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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도둑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19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성스러움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도둑질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제대로 읽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앞서 프리퀄로 살짝 맛만 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약 400페이지의 분량을 한 번에 읽는다는 게 실상 쉬운 일은 아닌데,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읽어 내렸을 만큼 매우 흥미롭고 몰입도 높은 이야기였다.
더불어, 중후반부터 급격히 진행되는 속도감에 더해, 앞서 드러난 증거들이 줄줄이 연결되는 것을 보며, 더없는 짜릿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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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및 배경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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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웨일스&슈롭셔와 웨일스 국경지대)
□베네딕토회
베네딕토 규칙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가톨릭 공동체. 청빈, 순결, 복종을 맹세하고 규율이 매우 엄격한 삶을 강조했다. 집단적인 예배도 중요시하여, 수사들은 하루에 일곱 번씩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성무일도를 수행했다.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
잉글랜드 슈롭셔주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원래 성 베드로에게 헌정된 작은 목조 교회였으나 11세기 후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두 사도에게 헌정된 석조 건물로 개축되었다.
■성 위니프리드
홀리웰에 살았던 위니프리드에 관한 이야기는 중세 전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녀는 성 베이노의 조카이자 테비트라고 불리는 기사의 외동딸이었다. 크래독 왕자가 그녀를 겁탈하려 하자 달아났고, 분노한 왕자는 그녀의 목을 잘랐다. 하지만 성 베이노가 그녀를 되살렸고 새 생명을 얻은 위니프리드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가 웨일스로 돌아와 귀더린 수녀회의 수도원장이 되었다고 전한다.
■캐드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자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약재를 담당하고 있는 수사
■휴 베링어
캐드펠의 친구이자, 슈롭셔주의 행정 장관
■라둘푸스 수도원장
헤리버트 수도원장의 뒤를 이어 1138년부터 1148까지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냈다.
■로버트 페넌트 부수도원장
12세기 전반에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부수도원장을 지냈고, 1148년부터 1168년까지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수도원장을 지냈다. 성 위니프리드의 귀더린 순례를 담은 <성 위니프리드의 생애>를 남겼다.
■헤를루인 부원장
램지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수도원 재건을 위해 슈루즈베리 수도원에 방문하게 되었다. 풍부한 경험과 권위를 갖추 인상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다
■투틸로
램지 수도원에서부터 내내 그를 따라온 젊은 견습 수사로 악기 연주와 노래에 능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니콜
헤를루인 부원장의 신임 받는 하인
■설리엔 블런트
램지 수도원에서 수련하던 중 모든 걸 그만두고 가족에게 돌아가 일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청년으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유도 블런트
설리엔의 형으로, 무기를 다루는 훈련에 푹 빠져있다. 추후 수비대의 일원이 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도나타 블런트
설리엔과 유도의 어머니로, 슈루즈베리 수도원 근처 롱너 영지에 살고 있으며, 살날이 얼만 남지 않았다.
■제롬 수사
헤를루인 부원장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
■페르튀 레미
남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온 손님 중 하나로, 50대의 신사
■달니
레미가 사들인 노예로,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베네제
레미의 시중을 드는 하인
■앨드헬름
홍수가 났을 때 수도원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온 양치기로, 누군가에게 살인을 당함
■레스터셔 백작
로베르 보스라고도 불린다. 강탈당한 성녀의 관을 우연히 보관하게 되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끼어들게 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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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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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년 한여름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8월 말, 에식스 백작인 제프리 드 맨더빌은 태양의 열기에 굴복하여 그 기회주의적인 긴 이력의 마지막 실수이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는 스티븐 왕에게 자신의 성과 영지와 직위를 모조리 박탈당한 후 1년 남짓 이곳저곳에 흩어진 비밀 근거지들을 수시로 출몰하면서 펜 지방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자신들의 약탈 행위를 막고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급히 쌓아 올린 성들 중 하나를 포위하여 제대로 함락시키려는 계획도 품고 있었다.
그러던 8월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말을 타고 나가 성 주위를 돌며 자신의 군대 보급선을 차단한 요새를 함락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중 찌는 듯한 무더위를 참을 수 없어 투구와 쇠사슬 갑옷을 벗어던졌고, 마침 성을 수비하던 평범한 궁수 하나가 쏜 화살에 머리를 맞게 된다.
제프리는 상처를 대단치 않게 여겨, 며칠 쉬면 나으리라 생각했지만 곧바로 열병이 그를 덮치게 되면서, 그대로 침대에 눕게 된 것이다. 스티븐 왕의 어떤 군대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8월의 태양이 해낸 것이다.
한편, 폭력적인 방법으로 램지 수도원을 탈취하고 수도원장과 수사들을 강제로 몰아낸 뒤 그 수도원을 강도와 고문자와 살인자들로 이루어진 제 왕국의 수도로 삼았던 제프리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후 사면을 받지 못한 터라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로써 땅에 제대로 묻힐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다 9월 16일, 제프리 드 맨더빌은 사면 받지 못한 상태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잡탕 부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한편 제프리가 죽기 직전 그의 부하들 중 몇몇은 최소한 영혼만이라도 지켜주고자 애를 썼는데, 그가 혼수상태에 빠져버리자 램지 수도원을 포함하여 제프리가 앗아간 수많은 교회의 재산들을 되돌려 주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게 된다.
제프리가 죽고 이 소식이 퍼져 램지 수도원 원장인 월터 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서, 그는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뒤 부원장을 비롯해 무일푼으로 쫓겨나 친척집으로, 혹은 다른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떠나간 수사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일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램지 수도원의 두 사자는 램지 수도원의 재건을 위해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오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램지 수도원의 재건을 위해 헤를루인 부원장과 견습 수사 투틸로는 슈루즈베리 수도원에 당도하게 되고, 이곳을 기점으로 이곳저곳 마을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통해 노동력과 기부금을 거둬들일 계획을 짠다.
그 와중에 투틸로는 슈루즈베리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는 성 위니프리드의 유골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게 되는데, 캐드펠은 이를 눈여겨본다.
더불어 헤를루인 부원장은 앞서 램지 수도원에서 수련하다 중도에 하차한 설리엔 블런트를 다시 불러들여 수사로 만들 꿈을 꾸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어머니 도나타 블런트가 가지고 있는 보석과 형이 벌목하여 말려둔 목재를 기부하기로 하면서 이 일 또한 일단락된다.
이때의 방문으로 인해 도나타 부인은 투틸로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의 음악적 감성과 능력을 꿰뚫어 보게 된다.
그때쯤 프로방스에서 온 페르튀 레미 일행이 지나가다 수도원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그들은 음악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중 홍수가 나게 되면서 수도원은 난리가 나고, 재건을 위해 떠나려던 헤를루인의 일정도 앞당겨지게 된다.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수사들은 귀중한 물건들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높은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성녀의 유골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재건을 위해 모아둔 기부금과 물품들을 램지 수도원으로 보내야 했기에 그야말로 수도원은 북새통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도원의 수사들뿐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빌려주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양치기 앨드헬름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후 한시름 놓는 사이, 램지 수도원으로 떠난 일행 중 일부가 처참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위기는 시작된다.
그들은 램지 수도원으로 이동하던 중 중간에 도둑을 만나 모든 물건을 강탈당했다고 말하며, 이를 알리기 위해 자신들은 이곳으로 되돌아왔다고 전한다.
여기에 더해 홍수가 지나간 뒤 다시 물건들을 되돌려놓는 과정에서 성 위니프리드의 유골이 도난당한 것을 알게 되면서 또 한 번 슈루즈베리 수도원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캐드펠은 고의적으로 자행된 일임을 깨닫고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때 살인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상황은 더 복잡하게 흘러가게 된다.
살해당한 사람을 목격한 사람은 투틸로로, 그는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여러 정황상 그가 도난과 살인까지 저지른 것처럼 흘러가게 되자 곧 징벌방에 갇히게 되고 휴와 캐드펠은 증거를 바탕으로 더 면밀히 조사를 이어가게 된다.
한편, 도난당한 위니프리드의 유골이 레스터셔 백작성에서 발견되면서, 그 또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슈루즈베리 수도원, 램지 수도원까지 더해 성 위니프리드 유골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곳이 세 곳으로 나뉘면서 이들은 마침내 소르테스 비블리카라는 성스러운 의식을 치러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다.
그리고 이 의식을 통해 확실한 결론을 얻는 것은 물론, 믿지 못할 기적도 경험하게 된다.
그 기적 속에는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라는 글귀가 남았는데, 이를 통해 풀리지 않던 마지막 조각까지 찾게 된다.
성스러움이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도난 사건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며 인간의 욕망과 신념이 무섭게 부딪히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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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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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로 미루어, 문지기 자신은 이 일에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헤를루인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꽤나 부담스러운 듯했다.
(...)
"내가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할 테니, 형제는 쟁반을 갖다 두고 뒤따라오시오."
"수사님께서 순교자의 기질을 지니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예, 먼저 가 계시면 곧 따라가겠습니다."
35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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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를루인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문지기를 위해 자신이 먼저 가서 이야기하겠다는 캐드펠에게 '순교자의 기질이 있다'고 하는 문지기의 말에서 위트가 느껴졌다.
아마도 문지기는 자신을 위해 애써준 캐드펠에게 우회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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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했지만, 그는 도둑이었네. 게다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서슴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았지. 그래도 도니타 부인한테는 참으로 따뜻한 태도를 보였는데...
3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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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틸로는 종교적 신념과 '성스러운 게시'라는 이름으로 성녀의 관을 훔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둑질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욕망을 신성함으로 포장한 왜곡된 믿음이며, 신의 뜻을 앞세워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 무모한 윤리일지도 모른다.
캐드펠은 그런 투틸로가 도니타 부인에게 보여주었던 따뜻한 태도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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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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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책이라 중간부터 읽어도 괜찮을까 나름 고민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인물의 특성이나 관계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읽는 쪽이 더 좋을 것 같다.
스토리는 생각보다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특히 중후반에 들어서서 사건을 풀어 헤쳐나가는 방식은 거의 코난급이다.
여러 번의 반전과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해서 용의자로 떠오르는데, 범인을 추리해 보고 색출하는 재미를 느껴보면 어떨까 한다.
막판에 마구간 신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해당 용의자를 전혀 용의선상에 올려놓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유일한 여성이자 여러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달니'를 지목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굳게 믿는 신념과 윤리의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이색적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