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아저씨 - 한 지휘자가 옮긴 감동 있는 음악이야기
이상환 지음 / 바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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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음악이라는 범주를 가만히 살펴보면 가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생각보다 꽤 좁은 범주의 음악만 즐기고 사는 것이 아닌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자신의 취향, 직업 등 필요에 따라 클래식이나 트로트 등을 즐겨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 음악만 듣고 즐기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한편으로는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음악을 제대로 처음 접했던 시기에 너무 '공부'로서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다 큰 성인이 된 후에야 뒤늦게 책이나 영화, 드라마, 광고음악, 지인의 추천 등의 계기로 빠져드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총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음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책으로, 한 지휘자가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과 악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토벤, 브람스, 베르디 등의 유명한 작곡가를 비롯해, 풍금, 가야금, 꽹과리,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피리 등의 악기, 그리고 클래식과 대중가요, 왈츠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음악과 악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듯 음악의 범주 안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마치 옛이야기 듣듯 읽다 보면 새삼 몰랐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새삼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곡, 가사, 악기 등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때론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깊은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지금과는 다른 시대적 배경이나 상황으로 인해 서글픈 애환이나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었는데, 그렇게 배경지식을 하나씩 쌓고 보니 더 많은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래는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추려 소개해 보려 한다. 나처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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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하나의 숭고하고 감동적인 멜로디는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감화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있다. 어느 때는 그것에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나의 마음까지도 내어주어야 할 때도 있고, 또 그 멜로디 하나가 서로 다른 마음들을 하나 되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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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노래와 멜로디는 마음을 움직이는 중계자로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해왔다. 그래서 지금도 나라에서는 국가를 학교에서는 교과를 그리고 단체나 군대에서는 단가와 군가를 불러왔다.

(...)

그런 이유에서 글과 말은 사람의 지성을 설득하기 위함이지만, 음악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나 생각한다.

24~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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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는 많은 매체를 통해 음악의 힘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영화를 볼 때, 드라마를 감상할 때, 게임을 할 때, 광고를 볼 때 등등 음악이 빠진다면 정말 적막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음악은 이렇듯 우리의 심신을 릴랙스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음악 별거 있어?'싶지만, 실상 음소거로 처리하고 많은 일들을 실행해 보면 얼마나 시간이 안 가는지, 또 흥미가 떨어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음악은 우리의 원초적인 감성을 움직이며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물리적인 시간과 행동마저 다르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바로 음악의 위대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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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의 추억'은 포스터가 작곡한 미국 노래로 그가 작곡한 '스와니 강'과 '금발의 제니'등과 함께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곡이다.


포스터는 3백 곡에 가까운 가곡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37세 짧고도 짧은 인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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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많은 곡들 중에서 특히 '메기의 추억'은 노래 가사와 멜로디가 잔잔한 감동을 주는 명곡 중 하나이다. 이 곡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 한국에 처음 들어온 후 우리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가슴을 아프게 하는 작곡 배경이 곡에 대한 애잔한 감동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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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선생님 조지 존슨은 한 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존슨은 그곳에서 학생이었던 메기 클락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영어 선생님으로 온 존슨과 제자인 여학생 메기는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메기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둘은 미래를 약속하며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아름다운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만 아내 메기에게 폐결핵이 찾아오고 만다.

(...)

결국 아내는 결혼 1년 만에 어린 갓난아이와 남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랑하던 아내를 잃은 존슨은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아내와 행복하게 살던 시골 고향 언덕에 그녀를 묻는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제자였던 아내를 떠나보낸 존슨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 후 그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메이플의 사랑"이라는 시집을 펴내게 되었고, 시집 첫머리에 아내 메기와의 추억이 담긴 시 한 편을 써넣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메기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였다.

63~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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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기의 추억'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에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그런데 이 곡의 뒤 배경에 이렇듯 슬픈 사연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직업도 바꾸고 오롯이 아내만을 생각하며 시를 남기게 되었을까? 이 내용을 알고 다시 가사를 보니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지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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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윤심덕은 1900년대 초 활동했던 한국 최초의 소프라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녀는 29살의 아주 짧은 인생을 살다 간 비운의 성악가였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스타 소프라니스트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

그런데 윤심덕이 유학 중 순회공연차 고국을 방문했는데 공연 도중 처자식이 있는 한 유부남을 만나게 된다. 그 남자는 김우진이라는 극작가였는데, 둘은 빠르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

멈춰야 하는 길인 것은 알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이미 돌이키기에 너무 늦어버린 관계가 되어 있었다.


당시 보수적인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그들의 사랑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

바로 그때 그녀는 '사의 찬미'라는 곡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노래로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비관하며 죽음의 비극을 알리는 메시지를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그녀가 쓴 '사의 찬미'의 노래 가사처럼,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김우진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

이 곡은 원래 한 루마니아 음악가가 작곡한 '다뉴브강의 잔 물결'이라는 원곡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었다.


윤심덕에 의해 작곡된 후 이 곡은 1926년 발매되어 대중음악의 효시 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불렸다. 또 이 노래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애창곡으로도 즐겨 불렸다.

173~17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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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의 와이프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상황인데, 시대적 배경과 가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보면 비운의 연인처럼 보이는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 이야기인 '사의 찬미'는 어떤 입장에 서서 노래를 감상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들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이런 스토리 덕에 오히려 사람들의 연심을 자극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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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은 여름이면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그의 여름 별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는 예년보다 별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쳐갔고 또 고향과 가족에 대한 깊은 향수가 생겨났다. 결국 악장 하이든에게 그 고충을 토로하게 이르렀다.


하이든은 그 난처한 상황으로 인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지혜로운 하이든은 후작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단원들의 고충을 알릴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게 된다. 바로 이 '고별'이라는 교향곡을 통해 후작에게 이별의 뜻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

연주회는 시작되었고 이제 마지막 악장에 다다랐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베이스 연주자가 하던 연주를 중단하고는 악기를 들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곧이어 다른 연주자들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무거운 표정을 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져갔다.

(...)

그사이 벌써 연주를 하던 단원들의 자리는 거의 비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장과 또 한 명의 연주자만이 무대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도 지친 표정으로 마지막까지 연주를 이어갔고 연주는 그렇게 마쳐졌다.

(...)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형식의 작품은 소개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도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날 연주를 다 들은 후작은 하이든의 뜻을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로 지쳐 있던 단원들에게 그동안 늦어졌던 여름휴가를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하이든의 이 작품은 지금에 와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그 이유는 행위를 접목한 이런 형식의 작품은 순수 절대음악에 있어서 음악과 퍼포먼스를 접목한 역사상 첫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놀랍게도 하이든은 그 오랜 옛적에 사회의 통념을 깨고 그런 시도를 했던 것이다. 아마도 하이든의 인격과 성품이 아니었다면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쉽게 생각하거나 시도할 수 없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

때로는 말보다 글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고 한다. 또 때로는 글이나 말보다 적절한 제스처가 더 큰 효과를 가져올 때도 있다.

178~18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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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아이디어에 획기적인 퍼포먼스가 음악과 결합된 당시로서의 매우 파격적인 연주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중간에서 매우 난처했을 텐데, 하이든은 이것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후작의 면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지쳐있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의중까지도 전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단순히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이끄는 악장으로써만 생활했다면 급작스러운 상황에 이런 아이디어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깊이 있게 음악을 대하고 늘 고심했기에 나온 지혜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서야 말이지만, 당시에는 저질러 놓고도 뒤에서는 얼마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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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들었으면 '그냥' 넘겼을 음악, 작곡가, 악기 소리를 이렇듯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니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이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가 보다. 덕분에 조금 멀게 느꼈던 음악들과도 꽤 가까워진 느낌이다. 어떤 음악을 들었을 때 이렇게 한번 콕 짚어진 것들은 새삼 반갑게 다가올 것만 같다.


그때 '엇! 이 음악은~ ' 하면서 마치 아는 사람인 것 마냥 반갑게 맞이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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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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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글들은 노래 가사를 비롯해 SNS를 통해 가끔 마주하기에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 그의 글은 믿고 보는 글이나 다름없다. 그의 감성과 똑 부러지는 글솜씨는 군더더기가 없고 명확한 메시지와 내용을 전달하기에 더 그렇다.


한동안 약속된 것들을 이행하느라 바빠 정작 읽고 싶은 것들을 가까이할 수 없었는데, 이제서야 한숨 돌릴 기회를 포착하고 모처럼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뒤져 이적의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이 책을 마주하고 처음 드는 생각은 '아! 금방 읽겠다'였는데, 그만큼 부담 없는 구성과 편집이 시선을 끌었다. 보통 책을 처음 마주하면 책 앞뒤 표지와 목차, 페이지들을 주르륵 넘기며 살펴보는 게 일련의 패턴인데, 그렇게 대강 마주한 책에서 '얼른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을 살펴보면, 인생의 넓이, 상상의 높이, 언어의 차이, 노래의 깊이, 자신의 길이를 주제로 하여 각 단어에 얽힌 이야기를 짧게 나열하는 형태로 담겨있다.


단어로 보자면, 인생, 상상, 언어 차이, 노래,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길지 않은 글자 속에서 이런저런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생각지 못한 발상, 날카로운 유머, 되돌아봐야 할 나 자신 등 짧게 남긴 메모 같은 글에서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함을 느낀다. 익숙한 단어를 발견할 때는 내심 반가웠다가, 글을 읽고는 공감을 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어디서 끊어 읽어도 부담스럽지 않고, 언제 어디서 마주해도 헷갈릴 일이 없어 이 책은 출퇴근길이나 쉬는 시간,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읽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적의 수많은 단어들 중, 내 마음에 콕 하고 다가왔던 몇몇 단어들을 지금부터 소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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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인성 교육 이야기를 들려준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이제 좋은 말을 하며 종이를 다시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답니다. 그러니까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안되겠지요?

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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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때로 아이들을 통해 삶을 배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걸 캐치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내용은 이미 유치원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운다.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하고, 타인에게 상처가 될 말들은 하지 않는 게 옳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들은 때론 생각 없이, 또 어떨 때는 일부러 타인에게 상처 줄 말들을 서슴없이 내놓는다.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타인에게 상처가 될 말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 오늘부터라도 자중하고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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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한 등산객 목에 걸린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음악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건 고개 돌려봐야 피할 방도가 없다. 혹시 이어폰이란 게 발명된 걸 아직 모르나 싶어 가방 속 내 것이라도 건네줄까 하다가, 이어폰 끼면 경적 소리를 못 들어 위험하다며 음악을 스피커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고 달리던 자전거 라이더가 생각나, 그냥 살포시 내 귀에 꽂기로 한다. 이럴 때 이어폰은 귀마개이자 마스크. 유해한 것들로부터 내 몸은 내가 지킬 수밖에.

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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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다가왔던 일상에서 흔히 겪는 공감 가는 이야기 중 하나로, 혀를 차게 되는 내용이기도 했다.


요즘은 민폐 끼치는 이들은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니고, 오히려 정상 범주의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꼴이라니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고,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말에 하나를 더 덧붙이고 싶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것, 맡기 싫은 냄새는 고개를 돌려봐야 피할 방도가 없다'라고.


그래서 내 가방은 언제나 빵빵하다. 꼭 봐야 할 때를 대비한 안경(평소에는 시력이 나빠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귀에 꼽을 이어폰, 향을 없애기 위한 핸드크림이나 향수는 필수이자 기본 옵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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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

전 국민이 열광하는 것처럼 보였던 어떤 것도 한 세대가 지나면 마이너로 사라져간다. 세상은 소리 없이 빠르게 변화한다.

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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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명절이면 누구나 즐기던 고스톱, 그리고 가장 먼저 발명된 고스톱 게임을 언급하며 이제는 수그러들어 서서히 마이너로 사라져 가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세상이 소리 없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콕 짚어 이야기한다.


맞다!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눈 깜짝할 새 많은 것들은 메이저에서 마이너로 사라져가고, 또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변화해간다.


유행은 적응할 새도 없이 급속히 변하고 또 변한다. 뒤돌아 봐야 알아챌 만큼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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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A 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저 귀여운 눈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으며, 뭐 이런 장난 가지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는 듯 이죽거리는 눈빛이 역겨웠다. 눈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면 동물을 학대할 수 있고 마침내 폭력은 자신을 향할 거라는 공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둘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큰 눈이 와준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9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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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히 뉴스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전조증상을 목격한 느낌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처럼, 처음은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특히 여성이라면 일상의 이런 일들을 가벼이 넘기기 보다 신중하게 지켜보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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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는 건 개떡같이 말한 쪽에서 염치없이 강요할 예기가 아니라, 감성과 지력을 총동원하여 마침내 상대가 원래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성공한 쪽에서 "개떡같이 말씀하셨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어요." 라고 한숨을 돌리며 토로할 얘기가 아닐까. 어느 쪽 입장이든 개떡같이 말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니, 찰떡같이 말해주세요.

12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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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며 세상이 참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말조차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상황이라니.


한때 문해력 논란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런 해석조차 문해력 부족으로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기심으로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타인이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고 원하기 보다, 자신이 먼저 타인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먼저 배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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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고수를 좋아하게 된 건 서른 살부터였다. 그 전까지 고수를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

서른 살 때 보스턴의 한 베트남 식당에서, 속는 셈 치고 시도해 보라는 친구의 말에, '그래, 그래 외국까지 왔는데 눈 딱 감고 마지막으로 먹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고수와 쌀국수를 입에 듬뿍 밀어 넣은 순간, 이 허브의 존재 이유가 온몸으로 납득이 되며 덜컥 사랑에 빠졌다.


어떤 맛은, 어떤 경험은 그러하다. 벼락같이 기호를 바꾸고 인생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두자. 완성된 취향 따위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뀔 때 젊다.

1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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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아직 전자의 경험에 가깝다. 고수를 먹지 못한다. 그렇기에 '왜 고수를 먹지?'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어떤 맛이나 경험이 벼락같이 뇌를 강타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알기에 마음은 열어두고 있는 편이다. 고수를 언젠가 저자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젊다는 것은 이처럼 새로운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완성이라는 것이 삶에 과연 존재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마음은 늘 청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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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싫은 사람과는 같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상태.

21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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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성공이 뭐 별거냐? 그저 싫은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이 말속에는 싫은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아도 된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


이적의 생애 첫 산문집인 이 책은 고루하지 않아서 좋다. 조잡한 단어와 말들로 장황하게 늘어놓기 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의도를 간략하고 명확하게 전달함으로써 쿡하고 웃어넘기거나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등 즉각적인 반응을 내보일 수 있어 좋다.


딥하지 않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나 자신과 삶, 언어의 또 다른 차이, 저자가 직접 쓴 가사의 비하인드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순서 상관없이 원하는 주제를 먼저 만나보아도 되고, 멈춰 서고 싶을 때는 언제고 멈춰서 머물러도 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읽어나가되, 그의 시선이나 생각 속에 깃든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재미가 있어 결코 독서하는 시간이 헛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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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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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4절기에 따라 1년을 살아본 이야기"


도시에 살다 보면 계절, 자연, 날씨 등을 온전히 느끼기 힘든 경우가 많다. 출퇴근길에 잠깐 마주하는 날씨, 춥고 더운 것으로 느끼는 계절, 그리고 근처 산이나 공원을 찾아야지만 느낄 수 있는 자연.

때문에 우리는 계절감을 잊고 매일 쳇바퀴 굴러가듯 '그냥' 살아간다. 사실 한때는 나 역시 이런 것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을 만큼 너무 바쁘게 살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고, 매일 지속되는 야근에 막차 타고 오기 바쁜 하루라 날씨, 계절, 자연 이런 것은 늘 뒷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를 건강하게 하고, 쉼을 주는 힐링 포인트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어릴 때는 자연 속에서 피톤치드 맞으며 흙, 나무, 꽃, 신선한 과일, 좋은 공기 등과 함께 했는데 그런 것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쳤고, 아팠고 참 많이 힘든 날들을 보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건강한 환경 속에 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계절 따라 우리에게 제철 행복을 주던 것들이 그리워졌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계절을 24절기로 나눠 변화하는 풍경과 제철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해 전한다.

저자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달력 속에 작은 글씨로만 존재하는 절기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서술함으로써 이 속에 얼마나 많은 성장과 변화, 그리고 삶이 숨어있는지를 알려준다.

덕분에 이 계절과 맞물려 있는 우리의 인생 속에 숨어있는 빽빽하고 가지런한 작은 행복의 씨앗 또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은근히 이것들을 하나 둘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온전히 계절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가질 수 있는 눈앞에 있는 행복! 지금부터 그것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 제철 행복을 찾아 떠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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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떠나기 전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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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건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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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보였다. 좋아하는 것들 앞에 '제철'을 붙이자 사는 일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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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맞은 시절을 맞이하기 전, 먼저 저자가 구분 지은 24절기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보통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이야기하지만, 조금 더 촘촘히 계절을 음미하기 위해 지금부터는 24절기로 계절을 만끽해 보자!


■24절기란?
'천구상에서 태양이 1년에 걸쳐 이동하는 경로'를 '황도'라 부른다. 황도 한 바퀴인 360도를 15도 간격으로 나누어 계절을 세밀하게 구분한 것이 24절기.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에 여섯 절기가 속하며, 한 절기의 길이는 약 15일로 한 달에 두 번 들어 있다.


■절기 알기
양력(태양력)에 따른 것이다. 보통 우리는 절기를 하루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황도상에서 15도 간격으로 나눈 각 지점을 태양의 정중앙이 통과할 때가 24절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다음 절기까지의 기간을 한 절기로 본다. 달력에 적힌 일자는 입기일(절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세종은 조선시대 천문학을 집대성한 역법서 <칠정산>을 펴내며 24절기를 한양의 위치와 기후에 맞게 수정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절기는 이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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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을 챙기기 위한 저자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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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끝자락에 저자가 제안하는 제철 숙제를 풀어보며 나만의 절기를 마음에 꼭꼭 담아두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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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봄, 봄비에 깨어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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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2월 4일 무렵
▷봄이 일어서기 시작하는 한 해의 첫 번째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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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의 숙제는 하나.
꼬박꼬박 때를 맞춰 찾아오는 봄처럼,
지치지 않는 희망을 새해 숙제로 제출할 것.

희망은 어디 숨겨져 있어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하는 사람의 마음에 새것처럼 생겨나는 법이니까. 새싹을 틔우는 게 초목의 일이라면 희망을 틔우는 건 우리의 일.
다시 봄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시작'이라 힘주어 말해도 좋은.
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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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1월 1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시작을 이야기하지만, 절기로 이야기하자면 봄의 시작은 '입춘'이라 말할 수 있다.

1월 1일 목표를 세웠다면, 새해 희망을 다지는 날은 '입춘'을 기점으로 해보면 어떨까 한다. 이제 진짜 시작!


■춘분
▷3월 20일 무렵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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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다그치는 인간 세상과 달리, 자연은 나무라지도 채근하지도 않는다. 나무가 나무로 살고 새가 새로 살듯 나는 나로 살면 된다는 걸 알게 할 뿐. 세상에 풀처럼 돋아났으니 다만 철 따라 한 해를 사는 것. 봄에 새순 같은 희망을 내어 여름에 키우고, 가을에 거두며, 겨울엔 이듬해를 준비하는 게 자연스러운 한 해 살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땐 큰 질문은 쪼개서 작은 질문으로, 큰 시간은 쪼개서 작은 시간으로. 1년이 막막하다면 다만 봄의 하루를 성실하게.

빈손으로 돌아온다 생각했는데 내가 펼쳐본 쪽지에 적혀 있던 건 모두 나를 위한 답이었다.
73~7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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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생명을 키워내는 방식처럼,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고 차근차근 성장하는 이치를 따르면 어떨까 한다. 매 철에 맞게 성장시키고, 수확하고, 다독이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다운 삶에 접어들어있지 않을까?

다만 방법을 잘 모르겠다 싶을 땐, 쪼개고 쪼개서 단위를 줄여 하나씩 이뤄나가면 된다. 성실하고 나답게.


■청명
▷4월 5일 무렵
▷산과 들에 꽃이 피어나는 맑고 밝은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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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은 365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작 봄의 하루도 시간을 내지 못하며 사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 벚꽃 앞에서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한다.
(...)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꽃놀이만큼은 '내가 나한테 이것도 못 해줘!'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내서 즐기기를.
(...)
환한 꽃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시시각각 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 이 맛에 산다'하는 흡족한 미소를 띨 그날까지. '이게 사는 건가'와 '이 맛에 살지' 사이에는 모름지기 계획과 의지가 필요한 법이다. 제철 행복이란 결국 '이 맛에 살지'의 순간을 늘려가는 일.
(...)
꽃은 늘 기다린 시간보다 짧게 머물다 가니,
봄이 오면 언제까지라도 오늘의 기쁨을 선택할 수 있기를.
내일의 즐거움을 예약할 수 있기를.
85, 87페이지 中
-----

매해 오는 봄이지만, 오늘의 봄은 지나가면 끝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올해의 봄을 넘겨버리면 어느새 '이게 사는 건가'와 같은 생각에 접어들기 마련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다가오는 봄을 만끽할 하루를 내어준다면, 적어도 '이 맛에 살지'하는 제철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제철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부지런함과 의지, 그리고 계획은 필수다.


■곡우
▷4월 20일 무렵
▷곡식을 기르는 봄비가 내리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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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이면 돌미나리 전을 먹는다. 그건 봄마다 친구를 떠올린다는 말. 우리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평생 미나리전 앞에서 친구를 떠올릴 것을 생각하면, 오래전의 약속이 모양만 바뀐 채로 계속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봄 산을 같이 걷길 잘했지. 평상에 앉아 미나리 전을 먹길 잘했지.

어쩌면 좋은 계절의 좋은 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을 줄여서 우정이라 부르는 건지도. 우리는 그렇게 잊지 못할 시절을 함께 보낸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사람이 된다.
10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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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을 누리는 것 중에 먹거리를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음식은 당시의 디테일한 추억을 상기시키기 좋은 소재인데, 먹었던 음식을 비롯해 당시의 날씨, 함께 한 이들, 코끝에 머물던 향기, 풍경까지 담아낸다.

때문에 우리는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때를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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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여름, 햇볕에 자라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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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
▷5월 20일 무렵
▷작은 것들이 점점 자라서 대지에 가득 차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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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안부가 원래 그런 일이다. 생각나서 연락하는 일.
(...)
안 하던 일을 하기가 어려울 땐 작게 해본다. 그중 가장 쉬운 안부의 규칙은 '이름으로 된 간판을 발견하면 연락하기'다. 싱겁기로는 국내 최고인, 저염식 안부라 할 수 있다.
(...)
제대로 할 게 아니면 아예 안 할 거라 마음먹는 것보다야 가볍게라도 하는 게 낫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안부'라는 게 있나? 안부는 짧아도 가벼워도 먼저 건네면 무조건 좋은 것이다.
(...)
시간차를 두고 도착하는 답장들엔, 직접 보지 못했어도 웃음이 묻어 있단 게 느껴진다. 어떤 안부는 조만간 만나자는 약속으로 이어지고, 또 어떤 안부는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끝나기도 한다. 그거면 됐다. 안부란 정말 별게 아니니까. 편안한지 아닌지 묻는 일.
(...)
작은 안부가 자라 마음을 가득 채우는 소만.
아무렴, 안부를 묻기에 좋은 계절이다.
127, 129, 131~1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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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쉽게 작은 안부를 먼저 묻던 때도 있었는데,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먼저 하는 것이 껄끄럽다는 이유로 미루다 보니 이제는 안부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작은 것들이 점점 자라기 시작하는 소만, 시시한 작은 안부를 먼저 건네보면 어떨까 한다.


■망종
▷6월 5일 무렵
▷까끄라기 곡식인 보리를 베고 모를 심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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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알맞은 행복을 찾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바라는 것을 귀담아듣는대서부터 시작하니까. '이런 걸 보니 좋네, 여기 있으니 마음이 편하네, 이걸 먹으니 행복하네' 내가 언제 그렇게 느끼는지를 알아채고, '이런 걸 보고 싶다, 이런 데 가고 싶다, 이런 걸 먹고 싶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알아줄 때. 그 목록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 한 위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망종엔 우리 모두 바깥 인간이 되자. 밖으로 나가 초여름을 누리자. 잠시여서 아름다운 계절을 즐기며 스스로를 웃게 해주는 일이야말로 변치 않는 제출 숙제니까.
145~14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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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저자는 바깥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초 여름을 누리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바라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를 귀담아 들으며 나의 행복을 찾아보라 권한다.

푸릇함과 싱그러움이 가득한 6월, 나를 발견하고 환기시킬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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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가을, 이슬에 여물어가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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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
▷10월 23일 무렵
▷서리가 내리고 단풍이 짙어지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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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다보는 단풍의 계절에서 내려다보는 낙엽의 계절까지, 내가 생각하는 숙제는 하나다. 이 가을을 끝까지 써야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치약이나 핸드크림의 가운데를 가위로 잘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쓰는 사람답게, 이 계절을 끝까지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까워라, 하는 마음으로.
(...)
다들 가을에 진심인 것, 아름다움 앞에 열심인 것. 그 마음을 헤아리면 이 모든 소통이 극성이 아니라 정성으로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성수기가 성수기인 이유는 그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과 함께. 우리는 저마다의 제철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다.
251~25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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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성수기마다 사람들을 피해 다니느라 바빴는데, 이 글을 읽고 보니 저마다 제철 숙제를 하느라 바빴던 것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유독 알록달록 가을빛으로 물든 가을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이면서도 막상 사람들에 치일 생각에 주저앉고는 했는데, 올가을에는 나만의 제철 숙제를 하러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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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겨울, 눈을 덮고 잠드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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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1월 20일 무렵
▷큰 추위가 찾아오는 한 해의 마지막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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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결국 계절의 흐름을 알고, 계절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도 알고, '제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옛사람들과 동식물처럼 사는 것.
(...)
꼭 필요치도 않은 것을 이것저것 매달고 여태 그것을 풍성함이라 여기며 살았던 건 아닐까. 내가 나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이거구나, 나머지는 결국 다 부수적인 것들이구나. 살아온 시간이 쌓인 만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선명해지면 좋을 텐데, 자주 잊고 새로 배우길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봄이 오는 한 우리는 매번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이번 봄은 다음 봄이 아니기에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한 번뿐인 계절을 귀하여 여기면서, 한 번뿐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겨울 숲의 저 나무들처럼, 신의 부재 속에서도 할 일을 찾았던 옛사람들처럼.
333~334페이지 中
-----

어쩌면 우리는 자연을 거스르고 역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물 흐르듯 '제때'에 맞춰 살아간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부터라도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보자. 제때 해야 할 일을 눈여겨보고,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무엇을 하나씩 실행해 보자. 여기에 더해 제철 음식을 충분히 음미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매해 돌아보는 봄이 있어 다행히 우리는 일 년을 주기로 삶을 새로고침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이번 봄이 다음 봄과 같지는 않기에 어쩌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방법은 하나다. 매 순간을 의미 있게 사는 것.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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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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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보면 왜 일 년이 사계절로 이루어져 있고, 또 이것이 24절기로 나누어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무엇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빽빽하게 자리한 절기를 노닐다 보면, 자연 그 자체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떼기 어렵다 느낄지도 모르겠다. 싹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불쑥 커버린 작물을 목격하게 되고, 그러다 울긋불긋 불든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수확의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쌀쌀함이 감돌 때쯤에는 하얗게 뒤덮인 눈 때문에 또 멍을 때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풍경에 압도당하는 느낌에 더해 중간중간 익숙한 먹거리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 새삼 낭만이라는 단어가 불쑥 떠오른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구나'

온전히 계절을 느끼며 살았던 그때가 문득 그리워진다. 이제부터라도 제철 숙제를 하며 절기별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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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듯 너를 본다 J.H Classic 2
나태주 지음 / 지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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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의 책을 읽다가 앞서 온라인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시만 모아 출간한 책이 있다고 하여 읽게 되었다. 찾아보니 최초의 인터넷 시집이라고 하는데, 시와 가깝지 않았던 젊은 사람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간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에는 나태주 시인의 시와 그림, 그리고 각 장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윤문영 화백의 그림을 만나볼 수 있는데, 보다 보면 자꾸 빠져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풀꽃부터 다양한 색감을 지닌 시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여기에 더해 중간중간 여백을 채우는 시인의 그림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좋았던 점은 시보다 오히려 그림이었는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 나무, 낙엽 등의 자연 소재에 시인의 상상력을 더한 그림들이 인상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에게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시와 그림들을 지금부터 소개해 보려 한다.



=====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목소리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번 죽는다.
63페이지 中
=====

이 시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서툰 것이 사랑일까? 그러다 오래 사귄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 즉 '권태감'이 문득 떠올랐다.

너무 오래 알고 지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서로에 대한 궁금증이나 서투름이 없는 상태. 어쩌면 이 권태감은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 새로움, 낯섦, 서툶이 없어진 이유일 테다. 때문에 시인은 늘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 즉 서투름이야말로 곧 사랑이라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72페이지 中
=====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행복이 별거 없다는 것. 시에 담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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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74페이지 中
=====

사람들이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체적으로 짧은 몇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풀꽃의 사랑스러움과 싱그러움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더해, 너도 그렇다는 한마디는 앞의 수식어들이 더해져 누구든 심쿵 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비슷한 느낌의 단어로 볼수록 매력적이라는 말을 뜻하는 '볼매'라는 단어가 불쑥 떠오른다.


=====
묘비명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8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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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그대로 묘비명으로 써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색다른 나만의 묘비명을 미리 정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




=====
아끼지 마세요

좋은 것 아끼지 마세요
(...)
그러다 그러다가 철 지나면 헌 옷 되지요

마음 또한 아끼지 마세요.
(...)
그러다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되지요

좋은 옷 있으면 생각날 때 입고
좋은 음식 있으면 먹고 싶은 때 먹고
좋은 음악 있으면 듣고 싶은 때 들으세요
더구나 좋은 사람 있으면
마음속에 숨겨두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그리하여 때로는 얼굴 붉힐 일
눈물 글썽일 일 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도 그대 앞에 꽃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지 않나요
그 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하세요.
106~107페이지 中
=====

'아끼다가 똥 된다'라는 말처럼, 무언가를 아끼다가 정작 쓰려고 꺼냈을 때 쓰지 못한 경험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게 물건이 됐든, 사람이 됐든 너무 아끼다 보면 무용지물이 되기 마련이다.

폐기처분하기 이전에,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용해 보면 어떨까? 감정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중요한 것은 현재이지 나중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더 자주 사용하고,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먹으며 음미해 보자. 좋아하고 그리운 마음 또한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 보자. 그게 바로 잘 사는 인생 아닐까?


=====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160~161페이지 中
=====

앞 전의 시와 반대되는 시로, 이 시에서는 배려와 책임감이 느껴진다. 책임지지 못할 감정은 마음속에 꾹 담아두기, 나도 겪어본 감정들을 타인이 굳이 겪게 하지 않기.

타인을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져 더 애달프게 다가왔다.


시를 위주로 소개했지만, 중간중간 시선이 갔던 그림도 함께 담아보았다. 섬세한 표현과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을 통해 잠시 힐링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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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개정증보판 포레스트 에디션)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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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가 공감의 언어가 되는 순간!"


일상의 단어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감정과 관계를 탐색하다 보니, 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그동안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출처를 알게 된다.

'아~ 이래서 내가 힘들었던 거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었구나' '나에게 앞으로 필요한 것은 00이구나' 깨닫게 된다.

나를 대변하는 언어,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나와 너를 규정할 수 있는 언어, 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언어들을 김이나의 언어를 통해 만나보면 어떨까 한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 주변에 늘 자리하고 있는 일상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감정, 관계,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게 해주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파트 1 '관계의 언어'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단어를 소개한다. 파트 2 '감정의 언어'에서는 단어가 지닌 특유의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파트 3 '자존감의 언어'에서는 나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성찰하게 만드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가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공감을 일으키는 작사가여서인지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공감하고 다독임을 받을 수 있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 밑줄을 긋거나 따로 필사를 함으로써 마음에 한 번 더 새겨두면 어떨까 한다.

본론에서 다루는 언어 외에도 'Radio record'와 'Lyrics'를 통해 그녀의 다른 감성들도 만나볼 수 있는데, 라디오 <김이나의 밤 편지>에서 다뤘던 멘트와 미발표곡의 노랫말을 통해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껴봐도 좋을 것 같다.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는 언어들 속에 자리한 숨은 의미와 의도들을 살펴보면, 내심 겉으로 드러내어 어떤 감정을 드러내기 매우 모호할 때가 많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불쾌함을 느낄 수도 없을뿐더러, 대놓고 비꼬거나 상처를 주는 말이 아니기에 더 그렇다. 김이나는 이런 언어들을 비롯해 특정 프레임에 갇혀 우리를 평가하거나 재단하는 언어, 나를 성장시키고 힘을 북돋어 주는 언어 등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언어가 지닌 힘과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사와는 다르게 해당 언어에 대해 또렷하고 명징하게 풀어냄으로써 독자들은 아마 나처럼 곧바로 피드백을 훅 내뱉게 될 것이다. '맞아 나도 그랬어' '이 땐 이런 마음이었구나'와 같이 말이다.

그렇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지 어떤 기준이 생긴다.

그러면서 불안하고 어수선했던 마음이 어느새 말끔히 정리되고, 차분해진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애매모호한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면, 나를 다잡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한 순간이라면 이 책을 통해 보통의 언어와 나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고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
나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모두 약간씩의 거리를 두는 편이다. 아니, 친할수록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
'소중한 사람일수록 잘 바라보아야 한다. 세심히 살펴야 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당연히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 관계는 V3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된다.'
28~29페이지 中
=====

=====
살다 보면 부득이 선을 긋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 이들은 나름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를 관찰해 주고, 그걸 토대로 내 성향을 점선으로나마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밑그림이 나의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때, 나는 무장해제되곤 한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알기에,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나 또한 열심히 점선으로 상대를 스케치해 본다.
(...)
이 섬세한 과정을 퉁치는 말이, '배려'인 것 같다. 그러므로 나와 상대방 사이에 있는 틈은 서로가 서로를 잘 바라보기 위한 것일 테다.
30페이지 中
=====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말하는 거리감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그래야 한다고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가까울수록 선이 필요 없다거나 더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선을 지켜 깍듯한 태도를 보이고, 가족이나 친한 지인들 사이에서 함부로 함으로써 관계를 어그러뜨리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쉽게 목격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소중한 사람일수록 잘 바라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하며, 만약 선 없이 자기 맘대로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 V3가 깔리지 않음 컴퓨터가 된다고 말한다.

더불어 간혹 선을 긋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때가 있는데 이들의 귀한 노력과 배려가 있기에 이런 상황이 가능할 수 있다고 전한다.

우리에게 이런 배려와 노력이 동반되기 어렵다면, 일단 안전거리부터 확보해 보면 어떨까? 우리의 안전한 감정과 관계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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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했잖아'라는 말. 이 문장만 봐도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짜증이 밀려오지 않는가? 그만큼 사과를 하고 받을 만한 일에서 중요한 건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이후의 과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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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받는 사람 쪽에서 필요한 겸연쩍은 시간이란 게 있다. 마지못해 내민 손을 잡아주고, 다시 웃으며 이야기 나누기까지 떼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몹시도 무겁다. 이 무거운 발걸음을 기다려주는 것까지가, 진짜 사과다.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는 비법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화해하는 거라고 대답한다. 호시절에 잘해주는 건 쉽고도 당연한 일이다. 소중한 관계일수록, 거리가 가깝고 가까울수록, 갈등이 생길 확률은 높다. 그러니 이 갈등을 어떻게 어루만져 다음 단계로 가는지가 중요하다. 잘 마무리된 다툼만큼 관계를 돈독히 해주는 건 없다. 잘못을 저지른 경우라면 차라리 당신에게 이 관계를 더 견고히 만들 기회가 주어진 거다. 잊지 말자. 사과는 A/S 기간이 가장 중요하단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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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하는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과를 하는 사람이 결국 화를 내고, 사과를 받는 사람이 결국 가해자가 된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많다.

당한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하고 어이없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늘 상황은 이렇게 돌아간다. 그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가해자는 사과한 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상대방이 결국 속 좁고 못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분명 어떤 것이든 예열이 필요한 법인데 왜 잘못한 쪽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그렇게 재빨리 해치우려 하는 걸까?

당한 것도 억울한데 사과까지 받아줘야 하는 걸까? 사과를 받아줄지 말지는 엄연히 내 마음인데, 이것까지 가해자에게 강요받는다.

이에 대해 저자는 관계를 잘 풀어가고 싶다면 이런 것까지 고려해 상대방이 충분히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까지 포함해야 진정한 사과라고 말한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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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기억이 아닌 감정에서 나온다. 즉 상황의 싱크로율이 같지 않더라도, 심지어 전혀 겪지 않은 일이라 해도 디테일한 설명이 사람들의 내밀한 기억을 자극해 같은 종류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을 사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감정 서랍이 있다.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질지라도, 그때 느낀 감정들은 어딘가에 저장이 된다. 공감에 대한 생각이 바뀐 이후, 내가 겪지 않은 일에도 조금 더 적극적인 위로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감정의 서랍은 냉장고와 달라서 열고 닫을수록 풍성해진다. 비록 나의 경험치가 아닌 일임에도, 진심으로 내 마음속의 서랍을 열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48~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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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공감! 어쩌면 우리 사회가 메마르고 까칠해진 건 바로 이 공감 서랍을 꾹 닫아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생각해 보면 꼭 같은 경험을 해야만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왜 우리는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인의 일'로만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일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정한 일들은 바로 이런 공감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재난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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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가 받는 이를 오랫동안 세심히 지켜봐온 시간이 선물 받는 이의 만족도를 좌지우지하듯, 조언도 그렇다. 듣는 이의 성향과 아픈 곳을 헤아려 가장 고운 말이 되어 나올 때야 '조언'이지. 뱉어야 시원한 말은 조언이 아니다.
7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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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에 대해 명쾌하고 확실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뱉는 말로 '조언'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상대방을 찌르는 바늘이 되어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만약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에 굳이 '조언'을 건네야 하는 상황이라면 듣는 이를 고려한 상황과 고운 말로 조심히 건네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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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다.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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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와 상관없이 이런 태도를 가진 자들이야 답이 없다 쳐도, 나이와 밀접한 상관이 있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서글프다. 삶에 지쳐, 육아와 회사에 지쳐, 체면이란 게 사치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태도일 테니 말이다. 수줍음이 있는 어르신이 된다는 건 그래서 어렵다. 그래서 소망한다. 시간이 흘러도 나 또한 염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길.
80~8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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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르신들을 보면 염치없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 많은 게 자랑인 양,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는 것 마냥 행동한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어르신뿐만 아니라 염치를 모르고 날뛰는 행동으로 각종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들을 보면 역시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반대로 염치를 안다는 말은 점잔고 품위 있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느껴진다.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나 역시 소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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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틀릴 수가 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중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는 기억의 속성을 잘 활용한, 거의 명언과 같은 표현이다. 반면에 추억은 틀릴 가능성이 없다. 이미 내가 어떻게 저장하기로 한, 나의 감정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상황이 실제로 좋았든 나빴든, 추억이 되느냐 마느냐의 감독 권한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뼈아픈 슬픔도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추억이 인화되어 액자에 넣어진 사진이라면, 기억은 잘려 나온 디지털 사진이다. 잘리기 전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몰랐던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나가긴 했지만 소멸되진 않았기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기억이 익어 추억이 되진 못하지만, 모든 추억은 결국 기억의 흔적이다.
1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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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기억에 대한 풀이를 보고 순간 반짝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비슷한 말로 대충 생각하며 살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추억과 기억에는 큰 갭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 단면을 잘라낸 기억과 온전한 상태로 담겨있는 추억은 완전히 다른 개념인데 왜 그동안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을까 새삼 반성하게 된다.

틀릴 수도 있는 기억, 절대 틀릴 가능성이 없는 추억!
우리에게 힘을 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은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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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말하자면, 목표는 어느 만큼의 관객 수를 동원할지, 얼마의 수익을 창출할지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다루는 이야기다. 반면 꿈은 미술을 논한다. 어떤 분위기의 장소, 어떤 색깔과 질감의 의상, 또 어떤 종류의 소품에 둘러싸인 주인공... 즉 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훌륭한 목표와 근사한 꿈, 어울리는 수식어도 각각 다르다.

아직 꿈이 없다면 차라리 그대로가 자연스럽다. 꿈은 '좋아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취향이 생겨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끌려 탄생한 꿈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어 작은 목표들을 만들어준다. 마음이 하는 모든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끌 듯 꿈도 그렇다. 꿈은 목표와 성질이 다르기에, 반드시 이루지 않아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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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와 꿈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 서술한 문장인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분명한 선을 제대로 짚어준 느낌이다.

목표는 구체적인 '수치'로 논할 수 있다. 반면 꿈은 '상상하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꿈은 어떤 것으로 구분 짓거나 명확히 성공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 그리고 꼭 도달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지금 내가 쫓고 있는 것이 목표인지 꿈인지 헷갈린다면 이것으로 구분해 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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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을 극으로 본다면 작가는 나고 주인공도 나다. 작가가 위기에 빠진 주인공 곁에 같이 앉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하고 발을 동동 굴러선 안 되는 법이다. 걱정에 빠진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를 위해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회차로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순리에 모든 걸 맡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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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우리 삶은 내가 주인공이자 작가이며 연출가라 말할 수 있다.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고,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삶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써 내려가고, 이끌어갈 것인가는 '나'에게 달려있다는 말이다.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살아갈지, 아니면 쭈구리 삼류인생으로 살지는 당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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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나가 말하는 보통의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과 관계, 삶들이 다시 재정립되는 느낌이다.

덕분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이나 감정들에 이름표가 하나씩 붙음으로써 시끄럽고 어지러웠던 마음의 방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구분 짓기도 애매했던 것들이 조금씩 분명한 색을 띠면서 내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버려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이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이 때론 아주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철학자나 전문가, 고전과 같이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는 보통의 언어들에서 찾을 수도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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