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드라, 떠나보니 살겠드라 - 65살, 여자, 혼자, 세계 여행자 쨍쨍으로부터
쨍쨍 지음 / 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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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자유로운 혼여행의 맛과 짧은 인생 내 멋대로 즐겁게 사는 법을 보여주는 책!"



표지 디자인부터 팝하고 힙한 느낌인 이 책은, 65살 여성의 혼여행을 담은 에세이로, 그 어떤 여행 에세이보다 자유롭고 유쾌한 삶의 모습들로 꽉꽉 채워져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톡톡 튀는 저자의 여러 이력들인데,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첫째, 26년 6개월간의 교사 이력

둘째, 나이 오십에 자발적 은퇴 선언 후 세계여행

셋째, 상상 이상의 자유분방한 가치관

넷째, 너무나 튀는 패션 스타일

다섯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대책 없음


이 외에도 많지만, 일단 정리해 보면 이렇다. 그냥 봐도 남다름이 느껴지지만, 보통의 한국 정서에 저자의 이력을 대입해 보면 더 쇼킹하게 다가온다.


일단 저자는 교사 일을 할 때조차 평범한 옷차림이나 수업방식은 거부했다고 한다. 그것을 그냥 넘겨준 학교 관계자와 유난스러운 학부모들을 어떻게 설득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무려 26년이나 교사직에 몸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교사라는 직업과 오십 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가치관은 활짝 열려있었다. 20년의 여행 기간 동안 처음 본 사람과 연애를 즐기고, 모르는 사람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머무르는 것을 보면 '타고난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 여행을 시작한 나이가 오십 세였다)


심지어 준비성은 제로에 가까워 대책 없이 여행을 다니고, 필요하면 그때그때 몸으로 부딪혀 해결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여행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만큼은 정말 부러웠는데, 오로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총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20년간 세계여행을 저자가 하며 만난 사람과, 사건, 일상들에 대해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철없는 시절 배낭을 메고 떠나는 여행도 쉽지 않은데, 저자는 65살인 지금도 여자 혼자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교사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면 매번 여행을 떠나고는 했는데,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아 결국 오십 세에 은퇴를 하고 홀로 여행을 시작했다는 그녀.


발길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계획 없이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그녀의 여행기를 살펴보다 보면 저절로 '자유'라는 말이 떠오른다.


때로 무모하고 대책 없이 보이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건강하게 여행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며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보는 이들만 애간장이 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제주도에 집을 마련해 제주와 해외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는 그녀는 여행 외에도 블로그 활동, 쨍쨍 토스쇼, 요가 등의 활동도 겸하고 있다.


어디서 봐도 톡톡 튀는 그녀의 패션 스타일은 말 그대로 오색 찬란한 원색들의 집합체처럼 느껴지는데, 은근히 잘 소화하는 것을 보면, 그녀이기에 가능한 패션이 아닐까 싶다.


핑크를 좋아하는 그녀답게, 대체로 분홍분홍한 느낌은 항상 포함되는데, 그 외 파랑, 노랑, 보라 등등 다양한 색감을 자유자재로 매칭해서 입는 듯하다.


신기한 건, 헤어스타일과 옷의 소재, 스타일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빡빡이 헤어스타일, 단정한 단발, 파격적인 노란 머리, 꽃을 꽂은 유쾌 소녀 스타일까지.


어쩌면 그녀의 진짜 인생은 은퇴 후 여행을 하며 산 20년의 세월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녀의 가치관과 성격이 찰떡처럼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외향적인 성격으로 친구를 쉽게 사귀고, 어디든 잘 섞이며,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성격을 봤을 때 지금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소심한 면이 있는 A형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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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쨍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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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쨍이 다녀간 세계 방방곡곡)



여자, 혼자, 세계 여행을 한 지 20년이 되었다. 첫 해외여행으로 간 인도는 인생을 바꾸어 버렸다.


2009년 8월 31일, 나이 오십에 불쑥 교사를 그만두고 학교 '밖' 여행을 위해 26년 6개월간의 '학교 여행'에 마침표를 찍고 세상의 아이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길 위에 올랐다.


새로운 공간과 사람에 있어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이라 여행할 때는 늘 흥분 상태다. 그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이 바로 글쓰기 놀이다.


2009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며 블로그에 여행 에세이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그 외에 요가와 쨍쨍 토크쇼를 하며 지내고 있는데, 쨍쨍 토크쇼는 총 200회가량 개최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종종 해외에서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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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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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학교에서 튀는 선생님이었다. 위에서 창규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쨍쨍'이라고, 별다른 호칭 없이 부른 것과 같은 선상의 일이다.

5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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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쨍'이라는 닉네임도, 그리고 그녀의 패션과 유쾌한 성격 모두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모두 교사 생활을 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


요즘 시대를 살펴보면, 모두 쉽지 않은 것들인데 예전이어서 가능했던 건지 아니면 유달리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서 가능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러한 그녀의 속성들은 은퇴 후 여행을 하며 더 도드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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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육체노동을 한다고, 옷 좀 허름하게 입었다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게 아니었는데,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몸소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신발이 없어서 맨발인 게 아니라, 맨발이 문화일 수도 있고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나무하러 가는데 무슨 좋은 옷을 입나? 허름한 옷을 입는 게 맞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하루 종일 웃게 만들어주고는 정신까지 번쩍 차리게 해준 나의 친구 신디, 산드라, 안젤라에게 다시금 감사해졌다.

11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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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여행을 하며 순간순간 깨달음을 얻는다. 그중 위의 에피소드의 경우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한 아찔한 상황이다.


일을 하느라 허름하게 입은 옷, 여기에 맨발과 맨손으로 나무를 나르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무언가를 선물해 주려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생각보다 꽤 부유하게 살고 있던 이들을 목도하면서, 저자는 자신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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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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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을 꿈꾸는 사람, 혼자 여행 가고 싶지만 어쩐지 무서운 사람, 나이를 먹어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보자.


영어를 못해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도 상관없다. 마음먹었다면 일단 떠나고 보는 거다.


때론 이런 무모함과 실행력이 '진짜 인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몸소 보여준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만의 패션과 스타일로 한껏 자유롭게 여행하며 자신을 펼쳐놓는다.


덕분에 새로운 사랑과 우정도 경험할 수 있었고, 또 경험이 쌓인 만큼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분홍분홍한 것을 애정하는 만큼 분홍분홍한 삶과 쨍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65세의 저자를 보며, 우리도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인생의 2막을 새롭게 열어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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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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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남성의 폭력성과 상처 입은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 모음집!"



얇지만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어, 항상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벌써 네 권째 읽고 쓰는 중이다.


매번 느끼지만, 읽을 때는 '그런가 보다'하고 가볍게 읽는데, 막상 읽고 난 후 쓰다 보면 이야기는 방대하게 늘어난다. 그래서 항상 깜짝 놀라곤 하는데, 어쩌면 그게 바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 속에 생략된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재미, 그리고 함축적으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 파악, 여기에 더해 책 한 권이 전하는 주제에 대해 세세하게 파고들다 보면, 몇 시간이 뚝딱 흘러가 있곤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클레어 키건의 책이 읽고 싶은 책이면서 동시에 쓰기에는 어려운 책이다. 그렇지만 역시나 쓰고 난 뒤에는 어떤 책보다 뿌듯함을 느끼게 만드는 책! 그게 바로 클레어 키건의 책이 아닐까 한다.


총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여자와 남자에 관한 세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책이다. 미국판은 유일하게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고 하는데, 부제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책을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듯하다.


세 편의 단편에는 각각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는데, 여성은 피해자로, 남성은 한마디로 '개자식'인 인간들이 등장한다.


세 편은 대략 10년씩의 시차를 두고 쓰인 단편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남성의 폭력과 우월주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최근에 쓰인 작품부터 오래전에 쓰인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는데, 뒤로 갈수록 수위는 더 높아진다.


남성들의 욕망과 본능, 그리고 이기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흘러가는 현실은 매우 냉혹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래서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더불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파문은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여성들은 몰랐던, 혹은 빙산의 일각으로만 알고 있던 남성의 세계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어쩐지 오래전부터 남성과 여성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달까?


편중된 시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성 모두를 도끼눈 뜨고 지켜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남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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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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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화창한 어느 여름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시선은 회사에 출근해 일하는 카헐의 모습을 따라 움직인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카헐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당장은 알 수 없는 형태로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그러다가 불현듯 결혼을 약속했던 한 여성과의 일화를 회상하게 되면서 독자는 남성인 카헐의 문제점과 결혼이 파기된 이유를 알게 된다.


카헐은 전형적인 아일랜드 남자로, 그 이야기인즉슨 여성 혐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매우 인색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랑이라 생각했던 여성을 떠나보내게 된다.


먼저 청혼해 놓고, 이기적이고 생색만 낼 줄 아는 남자를 여자는 견디다 못해 결국 떠나게 된다. 중간에 분명 기회가 있었지만, 카헐은 잠시 뜨끔할 뿐 그뿐이다.


약혼녀였던 사빈이 떠난 이후에도 카헐은 여전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인신공격과 모욕적인 욕설을 내뱉는 것으로 도망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뵐 하우스'라는 작가 레지던스에 당첨된 여성 주인공은 2주간 느긋하게 쉬며 글을 쓸 목적으로 이곳에 방문하게 된다. 마침 도착한 날은 그녀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었는데, 어떤 남성으로 인해 완벽했던 하루를 망치게 된다.


그는 독문학 교수로 자신을 소개하며 대뜸 여자가 머물고 있는 집을 둘러보고 싶다 말한다. 이에 여성은 방해받은 것이 불쾌했지만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방문을 허락한다.


심지어 케이크까지 만들어 대접하지만,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남자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그녀를 비난하며 놀기만 한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이내 남자를 쫓아내고 자신만의 재주로 그를 향한 통쾌한 복수를 감행한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은밀하게 복수를 진행한 것이다.



■남극

다른 남자와의 하룻밤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가 12월의 어느 날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홀로 도시로 떠나던 날 호기심을 실행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볼일을 모두 마친 그녀는 마침내 예쁘게 차려입고 술집에 들어서게 되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와 소원하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아껴주고 보살펴주는 느낌이 좋아 호기심을 충족했다고 느끼지만, 이내 서서히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미처 피할새도 없이 남자의 꾀임에 넘어간 여자는 그에게 붙들려 자신이 생각하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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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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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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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가 문제야?"

(...)

"이것들. 당신 물건 전부. 이거 다." 카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

카헐은 나이키 운동화와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내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들어올 줄 알았어?"

"그냥 너무 많아서." 그가 설명하려 애썼다.

(...)

"감당할 게 너무 많잖아."

(...)

"이해가 안 가." 사빈이 말했다. 내가 이달 말에 라스가의 아파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건 당신도 알았잖아. 당신이 여기로 오라고, 결혼하자고 했잖아."

"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

34~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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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에 이끌려 청혼을 한 남자는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자 감당할 것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기저에는 여성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이 대화에서 감당할 게 많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내용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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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내가 이 집에서 저녁을 만들었을 때 당신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식재료를 산 적도 없고, 아침 식사를 차려준 적도 없어."

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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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카헐)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초반에는 여성이 과소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결말에 다다라서는 이 시선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리를 잘하는 여자친구 사빈이 좋다면서도 식재료비를 부담하거나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여주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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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신 또래의 남자 절반은 그냥 우리가 입 닥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대. 남자들은 제멋대로 살아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한심하게 군대."

(...)

"또 어떤 남자들한테 우리는 씹년일 뿐이래."

(...)

"아,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방식이 그래." 카헐이 말했다. "그냥 아일랜드의 관습이야. 보통 아무 의미도 없어."

37~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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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은 카헐의 동료와 카헐의 입을 통해 아일랜드 남자들의 한심함과 무례함, 그리고 그들이 여성을 어떻게 보는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카헐로 인해 그녀는 결국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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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여성 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3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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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이 박혀 있는 아일랜드의 여성 혐오가 사실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어쩌면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들을 통해 아일랜드가 가진 사회 문제 중 하나인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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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가 많으시네요."

"전혀 수고스럽지 않아요."

그녀는 이 말이, 이 말을 하는 것이, 그가 그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지겨웠다.

7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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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무례하고 수고스러운 일을 벌인 장본인이, 계속해서 '수고가 많으시네요'라는 말을 하며 '전혀 수고스럽지 않아요'라는 말을 유도하게 만드는 일은 지겨우면서도 짜증 나는 일이다.


남자는 계속해서 수고스러운 일을 벌일 뿐만 아니라, 황당한 충고까지 늘어놓으며 여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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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의 서재로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

그녀는 '애킬섬'이라고 쓰고 날짜를 적었다. 그런 다음 잠시 멈추고 생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생각했다.

(...)

그녀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쾌활하고 복잡하며 결혼하지 않은 여주인공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기 오고 싶어 한다던 독일인 교수의 말을,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

(...)

어느 순간 고개를 들자 땅 위로 흘러드는 빛이 보였다. 햇빛을 보니 자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간절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 태양이 떠올랐다.

(...)

이미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절개하여 기후를, 그리고 갈망을 집어넣었다.

(...)

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 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78~8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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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 마침 작가들이 바라 마지않는 작가 레지던스 '뵐 하우스'에 입성하게 된 여자는 한껏 기대감을 가지고 즐거운 하루를 보낼 생각에 흥분한 상태다.


하지만, 첫날 그녀를 방해하는 한 남자로 인해 결국 엉망진창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이에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남성을 길고 고통스럽게 죽일 방법을 모의한다.


글을 쓰는 것으로 말이다.



■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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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반쯤 얼어 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9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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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처럼 그녀는 남자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국 그녀의 말처럼 지옥을 경험하며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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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남극을,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지옥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했다.

11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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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왜 지옥을 추운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그녀는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남극을 떠올리게 된다.


한 번의 일탈을 꿈꿨던 그녀는 결국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다시는 따뜻하고 안온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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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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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두께에 속아 가벼운 소설로 생각해서 읽기 시작하지만, 결코 예상처럼 끝나지 않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읽고 나면 자꾸만 내용을 곱씹게 만든다.


이번 소설은 남녀 관계를 다룬 세 편의 단편을 통해 아일랜드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남녀의 불균형한 관계, 그리고 남성의 폭력성과 우월주의에 대해 다루며 조용하지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거나 따뜻하기보다, 우중충하고 어두운데, 이는 평소의 아일랜드 날씨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단순히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말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씁쓸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데,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대략 10년 정도의 시차를 건너 뛸수록 여성들의 태도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1999년에 발표된 <남극>에서 여성은 결국 위험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하지만 2007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남자를 내쫓거나 2022년 <너무 늦은 시간>에서는 아예 파혼을 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시대가 변해도 남성들의 폭력성과 우월주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성들의 태도는 확연히 바뀌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견을 개진하고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일방적이고 무례한 남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낸다.


덕분에 어쩌면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과 <너무 늦은 시간>에 존재하는 여성들은 이후에 더 좋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만든다. 후퇴하는 남성들과는 다르게, 더 앞으로 전진하는 찬란한 여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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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고 말해 줄래?
하미라 지음 / 좋은땅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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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과 성찰에서 얻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통해 감정 회복을 돕는 책!"



토닥이는 따뜻한 글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성찰에서 얻은 힘이 되는 글들을 짤막한 글과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특정 순간이나 기억 속 무너지고 소모된 감정을 언급한 후에 깨달음을 통해 치유와 회복을 해 나가는 과정을 하나의 에세이 글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파도를 잘 담아내고 있어 공감 가는 내용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몇몇 부분은 좀 아이러니하게 다가와 혼란을 야기했다.


첫 번째는 책 제목으로, 내용상으로 보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하지만 <괜찮다고 말해 줄래?>라는 책 제목은 어쩐지 책 내용과는 상반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일부러 역설적 표현을 위해 의도한 책 제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책과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제목이었다면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책 소개 글의 일부 내용이 전혀 문법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사실은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해 줄래?"라고 묻고 싶었던 저자'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앞뒤 문맥으로 대충 내용 파악이 되기는 했으나, 해당 문장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오죽하면 AI에게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AI는 '누군가가 먼저 자신에게 "괜찮아"라는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네주기를 바랐다는 감정을 표현'이 아니었을까라는 대답을 내놓았는데, 그렇다면 다르게 표현했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저자'라고 표현했다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이유로 나는 책 내용과 소개 글이 책과 다른 편에 서 있는 느낌으로 다가와 어쩐지 불편하게 다가왔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음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책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무너진 감정을 일으켜 주고,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할 때 우리를 다잡아 주는 용기 있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어 책 제목이나 소개 글 일부와는 다르게, 다정하게 안아주는 느낌을 준다.


총 10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기억에서 얻은 통찰을 글과 그림으로 짤막하게 담아내고 있다. 내면을 강화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는데, 읽다 보면 공감과 위로가 되는 문장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괜찮지 않은데 '척'하며 살아갔던 나날들,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증을 느꼈던 매일, 나보다 남을 살피느라 정작 몰랐던 내 마음들을 들여다보며 진짜 중요한 것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으니, 스스로의 감정에 더 솔직해지면 어떨까? 지금부터라도 남보다 나를 더 앞에 두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스스로에게 건네다 보면 언젠가 분명 괜찮은 날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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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으로 다가온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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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식은 말



이해하려 노력하던 말들이

단정하는 말로 바뀌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이

조용히 식어가는 걸 느꼈다.


말은 남아 있었지만

그 말에 나를 담아 둘 자리는 없었다.


그때 알았다.

말이 식으면 관계도 식는다는걸.

그건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무너진다는 것도.

28~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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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할 때 상대의 말을 단정하거나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때 그 관계는 끝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말이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건, 관계가 식었다는 또 다른 표시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이해하려던 노력들은 언제고 이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그럴 때는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려 하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관계가 식었다고 인정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더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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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숨기다



마음을 숨기게 된 건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몇 번이고 겪고 나서부터였다.


용기 낸 내 말을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넘기거나

"네가 예민한 거야"라고 말했다.

(...)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그냥 조용히 웃었다.

마음을 숨기는 게

상처받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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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경험한 일화 중 하나라, 격하게 공감 갔던 문장 중 하나다. 때론 마음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애매한 관계, 불편한 사람에게는 마음을 숨기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

나라는 기준



행복도, 성공도 남의 잣대가 아니라

나만의 기준으로 다시 재 보니

나는 이미 꽤 괜찮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라는 기준 위에서

나를 믿고 살아가기로 했다.

118~1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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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도 행복도 나만의 기준 위에 세워져야 진심으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타인의 잣대 위에서 비교하며 살다 보면 평생 그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라는 기준 위에서, 스스로를 믿고 살아가자. 그것이 진짜 인생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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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먼저



'다음에', '나중에', '괜찮을 때'

내 마음은 늘 밀려났다.

양보도 해 보고,

참아도 보고,

지면서도 살아도 봤지만

남는 건 늘 찌뿌둥한 마음뿐이었다.

이제는 나부터 챙긴다.

(...)

내가 괜찮아야 누구를 챙기든,

무엇을 하든 덜 지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조금 이기적인 게 아니라,

조금 현명해진 거다.

156페이지 中

-----


누군가는 이타심을 대놓고 긍정적 시그널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평가다. 내가 바로 선 상태에서 이타심이 발휘되어야 비로소 진짜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괜찮지 않은데, 이타심을 부리는 것은 만용이자 허세일 뿐이다. 무엇이든 내가 괜찮은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덜 지치고, 더 제대로 챙길 수 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내 마음부터 챙기자.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자 현명한 처사이니,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그만 접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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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하루



예전엔 행복이란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는 줄 알았다.

(...)

그런데 아프고, 흔들리고,

버티는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그냥 흘러가는 오늘 하루,

별일 없이 지나가는 평범한 날이

사실은 제일 소중한 날이라는걸.

이 정도면 괜찮다.

별거 없지만, 마음은 편하니까.

182페이지 中

-----


행복을 좇느라 평범한 일상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할 때는 모른다. 하지만 아프고 흔들리는 날들을 겪어내고 나면, 그냥 흘러가는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날들인지 깨닫게 된다.


별것 없지만 괜찮은 나날들, 별것 없어서 괜찮은 날들.



=====

마무리

=====


나의 괜찮지 않음을 타인이 알아주기를 기대하기보다, 스스로 괜찮지 않음을 깨닫고, 괜찮아질 수 있는 방법을 주도적으로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타인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우리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기대하는 마음이 자꾸만 상처와 불안, 우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모든 기준점을 나에게 두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매 순간, 심지어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조차 소중하게 여기다 보면, 괜찮은 날들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다.


불안은 잠재워질 것이고, 상처는 어느새 희미해져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괜찮음'이든, '괜찮지 않음'이든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니, 스스로를 더 믿고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 보자.


그러다 보면, 결국 내 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아무리 무너지는 순간이 와도 몇 번이고 다시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나만의 회복탄력성을 갖춘 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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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데이터베이스에 가둔 남자 - 프라이버시를 빼앗은 ‘초감시사회’의 설계자
매켄지 펑크 지음, 이영래 옮김, 송길영 감수 / 다산초당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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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를 빼앗은 ‘초감시사회’ 설계자 '행크 애셔'를 통해 알아보는 빅데이터의 역사와 위험성"



현시대는 빅데이터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데이터화되어 우리 삶에 녹아들어 있다. 이 덕분에 편리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법 탈취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 개인 정보 남용의 큰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가끔 이런 빅데이터를 만든 이는 누굴까 궁금했는데,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최초의 설계자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행크 애셔'로,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데이터에 미친 사람으로, 통상적으로는 그를 '데이터 융합의 아버지' 혹은 '데이터의 마법사'라 칭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 대중은 그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우리 삶을 변화시켰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번에 이 책을 통해 그의 존재와 그가 세운 업적, 그 밖에 그가 개발한 빅데이터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까지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한편 매우 두렵게 다가오기도 했다.


총 3막 1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빅데이터의 설계자 '행크 애셔'의 일대기를 통해 빅데이터가 탄생하게 된 과정과 이후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이야기, 그리고 사람과 사회에 끼친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너무 많은 내용을 담아내려 한 저자의 욕심 때문인지, 흥미를 끄는 키워드와 소재에 비해 내용은 방대하고 다소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가독성도 떨어진다.


에필로그를 통해 저자는 원래 행크 애셔의 일대기를 담을 생각은 없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빅데이터에 대한 내용을 수집하다가 애셔처럼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 너무 심취한 나머지 선택과 집중의 경계선을 넘어버린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세세하게 사건과 내용들을 풀기보다 특정 에피소드들을 좀 더 흥미롭게 풀어내는 방식을 취했다면 훨씬 더 매력적인 책이 되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어쨌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세 가지만큼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 빅데이터의 최초 설계자 '행크 애셔'의 일대기, 둘째, 빅데이터가 발전해 온 양상, 셋째, 빅데이터의 위험성이 바로 그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CIA나 FBI의 정보력에 대해 늘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방식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그래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특히 최근 들어 한 통신사 해킹 사건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해킹 사건이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것을 보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위험성이 시간차를 두고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더 불안해졌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우리 자신은 사라져도 우리를 수식하는 여러 빅데이터는 여전히 남아, 우리의 잊힐 권리까지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애셔가 죽은 후에도 끝까지 그의 범죄 이력이 꼬리표처럼 남은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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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행크 애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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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 미스터 존 애덤스

▶대표 수식어: 문제아, 바람둥이, 사업가 그리고 마약 밀수업자

▶그의 아버지 해리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간호사 루실

▶인디애나주 밸퍼레이조의 한 알팔파(대표적인 사료 작물) 농장에서 자람

▶팝콘용 옥수수의 재배지로 유명한 기독교인 마을의 유대인 아이로 자람

▶고등학교 학생회장이었던 동생 척과 동창회의 여학생 대표였던 여동생 세라와 달리 행크는 교실을 숨 막혀 하는 학생이었음

▶평생 아버지로부터 학대 당했음

▶고등학교 자퇴한 행크는 지역 공장에 취직해 제도공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음

▶애셔는 거칠고 무례해 보였지만 매력적인 사람이었음

▶한 번씩 숨기고 있던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음

▶칭찬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 승리에 대한 집착, 배신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를 키우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많은 이를 의심하고 항상 상대에게서 우위를 확보하려 했음

▶큰 딸 데지리와 작은 딸 캐럴라인(칼리)이 있음

▶자신이 통제력을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음

▶직업의 변화

열여덟 살 페인트공으로 취직-플로리다에서 주택에 페인트칠을 하는 회사를 세움-서른다섯 살 프로그래밍을 치열하게 배움(스승: 로이 브루 베이커)


그의 주 무대는 플로리다로, 그곳에서 새 직업과 빅데이터 설계자로써 첫 발을 내디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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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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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셔는 학창 시절 꽤 천재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학교와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찌감치 학교를 자퇴하고 공장에 취직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습득 능력과 실력을 보여주게 된다.


그가 이토록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학교와 가까워질 수 없었던 데에는 아마도 월등히 눈에 띄었던 동생들과 비교 당하고,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때문인지 결국 성인이 된 후에도 그는 한 번씩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는 했는데, 그 때문에 가지고 있던 매력이 늘 반감되고는 했다.


일찌감치 사업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페인트공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이후 마약 밀수업으로 붙잡히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1988년 스승인 브루 베이커에게 치열하게 프로그래밍을 배운 그는 브루 베이커와 함께 '유저러버블'이라는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업은 곧 접게 되고, 다시 1992년 2월 두 번째 회사인 데이터베이스 테크놀로지스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사업이 대박을 치게 된다.


이 일로 그의 인생은 물론 우리의 인생도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빅데이터의 시초를 만들어 낸 사업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자동차와 관련된 공공 기록을 시작으로 방대한 대규모 데이터베이스를 수집하게 되면서 후에 독보적인 데이터베이스의 수집, 정리, 활용은 물론, 국가기관과의 공조를 통해 다양한 사건을 해결하기에 이른다.


이때 그가 만든 오토 트랙은 개인 삶의 특정 시점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만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역사 전체를 제공했는데, 그가 수집한 이래 단 한 번도 데이터를 지운 적이 없다고 하니 실로 얼마나 엄청난 자료가 축적되어 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때 이것의 위험성을 감지한 스승 브루 베이커는 중도 하차하게 되고, 애셔는 계속 혼자 빅데이터에 몰입하게 되면서 '데이터에 광적으로 미친놈'이 되어 간다.


그는 여러 차례 회사를 뺏기고 다시 세우는 것을 반복하며 51세의 나이에는 세상 꼭대기에 자리하기도 하지만, 10년 후 61세에는 결국 홀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9.11 테러와 실종된 아동 찾기, 살인, 아이티 지진 등 큰 사건에 무상으로 자신의 슈퍼컴퓨터들을 제공함으로써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각 프로젝트는 '사이신트', '매트리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 그 뿌리는 같았고 이를 통해 법 집행관, 언론, 신문사, 법률회사, 추심회사 등 전무후무한 여러 기관을 고객으로 두는 기업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큰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과거 범죄 이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일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광기 어린 데이터 수집을 멈추지 않았고, 매번 빠른 도약과 발전을 통해 획기적인 시스템을 내놓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 간과한 것은 그 시스템이 악용될 여지가 크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스스로가 국가의 큰일이나 아이들에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아낌없이 무상으로 제공했고, 또 그것을 만드는 것에 늘 빠져 있어 그 너머의 다른 이면은 미처 보지 못한 것 같다.


사후 그가 남긴 데이터와 시스템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이제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잊힐 권리는 사라진 듯하다.


그리고 아마도 살아 숨 쉬는 동안 애셔나 투표권을 잃어버린 흑인들, 무고하게 범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처럼 어쩌면 누군가의 편중된 시각에 의해 우리 또한 부당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중국과 같은 나라들은 국가가 정보를 통제하여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일들은 제외하거나 부풀려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기도 한다.


개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통제되었던 데이터를 결국 받아들인 미 정부 기관으로 인해 CIA나 FBI, 경찰, 금융권 등의 기관들은 막강한 권력과 힘을 얻게 되었고, 아마 그것의 결과물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가 아닐까 한다.


3막부터는 애셔의 사후부터 현시대에 데이터가 가지는 막강한 힘과 그것이 SNS와 결합하여 어떤 형태로 발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다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시스템 안에서 통제와 감시를 당하면서 살고 있는 우리의 민낯을 제대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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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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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겟은 개별적으로 무가치해 보이는 데이터도 집합적으로 결합되면 높은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 즉 데이터 집합의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했다.

9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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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겟은 데이터 집합의 가치를 간파했고, 이런 그의 아이디어를 보고 애셔는 큰 사업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동업자이자 스승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데이터를 모아 빅데이터를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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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 베이커는 말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속한 단계 중 하나는 해를 끼치는 직업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신념을 누구든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와 조화시키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더 많은 데이터의 층이 쌓이면 어떻게 될지, 경찰과 연방 요원이 영장 없이도 개인이 어디에 살고 누구를  아는지, 즉 그들의 삶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다. "저는 언제나 정부의 영향력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경찰에 제공하면 우리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9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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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셔와 그의 스승이자 동업자인 브루 베이커는 빅데이터를 만드는 것을 두고 엄청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둘은 갈라서게 된다. 그런데 당시 브루 베이커는 빅데이터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반면에 애셔는 그저 사업성과 이것을 만드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 이런 문제점에 대해 전혀 인지를 못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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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주 상원 의원 에드워드 롱은 "오늘날 우리의 프라이버시는 개인정보의 분산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했다.

(...)

즉 '정보 타일' 그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유한 식별자, 특히 사회보장번호처럼 정보를 하나로 묶는 방법이 있다면 누군가가 이 작은 정보들을 모아 개인의 습관과 행동, 생각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그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한 존슨 행정부는 데이터뱅크 구축 계획을 재빨리 포기했다. 그러나 연방정부가 감히 만들지 못한 것을 민간 기업은 만들고 말았다.

10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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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유출에 대해 일찍이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때문에 연방정부는 데이터뱅크를 구축하는 것에 섣불리 도전하지 못한다.


하지만 애셔와 같은 민간 기업이 손대기 시작하면서 개개인의 민감정보가 데이터화되어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그러다가 이내 연방정부마저 그 데이터를 활용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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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셔가 추구하려 했고 실제로 구축해 낸 데이터 시스템을 구상하는 데에는 특별한 유형의 사람 그리고 특별한 사고방식이 필요했다. 그의 시스템은 동시대의 시스템과 달랐다. 차별점을 만든 건 단순히 그들이 갖고 있는 기록이나 그를 차용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의 시스템은 업계에서 '위험'으로 인식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흔히 쓰이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가 설계한 시스템은 보험 회사를 위해 위험을 관리하도록 만들어졌지만, 나중에는 사회 전체의 위험을 관리하는 데 활용되었다. 시스템은 사람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나지 않은 정보를 찾아냈다. 자산, 동료, 주소, 음모, 유죄 판결 같은 것들 말이다.

10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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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애셔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남들과 다른 '위험(Risk)'에 초점을 맞춰 접근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유형의 시스템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목적과 방향성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이다 보니, 수집하는 자료나 활용하는 방식도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설득해 자료를 모았고, 그렇게 그만의 거대한 빅데이터를 완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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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애셔가 처음 만든 프로필을 기반으로 은밀한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디스토피아라고 중국을 걱정하면서 정작 우리의 현실을 모르고 있다.

3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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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전자 방식은 우리를 스토킹하도록 유도하는 은밀한 데이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신용카드, SNS, 휴대폰, gps 기록, 금융거래 등 이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곡차곡 우리의 프로필을 완성시켜 주는 주요 데이터들이다.


중국은 대놓고 데이터를 통제하는 거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통제와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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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 시대에 가장 인간적인 권리이자 가장 먼 권리는 잊힐 권리다. 이제 그는 잊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 모두 영영 잊히지 않을지도 모른다.

40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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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디지털 정보가 사망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이미 '잊힐 권리'가 강제적으로 박탈당한 것이다.


임의로 특정 데이터를 지워도, 앞서 오픈된 데이터가 무한 복제되어 이미 떠돌고 있는 상태라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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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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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자료와 내용들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오히려 글을 읽는 데 방해되는 느낌이다. 분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흥미로운 소재와 키워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독성이 떨어져 한눈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는다.


데이터에 미친 광기를 보였던 애셔의 삶 역시 빅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해 살짝 걸쳐진 느낌으로 다루고 있어, 주제가 좀 모호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애셔의 삶 혹은 빅데이터의 발전 과정 둘 중 하나에 확실히 포커스를 맞춰 집중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구성이나 편집에 있어 군더더기는 제외하고 에피소드별로 구분 지어 흥미롭게 다뤘다면 더 매력적인 책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남는 것은 있다. 특히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빅데이터의 시작과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주어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도 활용되면서 현재는 시간차를 두고 여러 리스크와 대면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 책 덕분에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빅데이터의 숨겨진 뿌리를 살짝 들여다본 느낌이다.


앞으로는 빅데이터에 더해 인공지능까지 합세하여 더 큰 빅 마켓을 형성하게 될 텐데 여러모로 걱정이 된다. 특히 콘텐츠 시장의 활성화와 그것을 바탕으로 훨씬 더 커질 데이터의 중요성과 활용도의 비중 때문에 더 그렇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빅데이터의 시작점과 그 과정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그 속에 숨겨진 명과 암의 면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더불어 스스로 경각심을 갖고, 개인정보를 남발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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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날들이 단단한 인생을 만들지
임희재 지음 / 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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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세계를 바꿔준 다정한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



해외 생활을 담은 이야기들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쩌면 평소 해외 거주나 여행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스물두 살, 대학을 졸업한 저자가 14년간 해외 유학 생활을 하면서 겪은 다정한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세이로, 해외 생활의 고충을 즐거운 '경험'과 '추억'으로 만들어 준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가 경험한 일상 속 작은 친절이 주는 행복을 만나보면서,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와 같은 따뜻한 온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저자의 다정한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요 배경은 프랑스로, 학위를 딴 이후에는 독일 쾰른과 이탈리아에서도 얼마간 생활을 이어 나갔다고 전하고 있다.


다정하진 않았지만 섬세하게 챙겨준 독일인 남자 친구를 비롯해, 막차를 놓쳐 난감한 상황에서 집까지 바래다준 같은 버스를 탔던 승객, 아플 때 서슴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옆집 여성, 그리고 변기가 막혔을 때 직접 변기를 뚫어준 이웃 남성까지.


완전히 다른 사회 시스템 안에서 홀로 우왕좌왕하던 저자는 이처럼 많은 이웃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위도 따고, 행복한 일상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생활권, 다른 상식을 가진 해외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홀로 생활하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또 그들의 생활권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이들 덕분에 저자는 14년간의 해외 생활을 이토록 다정하고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특별한 이벤트에 대한 내용은 없지만, 소소한 일상 속에서 만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문화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분명 우리의 정서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 한때는 저자 역시 실수를 하거나 오해하는(혹은 오해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정한 이웃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던 편견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또 힘겨운 유학 생활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힘든 순간,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이처럼 별것 아닌 다정한 말 한마디와 따뜻한 온기일 것이다.


현재 세계는 각박함과 치열함 속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며, 서로를 향한 열린 마음과 상대를 이해해 보려는 배려의 마음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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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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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이 짧은 다섯 글자는 순식간에 공기를 데우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정말 마법 같은 단어다.

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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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이 마법 같은 단어를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세상이 험악해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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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한국식 학벌주의는 통하지 않았다. 학생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길 원하는지 등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타인에게 설명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여전히 유럽에서 진리로 통하고 있었다.

(...)

어차피 한국에서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는 해외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기죽어 있을 시간에 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라도 더 파헤치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시간에 우리 자신을 알자.

32~3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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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벌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같은 것들 말이다.


저자는 한국과 다른 문화와 이념, 그리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 덕분에 관점과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진짜 중요한 것은 학벌과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앞서 가치있게 여겨야 하는 것은 바로 나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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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생들은 내 말을 반박하고 나에게 불평을 털어놓고 또 가끔은 내가 틀렸다고 지적하기도 해. 그런데 너는 무조건 알겠다고 답하더라."

(...)

교수님의 지적 이후 '리스너'로 살았던 20년을 뒤로하고 이제는 '스피커'로 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내가 하고 싶은 곡은 무엇인지, 왜 이 곡을 꼭 해야 하는지, 이 곡에서 어느 부분을 왜 좋아하는지, 어떻게 가사를 살려 부를 건지 등 나의 계획을 빠짐없이 말씀드렸다. 그러면 교수님은 이제 프로페셔널해졌구나. 앞으로도 쭉 그렇게 가는 거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교수님의 응원에 힘입어 그 학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40~4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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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유학 가서 겪는 가장 큰 딜레마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한국인에게 있어 '예스맨'이 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진짜 중요한 가치들이 결여되면서, 대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들 말이다.


아마 저자를 담당했던 교수님은 이런 부분을 꿰뚫어 보고 저자를 아끼는 마음에 지적을 하신 게 아닐까 싶다. 다행히 저자는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았고 '예스맨'에서 '노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스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스맨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내 주관은 명확히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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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도 오붓하게 데이트할 시간이 필요해. 같이 패션쇼를 보러 가거든.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 그러니 사샤가 우는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9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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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큰 안목으로 길게 보면 이것이 정답이다. 어떤 이들은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를 위해 같이 살아야 하고, 아이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결코 아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특히 개개인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보다 팍스(PACS: 시민 연대협약) 제도가 더 활발히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 제도는 성인 두 사람이 성별에 관계없이 함께 공동의 삶을 꾸려나가도록 만든 것으로 결혼보다는 가볍고 동거보다는 깊은 의미로 해석된다.


아이 위주로 가정이 꾸려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프랑스는 아이가 생기면 부부 위주로 가정이 재편된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때문에, 부부는 자신들의 삶과 생활을 더 귀하게 여기도 아이와도 정서적으로 독립되면서 행복한 부모,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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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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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가 유학을 떠나게 된 저자를 다정히 품어주었던 이웃들 덕분에 저자는 행복한 기억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을 더 깊이 알아 갈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은 물론,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생활하면서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편견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간 유학이었지만, 실상 두렵고 무서운 일들이 많았을 것이고, 또 혼자 어쩌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낯선 이방인의 간곡한 부탁을 서슴없이 들어온 이웃들과 그들의 배려 덕분에 저자는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남자친구를 따라 무턱대고 독일 쾰른으로 이주한 저자의 적응기에서 증명된다.


내 것을 내어주며, 불편함을 감소하고, 모르는 이에게 베푸는 친절이 요즘 시대에는' 불필요함' 혹은 '무관심함'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졌지만, 분명 우리도 그렇게 살던 때가 있었다.


저자는 그것을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다시 경험하게 되면서 '다정함'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유행은 특정 주기를 기준으로 돌고 돈다고 이야기한다. 팍팍하고 날카로운 시대의 분위기도 유행처럼 다시 돌고 돌아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전환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도 한때 '정'의 민족이라 불릴 만큼 따뜻한 시절이 분명 존재했었다. 그런 만큼, 언젠가 다시 훈풍이 도는 시절이 돌아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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