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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계획
김시은 지음 / 생각나눔(기획실크) / 2023년 9월
평점 :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인류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자비와 배려도 만나볼 수 없다. 그저 이용 가치가 있을 때는 이용하고, 철저히 버리는 잔혹성만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한 거창하고 완벽한 계획에 속절없이 끌려다니다가 어느새 '밀려난' 도재이. 그가 내딛는 한 걸음이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을 위한 첫 시발점이 된 것처럼 예쁘게 포장되어 있으나 과연 이것이 맞는 선택인가를 따져보면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더불어 이 종말의 원인이 이것을 철저히 계획한 이들의 묵인과 특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엄연히 이것은 인재이며 무자비한 학살일 뿐이다.
특히 이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종교적 이상론 혹은 사이비 종교라는 의견이 팽배하게 대립될 것으로 보이나,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것 또한 종교라는 이름 아래 실리를 위한 명목이 아니었나 싶다.
주인공처럼 보이는 끈 달린 인형인 도재이의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스토리는, 사실 그가 만나는 이들 중심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연결고리가 되고, 이를 통해 비로소 스토리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여기에 도재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한 조연일 뿐이며 그저 하나의 연극배우이자, 출연자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스토리 상에도 주변인들이 대단한 권력과 백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그는 평범 혹은 그 이하인 사람으로 표현되는데 뭔가 어설프면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들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어릴 때에는 가난과 불행으로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도망 나왔고, 직장에서는 특종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기자로 어쩐지 측은한 인상이 부각된다.
그럼에도 그는 선택당했고,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풍의 핵 속에 내던져진다. 무엇이 그를 이끄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우연을 가장한 치밀한 각본 속에서 완벽한 계획에 녹아들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에서 비롯된 몇몇 운 좋은 날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어리숙해 보이지만, 우리 삶에서 흔하게 보는(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나름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도재이가 낯선 이들에게 갖는 쉬운 믿음에서 미묘한 이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첫 믿음은 중학생 시절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다 배고픔에 우유와 빵을 훔치다 걸려 가게 주인에게 맞고 있던 자신을 구해준 파툼 수도사와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된다.
도재이는 자신을 도와준 파툼 수도사와 약 3년간 함께 살게 되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잘 공간과 먹을 것을 얻고, 그리고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게 된다. 이에 그는 신에 의탁하며 살게 되는데, 어쩌면 이것은 자신을 돌봐준 파툼 수도사가 말한 '이 모든 고난이 그를 만나게 하려는 신의 계획 중의 일부'라는 말이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길게 가지는 못하는데, 열아홉 살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게 되자 세상은 도재이의 순진함을 비웃듯이 도재이가 가지고 있던 믿음에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이에 도재이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신을 떠나기로 하고 적당한 타협, 아부, 노력, 현명함으로 포장된 비굴함 속에서 결국 소위 '일반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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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이 되고 나서야 '일반인'이 된다는 것이 지극히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재이는 '일반인'이 되고 싶어서 신을 찾았지만, 결국 '일반인'이 되기 위해서 신을 버려야만 했다. 도재이가 신을 버리겠다고 파툼 수도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도재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껴안아 주었다.
12~1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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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반인'이라는 의미가 중의적 표현으로 사용됨을 알 수 있는데, '종교인'과 '일반인'이라는 뜻과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도 풀이가 가능할 것 같다. 후반부에 가서 전개되는 스토리 문맥상으로 또 한 가지 뜻을 추가할 수 있는데, '권력자'와 '일반인' 혹은 '선택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일반인)' 로도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그렇게 일반인이 되고자 그는 일반인들 속에 섞여 들어가지만 어쩐지 가까이 속내를 터놓고 사는 사람은 없는듯하다. 그러다 취업전선에 뛰어들면서는 워싱턴 데일리 타임스에서 무려 140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된다. 천문학적인 경쟁률의 주인공이 되면서 비로소 기자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특종을 잡기는 어려웠고, 그저 그런 기자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승진은 하지 못한 채 자리만 지킬뿐이다. 그러던 중 미국 본사에서 노르웨이 오슬로 지사로 이달 내로 급히 파견하라는 전문이 오게 되면서 도재이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게 된다.
한국인이 유럽 지사로 파견을 가면서 승진까지 얻게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는 이것 또한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좋은 일 중 하나로만 여기며 얼떨떨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을 가장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을 의미했는데, 정작 이 여정에서 겪게 되는 무수한 일들이 미궁 속에 빠지면서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듯한 느낌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한국에서 런던을 경유해서 노르웨이로 가는 여정 속 갑작스럽게 받은 소포, 그리고 소포를 보낸 이의 의문스러운 죽음, 계속해서 맞닥뜨리는 새로운 인물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정체는 평범한 한 명의 기자가 감당하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면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한 이들과의 만남과 사건에 있어 정작 도재이는 전혀 의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서슴없이 다가오는 낯선 이들을 경계하지 않고, 의뭉스럽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그저 가볍게 넘겨버리며 치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 속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그는 스스로의 삶에서 '밀려난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것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삶 자체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결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불운했던 어린 시절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고, 은인처럼 생각했던 파툼 수도사와의 3년간의 생활 중 자신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당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어딘가 지질해 보이지만, 알 수 없는 운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 마음을 나눌 이는 전무하고 어쩐지 어리숙해서 이용하기 딱 좋아 보이는 모양새로 비친다.
그래서인지 권력이나 경제적 부유와는 상당히 먼 그와는 다르게 주변은 온통 화려한 이들만 가득한데, 그가 모르는 뒷공간에서조차 그를 도와주는 이 역시 막강한 힘을 가진 이들뿐이다.
이는 그를 주연으로 하는 시나리오 속에서도 그대로 투영되는데, 허울좋은 풍경 속에 내던져진 거짓 투성이의 그것처럼 보인다.
각종 백으로 입사한 워싱턴 데일리 타임스의 한국지사 직원들 속 모난 돌처럼 아무런 연고 없이 운 좋게 입사한 단 한 명,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지사의 요청으로 유럽 파견을 가는 기행, 수십억 자산가와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물론, 각종 거물급 인사와 국가 주요 담당자를 알현하는 일까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갇혀 휘청거리면서도 이것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그의 행동들은 어쩐지 영혼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종말을 야기하는 이 모든 치밀한 계획 속에서 단 한 번만 신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면, 어쩌면 핵무기로 잔치를 벌이는 종말은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여기에는 그가 끝의 끝에서야 확인한 진실에 근접하는 방법이었던 단순한 검색을 하는 행위도 포함되는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파툼 수도사를 그토록 신뢰했던 것인지, 그가 마치 애칭처럼 가벼이 불렀던 '에스카'라는 이름을 흘려들은 것인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하듯이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굴려지던 도재이는 한국을 떠나 런던, 노르웨이, 스리랑카, 몰디브, 중국, 그리고 다시 한국을 돌아오는 먼 여정을 통해 마침내 진실에 근접하게 되는데, 이 또한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계획한 빌데르베르크에서 보낸 메일 한 통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멸하는 종말을 앞둔 시점, 아둔함과 어리석어 또 한 번 주인공에서 '밀려난' 그가 만약 선택받은 십사만사천 명 사이에서 탈출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했다면 어쩌면 그 역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전에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분명 그가 착실히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동안에는 수많은 기회와 탈출 시기가 존재했음에도 그는 그걸 깨지 못했다. 어쩌면 이미 그것을 간파했기에 파툼 수도사는 그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편으론 든다.
많은 이들이 '평범한' 기자였던 도재이에게 배팅을 많이 했는데, 그중 워싱턴 데일리 타임즈의 하버트 브라운 사장의 뜻만큼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는 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의 무자비한 살생으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자신이 운영하는 거대한 워싱턴 데일리 타임즈에서 유독 권력 안에 들지 않았던 도재이를 알았기에 어쩌면 그에게 유일한 희망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또 유달리 곁에서 바람잡이 역할을 계속하며 하버트 사장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고 호기심이 동하게 만들어 부추긴 '실빈'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기에 하버트 브라운 사장의 뜻만큼은 유일하게 다른 목적을 지닌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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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이 기자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
하버트 브라운 사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옷깃을 추슬렀다.
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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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결론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처럼 결론 내려졌으나 도재이가 지나쳐간 또 하나의 기회로 보고 싶다.
완벽한 시나리오의 완성을 위해 거액의 돈과 막강한 권력, 인력까지 풀가동한 이들의 여정에는 주 무대가 되는 또 하나의 공간인 '바이오스피어'가 등장하는데, 일명 '제너시스'라는 이름으로 종말적인 세상에 대한 성서적 대안으로 만든 바닷속 깊은 곳에 만든 공간이다.
'초대'라는 이름을 앞세워 '납치'로 이곳에 끌려오게 된 이들은 이곳에서 남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잡혀 온 지 21일째 되던 날 우연히 제네시스의 비밀을 알게 된 도재이는 이곳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탈출 계획을 결심하게 되고 마침내 홀로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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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베 박사를 통해서 미국과 이스라엘, EU 국가들이 연합하여 중국과의 전면 전쟁을 준비하고 있고 '제네시스'가 세계적인 대재앙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선택된 몇몇을 위한 실험적 생존 모형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2~19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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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전하고 전쟁을 막기 위한 그의 나 홀로 고군분투는 생각보다 큰 규모를 야기하는데, 이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또 다른 이들은(하버트 브라운 사장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 그저 이 모든 것들을 관망하듯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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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맡겨야죠. 이제부터는 말이죠..."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이제부터는 그에게 맡겨야지. 당신 정말 수고가 많았어.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 다 당신 덕분이야."
20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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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갖 유물과 유적지가 파괴되는 것은 물론, 총과 폭탄이 난무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만난 수많은 특별한 사람들(고위 관료, 대통령, 첩보 기관 수장, 대부호 등) 중에서 참파 회장이 한 의미심장한 말은 어쩐지 복선을 나타내는 것 같아 유달리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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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없더라고. 나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이 있을 뿐. 나는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조각이더라구. 그걸 알고 나니 그제야 인생이 편해졌어."
258~25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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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트 브라운 사장이 남긴 암호를 푸는 것, 그리고 그걸 계기로 세계의 종말을 야기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완성된 시나리오처럼 지구는 어느새 멸망을 맞게 된다. 40만 년을 이어온 호모 사피엔스종이 멸종하는 데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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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선택되었고, 완벽한 그분의 계획 속에서 자네의 역할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네. 비록 신의 뜻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긴 하지만, 자네를 향한 인간적 연민과 비애를 지울 수 없기에 마지막으로 이 메시지를 보냄으로 자네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네.
이제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열릴 것이고, 태초의 제네시스가 다시 도래할 거야. 에스카, 신의 섭리 안에서 평안하길.
29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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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안식을 가장해 보낸 이 메일은 결말을 알게 되는 순간 조롱으로 바뀌는데, 자신들의 완벽한 계획을 위해 도재이의 삶 전체가 부정당한것은 물론 꾸며진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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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모든 것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신'을 떠나고 나서 도재이는 모든 것을 지워나갔다.
신을 떠난 대가는 달콤했다. 그동안 그를 억누르던 숙명론도, 도덕도, 심정적 갈등도, 모든 것을 신에게 귀착시킴으로 가졌던 인위적인 안정감도 일순간에 사라졌다. 다만, 치기 어린 보상심리만 남았다.
신을 떠나고 나서 도재이는 자유로웠으며, 감각적이었다. 도재이는 쾌락의 끝에 가보고 싶었다.
11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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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런 도재이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위 문장이 아닐까 싶다. 신 안에서 느낀 인위적인 안정감은 잠시뿐, 그 품에 벗어난 순간 느낀 자유로움과 치기 어린 보상심리만 남았다는 문장에서 모두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 그나마 조금 영혼이 담긴 사람답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모든 것을 지워나갔다는 문장에는 '안개'와 '신을 떠나고 나서'라는 수식이 붙는데, 두 가지는 내용상 부정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야를 가리는 '안개'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며, '신'은 누군가가 만든 환상의 프레임이다. 이를 조합해 봤을 때 '안개'는 현실의 모든 것을 뿌옇게 만들어 지워버렸고, '신'을 떠남으로써 환상 속에 갇혀있던 모든 것들이 지워졌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후반부에 가서는 '지워진다'라는 것은 곧 종말과 맞닿아 있어 서글프게 다가오는 문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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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촉각이 일치하는군요. 보이는 것만 잡을 수 있고, 잡히는 것만 볼 수 있어요."
1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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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 잡을 수 있고, 잡히는 것만 볼 수 있는 삶을 살았던 도재이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뿌연 안갯속에서 그렇게 누군가 짜 맞춘 계획된 삶을 산 것이다.
이기적인 야망을 가진 이들의 계획 아래 거행된 인류의 종말, 이것은 30년간의 거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십사만사천 명의 선택된 자들만이 누리는 허황된 미래였다.
그들은 일찍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인류의 종말을 이야기하며 우리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 일이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고, 또 우리 세대가 지나기 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찾은 진짜 바이오 스피어에서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현재는 인류의 종말을 관람하며 축배를 들지언정 그들의 신뢰가 과연 끝까지 굳건할 수 있을까?
파괴한 지구가 다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잔인하게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인지 내심 궁금한 마음이 인다. 또 그들이 부르짖는 신이 과연 진짜 신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문명을 창조한 신이 만들어 놓은 완전체를 과학 문명의 힘을 빌려 파괴하고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다시금 복원하는 것은 신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쩐지 어폐가 있어 보인다.
도재이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크고 작은 단서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데, 인물, 관계 외에도 눈에 보이는 바이오스피어, 안개, 마이크로 피셔 필름 등의 수수께끼 같은 단서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조력자와 빌런을 구분해 보길 바란다. 혹은 사건의 앞뒤 맥락을 짜 맞춰 진짜 진실에 도달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하나의 방법이 될 듯하다.
해석하기에 따라 <완벽한 계획>은 여러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주 등장인물인 도재이를 비롯해 등장하는 여러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또 다른 해석과 질문이 생성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과거 로빈 쿡과 댄 브라운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통해 치밀한 설계도를 보고 있는 듯한 소설을 한번 써보았으면 하는 막연하지만 어렴풋한 소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과거 읽었던 이들의 소설이 떠올랐다.
영화화까지 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강렬한 두뇌싸움을 야기했던 소설과 비슷한 형태의 책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부디 또 다른 독자들도 그때의 그 감동과 반가움을 이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