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평온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남성의 폭력성과 상처 입은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 모음집!"
얇지만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어, 항상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벌써 네 권째 읽고 쓰는 중이다.
매번 느끼지만, 읽을 때는 '그런가 보다'하고 가볍게 읽는데, 막상 읽고 난 후 쓰다 보면 이야기는 방대하게 늘어난다. 그래서 항상 깜짝 놀라곤 하는데, 어쩌면 그게 바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 속에 생략된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재미, 그리고 함축적으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 파악, 여기에 더해 책 한 권이 전하는 주제에 대해 세세하게 파고들다 보면, 몇 시간이 뚝딱 흘러가 있곤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클레어 키건의 책이 읽고 싶은 책이면서 동시에 쓰기에는 어려운 책이다. 그렇지만 역시나 쓰고 난 뒤에는 어떤 책보다 뿌듯함을 느끼게 만드는 책! 그게 바로 클레어 키건의 책이 아닐까 한다.
총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여자와 남자에 관한 세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책이다. 미국판은 유일하게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고 하는데, 부제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책을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듯하다.
세 편의 단편에는 각각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는데, 여성은 피해자로, 남성은 한마디로 '개자식'인 인간들이 등장한다.
세 편은 대략 10년씩의 시차를 두고 쓰인 단편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남성의 폭력과 우월주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최근에 쓰인 작품부터 오래전에 쓰인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는데, 뒤로 갈수록 수위는 더 높아진다.
남성들의 욕망과 본능, 그리고 이기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흘러가는 현실은 매우 냉혹하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래서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더불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파문은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여성들은 몰랐던, 혹은 빙산의 일각으로만 알고 있던 남성의 세계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어쩐지 오래전부터 남성과 여성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달까?
편중된 시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성 모두를 도끼눈 뜨고 지켜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남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
깊이 들여다보기
=====
■너무 늦은 시간
화창한 어느 여름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시선은 회사에 출근해 일하는 카헐의 모습을 따라 움직인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카헐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당장은 알 수 없는 형태로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그러다가 불현듯 결혼을 약속했던 한 여성과의 일화를 회상하게 되면서 독자는 남성인 카헐의 문제점과 결혼이 파기된 이유를 알게 된다.
카헐은 전형적인 아일랜드 남자로, 그 이야기인즉슨 여성 혐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매우 인색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랑이라 생각했던 여성을 떠나보내게 된다.
먼저 청혼해 놓고, 이기적이고 생색만 낼 줄 아는 남자를 여자는 견디다 못해 결국 떠나게 된다. 중간에 분명 기회가 있었지만, 카헐은 잠시 뜨끔할 뿐 그뿐이다.
약혼녀였던 사빈이 떠난 이후에도 카헐은 여전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인신공격과 모욕적인 욕설을 내뱉는 것으로 도망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뵐 하우스'라는 작가 레지던스에 당첨된 여성 주인공은 2주간 느긋하게 쉬며 글을 쓸 목적으로 이곳에 방문하게 된다. 마침 도착한 날은 그녀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었는데, 어떤 남성으로 인해 완벽했던 하루를 망치게 된다.
그는 독문학 교수로 자신을 소개하며 대뜸 여자가 머물고 있는 집을 둘러보고 싶다 말한다. 이에 여성은 방해받은 것이 불쾌했지만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방문을 허락한다.
심지어 케이크까지 만들어 대접하지만,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남자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그녀를 비난하며 놀기만 한다고 비난한다.
여자는 이내 남자를 쫓아내고 자신만의 재주로 그를 향한 통쾌한 복수를 감행한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쓸 줄 아는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은밀하게 복수를 진행한 것이다.
■남극
다른 남자와의 하룻밤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가 12월의 어느 날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홀로 도시로 떠나던 날 호기심을 실행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볼일을 모두 마친 그녀는 마침내 예쁘게 차려입고 술집에 들어서게 되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와 소원하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아껴주고 보살펴주는 느낌이 좋아 호기심을 충족했다고 느끼지만, 이내 서서히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미처 피할새도 없이 남자의 꾀임에 넘어간 여자는 그에게 붙들려 자신이 생각하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문장들
=====
■너무 늦은 시간
-----
"그럼 뭐가 문제야?"
(...)
"이것들. 당신 물건 전부. 이거 다." 카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
카헐은 나이키 운동화와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내가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들어올 줄 알았어?"
"그냥 너무 많아서." 그가 설명하려 애썼다.
(...)
"감당할 게 너무 많잖아."
(...)
"이해가 안 가." 사빈이 말했다. 내가 이달 말에 라스가의 아파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건 당신도 알았잖아. 당신이 여기로 오라고, 결혼하자고 했잖아."
"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
34~35페이지 中
-----
본능에 이끌려 청혼을 한 남자는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자 감당할 것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기저에는 여성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이 대화에서 감당할 게 많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내용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
"그거 알아? 내가 이 집에서 저녁을 만들었을 때 당신은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어. 식재료를 산 적도 없고, 아침 식사를 차려준 적도 없어."
38페이지 中
-----
남성(카헐)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초반에는 여성이 과소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결말에 다다라서는 이 시선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리를 잘하는 여자친구 사빈이 좋다면서도 식재료비를 부담하거나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여주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요즘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신 또래의 남자 절반은 그냥 우리가 입 닥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대. 남자들은 제멋대로 살아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한심하게 군대."
(...)
"또 어떤 남자들한테 우리는 씹년일 뿐이래."
(...)
"아,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방식이 그래." 카헐이 말했다. "그냥 아일랜드의 관습이야. 보통 아무 의미도 없어."
37~38페이지 中
-----
사빈은 카헐의 동료와 카헐의 입을 통해 아일랜드 남자들의 한심함과 무례함, 그리고 그들이 여성을 어떻게 보는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카헐로 인해 그녀는 결국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른다.
-----
"당신, 여성 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39페이지 中
-----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아일랜드의 여성 혐오가 사실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어쩌면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들을 통해 아일랜드가 가진 사회 문제 중 하나인 '여성 혐오 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
"수고가 많으시네요."
"전혀 수고스럽지 않아요."
그녀는 이 말이, 이 말을 하는 것이, 그가 그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지겨웠다.
71페이지 中
-----
충분히 무례하고 수고스러운 일을 벌인 장본인이, 계속해서 '수고가 많으시네요'라는 말을 하며 '전혀 수고스럽지 않아요'라는 말을 유도하게 만드는 일은 지겨우면서도 짜증 나는 일이다.
남자는 계속해서 수고스러운 일을 벌일 뿐만 아니라, 황당한 충고까지 늘어놓으며 여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
뵐의 서재로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
그녀는 '애킬섬'이라고 쓰고 날짜를 적었다. 그런 다음 잠시 멈추고 생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생각했다.
(...)
그녀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쾌활하고 복잡하며 결혼하지 않은 여주인공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기 오고 싶어 한다던 독일인 교수의 말을,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
(...)
어느 순간 고개를 들자 땅 위로 흘러드는 빛이 보였다. 햇빛을 보니 자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간절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 태양이 떠올랐다.
(...)
이미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절개하여 기후를, 그리고 갈망을 집어넣었다.
(...)
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 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78~81페이지 中
-----
생일날 마침 작가들이 바라 마지않는 작가 레지던스 '뵐 하우스'에 입성하게 된 여자는 한껏 기대감을 가지고 즐거운 하루를 보낼 생각에 흥분한 상태다.
하지만, 첫날 그녀를 방해하는 한 남자로 인해 결국 엉망진창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이에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남성을 길고 고통스럽게 죽일 방법을 모의한다.
글을 쓰는 것으로 말이다.
■남극
-----
"난 지옥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반쯤 얼어 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96페이지 中
-----
복선처럼 그녀는 남자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국 그녀의 말처럼 지옥을 경험하며 그녀는 숨을 거두게 된다.
-----
그녀는 남극을,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를 생각했다. 그런 다음 지옥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했다.
112페이지 中
-----
그녀가 왜 지옥을 추운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그녀는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남극을 떠올리게 된다.
한 번의 일탈을 꿈꿨던 그녀는 결국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다시는 따뜻하고 안온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
마무리
=====
얇은 두께에 속아 가벼운 소설로 생각해서 읽기 시작하지만, 결코 예상처럼 끝나지 않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읽고 나면 자꾸만 내용을 곱씹게 만든다.
이번 소설은 남녀 관계를 다룬 세 편의 단편을 통해 아일랜드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남녀의 불균형한 관계, 그리고 남성의 폭력성과 우월주의에 대해 다루며 조용하지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거나 따뜻하기보다, 우중충하고 어두운데, 이는 평소의 아일랜드 날씨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단순히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말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씁쓸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데,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대략 10년 정도의 시차를 건너 뛸수록 여성들의 태도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1999년에 발표된 <남극>에서 여성은 결국 위험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하지만 2007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남자를 내쫓거나 2022년 <너무 늦은 시간>에서는 아예 파혼을 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시대가 변해도 남성들의 폭력성과 우월주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성들의 태도는 확연히 바뀌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의견을 개진하고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일방적이고 무례한 남성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낸다.
덕분에 어쩌면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과 <너무 늦은 시간>에 존재하는 여성들은 이후에 더 좋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만든다. 후퇴하는 남성들과는 다르게, 더 앞으로 전진하는 찬란한 여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