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과학과 사회가 한데 엮여 있다는 건 상식이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 이런 지식의 확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황우석일 게다. 어찌 되었든 그 이후 관련 도서들이 꾸준히 나오며 나름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최근 알라딘 과학 분야에는 아예 과학사회학(STS)가 따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과학의 언어>, <한국의 과학자 사회>, <부정한 동맹>, <셀링 사이언스> 등 이 분야 도서를 꾸준히 출간한 궁리에서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이란 재미난 책을 새로 펴냈다. 과학과 사회과 다투거나 삐지거나 등돌린 열세 가지 주제를 재료 삼아 '두 문화'의 즐거운 만남을 시도한다. 아래 내용은 궁리 출판사에서 출간 직후 저자 강윤재 교수와 나눈 인터뷰다. 자연과학출판인회의와 알라딘이 함께하는 '과학책이 세상을 구한다' 캠페인 8월 이달의 과학책 선정에 더해 아래 내용을 함께 올린다.
이달의 과학책 페이지 :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110803_science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은 과학과 종교, 과학과 전쟁, 과학과 여성 등 사회적 맥락에서 과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좀더 이야기해주세요.
이 책은 과학을 외톨이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사회와 더불어 사는 친구로 이해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흔히, 과학 하면 사회와는 무관하게 세상에서 고립된 무인지경으로 생각하기 쉽잖아요. 과학자란 홀로 진리를 찾아나선 구도자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 과학과 과학자의 모습은 ‘과학의 황금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것입니다. 과학의 사회적 쓰임새가 획기적으로 커진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과학에 대한 이해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과학 그 자체에 몰두하여 과학의 본질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망을 폭넓게 조망하여 과학의 다양한 모습을 접할 때 우리는 보다 더 과학의 참모습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과학과 관련된 13가지 주제가 실려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쟁점들도 있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도 있습니다. 역사적 쟁점은 주로 과학의 성격을 둘러싼 것이라 할 수 있고, 현실적 논쟁은 과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은 과학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수년간 수업을 하면서 가다듬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주제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취하고 있는 관점은 논쟁을 진위(眞僞)의 문제가 아니라 대칭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쟁에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대개의 경우 승자는 왜 이겼는지, 패자는 왜 졌는지를 설명해주는 접근방식을 취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서로의 주장을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가급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모든 논쟁에는 찬반이 있기 마련인데, 사실은 두 입장 모두 나름의 옳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위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고 대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법이 중요한 이유는 과학 논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 짓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고, 과학의 참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과 사회, ‘두 문화’의 갈등 문제는 그 기원이 언제쯤으로 거슬러올라가는지요?
‘두 문화’라는 개념이 학술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50년대에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인 영국의 스노우(C. P. Snow)가 케임브리지 리드 강연에서 한 연설에서 유래했습니다. 그의 강연은 현재 <두 문화>라는 책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두 문화의 경향이 유독 강한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반과 이과반을 선택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교육과정은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창조력이 요구되고 종합적 사고가 요구되고 있는 이 때, 따라서 특정한 한 분야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융합과 결합이 중시되고 있는 이 때, 문과와 이과를 일찍 선택하는 교과과정은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취지와 정반대로 반쪽짜리 전문가만 양성해내는 셈입니다. 조속한 시정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책이 잘못된 교과과정에 따른 여러분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두 문화’의 갈등이 아니라 과학과 사회의 생산적 만남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같은 장르를 낳고 있습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활동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르는데, 이 잣대를 과학자에게 적용하는 순간 혼란스러워짐을 느낍니다. 자주 드는 사례가 핵무기 개발 관련한 것인데요, 과학자는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까지 져야 하는 걸까요?
본문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사실 그 답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 여부가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기원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더욱이, 과학이 아니라 핵무기처럼 기술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더욱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은 기술의 개발 자체는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고, 오직 그 사용자에 의해 사회적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기술의 개발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기술은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자는 사회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술이 다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칼은 비교적 가치중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나 의사가 사용하면 매우 유익하지만 강도가 사용하면 흉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칼을 만든 기술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자폭탄은 경우가 다릅니다. 원자폭탄은 결코 좋게 쓰일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과 건물을 파괴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이런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애국과 인류애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가치중립성을 이유로 댈 수는 없습니다. 또한 원자폭탄이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서는 그 개발에 참여한 과학기술자들도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태에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철면피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양심적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참고로, 독일의 과학자들은 비인도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피해자가 내 가족이거나 이웃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책임이 있기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반대를 외쳤던 것입니다.
‘연금술사 뉴턴’ 편에서는 경제학자 케인스가 소더비 경매에서 뉴턴의 미출간 원고들을 사들여 살펴보다가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천재 과학자가 30대에 들어서 연금술과 <성경> 연구에 몰입했다고 해서 조금 어리둥절한데, 그렇다면 과연 뉴턴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일까요. 아니면 시대의 산물일 뿐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책을 읽어보시면 궁금증이 다소 풀리실 텐데요. 중요한 것은 개인과 시대가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입니다. 뛰어난 개인은 시대를 선도하지만, 시대의 물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요지는, 개인과 시대를 분리해서 어느 것이 먼저냐는 문제는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별 볼일 없는 저도 이 시대에 살면서 어느 짧은 순간에 이 시대를 뛰어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뉴턴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과학이나 과학자에 대해 얼마나 큰 허상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뉴턴을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천재로만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17~18세기 영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흑사병이 창궐하고 기독교가 굳건한 사회를 살면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실망하고, 슬퍼했을 사람이었을 텐데, 왜 우리는 그의 보통 육체는 보지 않은 채 그의 위대한 정신만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왜 유독 뉴턴에 대한 신화가 많은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뉴턴이 현대과학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위대할수록 그 아버지 또한 위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뉴턴을 시대를 초월한 위인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뉴턴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뉴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회가 뉴턴의 이야기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마치 유신시대에 성웅 이순신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우상화는 그 순수성을 잃고 결국은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를 옥조여오는 것이지요. 절대적 권력이 부패하는 것처럼 절대적 과학도 부패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과학이 아니라 균형을 갖춘 현실적인 과학입니다.
현대로 와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 기후 변화, 우주 개발 등 좀더 다양한 곳에서 과학과 사회의 갈등폭이 커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합리적 판단이 과학에서만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합리성을 크게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으로 나눕니다. 이 때 과학적 합리성이란 최적의 선택을 위해서 전문가가 인도하는 과학(지식)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사회적 합리성이란 사회적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현대사회에서 최고의 지식은 역시 전문가에서 오기 때문에 그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고요, 후자는 그래도 인류 최고의 제도는 민주주의이니까 과학기술의 문제에서도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가령, 유전자 변형 식품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전문가들은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안전성의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식품이 기존의 식품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민단체들은 최악의 경우 이런 식품이 인류의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인류에게 치명적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과학적 합리성은 전문가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허용여부를 선택할 때 최선이라고 보는 반면, 사회적 합리성은 그 피해가 인류 전체에 미치는 만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이 의견을 충실하게 반영한 선택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느 입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함께 고려돼야 한다는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절충적 입장이 현실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들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토론회와 모임에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갈고닦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교수님이 과학자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첨단무기를 개발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무기는 자칫하면 인류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럴 때 애국과 인류애 중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민족주의자이긴 합니다만 인류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군대 있을 때 사격은 잘 했지만 첨단무기는 왠지 느낌이 섬뜩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섬뜩한 느낌은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3>와 같은 영화를 보시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무인정찰기는 물론 정찰개 로봇과 곤충 로봇 등 수많은 전투로봇이 선보이고 있는데요. 저는 과학자들에게 소리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인류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어!!!”
앞으로 또 어떤 책들을 집필하거나 번역하고 싶으신지요?
앞으로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싶습니다. 물론 과학책도 번역하고 싶고요. 특히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하는데, 위험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위험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정리해줄 필요가 있는데,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그런 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과학과 사회 문제를 다룬 책들 중 독자들에게 더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요?
국내학자가 쓴 책과 번역된 책 합쳐서 꽤 많은데요. 아마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출판된 책 위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골렘>과 <닥터 골렘>을 추천합니다. 골렘이란 유대교에서 나오는 인간의 피조물인데, 평소에는 인간 주인의 말을 잘 듣지만 가끔 화가 나면 주인을 해치기도 합니다. 과학이 바로 이런 골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과학의 참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적 과학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과학과 사회운동의 사이에서>와 <시민과학자로 살다>(조금 오래된 책인데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명의 느낌>, 과학과 사회의 어두운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한 동맹>, 전염병과 현대문명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염병의 세계사> 등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