 용돈도 주면 물론 금상청화다. 판검사들, 특히 젊은 판검사들 가운데는 술과 여자에 굶주린 사람이 많다. 스폰서들은 이런 판검사들을 노린다. (…) 룸살롱의 잘나가는 아가씨들 가운데 판검사와 섹스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스폰서를 두고 있는 판검사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특히 잘나가는 검사들 가운데 스폰서를 여럿 거느린 사람도 많다.”(《천당에 간 판검사가 있을까?》 중에서》)

이 책은 정씨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나올 수 없었다.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증언이 책으로 기록되어 세상에 나오길 가장 바랐다. 그는 “그동안 제가 접대했던 분들이 이 책을 한 권씩 사서 읽어주길 바란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정씨는 진실을 얘기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현재 신병치료를 위한 구속집행정지조차 얻어내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뎌내고 있다. 애초 도전하지 말아야 할 ‘성역’에 도전한 탓이었다. 정씨는 지난 2월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처지를 <산장의 여인> 노래 가사에 빗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서 있네.”

정씨는 다시 구속된 이후 수술이나 재활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정씨는 편지에서 “모든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힘들 줄 몰랐다”며 “모든 것이 고립”이라고 토로했다. 정씨의 유죄가 확정돼 형사처벌을 받고 있더라도 그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사법부에서 정당하게 배려해주기를 바란다.

특히 ‘언론보도’의 한계를 절감했던 우리는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책’이라는 ‘올드 미디어old media’가 의미 있는 미디어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출판사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이 책을 내겠다고 선뜻 나서준 김이수 책보세 주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검사 스폰서 사건 보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최승호 PD 등 MBC <PD수첩>에도 감사한다. <PD수첩>은 두 번에 걸친 검사 스폰서 관련 방송 원고를 이 책에 실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앞으로도 <PD수첩>이 우리 사회의 성역을 끈질기게 파헤치는 ‘시대의 눈’으로 남기를 바란다.

지난 4월 6일, 책 출간을 앞두고 안동교도소에 수감된 ‘스폰서 정씨’를 면회했다. 수감 상태에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검찰의 주시 대상이었다. 안동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그의 구속을 지휘한 부산지검 검사가 이 책 초고를 손에 넣으려고 구치소 내 그의 방에 들이닥쳤지만 간발의 차이로 원고를 우편으로 내보낸 뒤여서 허사로 끝났다고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다. 검찰이 지난 1년간 그런 열성으로 환골탈태를 위해 각고했다면 아마 이 책은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011년 4월 초
정용재의 증언을 정리한 정희상·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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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라는 용어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인지’라는 말은 주로 과학용어로 사용된다. 인지과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지’는 신경생리학, 뇌과학, 컴퓨터공학, 심리학, 교육학 등의 용어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 때문에 정치경제학 용어인 ‘자본주의’라는 말과 ‘인지’라는 용어의 결합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생소함이야말로 우리가 인지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제국, 다중, 아우또노미아... 조정환 하면 함께 떠오르는 개념이다. 물론 캘리니코스, 네그리, 하먼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연구를 거칠게 정리하면 '현대 세계의 성격과 구조를 탐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가능한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방법을 고민'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인지자본주의>는 이 여정의 일단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책은 입론이라 변혁의 대안에 대해서는 <혁명의 세계사>(가제)에서 따로 다룰 계획이라 한다. 다중이 어느새 (그 내용에 대한 이해를 떠나) 익숙한 표현이 되었듯이, 인지자본주의도 세계를 이해하는 새롭고 강력한 틀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몇 가지 질문과 답변, 서문을 통해 <인지자본주의>를 읽기 위한 준비운동을 제안한다.

 

Q. 인지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탈산업사회 등의 다른 이름인가?
이것들이 사유하는 대상은 거의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론은 자본주의 정책 형태의 변화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며 그것의 대안은 주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변경에서 찾아진다. 금융자본주의론은 자본형태를 중심으로 사유하며 그것의 대안은 지금까지 주로 산업자본에서 찾아졌다. 탈산업사회론은 주로 기술형태를 중심으로 사유하며 그것의 초점은 대안기술과 문화에 모아졌다. 인지자본주의론은 노동형태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대안은 노동의 대안적 자기조직화이다.
 
Q. 인지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의 한 유형일 뿐,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지활동도 신체를 사용하며 신체에 의존한다. 인지노동은 육체노동에 대립하는 노동이 아니라 육체노동이 확장되고 진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노동은 산업노동과 연속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은 산업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육체노동은 정신노동과 분업적으로 구별되었고 심지어 대립되었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그것이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이 분업적 구별과 분리는 사라진다. 육체노동이 인지화하며 인지노동이 육체화한다. 그 결과 모든 노동은 육체노동이면서 동시에 인지노동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인지자본주의를 산업자본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이 핵심적인 변화를 간과하면서 인지화가 가져오는 변화의 여러 지점들을 놓친다. 이 책에서 내가 분석하는 것은 인지화가 가져오는 실제적 변화들, 그 결과들, 그리고 의미들이다.
 
Q. 인지자본주의론이 인지노동자들을 특권화시키지는 않겠는가?
인지자본주의에서는 대학이 공장으로 되고 메트로폴리스가 미술관으로 되고 국가가 스펙타클로 된다. 이것의 영향으로 전통적 공장들도 점점 디자인 작업실로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 예술가, 공무원 등을 인지노동자로 특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노동들이 인지노동의 성격을 더 많이 띠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원자력발전소의 노동자들을 전통적 산업노동자로 부를 수 있겠는가? 고도의 지식을 요하는 유기농산물 생산자를 농민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인지노동은 산업노동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메트로폴리스로의 확장이며 또 그것의 변화한 특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를 말하는 것이 인지노동자의 정치적 특권이나 헤게모니를 의미할 수는 없다.
 
Q. 인지자본주의론은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지자본주의론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 인지적 성격이 강한 신기술의 영역을 운동과 혁명의 핵심영역으로 간주하는가? 예컨대 최근의 아랍혁명을 SNS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전통적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SNS는 표현수단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노동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기술을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관계 속에서 고려하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폭발한 혁명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페이스북 혁명이라거나 트윗 혁명이라는 말로 묘사하는 것은 그러므로 일면적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에 대해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말들의 유행은 혁명을 테크롤로지 의존적인 것으로 표상할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표상은 혁명을 기술적 지적 엘리뜨의 과업으로 만들고 이러한 테크놀로지에서 소외되어 있는 대중들의 혁명적 역할을 간과하거나 폄하할 수 있다
   반면 고전적 혁명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트윗이나 페이스북은 발화수단일 뿐, 진정한 혁명은 공장에서 파업을 통해 준비되어 왔고 또 그것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SNS나 그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학생과 청년들)를 주변적이거나 종속적인 힘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운동의 표상을 현재로까지 가져와 육체적 산업노동자들을 중심에 놓으면서 새로운 노동자층의 혁명적 역할을 간과하거나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두 관점은 모두 현존하는 혁명능력들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SNS는 오늘날의 공장이다. 사회적 인지력을 연결하는 망은 공장노동자들을 연결하는 콘베이어벨트와 같다. 내가 현대의 메트로폴리스를 거대공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것을 통해 가치생산이 이루어지고 축적이 이루어진다. SNS 사용자들을 산업공장의 노동자들과 구별짓는 것은 그들의 생산방식이나 그 생산과정의 특성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구성부분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SNS가 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혁명의 장소로 사용된다는 것은 공장이 점거되어 파업투쟁의 장소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투쟁의 특권적 장소로 파악되어서도 안 되며 투쟁을 보조하는 종속적 장소로 파악되어서도 안 된다.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혁명은 산업적 투쟁과 사회적 투쟁 그리고 담론적 투쟁 모두를 위계 없는 관계로서 포괄한다. 이 각각을 서로 연결되어야 할 특이한 투쟁력들로 파악할 때에만 현대의 혁명이 뿌리에까지 이르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과거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유사한 경험을 한다. 실업으로 인해 소득은 줄어들고 치솟는 물가로 인해 상품들의 문턱은 높아지며 양극화로 인해 가난하다는 느낌은 점점 깊어진다. 역사적 공동체들을 대체한 국가는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이익집단으로 행동하고 제국은 소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종당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특히 사적 이익집단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이용당한 지구생태계는 단말마의 신음을 내뿜으며 점점 인간에 적대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해 개개인들은 점점 더 의외의 시간에, 의외의 방식으로, 질병에 걸리거나 죽게 되고, 인류 전체가 종말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묵시록적인 공포의 정서가 일상세계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세계에서도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럴수록 사람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공포와 절망의 감정은 모든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통치집단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뻔한 거짓말을 지겹도록 늘어놓고 모든 것을 돈에 종속시킨다. 심지어는 인도주의라는 말조차도 자원약탈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사학으로 이용한다. 정치, 경제, 교육, 미디어, 종교, 군대 등 모든 영역들에서 지배집단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뿌리깊은 부패의 사슬에 연루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자주, 그리고 더 깊이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 집단들 사이의 갈등에, 그리고 전 지구적인 전쟁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정치가들이 자신의 지역을 멋지게 가꾸었다고 자랑하는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지역의 오염과 훼손은 심각해지고, 주가가 떨어지건 고공행진을 하건 대중들의 가난은 깊어가고 GNP 지표가 하락하건 수 만 달러를 가리키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고, 텔레비전 드라마와 광고가 꿈같이 화려한 세계를 누구나 만져보고 싶도록 연출해서 보여주면 그럴수록 일상의 삶은 그 만큼 더 비루해지며, 구원이 가까왔다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행복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부와 가난의 양극화는 권력과 무력의 양극화로, 탐욕의 끝모르는 질주와 희망의 추락이라는 양극화로, 마천루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 보는 삶과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조산(早産)된 21세기는 1968년 혁명에서 시작해서 부채위기로 점철되었고 냉전을 제국적 내전들과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대체했으며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로(早老)현상을 드러냈다. 나는 이 조로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현대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로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국에서 지난 이 십 여 년 동안 이루어져온 연구들의 많은 부분은 인지자본주의의 증상들과 결과들을 탐구하는 데 바쳐졌다. 인지자본주의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실업,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이라는 대중화된 주제들, 인지자본주의가 소득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88세대론이나 양극화론, 인지자본주의가 주체 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신세대론을 비롯한 각종의 세대론과 청년론, 인지자본주의가 과학과 테크놀로지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인지과학, 생명공학, 정보화론, 인지자본주의가 공간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도시개발론, 메트로폴리스론, 환경공학, 인지자본주의가 기업형태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네트워크 기업론이나 사회적 기업론, 인지자본주의가 대중의 문화체험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스펙타클론이나 시뮬라크르론, 인지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권력형태의 미시적 재구성에 집중하는 우리안의 파시즘론, 대중독재론, 부드러운 파시즘론, 인지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다양한 생태론, 인지자본주의가 성별 문제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돌봄노동론과 페미니즘론 등등의 주제가 그러하다. 인지자본주의론은 이 미시적이고 다양한 탐구들이 천착하고 더듬어온 문제들을 노동형태 및 자본형태의 변화,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라는 거시적 틀 속에서 종합하고 각각의 문제들의 위치를 밝히며 총체적인 발전의 경향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인지자본주의는, 2011년에 들어 발생한 두 개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발전과정에서 불러낸 힘들을 그 자신이 통제할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일본 대지진에 뒤이은 원자로 폭발과 방사능 위기이며 또 하나는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의 연쇄적이고 연속적인 혁명이다. 원자력 발전은 우라늄이라는 자연물질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분열과정은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인지적으로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인간은 핵분열 조작을 통해 거대한 핵에너지를 인공적으로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자로의 폭발과 누출되는 방사능에 대한 통제불가능의 상황은 인지자본주의가 거대한 힘을 불러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자 에너지는 켤 수는 있지만 끌 수 없는 불이다. 인간은 그것을 냉각시킬 수 있을 뿐이고 수 만, 수 십 만, 아니 수 십 억 년에 걸쳐 진행될 그것의 반감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일본 핵상황의 불확실성은 전 세계에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혁명은 이 통제불가능성의 또 다른 예이다. 인지자본주의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핵연료인 우라늄을 비롯한 막대한 광물자원과 석유자원을 채굴했고 그것으로 거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2011년, 이 지역의 다중들의 혁명과 그것의 연쇄적 확산은 인지자본주의가 빠져 있는 통제불가능성과 무능력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이집트로 확산되었고 이어 리비아, 알제리, 모리타니 등의 아프리카 지역 뿐만 아니라 예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오만,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중동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지역에 통제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절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인지자본주의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떻게 운동하고 있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진보와 실천의 물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 가운데 무엇을 발전시키고 무엇을 억제해야 하는가 라는 윤리적 선택과 자제의 물음도 포함해야 한다.
   1991년 사회주의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에 의해 새로운 세계질서가 선포되었을 때, 문제는 그 새로운 세계질서의 성격, 그것의 구조, 그것의 내적 모순, 그리고 그것의 동학에 대한 탐구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냉전 이후의 이 통합된 세계질서가 가져오는 새로운 주권형태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끌었다. 그 탐구의 결실은 네트워크 주권형태로서의 제국에 대한 개념화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1년 9/11 사건과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서의 테러에 대한 전쟁, 그리고 그에 뒤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제2차 걸프전은 제국의 형상을 수정했다. 9/11 사건은 군주국 미국이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도전받는 상태에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미국은 제국의 다원주의적 합의 체제를 깨뜨리고 일방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서 수행되어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은 이 일방주의적 행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전쟁들은 미국을 단독적 군주국으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미국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였다. 10년 여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은 제국 내부에 커다란 긴장과 갈등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추시켰고,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이 쿠데타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종말을, 나아가 세계자본주의의 결정적 위기를 불러오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결정적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금융위기는 세계경제위기를 불러오면서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습되기는커녕 나날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 수준에서 다중의 저항과 혁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응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아시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순환하고 있는, 다중의 전 지구적 대장정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이후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현 시대를 재조명하는 과제를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의 한 국면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지자본주의하에서 누적되어온 위기의 축적과 그 축적된 위기가 갖는 탈순환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현재의 위기의 구조적 성격을 규명하는 한편, 현재의 체제 속에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고스란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고전적 형태 그대로가 아니고 변용된 형태로 살아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 시대에 가능한 혁명의 기원과 경향과 형태를 밝히는 작업-이 작업은 곧 출간될『혁명의 세계사』(가제)에서 이루어질 것이다-의 필수적인 전제가 될 것이다.
   지난해부터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지난 십 여 년 동안의 나의 연구과제 대부분이 바로 현대 세계의 성격과 구조를 탐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가능한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을 다루든, 정치경제를 다루든, 문학예술을 다루든, 늘 나의 문제의식이 이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나는 지난 해 이후 의식적으로 이 책의 발간을 목표로 기고활동을 조직하고 이 책의 기획 이전에 썼던 글들을 이 책의 취지에 맞게 편집하고 수정했으며 일관된 서술체계를 부여했다.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의 구조와 특성에 대해 서술한 책이기 때문에 대안을 찾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각 장의 끝 부분과 책의 마지막 부분, 그리고 간주곡에 해당하는 몇 편의 글을 통해, 그 대안이 고려해야 할 거시적 조건들과 대안이 추구되어야 할 커다란 방향이 제시되거나 최소한 암시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 서술의 내용은 이 책에 필요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사회혁명적 대안문제에 관해서 나는, 『혁명의 세계사』에서 역사서술적 방식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다룰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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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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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집단, 민족과 국가, 언어와 존재를 함께 사유하다
심야 치유 식당- 당신,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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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도, 삶에도, 마음에도 '빈틈'이 필요하다
긍정의 배신-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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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반신반의한 분들께
상상목공소-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김진송 지음 / 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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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란 나의 확장이 아닌, 타인, 세계와의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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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도약- 진화의 10대 발명
닉 레인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3월
24,000원 → 21,6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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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과 전체를 아우르는 생명 진화의 10장면
루소-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리오 담로시 지음, 이용철 옮김 / 교양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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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소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루소뿐
낱말의 우주-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우석영 지음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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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1세기판 근사록(近思錄)
우리는 왜 아플까- 몸과 마음의 관계로 읽는 질병의 심리학
대리언 리더 & 데이비드 코필드 지음, 배성민 옮김, 윤태욱 감수 / 동녘사이언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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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생각, 성격이 병을 만든다니, 오래 살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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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마리 여사의 강의 지상중계는 오늘로 막을 내립니다. 네 번에 불과하지만 너무 질질 끌었나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마지막 강의는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의 의미를 통해 세계질서의 변동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을 빗대어본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제 마리 여사의 책은 세 권 남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안에 완간이 될 터인데 더 많은 이들이 곱씹을 수 있도록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득 일본에서는 마리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참고 삼아 알라딘에서 진행한 요네하라 마리 리뷰 대회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한번 살펴볼 만합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00802_mari_end 

 

제4장.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에서

이미 국제화를 이루었지만

비일상적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국제적인 교류랄까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전통적으로 국제적인 일은 비일상이라는 관성의 법칙(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속에도, 행동양식에도 이 관성의 법칙이 살아 있어서 현실은 이미 국제적인데도 마음은 여전히 비非국제적인 상태 그대로다.
  국제적이게 된 요인으로는 먼저 교통수단과 운반수단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굳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비행기로 한번에 외국에 갈 수 있다. 국경이라는 울타리가 차츰 낮아지고 있다. 또 통신수단이 발달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몇 초 후면 텔레비전 중계로 방송되고 인터넷으로 전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유럽에서는 10여 년 전에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어 체제의 벽이 없어졌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이 자원을 조달할 때도 국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엔화가 약세다. 경제 불황이 이어져 엔화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국제적으로 보면 엔화의 수준은 상당히 높고 강하다. 그러면 일본에 값싼 노동력이 자꾸 들어온다. 외국인이 일본 열도로 몰려든다. 그런 의미에서도 현실에서 일본은 이미 국제화되어 있다. 다른 국가와의 교류가 증가하고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국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국제화는 비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는데도 뉴스를 봐도 그렇고, 일반인들을 봐도 그렇고, 세계나 국제라는 말을 들으면 약간 흥분한다. 이웃현縣의 손님보다 외국 손님이 오면 흥분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아무튼 일상의 연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국제화는 영어로 뭘까

어떤 이유에선지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면 평상심을 잃는데, ‘국제’와 ‘국제화’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자.
  ‘국제화’라는 말에 우리는 많은 개념을 뒤섞어 집어넣고 있는 게 아닐까? 일본어로 ‘국제적’이라고 할 때와 ‘국제화’라고 할 때 똑같이 ‘국제’라는 단어를 쓰는데, 영어로 ‘국제적’은 ‘international’이다. 그럼 ‘국제화’라고 할 때는 ‘internationalization’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국제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internationalization’은 ‘국제 관리화’라는 뜻이다.
  파나마 운하를 예로 들어보자. 남북 아메리카를 잇는 잘록한 땅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파나마라는 나라다.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 지협地峽을 횡단해 태평양과 카리브해(대서양)를 잇는 장소라서, 그곳의 이권을 쥐는 것은 교통이나 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파나마 운하를 한 나라가 아닌 국제 공동 통치하에 두어 관리한다고 할 때 ‘internationaliz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미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아홉 개의 나라로 이루어진 연합국—연합국은 9개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의 통치하에 놓였다. 국제 공동 통치하에 놓인 것이다. 독일도 그랬다. 이런 경우에 ‘internationalization’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제화’는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까? 사전에 나와 있듯이 ‘globalization’, 글로벌리제이션 혹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한다.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은 장사 습관이나 행정 방법 등 많은 것들이 특수한 나라로, 국제사회와는 약간 다르다. 그래서 일본인의 양식을 국제사회의 양식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할 때는 국제 양식에 맞추는 것, 흔히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 말하는 세계 표준에 맞춘다는 의미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진짜 의미

그럼 ‘국제화’로 번역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어떤 의미일까?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용어의 중심 개념은 ‘글로브globe’다. 글로브는 지구의 구球, ‘지구의地球儀’를 말한다. ‘영어로 지구는 earth인데?’라고 생각할 텐데, 글로브는 지구가 구형인 것, 즉 둥근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글로벌리제이션은 영어니까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기준, 자신들의 표준으로 세계를 뒤덮으려는 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다.
  그래서 나는 동시통역을 할 때,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글로벌리제이션—러시아어니까 글로발리자치야Глобализация—이라고 번역했는데, 지금 말한 것처럼 사실은 반대 의미다. 앞서 말했지만 ‘국제화’라 할 때 일본인이 말하는 국제화는 국제적인 기준에 자신들이 맞춘다는 의미다. 지구촌, 국제사회에 맞춰간다는 의미.
  미국인이 말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자신들의 기준을 세계에 보편화한다는 의미다. 자신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들은 정당하고 정의롭다. 자신들이 법이다. 이것을 세계 각국에 강요하는 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다.
  똑같이 국제화라고 하지만 자신을 세계의 기준으로 하려는 ‘글로벌리제이션’과 세계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국제화’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도랑이 있는 것이다. 정반대의 의미다. 일본인은 이 점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무엇일까? 일본인이 세계에 자신들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의 세계 혹은 국제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전통적인 습성으로, 일본인에게는 그때그때의 세계 최강국이 곧 세계가 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이 두 가지만 보고 문화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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