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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여자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4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평점 :
이제 우리에겐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균열이 벌어졌던 최초의 순간까지 되짚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필요한 모든 언어가 다 도착한 것 같지 않아 애통할 따름이다. 괴로워서 두 번은 못 읽겠다.
(43) 저는 저의 몸을 그대로 두고 싶었습니다. 아무 것에도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말인가요? 그러나 저는 그러고 싶었습니다. 저는 저의 몸을 섹스에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행위를 제 몸이 사용당하는 행위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밝혀낼 수가 없었습니다.
(56) 저는 결혼생활에 만족했습니다. 한 달 동안은요. 그 기간 동안 그는 회사에 심각한 일이 생긴 탓에 거의 매일 야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시에 퇴근했고, 그때부터 그는 일주일에 두 번꼴로 저에게 섹스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우리가 연애하는 동안 섹스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반년에 한 번 정도였으니 그것을 잊고 살 만도 했지요. 저는 갑자기 변한 그가 낯설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섹스를 해야 하느냐고 물은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사이에선 당연했지요. 그는 아주 과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말했습니다. 부부라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어디선가 들은 듯한 말을 하고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59) 그것은 그의 성기에 끼워져서 제 몸속으로 들어왔고, 여성 상위를 선호하는 그의 취향에 맞추어 언제나 제가 자발적으로 그것을 몸속에 넣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저는 다시 소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섹스가 의무가 아닌 소녀로 돌아가서 저의 몸을 아무 곳에도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114) 억압과 해방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뫼비우스의띠인지도 몰라. 억압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전복되어 해방으로 향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해방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국 억압으로 작용해. 나에겐 섹스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래.
(118) 그러나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잔잔하게 고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기꺼이 혼자가 되는 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