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래 이 책에 박한 평가를 내리려고 했다. 세대와 성별을 비롯한 위치성이 달라서인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대략 책의 3분의 2 정도?). 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문학을 바라보는 방법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큰 소득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자살하는 인간(231-243)"이라는 챕터에 그만 쓰러져버렸다.


내 어린시절엔 "오늘도 태양이 나를 위해 떴다"는 식의 해맑음이 없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함을 자주 생각했고 '태어남'의 고통을 나만큼은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생이 내겐 지독한 공포였고 '영원히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할때마다 거의 패닉에 빠졌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딱히 살고 싶지도 않은 게 우울증 환자의 디폴트 값이라고 전에 다른 글에 적은 적이 있었는데 거짓말이다. 죽고 싶었던 적이 꽤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로부터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멀리 왔다.


삶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알게 되어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삶은 엉망진창이고 사람은 이기적이며 세상은 실망스럽다는 걸 어느 순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기대를 접음으로써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나는 무뎌졌고 평온해졌다. 나를 거쳐간 수많은 책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네가 겪은 일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거야. 그건 아주 진부한 이야기일뿐이야. 너도, 너의 슬픔도 특별하지 않아.


나쁜 일이 일어나면 당연히 분개하고, 좌절하고, 고통을 겪지만 한편으론 그래,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야 생각하는 내가 있다. 반대로 좋은 일이 일어나면 웬일로 삶이 내게 잘해주지 생각한다. "오히려 좋아" 감사하고 양껏 기뻐한다.


(237) 실존적인 상황이란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을 자신이 감내하고 살아가야 할 세상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그 덧없음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실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뭐야, 이거 완전 난데? 나 실존주의자였어?!



전에 공쟝쟝님이 댓글로 알려주신 링크를 타고 가서 테스트 해보았을 때도 후기 실존주의자가 무려 93%, 플라톤이 0%였다(보편성에 알레르기 있음).


(240) 실존주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적인 보편이성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부정했던 감각의 세계를 긍정하는 데서 실존적 사유가 시작된다. 그 감각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몸이 속한 세계이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들과 우리의 몸이 만나는 세계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가능성을 던진다고 할 때 결국 던져지는 것은 나의 몸이다. 나는 몸을 통해서 세상과 만나고 그 몸을 통해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나의 개별성 역시 나의 몸에서 비롯된다.


"원래 그런거야", "그냥 남들 하는대로 해" 같은 말들로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강요할 때 나는 그쪽 방향으로는 행여라도 단 한뼘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건 내가 내 삶에 부여하는 의미와--나의 몸을 던지고자 하는 세상과--하등 무관하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몇년 전 타샤 튜더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야, 이거 완전 나야, 하며 한동안 카카오톡 프로필로 해두었던 사진이다(너야, 이거 완전 너야, 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이 챕터의 주제인 "자살하는 인간"과 관련해 범우사판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인용되어 있다.


(236) 자살한다는 것은... 인생에 대처하지 못하고 끌려감을,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이유로--그 첫째는 습관이다--생존이 명하는 행위를 계속한다. 자진해서 죽는다는 것은 이러한 습관의 우롱적인 성격, 산다는 모든 깊은 이유의 결여, 매일 매일의 이 소란의 무모한 성격, 그리고 고통의 무용성을 의식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실존주의자에게 자살이란 스스로의 인생이 무가치함을 고백하는 것(242)"이다. 당장 카뮈를 읽고 싶어져서 책장을 뒤져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카뮈 <시지프 신화>가 있다. 책을 덮어놓고 사다 보면 이런 좋은 일도 생긴다. 당장 읽고 싶은 책이 이미 내손에 있었는데 아직 안 읽었다니!!!



지금의 나는 무의미와의 싸움에서 질 생각이 없다.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투쟁(242)"하며 끝까지 주어진 생을 다 살아냄으로써 인생의 가치있음을 증명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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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0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1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3-04-11 08: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어요 - 오늘의 문장으로!!

책먼지 2023-04-11 12:16   좋아요 1 | URL
알겠어, 알겠어 대답하는 부분이 킬포입니다!!! 타샤 튜더님 진짜 너무 멋지지 않나요❤️

다락방 2023-04-11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갑자기 이 글 읽다보니 제가 이미 <시지프 신화>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매우 반갑고 좋습니다. 덮어놓고 사다보면 이렇게 사고 싶은 책을 미리 갖추게 되기도 하는군요. 제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으하하하.

그나저나 ‘자살하는 인간‘에 대한 꼭지 읽고 싶네요. 저는 자살이 궁금해요, 책먼지 님. 제가 자살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혹은 알고 있는 것 말고 다른 것들이 그 안에 잔뜩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궁금해요. 정희진 쌤은 자살 관련 책을 아주 여러권 읽었다 말씀하셨는데, 저도 관심이 가요. 읽어볼래요.

책먼지 2023-04-11 12:24   좋아요 1 | URL
사고 싶은 책을 이미 사두었다니.. 심지어 샀다는 걸 어렴풋이만 기억하고 있어서 이토록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다니!! 과거의 다락방님, 과거의 나, 아주 잘했다!!

저는 작년 초엔가 미괴오똑 읽다 과거의 제 경험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아서 바로 읽기 중단했거든요.. 아직은 때가 아닌가보다 이렇게 생생한 여성 우울증의 증언까지는 내가 읽을 준비가 안 되었나보다 하면서요. 그런데 이 책의 요 부분은 읽으면서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고 심지어 자살 좀 궁금하다 인간은 왜 자살하는걸까 더 알고 싶다, 싶어졌어요!! 이건 읽어도 되는 것 같습니다!! 희진쌤이 일단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에 닿아있는 책부터 읽으라고 하셔서 그 말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는데 저도 관련된 다른 책들 더 파보려고요 이 책에는 딱 이 꼭지 뿐이라 좀 모자란 느낌이 듭니다!!

건수하 2023-04-11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실존주의적 인간인가…. %는 좀 낮을 것 같지만요 ㅎㅎ

책먼지 2023-04-11 12:27   좋아요 0 | URL
오?? 읽으시면서 공감 포인트 많으셨다면 아마 수하님도.. 혹시 저 테스트 아직 안해보셨을까요? https://www.gotoquiz.com/which_philosopher_are_you 링크 무단 나눔합니다!!!

건수하 2023-04-11 14:35   좋아요 1 | URL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제일 높네요 그 다음은 실존주의 ^^;;

공쟝쟝 2023-04-12 12:34   좋아요 2 | URL
역쉬 보뷰아르 수하!!

책먼지 2023-04-12 14:02   좋아요 1 | URL
수하님 쟝님하고 대디님하고 결과 비슷하신 것 같아요!! 보부아르 수하라니.. 고급지다🥹

공쟝쟝 2023-04-12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존주의자님 만나서 반가워요!! ㅋㅋㅋㅋ
저는 심각한 구조주의자에 본질주의자혐의를 받는 신자유주의 페민데여…. 독서나 지식 추구에 있어서 만큼은 실존주의자 하기로 해서 바뀔 수도 있습니닼ㅋㅋㅋㅋ
그리고 제 서재 제목은 의미가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인데 ㅋㅋㅋㅋㅋㅋㅋ
의미…있지 않나요? ㅋㅋㅋ

책먼지 2023-04-12 14:0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쟝님 서재 제목부터 라캉 묻어있는 거 쟝님 글 예습복습한 저는 다 알아버렸습니다!! 흠.. 그런데 몸의 개별성, 몸을 던진다는 부분은 읽으면서 쟝님 떠올랐단 말이죠?? 쟝님 안에 이미 실존주의자도 있는 듯요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2 17:15   좋아요 0 | URL
쿄쿄 저의 몸철학 이라 함은…. 🥹 아 몸탐구도 해야하는데…

희선 2023-04-14 0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까뮈를 찾아보니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다는 말이 있기도 하네요 까뮈가 어떻게 죽었더라 하다가 무슨 사고였던 것 같은데 했어요 차 사고로 죽은 거 맞군요 저는 무슨 주의일까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타샤 튜더가 한 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는 말 멋지네요 다른 사람 말에 흔들리지 말고 그런가 보다 하고 자기대로 살면 될 텐데...


희선

책먼지 2023-04-14 10:35   좋아요 1 | URL
헛 희선님 제가 어제 완독한 <자살에 대하여> 쓴 크리츨리님도 카뮈가 교통사고 아니었음 결국 자살했을 것 같다는 암시를 주면서 카뮈의 실존주의가 좀 불완전했다고 보는 것 같았는데 아예 실존주의자 아니란 말도 있군요?! 후후 애초 이런 ‘주의’ 같은 것에 회의감이 있으시다면 위의 수하님처럼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가깝지 않으실지요!! 희선님도 타샤 튜더님의 멋짐을 알아보셨군요!! 맞습니다!! 결국 내 인생을 사는 건 내 자신이니 남들 말은 적당히 듣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