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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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단편을 엮어 만든 소설책이라 생각하고 스토리 위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보다도 '공허함'이나 '단절'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의 흐름보다 그 안에 스며든 '느낌'에 더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후에, 책 소개를 통해 이 책이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북한, 고려인, 이주민 등이 이 책에 많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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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란?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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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담아내고 있다. 외국으로 이민 간 이주민, 북한에서 탈북한 탈북민, 고려인, 전쟁으로 인해 강제 이주해야 했던 사람들까지, 그들의 사연을 살펴보면 매우 다채롭다.


하지만 그 다채로운 이야기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스며 있는 정서들이 있는데, 바로 외로움, 공허함, 그리고 상실감 같은 감정들이다.


이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이 지나쳐 가는 그 어떤 풍경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심지어 머무는 장소조차 흑백의 무색무취처럼 느껴진다. 나를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무'의 상태가 그들에게는 일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상태의 삶이 지속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는지, 이 책은 분명히 보여준다.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감정들과는 다른, 진정한 비애와 공허, 황량함, 외로움, 슬픔과 단절과 같은 의미를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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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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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선

서른한 살의 '보'라고 불리는 보선은 어느 무역회사의 나쁜 일에 말려들어 교도소에 수감되게 되고, 풀려난 뒤에는 함께 방을 썼던 동료 재소자 '로저'의 소개로 아주 작은 도시인 캘리스라는 마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보는 필립이란 노인으로부터 저렴한 집을 하나 렌트하게 되는데, 노인은 카로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함께 살고 있다.


한편 부족한 렌트비를 충당하기 위해 보는 근처 카지노를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새로운 동료 해리와 함께 근무를 하게 된다.


이렇듯 보는 미국으로 이민와 교도소와 낯선 도시로 옮겨 다니며 공허한 삶을 이어나간다.



■코마로프

며칠 전 만난 젊은 남자들의 제안으로 스페인 코스타브라바의 언덕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온 54세의 주연은 30세인 미들급 복서 니콜라이 코마로프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다. 


남자들이 권하는 대로, 그녀는 온몸에 도청과 녹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장치를 두르고 권투선수가 된 아들을 만나러 갈 예정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 


주연은 북한에서 태어나 현재 바르셀로나에 거주 중으로, 탈북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들을 만날 생각에 심란하다. 왜냐하면 사실 젊은 남자들이 주장하는 권투선수 니콜라이 코마로프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과 같은 해에 태어난 또 다른 아이들 중 하나라고 직감한 그녀는 자기 자신과 그 아이를 위해 진짜 엄마를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몰래 건네주며 태어난 지 다섯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진짜 아들을 떠올린다.


냉전 시대에 탈북해 남한에서, 독일로, 다시 스페인으로 혈혈단신 떠돌아온 장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이야기 속에는 깊은 외로움과 고독감이 느껴진다.



■역참에게

도시오와 히로코는 도카이도(도쿄와 교토를 잇는 도로)를 따라 열 살쯤 된 유미(활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 소년을 데리고 이동 중이다. 


아이는 조선 침략의 피해자로, 갓난아이 때 조선에서 데려와 주군 자제의 책임하에 있다가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고아가 된 아이다. 


주군 자제의 부인인 가쿠에 덕분에 조선인들에게 아이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면서 이들은 고아가 된 아이를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로써 도시오와 히로코는 조선인들과 만나기로 한 역참에 머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들에게 아이를 인계하게 된다.


갓난아기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붙잡혀 온 아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일본에서 말과 활쏘기를 배운 아이는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일본을 떠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계속해서 떠도는 삶을 살게 된다.



■크로머

뉴몰튼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가게를 운영 중인 해리와 그레이스 부부는 처음에는 가십 위주의 잡지와 신문을 팔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그러다 사람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자, 지금은 스마트폰 케이스를 파는 곳으로 바꿔 운영 중이다. 이들은 탈북해 영국 땅에 자리 잡은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로 이곳에서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때로 탈북민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묵묵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부모 세대는 세상을 떠난 뒤라 이들도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날 법도 하지만, 그들은 고립과 연대 사이를 오가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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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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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의 소설 모두 어딘가 모르게 텅 빈 공허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들은 마음을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계속해서 떠돌아다닌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언급하는 배경들은 그저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이들은 왜 이곳에 왔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혹은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상황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마음과 함께 연이어 물음표가 떠오른다. 왜 이들은 새로 시작할 마음을 먹지 못하는지, 어째서 뿌리를 찾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지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처럼 떠돌다 때가 되면 또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지는데, 그 과정 속에는 삶에 대한 어떤 애착이나 애정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미스터리하고 수수께끼처럼 다가온다.


스스로 만든 고립인지, 아니면 타인이나 환경에 의한 고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런 상황이나 내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서히 세상에서 지워진다.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일곱 편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내 안에는 무미건조함과 텅 빈 마음만이 황량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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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현북스 소설 1
위기철 지음 / 현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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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자주 눈에 띄던 제목이었지만, 이번에서야 비로소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어쩌면 내심 '아홉 살 인생'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책을 읽어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책이 내 삶의 발걸음에 맞춰 찾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보면 지금이 딱 이 책을 만날 시점이어서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총 2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책에는, 아홉 살 여민이의 눈에 비친 삶과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상을 전혀 모른다고 하기엔 이미 눈치껏 바라볼 줄 알고, 그렇다고 모든 걸 안다고 하기엔 아직 어린아이인 여민이.


아홉 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떤지, 그 시선을 따라가며 다양한 인간 군상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을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한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서울에서도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몇 해를 보낸 뒤에야 겨우 얻은 낡아빠진 판잣집들이 우글거리는 산꼭대기 집!


이곳에서 여민은 비로소 아홉 살 인생을 제대로 만끽하게 되는데, 과연 어떤 삶이 여민을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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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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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정말 묘한 숫자다. 아홉을 쌓아 놓았기에 넉넉하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헛헛하다. 그 아홉이 지나면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기에 불안하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이건 모두 십진법의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지만, 그게 때때로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들곤 하니 우습다. 이게 다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탓이리라.


(266~2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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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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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민(주인공)

-다섯 살이 되던 무렵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간 뒤 여러 번의 이사를 하며 붕붕 뜨는 생활을 이어감

-그러다 아홉 살 삼학년 여름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 판잣집들이 우글거리는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됨

-싸움을 꽤 잘하지만 싸움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음

-정의로움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음

-별명: 노란네모



■백여운

-다섯 살 여동생



■백철홍

-여민의 아빠

-정의롭고 선함



■여민의 엄마

-여민이 다섯 살 무렵 잉크 공장에서 일하다 약품이 얼굴에 쏟아지면서 한쪽 눈을 잃게 됨



■신기종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 온 뒤 가장 먼저 친구가 된 아이

-별명: 시궁창

-공상하기를 좋아하며 어딘가 엉뚱함

-누나와 단둘이 살고 있음



■검은 제비

-산꼭대기 아이들 사이에서 대빵으로 통하는 아이

-오학년(열두 살)

-검은제비네 아버지는 유명한 술주정뱅이

-검은 제비는 주정뱅이의 장남임



■오금복

-옆집에 사는 싸움쟁이 부부의 첫째 딸

-둘째 동생은 은복, 그다음 동생은 돈복

-하는 짓마다 밉살맞고 정이 가지 않는 아이



■장우림

-새로 전학 간 교실에서 처음으로 짝꿍이 된 아이

-깔끔한 얼굴에 말쑥한 옷차림의 아이

-건방진 태도로 아이들의 신임을 잃어 친구가 없음

-허영심이 많음



■골방철학자

-부잣집 아가씨이면서 피아노 선생님인 윤희를 짝사랑 중

-기종이네 뒷집에 살고 있음

-온종일 골방에 처박혀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음

-현재 고시공부 중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음



■풍뎅이 영감

-속물로 불리는 사람

-몸집이 땅딸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함

-정식 호칭은 '최 영감님' 혹은 '최 씨 할아버지'

-산동네 주민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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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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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떠돌다 부모님이 어렵게 장만한 집은 산꼭대기 판자촌으로, 가장 위쪽에 자리해 있다. 처음으로 갖는 우리집이라는 소리에 여민은 한창 기대감을 갖지만, 이내 동네 분위기를 보고는 실망하게 된다.


하지만 점차 동네에 적응해 가기 시작하면서 여민은 어느새 친구들도 사귀고 숲에서 다양한 놀잇감들도 발견하게 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된다.


한시도 조용할 날 없는 산꼭대기 마을에서 여민은 매일 새로운 인간 군상과 세상을 마주하게 되면서 아홉 살 인생에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나름대로 뚝심과 정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여민이기에 집단적 행동에 가담하거나 싸움과 같은 물리적 행동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부분은 어른인 우리들도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각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순수한 모습에 웃음이 나다가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순간 씁쓸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를 통해 인생은 지속되고, 삶은 이어져 있구나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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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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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도 진짜 불쌍하지는 않아. 단지 불쌍하게 보일 뿐이지."

(...)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자 한다면 정말 누구나 불쌍해진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대로 어떤 사람도 정말로 불쌍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태여 불쌍함을 구걸 받으려 할 필요는 없다.

5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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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아이가 깨닫기에는 꽤 하이레벨의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문장 자체만 봤을 때는 명언처럼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없다. 그저 불쌍하게 보일 뿐!"


이 문장을 기반으로 현시대에 불쌍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는 색안경을 끼고 누군가를 불쌍하게 보기 때문에 불쌍하게 보이는 사람, 두 번째는 불쌍해 보이려는 의도로 불쌍한 척을 해서 불쌍해 보이는 사람!


타인의 관점까지 내가 컨트롤할 수는 없기에 첫 번째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두 번째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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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 없기 때문이야. 잘해 주든 못해 주든, 한번 떠나 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1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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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보면 몇 번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에피소드를 만나게 되는데, 특히 갑작스러운 이별은 늘 후회와 깊은 슬픔을 남긴다.


곁에 없기에 더 이상 무엇을 해줄 수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후회와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다면 지금 곁에 있을 때 잘하자. 영원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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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검은 제비는 잘 있습니까?


슬픔과 외로움과 가난과 불행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자신을 향해 애꿎은 저주를 퍼붓고 뾰족한 송곳을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해선 안 될 적들은 쉽사리 용서하면서, 제 피붙이와 자신의 가슴엔 쉽사리 칼질을 해 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검은 제비는 잘 있습니까? 혹시, 당신이 검은 제비 아닙니까?

18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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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제비에 비유해 우리들 모두에게 포효하듯 내지르고 있는 말처럼 느껴져 읽는 내내 깊은 슬픔이 느껴졌던 문장이다.


읽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내용들이 많은데 살펴보면 이렇다. 현재의 불행한 환경이나 상황을 앞뒤 따지지 않고 그저 자신 탓이라며 저주를 퍼붓고 있는 사람들, 권력이나 쉽사리 넘어설 수 없는 힘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쉽게 져 주면서 되려 약하고 힘없는 가족들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내리꽂는 사람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모습들이라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검은 제비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며 언젠가 그런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일 거라 다짐하지만, 아버지는 제풀에 지쳐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후로 이를 갈며 버티던 검은 제비는 이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문장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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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맹장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한 거야?"

"물론 맹장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걸 내가 못 가졌다는 사실이야. 난 그걸 참을 수 없는 거야. 이해할 수 있겠니?"

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아홉 살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허영심까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므로. 그러나 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맹장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조차 기필코 차지하려 드는 멍텅구리들이 세상에 뜻밖에도 많다는 사실을.

20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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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에 뭐 이런 속 깊은 내용까지 포함될 일인가 싶지만, 아이들 세상이나 어른들 세상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니 이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하지 않음에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필코 차지하려 드는 인간 군상. 허영심에 찌들어 남에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이런 유형들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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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느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과장해, 그것이 인생의 전부이리라 착각할 필요는 없다. 기쁨 때문에, 슬픔 때문에, 낭만 때문에, 고통 때문에, 욕망 때문에, 좌절 때문에, 사랑 때문에, 증오 때문에.... 또는 과거 때문에, 현재 때문에, 미래 때문에... 혼자만의 울타리를 쌓으려 드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못된 거인이 정원에 울타리를 치자 봄이 오지 않았다 하지 않던가!

263~26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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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떤 부분이 고장 나면 보호본능이 발동되어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 문장처럼 서서히 그 높다란 울타리를 낮출 필요는 있어 보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세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되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 자신이기에, 조금은 적립된 기쁨, 슬픔, 분노, 고통, 욕망, 좌절, 과거, 현재 등등을 낮춰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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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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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다소 성숙한 면모가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함과 인생의 쓴맛을 동시에 맛볼 수 있어 꽤 알찬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아홉 살 인생이라고 해서 항상 단맛만 경험하라는 법은 없으니, 어쩌면 이 책에 실린 아홉 살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참맛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인생의 맛을 여민이처럼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학창 시절을 거치며 배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 서른아홉 살 등등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오늘의 인생을 <아홉 살 인생>에서 배워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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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소나타 - 정신분석학이 결혼의 여러 가지 고민을 언어의 의미로 연주하다
강인경 지음 / 북보자기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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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여러 가지 고민을 연주하듯 다양한 언어의 의미로 담아냈다는 소개 글에 혹해서 읽게 되었는데, 읽다 보니 살짝 아쉽다.


정신분석학의 측면에서 쉽게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나, 읽고 나서 뭔가 크게 남는 것은 없는 느낌이다.


쉽게 읽히기는 한다. 그런데 명확한 핵심이 딱 짚어지지는 않는다. 결혼에 대한 다양한 고민, 이를테면 연애, 임신, 출산, 스트레스, 중독 등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쓱 읽고 쓱 넘어간다.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옆 테이블에서 유난스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때가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다.


정신 분석학적으로 접근했다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쓰이는 용어는 거의 배제한 듯 보이고, 이보다 오히려 문학적 독백이나 소설, 시적인 언어들이 더 자주 엿보인다.


그래서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는 하나 조금 더 명확한 해결책이나 주제가 돋보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4악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주제에 따라 더 세세하게 구분하여 '들려오다-보여지다-바라보다-살아가다-살아지다-느낌하나'로 분류해서 해당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어떤 주제는 조금 따로 노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것들을 다 따지다 보면 머리 아파지니, 그냥 술술 읽히는 데로 읽는 방식을 취했고, 그중에서 머릿속에 남는 문장만 기억에 남겼다.


그래도 혹시나 저자가 설정한 전개 방식에 따라 읽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가 소개하는 각 세부 분류에 대해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들려오다'는 오늘날 주변에 들려오는 구체적인 현실을 담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보여지다'는 말하는 사람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회상해 본다.

▶'바라보다'는 정신분석적인 삶의 의미에서 새롭게 삶을 선택하려는 의지의 성찰을 담고 있다.

▶'살아가다'는 스스로 살아가는 실천의 삶을 문학적 은유로 다가서고자 노력했다.

▶'살아지다'는 철학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새로운 존재의 가치를 연주하고자 했다.

▶'느낌하나'는 가슴에 각인된 명료한 자신의 고백을 담고 있다.


고 전하고 있는데, 읽는 방식은 독자의 선택이니 각자의 방식에 따라 독서하고 뇌리에 남는 문장들은 가슴에 새기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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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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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트의 후설의 '에포케'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 '판단중지'라고 하는데 텅 빈 괄호 같은 것인데 다른 말로 이성의 판단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인데' 이 말처럼 어려운 말은 없다.


순수한 마음은 의미로 해석하기 힘들다. 정신분석 치료에 '에포케'는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마음 그대로 듣고 고민하고 그 사람이 되어주는 마음이다. 힘들면 같이 힘들어하고 좋으면 같이 좋아하는 감정을 나누는 것이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한다.

(...)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런 마음만 있으면 그런 삶을 가르치고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저절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172~17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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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는 '에포케'의 마음이 많이 부족한듯하다. 꼬아서 보고 듣고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안된다.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 그대로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에포케'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주면 참 좋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 단어가 유독 더 마음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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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한 불만과 욕심에서 온다. 불만과 욕심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삶을 만든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삶이 가장 불행한 삶이다. 그 불행은 이별의 아픔을 낳고 아픔으로 남겨진 생명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184~18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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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는데 불현듯 반항심이 불쑥 솟아오른다. 고통이 내 안에서 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런 마음 좀 가지면 안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모든 것에 초연하거나 괜찮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끔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불만과 욕심을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그게 항상 고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기에, 때론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기에 가끔은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모든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삶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가끔, 때때로 그런 마음과 생각을 품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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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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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여러 고민을 음악에 비유해 '소나타'라는 이름을 짓고, 각 악장으로 표현한 것 그리고 구성상 다양한 시도를 한 점은 높게 평가할만하다.


하지만, 역시 앙꼬 없는 빵은 뭔가 심심하다. 가독성이 떨어지고 지루한 내용도 독자에게 버림받지만, 너무 쉽거나 텅 빈 내용도 외면받기 쉽다.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조금만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안은 채, 이 책의 마지막 악장을 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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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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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두터운 페이지를 자랑하는 이 책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로, 실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배한 이탈리아는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40년이 지난 후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게 되는데, 소설은 당시의 긴박했던 에티오피아의 상황과 정세를 세밀하게 다루며 긴 대장정을 이어간다.


특히 이 소설은 남성들에 비해 낮게 평가받던 여성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성별과 계급에 얽매인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의 2차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로, 계급과 젠더 문제,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폭넓게 다루며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통 전쟁 이야기는 남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만큼은 여성들의 활약과 주도적인 면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읽다 보면 중간중간 불필요한 요소가 지나치게 자세히 언급되거나 이야기가 다소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부분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되거나 승자의 관점에서만 기록된 역사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제대로 만날 수 있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를테면, 전쟁 속 여성들의 잊힌 역할, 기억과 정체성, 권력과 상징, 식민주의의 잔혹성 등을 주인공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어 현장감과 생생한 몰입감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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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및 배경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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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패망하면서 이탈리아는 굴욕을 맞보게 된다. 40년이 지난 이후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통해 과거의 굴욕을 청산하고, 동시에 이탈리아 내부 산업의 발전을 위해 결국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죽다

무리레='죽다'라는 이탈리아어

메모트='죽다'라는 에티오피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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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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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트

-수확의 날 태어난 게테이와 파실의 딸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오래된 소총(우지그라 혹은 퓌지그라)을 키다네에게 강제로 뺏김

-한때 그녀는 그림자 왕의 자랑스러운 호위병이었음

-현재 그녀는 사랑받는 아내이자 사랑하는 어머니이자 병사

-편지를 받고 난 뒤 과거로 돌아가는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1974년 다시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옴



■아스테르

-에디오피아 귀족의 딸로, 에디오피아 총사령관 키다네의 부인

-어릴 적 집안 문제로 강제로 키다네와 결혼하게 됨



■데자즈마치 키다네

-히루트 부모님이 죽고 히루트 엄마와의 인연으로 혼자 남은 그녀를 거두어줌

-히루트의 어머니는 키다네를 '형제'이자 '친구'라고 불렀고 때론 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음

-히루트의 엄마는 그를 '키두'라고 부름



■하일레 셀라시

-에디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미님

-그림자 왕

-농장에서 살고 있으며 어떤 적도 만들지 않음

-언젠가 강철 같은 야수에 대항해 한 나라를 이끈 적이 있음



■에토레 나바라

-이탈리아 군 소속 사진사로 기록하는 임무를 맡고 있음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고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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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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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30년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내용으로, 주인공 히루트는 부모를 잃고 엄마와 친분이 있었던 키다네의 하녀로 들어오게 된다.


이곳에 머물레 된 그녀는, 주인인 키다네와 그의 아내 아스테르 밑에서 지내다 전쟁이 터지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이탈리아가 침공하자 키다네는 저항군 지도자로 나서게 되고, 히루트와 아스테르도 여성 전사로 싸움에 뛰어들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전쟁이 한창일 때 황제가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되고, 이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꾀를 낸 이들이 왕과 똑같은 사람을 가짜 왕(그림자 왕)으로 내세우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되찾게 된다.


이때 아스테르와 히루트는 스스로 상징적 인물(=그림자 왕)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황제의 여성 친위대인 것처럼 변장하여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덕분에 사람들의 사기도 금방 회복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히루트는 단순한 하녀에서 저항군 전사로 거듭나게 되고, 전쟁 속 여성의 고통, 용기, 연대, 자아 찾기를 겪어나가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 군 사진병 에토레의 시선을 통해 침략자들의 시각도 교차되며, 전쟁과 기억, 기록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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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으로 다가온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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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트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피부밑으로 뼈가 문드러져 이리저리 밀리고 있다고 느낀다.

4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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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에게 받은 유일한 유품인 총을 강제적으로 빼앗긴 히루트는 잠시 정체성을 잃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처참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한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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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을 입고 고함을 지르며 우리의 밤을 어지럽히는 이가 바로 그 여자다. 아스테르가 우리를 부르며 싸울 준비를 하라 명하고 있다.

(...)

주인집 여자들을 강둑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요리사네 집 아스테르인지 알고 싶어 한다.

10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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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넨 황후가 나와 이 나라 모든 여성에게 요구한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이 나라가 오로지 당신들만의 나라인가요?

1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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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스테르는 말을 타고 집을 뛰쳐나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히스테릭하고 어딘가 모르게 질투에 사로잡힌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보였는데, 전쟁을 계기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스테르는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튜닉과 승마바지를 자신의 몸에 맞게 재단한 후 얼룩이 묻은 케이프를 어깨에 두른 뒤 새 소총을 등에 멘다. 그렇게 어느 남자 못지않게 맹렬해 보이는 전사 복장의 모습으로 전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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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여자에게 화약 만드는 법을 가르칠 거야. 너희 모두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칠 거라고. 두려움 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갈 줄 알아야 해.

17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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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의 변화는 의상뿐만 아니라, 그녀의 언행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여성들 또한 남성들과 동일하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화약을 만들고, 총을 쏘는 법을 가르칠 거라고 강력히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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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들은 1935년 10월 3일이른 새벽의 어둠 속에서 십만 명의 페렌지가 마레브강을 건녔다고 주장한다.

(...)

신문들은 이탈리아가 사십 년의 모욕 끝에 1935년 10월 5일에 마침내 아드와를 자랑스럽게 장악했다고, 그리고 그 평범하고 작은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울룰루 함성을 내지르며 침략자들을 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 일은 이런 방식으로 쓰였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히루트가 아는 사실은 그 육식성 침략자들이 악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삼 열대형이 분리되면서 대열이 무너졌고, 그 사이 공간으로 에티오피아인들이 끼어들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십만 명의 군인이 우아한 발걸음으로 한 나라에 진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신문과 기억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십만 명의 군인이 이 아름다운 나라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탐하든, 온 마음을 다해 조국의 자유를 지키려 하는 에티오피아인의 숫자를 넘어설 수는 없으며, 이는 산술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135~13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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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역사의 기록들이 모두 진실되지는 않다. 실제로 승자에 의해 쓰이는 경우가 많기에 더 그렇다. 아마 이탈리아-에티오피아 2차 전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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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지위와 격차를 알 수 있는 아스테르와 키다네의 대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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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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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 난 이 케이프를 입을 권리를 갖췄고, 돌려주지 않을 거야. 날 때려. 어서 때리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봐.


키다네: 당신은 내 부하들의 시중을 들 거야. 당신은 다른 여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거야. 당신은 내 명령을 따르게 될 거야. 다친 내 부하들을 옮기고 죽은 내 부하들을 묻을 거야. 나를 믿고 내 지휘를 따르는 부하들, 나를 위해 죽을 그 부하들을 돌보게 될 거야. 당신은 저 밖으로 나가 내가 그만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그런 일을 하고 또 해야 할 거야. 내가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다면 그것은, 그 모든 것은 내 부하들의 몫이야. 내가 죽는 날까지...

1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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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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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 우리가 도울 수 있어요. 아스테르가 말한다. (...) 제가 이미 우리 여자들을, 싸우고 싶은 이들과 뒤를 따르고 싶은 이들로 분류해뒀어요. 양쪽 다 숫자가 넉넉해요. 낡은 총들이 작동하는지 우리가 시험해 줄게요. 그녀가 나직하게 덧붙인다.


키다네: 당신들은 우리를 뒤따르며 부상자를 보살필 거야. 붕대와 약품을 챙겨. 그가 말한다. 그게 당신들이 싸우는 방식이라고 여자들에게 전해. 해가 지면 여기를 떠날 거야.

2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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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바로 아스테르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히루트는 아버지가 남긴 소총을 뺏겼다는 자괴감에 한동안 그것을 되찾을 생각에 빠져 살지만, 아스테르는 빠른 대세 전환을 보이며, 사람들을 모으고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능동적으로 찾아 처리한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키다네는 아스테르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이 내리는 명령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아스테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솔선수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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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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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순히 과거 역사를 재조명한 작품이 아니다. 그 속에서 잊힌 사람과 기억들을 다시 꺼내어 우리들에게 제대로 된 진실을 이야기해 주는 책이다.


침묵 속에 묻힌 목소리, 전쟁 속에서 잊힌 여성들의 역할,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한 정체성, 권력과 상징이 의미하는 것들, 식민주의의 잔혹성 등.


어떻게 보면 빛을 든든히 받쳐주는 이면에 자리한 그림자의 모습을 더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전쟁 속에 숨겨진 진짜 위대한 영웅은 누구이며, 또 스스로 찾아가는 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한 질문, 여기에 더해 여성들이 보여주는 연대와 용기, 기록하는 자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 왜곡, 마지막으로 전쟁에서 보이는 비인간성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듯하다.


이를 통해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누군가에 의해 변형되거나 지워진 기록을 진짜라며 알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앞으로는 남성, 권력, 승리자와 같이 나라를 주무르던 사람들에 의해 쓰인 기록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폭넓게 역사와 과거를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계기로 역사의 그늘 속에서 사그라져 간 또 다른 영웅들을 기억하며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나를 빛나게 해주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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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공화국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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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다음 편이 바로 <반짝반짝 공화국>인데, 어쩌다 보니 3편인 <츠바키 연애편지>편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으니 순서 상관없이 <반짝반짝 공화국>을 세 번째로 읽어본다.


2편 <반짝반짝 공화국>에는 포포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는데, 이를 통해 포포의 성장담은 물론 새로 일군 가족을 지키겠다는 포포의 다짐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 '선대'의 죽음 이후 줄곧 혼자 지냈던 포포는 새로운 가족을 두고 '반짝반짝 공화국'이라 부르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때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만나게 된다.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포포와 츠바키 문구점의 성장과정을 이 책을 통해 만나보면 어떨까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결혼을 통해 달라진 포포의 여러 변화와 성장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자신만의 취향이 묻어나기 시작한 츠바키 문구점의 풍경, 새로 생긴 딸과 남편, 생활의 변화, 달라진 마음가짐 등등 포포의 사적인 부분들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며 포포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도 하나 있다. 바로 몇 대째 계속되고 있는 '대필'이 바로 그것이다. 특별한 사연을 품고 있거나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이들이 포포를 찾아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우리는 다채로운 사연들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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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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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하토코)

대필을 가업으로 이어온 츠바키 문구점의 십일 대 대필가. 미츠로와 결혼하면서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미츠로

아내와 사별하고 딸 큐피와 함께 고향인 가마쿠라에 내려와 식당을 차렸다. 포포와 결혼하게 되면서 새로운 행복을 만끽 중이다.


■큐피

미츠로와 미유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미츠로와 포포 결혼의 1등 공신으로, 포포를 잘 따른다.


■빵티

초등학교 교사인 포포의 친구. 남작과 부부 인연을 맺은 후 현재 임신 중이다.


■남작

선대의 친구이자 빵티의 남편.


■선대

츠바키 문구점의 십 대 대필가이자 포포의 할머니.


■미유키

미츠로의 전 부인이자 큐피의 엄마. 살인사건에 휘말려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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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간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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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피의 활약으로 포포는 미츠로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렇게 '아메미야 하토코'에서 '모리카케 하토고'가 된다. 하지만 한동안은 따로 살며 서로의 집을 오가는 형태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이내 집을 합치게 되면서 서로의 삶에 좀 더 깊숙이 스며들게 된다. 혼자였던 포포는 그렇게 남편, 딸, 그리고 시댁 식구까지 새로 얻게 되면서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 가기 시작한다.


미츠로와 포포의 혼인신고, 큐피의 초등학교 입학을 기점으로 그렇게 새 출발을 하게 된 포포지만 여전히 츠바키 문구점을 운영하며 대필 의뢰는 성실히 이어나가게 된다.



●스즈키 다카히코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

-어머니날 카네이션과 함께 엄마한테 편지를 쓰고 싶어서 대필 의뢰


●요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편지로 사과를 받고 싶어 대필 의뢰

-사십구제가 되기전에 남편으로부터 제대로 사과받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편지를 받아야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의뢰를 하게 되었다고 함


●가마쿠라 마담

-남편하고 이혼하고 싶어 이혼장을 대신 써달라는 대필 의뢰

-남편의 주사로 인해 신변의 위험을 느낄 정도라고 함


●리처드 (반)기어

-가마쿠라 마담의 남편

-아내로부터 이혼장을 받은 후 아내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설득하는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대필 의뢰

-아내에게 상처 입힌 것은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이혼하지 않고 이대로 함께 살 수 있도록 힘을 빌려달라는 요청


●집게 씨

-은둔형 외톨이인 그녀

-호감 있는 상대에게 고백 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의뢰


●마담 칼피스

-친구인 미즈호가 병이 났는데, 과거 빌려준 돈을 갚아달라는 말을 야박하게 하기 어려워 대필 편지를 의뢰


●두 남녀

-생후 8일 된 아들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상중 엽서 대필 의뢰


●남작

-암이 발견되었다면서 추후 자신이 사망하게 되면 아내인 빵티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대필 의뢰


●후지산 이마씨

-과거 자살한 작가 야스나리가 자신의 애인이라 말하는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한 달에 한 통이라도 야스나리 씨의 러브레터를 받고 싶다며 대필 의뢰



이렇듯 항상 행복하고 기쁜 일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느 날 갑작스레 등장한 한 여성으로 인해 포포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레이디 '바바'라고 불리는 이가 포포를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며 으름장을 놓는데, 돈이 없다며 돌아가라 하니 자신이 포포의 생모라고 주장하며 위협을 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포포는 새로운 가족들에게 해가 갈까 봐 한동안 잠을 설치며 괴로워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던 포포는 이 일을 계기로, 돌아가신 할머니 '선대'가 이를 감추어 자신을 보호해 줬음을 깨닫게 된다.


한동안 할머니를 원망만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포포는 이렇듯 숨겨진 할머니의 진짜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던 포포와 미츠로, 큐피는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그럼에도 큐피의 엄마 '미유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미츠로가 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한동안 포포는 서운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부터 이들은 공개적으로 '미유키'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나누게 되고 그렇게 점차 진짜 가족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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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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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리카게 가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반짝반짝 공화국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반짝반짝 공화국을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28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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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가 미유키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로, 이를 통해 포포가 얼마나 새로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알 수 있다. 포포는 새로운 가족을 두고 '반짝반짝 공화국'이라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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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불행해진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지진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 편지를 쓰면서."

미츠로 씨 말은 내게 묵직한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살아가는 수밖에 없더라. 내가 행복해지는 게 복수라는 걸 깨달았어. 우리가 울고 있으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거야."

2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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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때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미츠로가 한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가 꺼내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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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애써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감사는 할 수 있네."

줄곧 가슴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29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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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며 포포는 할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괴로워한다. 자신을 키워준 고마운 존재인 동시에, 살아생전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기에 더 그랬다.


여기에 더해 뒤늦게 드러난 편지 내용과 생모의 존재로 인해 포포는 몰랐던 할머니의 깊은 애정과 보살핌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에 큰 돌덩이를 얹고 있는 것처럼 불편한 상태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애써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감사는 할 수 있다'는 말에 그동안의 체증이 내려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각기 다른 양가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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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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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일본에 존재하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덕분에, 이 마을이 큰 수혜를 입었다고 들었다.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방문해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으니 이만큼 좋은 오락거리가 또 있을까 싶다.


츠바키 문구점을 비롯해 그들이 산책하고 거닐었던 거리, 외식했던 식당, 들렸던 신사 등. 작가가 표현한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잠시 소설 속에 머무를 수 있으니 어쩌면 환상 속을 거니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싶다.


이것을 노린 것인지 책의 뒷면에는 마치 실사 이야기처럼, 소설 속에 등장하는 포포의 대필 편지와 가마쿠라의 지도가 함께 첨부되어 있다. 이 때문에 더 '한 번쯤' 가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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