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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꽤 두터운 페이지를 자랑하는 이 책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로, 실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배한 이탈리아는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40년이 지난 후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게 되는데, 소설은 당시의 긴박했던 에티오피아의 상황과 정세를 세밀하게 다루며 긴 대장정을 이어간다.
특히 이 소설은 남성들에 비해 낮게 평가받던 여성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성별과 계급에 얽매인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의 2차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로, 계급과 젠더 문제,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폭넓게 다루며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통 전쟁 이야기는 남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만큼은 여성들의 활약과 주도적인 면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읽다 보면 중간중간 불필요한 요소가 지나치게 자세히 언급되거나 이야기가 다소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부분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되거나 승자의 관점에서만 기록된 역사 뒤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제대로 만날 수 있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를테면, 전쟁 속 여성들의 잊힌 역할, 기억과 정체성, 권력과 상징, 식민주의의 잔혹성 등을 주인공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어 현장감과 생생한 몰입감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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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및 배경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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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패망하면서 이탈리아는 굴욕을 맞보게 된다. 40년이 지난 이후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통해 과거의 굴욕을 청산하고, 동시에 이탈리아 내부 산업의 발전을 위해 결국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죽다
무리레='죽다'라는 이탈리아어
메모트='죽다'라는 에티오피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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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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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트
-수확의 날 태어난 게테이와 파실의 딸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오래된 소총(우지그라 혹은 퓌지그라)을 키다네에게 강제로 뺏김
-한때 그녀는 그림자 왕의 자랑스러운 호위병이었음
-현재 그녀는 사랑받는 아내이자 사랑하는 어머니이자 병사
-편지를 받고 난 뒤 과거로 돌아가는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1974년 다시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로 돌아옴
■아스테르
-에디오피아 귀족의 딸로, 에디오피아 총사령관 키다네의 부인
-어릴 적 집안 문제로 강제로 키다네와 결혼하게 됨
■데자즈마치 키다네
-히루트 부모님이 죽고 히루트 엄마와의 인연으로 혼자 남은 그녀를 거두어줌
-히루트의 어머니는 키다네를 '형제'이자 '친구'라고 불렀고 때론 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음
-히루트의 엄마는 그를 '키두'라고 부름
■하일레 셀라시
-에디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미님
-그림자 왕
-농장에서 살고 있으며 어떤 적도 만들지 않음
-언젠가 강철 같은 야수에 대항해 한 나라를 이끈 적이 있음
■에토레 나바라
-이탈리아 군 소속 사진사로 기록하는 임무를 맡고 있음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고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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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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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30년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내용으로, 주인공 히루트는 부모를 잃고 엄마와 친분이 있었던 키다네의 하녀로 들어오게 된다.
이곳에 머물레 된 그녀는, 주인인 키다네와 그의 아내 아스테르 밑에서 지내다 전쟁이 터지면서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이탈리아가 침공하자 키다네는 저항군 지도자로 나서게 되고, 히루트와 아스테르도 여성 전사로 싸움에 뛰어들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전쟁이 한창일 때 황제가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되고, 이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꾀를 낸 이들이 왕과 똑같은 사람을 가짜 왕(그림자 왕)으로 내세우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되찾게 된다.
이때 아스테르와 히루트는 스스로 상징적 인물(=그림자 왕)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황제의 여성 친위대인 것처럼 변장하여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덕분에 사람들의 사기도 금방 회복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히루트는 단순한 하녀에서 저항군 전사로 거듭나게 되고, 전쟁 속 여성의 고통, 용기, 연대, 자아 찾기를 겪어나가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 군 사진병 에토레의 시선을 통해 침략자들의 시각도 교차되며, 전쟁과 기억, 기록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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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으로 다가온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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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트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피부밑으로 뼈가 문드러져 이리저리 밀리고 있다고 느낀다.
4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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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에게 받은 유일한 유품인 총을 강제적으로 빼앗긴 히루트는 잠시 정체성을 잃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처참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한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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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을 입고 고함을 지르며 우리의 밤을 어지럽히는 이가 바로 그 여자다. 아스테르가 우리를 부르며 싸울 준비를 하라 명하고 있다.
(...)
주인집 여자들을 강둑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요리사네 집 아스테르인지 알고 싶어 한다.
10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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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넨 황후가 나와 이 나라 모든 여성에게 요구한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이 나라가 오로지 당신들만의 나라인가요?
1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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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스테르는 말을 타고 집을 뛰쳐나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히스테릭하고 어딘가 모르게 질투에 사로잡힌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보였는데, 전쟁을 계기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스테르는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튜닉과 승마바지를 자신의 몸에 맞게 재단한 후 얼룩이 묻은 케이프를 어깨에 두른 뒤 새 소총을 등에 멘다. 그렇게 어느 남자 못지않게 맹렬해 보이는 전사 복장의 모습으로 전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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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여자에게 화약 만드는 법을 가르칠 거야. 너희 모두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칠 거라고. 두려움 없이 그들을 향해 달려갈 줄 알아야 해.
17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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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의 변화는 의상뿐만 아니라, 그녀의 언행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여성들 또한 남성들과 동일하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화약을 만들고, 총을 쏘는 법을 가르칠 거라고 강력히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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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들은 1935년 10월 3일이른 새벽의 어둠 속에서 십만 명의 페렌지가 마레브강을 건녔다고 주장한다.
(...)
신문들은 이탈리아가 사십 년의 모욕 끝에 1935년 10월 5일에 마침내 아드와를 자랑스럽게 장악했다고, 그리고 그 평범하고 작은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울룰루 함성을 내지르며 침략자들을 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 일은 이런 방식으로 쓰였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히루트가 아는 사실은 그 육식성 침략자들이 악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삼 열대형이 분리되면서 대열이 무너졌고, 그 사이 공간으로 에티오피아인들이 끼어들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십만 명의 군인이 우아한 발걸음으로 한 나라에 진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신문과 기억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십만 명의 군인이 이 아름다운 나라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탐하든, 온 마음을 다해 조국의 자유를 지키려 하는 에티오피아인의 숫자를 넘어설 수는 없으며, 이는 산술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135~13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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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역사의 기록들이 모두 진실되지는 않다. 실제로 승자에 의해 쓰이는 경우가 많기에 더 그렇다. 아마 이탈리아-에티오피아 2차 전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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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지위와 격차를 알 수 있는 아스테르와 키다네의 대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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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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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 난 이 케이프를 입을 권리를 갖췄고, 돌려주지 않을 거야. 날 때려. 어서 때리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봐.
키다네: 당신은 내 부하들의 시중을 들 거야. 당신은 다른 여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거야. 당신은 내 명령을 따르게 될 거야. 다친 내 부하들을 옮기고 죽은 내 부하들을 묻을 거야. 나를 믿고 내 지휘를 따르는 부하들, 나를 위해 죽을 그 부하들을 돌보게 될 거야. 당신은 저 밖으로 나가 내가 그만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그런 일을 하고 또 해야 할 거야. 내가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다면 그것은, 그 모든 것은 내 부하들의 몫이야. 내가 죽는 날까지...
1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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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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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르: 우리가 도울 수 있어요. 아스테르가 말한다. (...) 제가 이미 우리 여자들을, 싸우고 싶은 이들과 뒤를 따르고 싶은 이들로 분류해뒀어요. 양쪽 다 숫자가 넉넉해요. 낡은 총들이 작동하는지 우리가 시험해 줄게요. 그녀가 나직하게 덧붙인다.
키다네: 당신들은 우리를 뒤따르며 부상자를 보살필 거야. 붕대와 약품을 챙겨. 그가 말한다. 그게 당신들이 싸우는 방식이라고 여자들에게 전해. 해가 지면 여기를 떠날 거야.
2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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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바로 아스테르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히루트는 아버지가 남긴 소총을 뺏겼다는 자괴감에 한동안 그것을 되찾을 생각에 빠져 살지만, 아스테르는 빠른 대세 전환을 보이며, 사람들을 모으고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능동적으로 찾아 처리한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키다네는 아스테르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이 내리는 명령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아스테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솔선수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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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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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순히 과거 역사를 재조명한 작품이 아니다. 그 속에서 잊힌 사람과 기억들을 다시 꺼내어 우리들에게 제대로 된 진실을 이야기해 주는 책이다.
침묵 속에 묻힌 목소리, 전쟁 속에서 잊힌 여성들의 역할,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한 정체성, 권력과 상징이 의미하는 것들, 식민주의의 잔혹성 등.
어떻게 보면 빛을 든든히 받쳐주는 이면에 자리한 그림자의 모습을 더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전쟁 속에 숨겨진 진짜 위대한 영웅은 누구이며, 또 스스로 찾아가는 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한 질문, 여기에 더해 여성들이 보여주는 연대와 용기, 기록하는 자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 왜곡, 마지막으로 전쟁에서 보이는 비인간성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듯하다.
이를 통해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누군가에 의해 변형되거나 지워진 기록을 진짜라며 알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앞으로는 남성, 권력, 승리자와 같이 나라를 주무르던 사람들에 의해 쓰인 기록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폭넓게 역사와 과거를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계기로 역사의 그늘 속에서 사그라져 간 또 다른 영웅들을 기억하며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나를 빛나게 해주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