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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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글들은 노래 가사를 비롯해 SNS를 통해 가끔 마주하기에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 그의 글은 믿고 보는 글이나 다름없다. 그의 감성과 똑 부러지는 글솜씨는 군더더기가 없고 명확한 메시지와 내용을 전달하기에 더 그렇다.


한동안 약속된 것들을 이행하느라 바빠 정작 읽고 싶은 것들을 가까이할 수 없었는데, 이제서야 한숨 돌릴 기회를 포착하고 모처럼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뒤져 이적의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이 책을 마주하고 처음 드는 생각은 '아! 금방 읽겠다'였는데, 그만큼 부담 없는 구성과 편집이 시선을 끌었다. 보통 책을 처음 마주하면 책 앞뒤 표지와 목차, 페이지들을 주르륵 넘기며 살펴보는 게 일련의 패턴인데, 그렇게 대강 마주한 책에서 '얼른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을 살펴보면, 인생의 넓이, 상상의 높이, 언어의 차이, 노래의 깊이, 자신의 길이를 주제로 하여 각 단어에 얽힌 이야기를 짧게 나열하는 형태로 담겨있다.


단어로 보자면, 인생, 상상, 언어 차이, 노래,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길지 않은 글자 속에서 이런저런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생각지 못한 발상, 날카로운 유머, 되돌아봐야 할 나 자신 등 짧게 남긴 메모 같은 글에서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함을 느낀다. 익숙한 단어를 발견할 때는 내심 반가웠다가, 글을 읽고는 공감을 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어디서 끊어 읽어도 부담스럽지 않고, 언제 어디서 마주해도 헷갈릴 일이 없어 이 책은 출퇴근길이나 쉬는 시간,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읽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적의 수많은 단어들 중, 내 마음에 콕 하고 다가왔던 몇몇 단어들을 지금부터 소개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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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인성 교육 이야기를 들려준다.


"종이에 사람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며 종이를 구겨보세요. 이제 좋은 말을 하며 종이를 다시 펼치세요. 어때요.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죠? 그래요.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답니다. 그러니까 친구한테 나쁜 말을 하면 안되겠지요?

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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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때로 아이들을 통해 삶을 배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걸 캐치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내용은 이미 유치원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운다.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하고, 타인에게 상처가 될 말들은 하지 않는 게 옳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들은 때론 생각 없이, 또 어떨 때는 일부러 타인에게 상처 줄 말들을 서슴없이 내놓는다.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타인에게 상처가 될 말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 오늘부터라도 자중하고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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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한 등산객 목에 걸린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음악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건 고개 돌려봐야 피할 방도가 없다. 혹시 이어폰이란 게 발명된 걸 아직 모르나 싶어 가방 속 내 것이라도 건네줄까 하다가, 이어폰 끼면 경적 소리를 못 들어 위험하다며 음악을 스피커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고 달리던 자전거 라이더가 생각나, 그냥 살포시 내 귀에 꽂기로 한다. 이럴 때 이어폰은 귀마개이자 마스크. 유해한 것들로부터 내 몸은 내가 지킬 수밖에.

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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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다가왔던 일상에서 흔히 겪는 공감 가는 이야기 중 하나로, 혀를 차게 되는 내용이기도 했다.


요즘은 민폐 끼치는 이들은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니고, 오히려 정상 범주의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꼴이라니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고,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말에 하나를 더 덧붙이고 싶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것, 맡기 싫은 냄새는 고개를 돌려봐야 피할 방도가 없다'라고.


그래서 내 가방은 언제나 빵빵하다. 꼭 봐야 할 때를 대비한 안경(평소에는 시력이 나빠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귀에 꼽을 이어폰, 향을 없애기 위한 핸드크림이나 향수는 필수이자 기본 옵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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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

전 국민이 열광하는 것처럼 보였던 어떤 것도 한 세대가 지나면 마이너로 사라져간다. 세상은 소리 없이 빠르게 변화한다.

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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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명절이면 누구나 즐기던 고스톱, 그리고 가장 먼저 발명된 고스톱 게임을 언급하며 이제는 수그러들어 서서히 마이너로 사라져 가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세상이 소리 없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콕 짚어 이야기한다.


맞다!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눈 깜짝할 새 많은 것들은 메이저에서 마이너로 사라져가고, 또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변화해간다.


유행은 적응할 새도 없이 급속히 변하고 또 변한다. 뒤돌아 봐야 알아챌 만큼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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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A 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저 귀여운 눈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으며, 뭐 이런 장난 가지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는 듯 이죽거리는 눈빛이 역겨웠다. 눈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면 동물을 학대할 수 있고 마침내 폭력은 자신을 향할 거라는 공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둘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큰 눈이 와준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9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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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특히 뉴스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전조증상을 목격한 느낌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처럼, 처음은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특히 여성이라면 일상의 이런 일들을 가벼이 넘기기 보다 신중하게 지켜보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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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떡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는 건 개떡같이 말한 쪽에서 염치없이 강요할 예기가 아니라, 감성과 지력을 총동원하여 마침내 상대가 원래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성공한 쪽에서 "개떡같이 말씀하셨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어요." 라고 한숨을 돌리며 토로할 얘기가 아닐까. 어느 쪽 입장이든 개떡같이 말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니, 찰떡같이 말해주세요.

12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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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며 세상이 참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말조차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상황이라니.


한때 문해력 논란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런 해석조차 문해력 부족으로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기심으로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타인이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고 원하기 보다, 자신이 먼저 타인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먼저 배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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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고수를 좋아하게 된 건 서른 살부터였다. 그 전까지 고수를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

서른 살 때 보스턴의 한 베트남 식당에서, 속는 셈 치고 시도해 보라는 친구의 말에, '그래, 그래 외국까지 왔는데 눈 딱 감고 마지막으로 먹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고수와 쌀국수를 입에 듬뿍 밀어 넣은 순간, 이 허브의 존재 이유가 온몸으로 납득이 되며 덜컥 사랑에 빠졌다.


어떤 맛은, 어떤 경험은 그러하다. 벼락같이 기호를 바꾸고 인생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두자. 완성된 취향 따위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뀔 때 젊다.

1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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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아직 전자의 경험에 가깝다. 고수를 먹지 못한다. 그렇기에 '왜 고수를 먹지?'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어떤 맛이나 경험이 벼락같이 뇌를 강타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알기에 마음은 열어두고 있는 편이다. 고수를 언젠가 저자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젊다는 것은 이처럼 새로운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완성이라는 것이 삶에 과연 존재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마음은 늘 청춘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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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싫은 사람과는 같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상태.

21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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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성공이 뭐 별거냐? 그저 싫은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이 말속에는 싫은 사람과 함께 하지 않아도 된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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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생애 첫 산문집인 이 책은 고루하지 않아서 좋다. 조잡한 단어와 말들로 장황하게 늘어놓기 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의도를 간략하고 명확하게 전달함으로써 쿡하고 웃어넘기거나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등 즉각적인 반응을 내보일 수 있어 좋다.


딥하지 않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나 자신과 삶, 언어의 또 다른 차이, 저자가 직접 쓴 가사의 비하인드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순서 상관없이 원하는 주제를 먼저 만나보아도 되고, 멈춰 서고 싶을 때는 언제고 멈춰서 머물러도 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읽어나가되, 그의 시선이나 생각 속에 깃든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재미가 있어 결코 독서하는 시간이 헛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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