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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 내 삶의 예술가 되기 - 천경의 미셸 푸코 읽기
천경 지음 / 북코리아 / 2024년 6월
평점 :
다양한 책을 통해 경험을 쌓으면서, 철학자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이 책을 읽을 용기를 냈고, 그렇게 '처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와 '천경'이라는 작가를 만났다.
처음이었기에 설렜고, 궁금했다. 미셸 푸코가 추구하는 철학은 무엇일지, 그것을 천경이라는 작가는 어떻게 해석했을지, 또 이것이 나에게는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너무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필드에 들어서니, 눈이 팽팽 돌았다. 처음부터 저자가 경고성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올지는 몰랐다.
저자는 1부의 내용이 어려울 것이라 경고했고, 2부와 3부는 쉽고 재밌을 거라 말했다. 더불어 매우 자주! 체계를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흐름에 따라 글을 썼다는 것을 강조했다.
소개 글이나 추천글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무색할 정도였고, 저자가 말한 경고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또 실감했다. 특히 서문에서 1부까지의 내용은 심각했는데, 내용이 연결되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계속 읽었다. 저자가 초반에 경고한 부분이 있었기에 어쨌든 꾹꾹 눌러 담으며 다음 장을 향해 나아갔다. 1부의 내용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 노력도 했다. 그런데 막상 다 읽고 난 지금까지도 과연 1부의 내용이 꼭 필요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2부 내용부터는 1부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앞선 경고대로 내용은 흘러가고 있었으나 중간중간 신변 잡담 수준의 이야기로 빠지는 것은 비일비재했고, 명료하지 않은 구성은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왜 작가 개인의 하소연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건 나뿐인가?)
저자는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왜 저자의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그런 재미를 주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스스로 자신의 글이 울퉁불퉁하고, 유아적이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평하고, 자신의 글쓰기는 경로를 자주 이탈한다고 말하며 전혀 고칠 생각은 없으니 아이러니하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을 무어라 칭해야 할까?)
미셸 푸코의 원문을 읽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최소 1/3에서 1/2 정도는 걸러서 읽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특히 나와 같이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아니 어쩌면 원문을 먼저 읽는 것이 더 이로울지도 모르겠다) 군더더기 제외하고 <실존의 미학>의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102페이지부터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저자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재미를 반감시킨 덕분에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된 미셸 푸코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의 경우는 자신의 그런 책쓰기 방법에 대해 너무 당당하게 밝히며, 그것이 자신의 글쓰기 방식이라 말하는 것을 보고 조금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그럼에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은 책이기에, 나름대로 미셸 푸코의 사상과 철학을 정리해 보았다. 최대한 처음 읽는 사람들도 이해 가능한 범주로 정리해 보려 노력했고, 핵심 내용들만 기재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저자가 쓴 단어들로 인해 다소 이해가 가지 않거나 복잡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미셸 푸코의 말기 작품인 《주체의 해석학》을 재해석하여 서술하고 있다. 1부에는 미셸 푸코의 철학인 통치성과 주체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2부에서는 <주체의 해석학>에 대한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미셸 푸코가 말하는 주체화를 이루기 위한 일상의 여러 방법들을 담고 있다.
여러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책이 말하는 실존의 미학이라 말하는 핵심 내용은 결국 '외부의 가치기준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발명하여 역량을 펼쳐내는 삶'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와의 관계가 중요하며,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말한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주체화 방식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주체화 방식을 다루는데, 현대 시대와 비교하며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더불어 '나'라는 주체를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어떤 행동양식으로 살아갈지를 함께 고민해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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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하기>의 핵심 단어인 '자기배려(자기 돌봄)'를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감정이나 인식이나 진실이나 관계나 성공이나 돈이나 이런 것을 대하는 태도 바꾸기, 즉각 행동 바꾸기.
(...)
<주체의 해석학>은 그 방법을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로마 철학자들의 실천 기법들을 통해 알려준다.
(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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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간략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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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은 푸코가 1981~1982년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녹취해서 출간한 책이다. 푸코의 말기작에 속하는 이 책은 자기 수련의 방법적 도구로서 '실존의 테크닉'들에 대해 논한다.
실존의 테크닉이란 지금과 다른 주체를 생산하는 기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른 주체는 주체의 외부에 있는 진리들을 자신의 신체에 기입하여 진리와 주체가 만나는 매 순간 탄생한다. 스스로 자신의 주체화 양식을 만들어가는 예술 행위를 푸코는 '실존의 테크닉'이라고 정의한다.
푸코가 보기에 고대인의 주체화 방식, 기독교인의 주체화 방식, 근/현대인의 주체화 방식을 각각 상이하다. <주체의 해석학>은 이 중 고대인의 주체화 방식, 즉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주체화 방식을 다룬다.
<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고대의 철학이란 자기배려와 뗄 수 없는 관계로,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배려와 자기인식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푸코의 정의에 따르면 자기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다. 그러나 자기에게 몰두하거나 자신을 돌보는 행위는 개인의 이기적인 행복 추구와는 거리가 있다.
자기배려는 "영혼을 부단히 훌륭하게 만드는 일"과 관련된다. 때문에 자기와 적절한 관계를 맺는 '자기배려'는 타자와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고, 자기는 물론 타인과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다.
한편 자기인식 역시 당시에는 "처신함에 있어서도 지나침이 있어서는 안 됨을 의미" 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는 안 되고, 힘과 대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원칙"이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자기인식이란 자기배려라는 "일반적인 범주의 한한 형식"이었다. 한마디로 자기인식은 자기배려를 위한 것이었다. 즉, "내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는 한에서만 내 자신을 알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이다.
푸코가 지향하는 자기배려에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일련의 자기 수련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근데 '데카르트의 순간'에 와서부터는 '인식'화 되어버리면서 철학이 "탁월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자기배려'가 아니라 '인식의 여정'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지식을 축적하고 소유하는 영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많이 아는 놈, 많이 가진 놈이 장땡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앎을 실천과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이 주목받고, 이런 방식을 선호하다 보니 여기에는 자기배려가 끼어들 틈이 없다.
존재는 변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자기를 내기에 걸고 죽을힘을 다해 수련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제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체의 변모를 위한 적극적인 자기배려를 했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변화를 위해 자기를 돌보며 살아야 해!'라는 것이 전제된 사회였다는 말이다.
나의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고 느낀다면, 존재를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힘인 자기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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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개념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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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자기 테크놀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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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기란 자기 문제에서 출발한 물음과 실천이어야 한다. 여기서 '자기 돌봄'이 시작된다. 나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실존의 테크닉'을 각자 고안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만큼이나 많은 실존의 기술을 우리는 발명할 수 있다.
이 기술을 푸코는 '자기 테크놀로지'라고 부른다. 자기 테크놀로지란 '자신의 행동 규칙들을 스스로 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 내에서 자신을 변화, 변모시키며, 자신의 생을 작품으로 만들려고 하는 숙고된 자발적인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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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대의 자기 수련 기술들을 소환해 보면 참고할 만하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글쓰기, 경청 독서, 사유와 표상 점검, 죽음 수련, 양생술, 자기통제, 각종 정화 의식 등 수많은 '영성'이 실천됐다.
12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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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의 적절한 관계 맺음은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 맺음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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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계의 삶을 살고 있으니 내가 조금 변한다는 것은 세상을 조금 변화시키는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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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들처럼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할 때, 나를 잘 돌보고 있는지, 자식을 잘 돌보고 있는지, 세상을 잘 돌보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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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삶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2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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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자기 돌봄을 위해 자기만의 실존 기술을 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자기 테크놀로지'라고 명명했는데, 이 방법들은 그 어떤 외부 조건에 상관하지 말고, 자신만의 기술을 선택하여 길러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것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자기 수련 기술들을 살펴보면, 글쓰기, 독서, 자기 통제, 명상 등으로 일상 가까이에서 실천하고 수련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푸코가 말하는 성적 쾌락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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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의 자기 배려란 성적 욕구를 지배하는 것과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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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활용과 관련해서 그리스인은 세 가지 형태의 자기배려 기술을 연마했다.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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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편에서 "그리스인의 도덕적 주요 관심사는 한마디로 잘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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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잘하는 것의 핵심이 '자기배려'라면 이 자기배려의 내용은 쾌락을 적절히 관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즉, 그리스인에게 '성적 쾌락의 활용'은 자기배려의 특권적 영역이었다.
이 쾌락을 잘 활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그리스인은 양생술, 가정관리술, 소년과의 연애술 등 세 가지 자기배려 기술을 스스로 수련했다. 이는 성적 영역에서 도덕적 주체로 자기를 배려하는 세 가지 기술이다.
양생술은 동양에서도 발견되는데, 시기와 내용이 유사한 점이 흥미롭다. 무엇보다 정액을 소중히 여기는 점이 양측 모두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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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고대 그리스의 양생술이란 자기의 신체와 맺는 관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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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용과 금지, 정상과 일탈의 외부 기준은 없다. 스스로 체질과 기후, 신체 특성이나 환경 등을 고려해 성적 욕구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무절제한 성행위를 알아서 삼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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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회는 생식만이 성관계의 목적의 아니었다. 남성 간의 성행위를 더 문제시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과도하지 않아야 했다.
가정관리술도 흥미롭다. 가정관리술이란 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배려의 기술이다. 이것은 부인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자기를 다스리는 기술이다. 동양도 그랬지만, 이 시기 그리스도 부인은 남편과 대등한 지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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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보다 조금 나은 처지인 부인의 위치를 인정하면서, 부인 및 하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정관리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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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남편의 자기배려란 자기 절제의 테크닉을 발휘해서 부인이 잘 수용케 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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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기술로서 연애술은 동양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연애술은 성인 남성과 소년이 관계를 맺을 때 성인 남성이 자신을 배려하는 기술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사회에서는 이성애나 동성애가 모두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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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그리스 사회에서는 성행위 시 수동적인 자세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점이다. 자유인 남성이 수동적인 여성 역할을 하는 것을 자연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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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성장 중인 소년과의 성관계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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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술의 자기배려 역시 자기를 배려하는 동시에 소년을 배려하는 기술이다.
131~1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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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말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성적 쾌락의 활용을 살펴보면 크게 3가지 형태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인데 이를 통해 당시 여성의 지위와 성에 있어서만큼은 현대 시대보다 더 개방되어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모든 자기배려는 종교, 정치, 교육제도 및 외부의 도덕법칙 등 그 어떤 것에서도 독립적인 영역이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수정하며 관계를 설정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개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성과학과 삶의 쾌락
▷성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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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근대의 생명관리 권력(생명 권력)을 한편으로 개인의 신체 층위에서 작동하는 규율권력과 종 인구에 작동하는 조절통제 권력으로 나눈다. 성은 이 두 층의 모두에게 작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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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개인과 종의 생명을 통제, 관리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즉, 성은 '육체에 대한 미시 권력'을 행사하면서 동시에 사회 전체나 사회집단에 개입하는 통로였다. 권력의 입맛에 맞게 그들이 바라는 결과를 유도하는 전략, 전술의 도구로 이용된 것이 성이었다.
14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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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필요에 따라 성이 범람하는데, 이렇게 발명한 성 담론은 새로운 규범이 된다. 새로운 정상과 비정상이 생산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런 절차와 과정을 거쳐 탄생한 인간과학 중 하나가 성과학이라고 본다. '성과학'은 과학의 영역인 듯 보이지만 실은 권력과 공모해서 탄생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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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푸코는 '성'이라는 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성은 18세기 이후 만들어진 복합적인 어떤 관념을 지칭한다. 즉, 섹슈얼리티란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으로 항구적이고 초월적인 무엇이 아니라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근대 권력은 성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까지 파고들어와서 인간을 통제하고 개조한다.
14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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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근대 성 담론이 규격화해놓은 성 정체성의 예속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쾌락 행위를 발명하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성'의 영역에조차 침투해서 정상적인 쾌락의 조건과 범위를 만들어 금을 그어주는 권력이라니!
14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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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근대에 들어서 성은 권력의 입맛에 따라 전략, 전술의 도구로 전략했다 말하며, 이것에 대해 '성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권력과 공모해서 탄생한 지식이라는 뜻으로, 이것에서 벗어나라 말한다.
▷삶의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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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이성애나 동성애, 양성애 등을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자기의 몸을 실험하는 방식일 뿐이다. 자신의 새로운 쾌락을 발명하고, 자기 삶을 어떤 쾌락의 장으로 보직하는 것, 어떤 쾌락의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쾌락이란 성적 쾌락만 의미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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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쾌락의 이미지를 성적 이미지로 한정하거나 환원한다. 푸코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쾌락을 활용할 것인가와 연결된다. 쾌락은 성의 영역을 포함해서 삶의 모든 순간 향유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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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쾌락을 우리가 제대로 생산해서 삶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n 개의 쾌락이 있다. n 개의 쾌락을 각자 고안하여 쾌락의 장소인 자기 몸의 주인이 되는 쾌락의 삶이 중요하다. 쾌락은 누구에게는 즐거움이고, 누구에게는 고요함이나 평정이며, 누구에게는 희열의 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맛보는 지극한 지적 환희다!
그래서 푸코는 고대인이 자기의 쾌락 행위를 조절하여 윤리적 존재로 주체화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인간은 쾌락을 산출하며 생을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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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에게 맞는 쾌락을,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택해서, 적절한 상대와 적절한 빈도와 강도로 즐기면 된다. 이 사적인 영역에 대해 누구도 정상적인 체위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고대인은 쾌락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45~14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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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성의 쾌락을 포함해 삶의 모든 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즐거움을 각자 고안해서 발명하라 말한다. 자신만이 느끼는 감정의 쾌락은 때로 고요함 일 수도 있고, 희열이나, 앎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계발하고 양식화하여 기쁘게 살 자유가 있으며, 인간이란 이런 쾌락을 통해 생을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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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말했듯이 전통적인 주권 권력이 규범 권력으로 변하면서, 이런 규범 사회는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눈다. 이것은 무섭다. 비정상 군에 포함되면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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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당간당,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비정상의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렵다. 그것이 '주홍글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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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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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넘어 나의 지금 삶을 박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담 한마디에도 정색한다. 팍팍하고 에누리 없고 긴장하며 서로의 시선과 평가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153~15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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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현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어쩌면 이런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닐까 한다. 권력의 주체가 '나'에서 '사회적 규범'으로 변화하면서, 다름은 그야말로 공포가 되었다.
이때는 객관적 진실로써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보다 오로지 집단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남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다르지 않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팍팍하고 긴장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기준으로 나와 너를 구분 짓는다는 것, 내가 그냥 나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지 새삼 깨닫는다.
■고대 그리스의 세 가지 시간: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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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세계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이 있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이다. 양으로 환원되는 직선적인 시간이다. 아이온의 시간은 현재 속에 과거(기억)가 펼쳐지는 시간이다. 과거는 나의 기억 전체이며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무의식은 영원하다. 그런데 현재라는 순간 속에 무의식(기억)은 접혀 있다. 카아로스의 시간은 기회의 시간이다. 내게 나타난 기회를 잡지 못하면 사라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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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온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지속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과거에 위치하고 있지만 현재와 함께하고 있으며, 영원히 내게 돌아온다. 기억이란 과거를 현재 속에 연장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현재와 함께하는 차이 자체다. 기억은 현재를 만나 어떤 차이를 창조한다.
15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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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온은 언제나 도래한다. 아이온은 내가 만나는 무한의 시간이다. 과거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로 연장되는 시간이며, 현재를 변용하는 미래의 시간이다. 결과적으로 미래를 바꾸는 시간이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와 접속하여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바꾼다. 과거의 시간은 철 지난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춤추게 했던 어떤 날, 어떤 시간이 무한으로 출렁인다. 나를 통찰로 이끈 시간, 나를 사무치게 아프게 했던 시간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 그 아이온을 불러내서 현재를 새로 창조하고, 현재를 바꾸는 에너지가 되도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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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현재를 만나 차이화되는 시간의 생성, 이것이 창조다. 창조는 차이화들이다. 과거란 케케묵은 골동품이 아니다.
이것이 헬레니즘, 로마 시대 철학자들이 과거의 시간을 중시했던 이유다. 이들이 보기에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무이지만 과거는 내 수중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과거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소유물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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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누구도 침범 불가능한 나의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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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은 나의 자산이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나의 역사이며 나다. 아프면 아픈 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거기서 배워야 한다. 자기의 과거를 망각한다는 것은 과거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다.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지길 바라지만, 그가 바라는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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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래와 즉각 연결된다. 미래가 오늘이고 오늘이 미래다! 그리고 오늘에는 항상 어제가 함께하고 있다. 수많은 어제가 내 안에 있다. 이들 중에는 어제를 불러내느냐가 중요하다. 무수한 어제의 기억 중에서 존재의 주인이 되는 힘들과 관계 맺기, 그리고 그 어제의 힘들과 오늘의 힘이 무수한 내일 중에서 어떤 내일을 자기 존재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이것이 삶이다. 이것이 운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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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세네카나 플루타르코스가 과거를 중시한 이유는 현재를 잘 살기 위함이다. 때문에 이들은 '기억 훈련'을 열심히 했다.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의 존재 방식'이니까. 기억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으니까.
161~1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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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세 가지 시간에는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아이온으로, 과거(기억)를 뜻한다. 과거는 모든 것의 접점으로, 현재와 미래와도 통한다.
또 과거는 이미 우리가 축적한 자산으로 어느 누구도 침범 불가능한 영역이다. 과거를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과거를 중시한다는 것은 곧 현재를 잘 사는 방법이자 새로운 미래의 삶을 창조하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스튈티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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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누구에게는 열려 있는 시스템에서는 역으로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것에 걸맞게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기를 제대로 욕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의 주체 되기. <주체의 해석학>에 소개된 세네카의 스튈티티아(비이성, 사유의 동요) 개념을 생각해 본다. 세네카는 자기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을 스튈티티아 상태라고 말한다. 그는 외부의 표상들의 가득해서 항상 동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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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튈티티아 상태의 사람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들어찬 상태다. 너무 많은 싸구려 지식과 정보로 채워진 상태. 세네카는 스튈티티아를 자신을 방치하는 자로 설명한다. 그는 외부 힘의 방향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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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튈티티아 상태를 세네카는 '품위 있게 욕망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한다. 그는 자유롭지 못한 자다. 그의 의지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외부의 시선이나 주의의 반응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그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그의 견해는 지배적 타자들의 견해다.
1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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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튈티티아 상태의 사람은 비이성적이며 스스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기에 항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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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의 존재 방식을 바꿔줄 타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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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즉시 스튈티티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란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에서 끄집어내는 자다. 그런데 이 역할을 철학자가 한다. 헬레니즘, 로마 시대 철학자는 소피스트처럼 궤변을 늘어놓는 사변론자가 아니라 존재 방식을 바꾸도록 안내하는 자다. 그는 스튈티티아 상태의 사람에게 자신을 제대로 욕망하도록 지도한다.
(...)
무엇이든 사회적 코드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는 이가 '삶의 대가'다. 푸코의 실존 미학은 여기서 싹튼다.
(...)
현대 문명이 발명한 엄청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인간은 파멸할지 모른다. 이 지식과 정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168~17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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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튈티티아라는 용어는 처음 들어보지만, 어쩐지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 외부 힘의 방향대로 움직이는 사람,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며 힘 있는 자들의 욕망에 휩쓸리는 사람.
현대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의 유형이다. 이런 스튈티티아에 대해 푸코는 존재방식을 바꿔줄 존재가 필요하며, 여기에는 철학자가 답이라 말한다.
특히나 고대 철학자들은 궤변을 들어놓는 자들이 아닌, 존재방식을 바꾸도록 돕는 안내자들로 옳은 방식으로, 제대로 욕망하도록 지도한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대신해 주는 사람에는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글쎄'라는 답이 나온다. 몇 년 전에는 그나마 '선생님'이나 '스승'을 꼽는 사람들도 몇 있었을 텐데, 요즘의 우리 사회에서 고대시대 철학자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고로, 밀려드는 정보와 지식들을 스스로 통제하고, 올바로 사고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수밖에는 없다. 스스로 자신 삶의 주체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자기배려와 자기 계발
▷현대사회의 자기 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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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들은 '쓰임 받는' 사회의 부품으로서 자기를 부단히 담금질하는 노하우 전수에 집중한다. 자기와 타인과 사회를 무한 긍정하며, 자기 자신과의 무한 경쟁을 요구한다. 희망을 주면서 자기 착취를 부추긴다.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는 이 같은 담론은 자기를 갈취하는 가장 노련한 방법이다.
이런 자기 계발 담론의 문제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저서<피로사회>에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 했으며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즉 '나는 할 수 있다'는 과잉 긍정이 사회 주요 코드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위주의 현대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아니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이 넘치는 사회.
173~17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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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의 자기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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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자기배려는 오늘날 성공학 도서로 분류되는 자기 계발서들과는 다른 전망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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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변화시키는 자기 돌봄은 즉각 타자와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역으로 어떤 타자의 자기 돌봄은 그와 연결된 나를 변화시킨다. 내가 상대에게 영향을 받듯이 상대 또한 나에게 영향을 받는다. 이 주고받는 관계에서 각자의 능동성이 요구된다. 자기배려란 이 능동성까지를 함의한다. 그러니까 나의 자기배려란 타자의 자기배려와 연결되며, 타자의 자기배려에 의한 나의 주체성 수정을 동시적으로 수행한다. 주체가 변형되는 한에서 진리, 진실에 접근할 수 있고 주체의 존재 방식의 수정을 위해 자기배려가 요청된다.
176~1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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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자기배려와 현대사회의 자기 계발을 살펴보면 완전히 극과 극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 계발은 언젠가부터 나 자신을 부품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형태로 진화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인드 뒤에 서서히 망가져가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반면, 고대의 자기배려는 자기 돌봄을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긍정의 신호들이 번져나감을 알 수 있다. 이 주고받는 관계는 각자의 능동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주체의 변형은 동시적으로 나와 연결된 타자에게까지 수행된다.
이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존재방식 또한 내가 원하는 형태로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
■자기 지배와 타자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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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일상에서, 자기 삶의 장에서 시작돼야 한다. 정치권에 변하라고 하기 전에 나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17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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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실천을 위해서는 어떤 앎이 요구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실천적 지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든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즉, 욕망과 쾌락을 적절히 제어하기 위해 이 앎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절제의 중요한 요소가 실천적인 앎이다. 이 앎은 진리와 관계한다. 진리에 대한 앎이 자기제어를 위해 필요하다.
이렇게 자기의 쾌락과 일상을 제어할 수 있는 자기 타자를 지배하는 통치자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을 지배하는 자는 자기를 지배하는 자라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가 지배권을 갖게 되면, 타인들을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
권력자는 자기 지배력이 필수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덕목이 바로 절제다. 푸코는 '가장 임금다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왕인 자'라는 고대의 텍스트를 인용한다.
18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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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도시국가에 유용한 인간 교육이란 다름 아닌 자기제어 교육이다.
(...)
말하자면 내가 좋은 인간이 되는 훈련이란 내가 좋은 지도자가 되는 훈련과 같은 것이다. 결국 자기 관리, 가정관리, 국가관리가 동형이라는 결론이다.
18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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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지배하려 들지 마라! 당신 자신의 지배자가 되어라! 그것이 당신 자신과 타자의 지배자가 되는 길이며, 우주의 원리에 합당하다.
(...)
자기를 지배하는 자는 자유인이다. 그는 세상의 흐름에 불안하게 쫓아가지 않는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멈춘다.
(...)
자유는 자기에게 저항하여 삶을 다르게 운용할 능력이 생길 때 확보된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야!'라고 낙담하는 사람은 '난 변하지 않을 거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83~18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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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나의 삶의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배움을 통해서는 자기통제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여 아니라고 생각될 때는 멈출 수 있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 여기에 더해 나만의 삶을 운영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진정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진짜 자유는 통제에서부터 비롯된다. 진리를 깨우쳤다면 실천을 통해 변화를 꾀하고, 좋은 인간이 되는 훈련을 반복한다면 결국 나 자신은 물론 저절로 타자까지 통제하는 상황에 도래하게 될 것이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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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사유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유를 바깥의 사유라고 명명합니다. 바깥의 사유란 말하자면 사유되지 않는 것을 사유하기입니다.
(...)
그것은 현재에 억압된 것, 파묻혀버린 것을 들춰내는 사유이며 현재의 지층들 너머의 사유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유이기도 합니다. 바깥의 사유는 타자들과 접촉하는 사유입니다.
(...)
굳어버린 현재를 갈아엎고 묻혀버린 과거의 것을 불러오며, 언어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는 사건들을 만나는 사유이니까요.
그래서 푸코에게 사유하기란 저항하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때 사유한다는 것은 실천하다는 것이 됩니다. 실존의 미학이란 다름 아닌 바깥의 사유를 자기 삶의 실천으로서의 바깥의 힘들과 관계 맺기.
(...)
바깥의 사유는 바깥의 사유를 내 삶의 장으로 끌어와서 내 삶을 구성하는 힘으로서의 사유입니다.
(...)
외부의 힘에 예속되는 주체화가 아니라 외부의 힘을 자신의 실존을 위해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수련입니다.
(...)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사건들과 조우하는 것이지요. 이 사건들과 나의 마주침으로 '나'라는 주체가 형성됩니다.
(...)
나의 주체화 과정은 내가 사회와 관계하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나의 주체화는 사회의 무수한 힘과 만나는 방식으로 결정됩니다.
191~19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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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지니지 못한 바깥의 것들을 만나 새롭게 변화를 꾀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타인과 접촉하며 관계를 맺고, 매 순간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 '나'와 마주하는 것.
이 모든 것에는 '외부'가 아닌, '내'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고,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새롭게 유입된 사유는 여러 과정을 거쳐 '나'라는 주체를 만든다.
■공감, 자기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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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헬레니즘 시대의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는 관계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봤다.
(...)
관계적 지식이란 인간을 둘러싼 세계, 사물, 타인에 대한 앎이면서 동시에 이것들과 나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계적 앎이란 한마디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다.
19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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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적 지식은 세상 만물을 나와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여 얻어낸 것이다.
그래서 데메트리우스는 이런 앎을 유익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앎은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준다.
19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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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란 타자화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
타자와 하는 실천이 습관이 되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
나의 관점으로만 보이던 세상에 무수한 눈높이의 관점들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자기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놀라운 마법을 이 순간 경험한다.
19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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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공감한다는 것은 서로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가해자도 피해자고 없다. 관계적인 삶과 충만한 삶이란 동전의 앞, 뒷면처럼 붙어있다. 때문에 공감을 강조하면 피해자가 되고 손해 볼 거라는 논리는 기우다. 서로 영향 관계를 주고받기 때문에 누군가의 고통이 누군가의 행복이 될 수 없다. 그물코 하나가 찢어지면 나머지 모든 그물코에 영향을 주듯이.
(...)
결론적으로 '공감하기'는 '나와 너의 구별 없애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자기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열쇠다.
19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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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부족한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공감'이 아닐까 싶다. 타자화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감옥에 갇혀 '왜 저래'만 연발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눈이 뜨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꽤 많은 관점들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마법이라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공부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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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성의 역사: 쾌락의 활용>에서 철학이라는 것을 '사고에서의 고행', 즉 '자기의 훈련'이라고 말한다. 자기의 훈련이란 시도하는 것이다. 이 시도란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변형시키려는 시험'이다. 푸코는 변화될 수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진리라고 말한다.
(...)
진리는 인간을 바꾼다. 이것이 '진리'의 몫이다. 존재의 전면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공부다.
20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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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한다는 것은 곧 수련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련한다는 것은 곧 무언가 변화를 촉구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에 진리는 인간을 바꾸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몫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기 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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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자기 수양에서의 자기 전향이 중요한 테마가 된다. 전향은 서구의 자기 테크놀로지 중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푸코는 말한다. 여기서 전향이란 '자기로의 회귀', '자기 자신으로의 선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전향'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전향이나 기독교의 개종과는 다른 층위에서 논의된다. 그것은 사유에 한정되기보다 '행동 도식'에 가깝다.
플라톤의 텍스트에 나타난 전향의 개념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
요약하면 외관으로부터 시선 돌리기, 자기로 회기 하기, 존재론적 본향으로 되돌아가기다. 플라톤의 전향은 이 덧없는 감각 세계에서 영원한 천상의 세계(이데아)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며, 상기를 통해 자신의 신성을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해방하는 행위다. 자기로 전향한다는 것은 인식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21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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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주목하고 있는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자기 전향'은 자신과 단절하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와의 단절이다. 자기 주변 것들과의 단절이다.
(...)
외부에서 시선을 거두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
또 이때 전향은 '능동-주체화'다. 이 능동-주체화는 개종에서처럼 느닷없이 존재가 단절을 경험하는 갑작스러운 변형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길고 연속적인 과정이다.
(...)
그러니까 타자들로부터 해방되어 자기를 응시하는 것은 자신이 애초에 설정한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함이다.
(...)
자기 수양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그것은 정신적인 집중 훈련이라는 실천적 도식이다.
212~21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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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전향이란 자기 수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데 정신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는 행위다.
(..)
더 잘 실천하기 위해, 더 잘 행위 하기 위해 전향이 요청되는 것이다.
(...)
능동적으로 자기를 개종하고 전향하여 도달하는 영역이다. 힘든 실천을 부단히 통과한 자가 다다르는 경지다.
21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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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향이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하자면, 곧 자기 집중이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 한다. 요즘같이 이것저것 시선이 어지러운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한때는 멀티플레이어라는 말이 유행하고 또 이것이 능력 있음이라는 것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이것이 잘못된 개념으로 밝혀졌다.
주변의 어지러운 것들과 단절하는 것, 내 안의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목표하는 것에 다다르기 위해 집중하는 행위 등 자기 전향을 통해 이제는 나로의 회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행위야말로 진짜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최적의 방법이자, 행위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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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화의 기술들: 자기 돌봄 실천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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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휘폼네마타(글쓰기) 활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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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서신 교환, 경구 메모, 논설 교환 등 글쓰기와 독서를 자기배려와 타자 배려의 중요한 기예로 본다. 여기서 서신 교환과 '휘폼네마타(요약메모)'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휘폼네마타는 독서나 대화, 강의 내용을 요약한 메모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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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 교환이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라면, 휘폼네마타는 '바깥에서 안으로' 향한다.
(...)
편지를 받고 뭔가 깨닫는 순간 나는 변용되는 것이다. 휘폼네마타는 바깥의 진리들을 기록해서 문서 고화한 후, 그것을 내 피와 살에 새기는 것이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이 휘폼네마타를 돌려보기도 하고 이를 기반으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
(..)
휘폼네마타는 넓은 의미로는 '씌어진 모든 주석과 모든 형태의 씌어진 기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용약 메모도 휘폼네마타지만, 독서나 자신의 생각을 쓴 글도 휘폼네마타에 포함된다. 독서 후에 독서 내용을 글로 써서 기록한 것도 휘폼네마타다.
서신 교환은 엄밀한 의미에서 휘폼네마타와 다르다.
(...)
서신교환은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서신 교환이 양자 모두를 성장시킨다.
227~2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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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라틴어 명상이란 그리스어 실사와 동사를 번역한 말이다. 이때 동사는 '연습하다', '훈련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즉 사유 훈련을 의미하는데, '사유를 자기화하고 그것을 확신하여 정신에 새겨지게 하는 것'이다. '진실을 사유하는 주체'에서 '적절히 행동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목표다.
23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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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 메모 습관은 뭔가를 취한 후 자기만의 무늬를 그려내는 실천이다.
(...)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써야 한다. 쓰는 습관은 쓰기의 기예와 삶의 깨달음도 함께 준다.
2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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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돌봄의 실천 과제 첫 번째는 휘폼네마타라고 하는 글쓰기다. 바깥에서 얻은 지식이나 깨달음을 글로 쓰는 것으로, 독서나 대화, 강의 등의 내용을 메모한 것을 말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다시 한번 자각하고, 몸에 깊숙이 새겨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말하며 지속적인 실천 행위를 통해 습관화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독후감 쓰기, 서평 쓰기, 일기 쓰기, 필사하기, 강의나 명사의 말 기록하기 등을 활용할 수 있다.
2. 파르헤지아(솔직히 말하기) 활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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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웅변술과 대척점에 파르헤지아(솔직히 말하기)가 있다. 파르헤지아는 '솔직히 말하기, 말의 자유, 말해야 될 때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해주며, 수사학이나 아첨과 대립되는 솔직함'이다.
한편 웅변술은 논리적이고 정합적으로 진실 관계를 사유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을 부추기고 환호하게 한다. 웅변술은 사실 관계의 진실성과는 별도로 청중을 흥분하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분노케 하고, 박수 치게 한다. 충동적이고 맹목적으로 광신하게 하는 기술일 수 있다.
2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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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자기 수련이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진실된 담론을 체현화하는 것이 자기 수련이다.
(...)
참된 담론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참된 담론의 보유자인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
이때 수련자들은 정숙, 독서, 경청, 글쓰기 등을 통해 참된 담론을 지니는 훈련을 한다.
(...)
참된 담론을 지닌 스승은 '파르헤지아라는 일반적 형식 내에서' 참된 담론을 전승해야 한다. 이때 파르헤지아는 스승 입장에서 제자에게 언표되는 담론의 '기술적 절차'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파르헤지아, 웅변술도 대상을 전제한다. 웅변술이 대중 설득술의 일환이라면 파르헤지아는 진실한 담론을 전승하는 자의 방법적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웅변술은 자신이 믿는 진실을 대상도 믿게 하려는 수사학적 기술이며, 그 혜택이 웅변하는 자에게 가장 많이 돌아간다는 것이 고대 철학자들의 견해다. 그러나 파르헤지아는 그 혜택이 오로지 제자들에게, 즉 타자에게 돌아가는 이타성을 띤다.
(...)
파르헤지아는 타자가 진실한 담론을 주체화하도록 하는 지도자의 테크닉이지만, 동시에 '발화 주체와 행위 주체의 일치'가 전제된다.
다시 말해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스승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행하는 존재다.
(...)
또한 파르헤지아는 아첨과도 대비된다. 아첨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갖는 것이 파르헤지아의 또 다른 전제다.
236~2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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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스스로의 스승 되기. 스승 없는 최초의 파르헤지아를 내게 이식해서 존재 방식을 변모시킨 나는 나의 스승이 된다. 그것은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스승에게서 배우는 존재의 개심이며 변화다. 자기를 넘어 자기에게 다가가는 스스로의 스승이며 스스로의 제자 되기.
23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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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는 웅변술과 파르헤지아를 비교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기회를 통해 웅변술과 파르헤지아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서 각각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진실한 담론을 통해 전승하는 자의 방법적 도구, 발화 주제와 행위 주최자의 일치, 제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감 등을 통해 문득 소크라테스가 떠올랐는데, 어쩌면 파르헤지아에 가장 가까운 이가 아니었나 싶다.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할 줄 아는 것, 솔직하게 말하는 것, 아첨하지 않는 것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꼭 스승이 없더라도 스스로 스승이 되어 파르헤지아를 연습하고 실천해 보면 어떨까?
3. 나만의 파라스케우(장비) 장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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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은 스트레스를 대비한 문장들을 마음과 근육과 신경에 저장하면서 살았다.
(...)
이것을 고대인은 파라스케우에(장비, 채비)라고 설명한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파라스케우에를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 데 필요충분한 동작의 총체, 실천의 총체'라고 설명한다.
(....)
이 정언은 스승들이 발화한 문장이나 전승하는 성인의 말씀, 스스로 설정한 문장 등이다. 그는 이것을 암송해서 자기의 이성이나 의지, 성정과 일체가 되도록 한다. 그러니까 파라스케우에는 '이성에 기초한 담론들'이며 합리적이고 참된 자연의 본성에 합치되는 '장비'로서 즉각 행동을 유도하고 명령하는 담론이다.
(...)
우리가 방향을 잃고 기우뚱하는 것은 내면의 나침반이 없어서다. 나의 나침반을 수중에 지니고 살면, 그것은 즉각 제동을 건다. 즉시 구조 받을 수 있다.
244~2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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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고대인들처럼 파라스케우에(장비)가 준비되어 있다면 어떨까? 지금보다는 훨씬 더 수월하게 하루를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담담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담론들, 즉각 행동을 유도하는 담론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담론들을 적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보면 어떨까?
길을 잃었을 때,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 이것들은 즉각적으로 나를 구조해 줄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4. 분노 다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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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헬레니즘, 로마 시대 분노의 윤리는 권력 행사의 문제와 연관해서 나타난다. 즉 타자에게 분노하는 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
분노라는 것은 권력자가 자기 지휘권에 속하는 자들에게 지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2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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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주 분노하다 보면 분노를 발생시키는 뉴런 연결 조합이 계속 활성화, 공고화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의식적으로 분노를 줄이면 이 연결 조합은 불활성화되고 변형된다. 분노 횟수를 줄여보자. 어느 순간 분노를 발생시키는 연결 조합은 사라지거나 비활성화된다. 분노는 습관이다.
따라서 오늘 하루, 이번 한 주 격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장기적으로 실천하다 보면 분노의 연결 회로는 희미해진다.
251~25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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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분노에 대해 권력자가 지위권에 속하는 자들에게 지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했는데, 현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가부장적인 아버지-가족, 직장 상사-부하직원, 힘센 남성-여자친구 등 여전히 권력자는 힘없는 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분노를 쏟아낸다.
이런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횟수를 줄이는 것을 추천하고 있는데, 분노도 결국 습관이기에 분노 회로를 차단하거나 비활성화 시켜야만 결국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불쑥 튀어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5.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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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도 세네카와 유사한 논리로 역경과 고통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
난관과 시련은 그 자체로 악이 될 수 있으나 이겨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악이 아니다. 고통과 역경은 섭리이며, 세계 질서에서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난관은 유익하다!
(...)
정리하면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등 스토아 학자들에게 시련과 고통은 신의 섭리에 속한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 그는 자신을 수련하며, 수련하는 삶 자체가 인생의 목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완성된다.
(...)
모욕 행위는 악이지만 나에게는 선으로 기능한다. 나의 인내심과 관용을 시험하고 나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시련과 역경은 선이 된다. 인간의 주변에 시련을 배치하는 것은 신의 자비심 때문이며, 이 시련은 나를 도약시킨다.
256~25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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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피하려고만 하거나, 행복하다는 주문을 고통의 형상 위에 슬쩍 덧칠한다 해도 고통은 꿈틀꿈틀 도래할 것이다. 이는 내가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를 겪어내고 응시하는 숱한 과정을 통해 실존의 과제가 해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의 선물로 내게 다가온 이유 없는 고통과 시련이라면 그건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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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고통, 나를 방문하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25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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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고통과 시련이 항상 수반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것에 대한 정의는 물론, 우리 삶 또한 달리질 수밖에 없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버리면 이후에 그것은 영원히 고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또다시 고통이 찾아왔을 때 피하거나 더한 고통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 고통을 통해 삶을 배우고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면 이 고통은 고통이 아닌 성장의 밑거름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고통은 무언의 성장 동력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시련과 고통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응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 삶 역시 달라질 것이다.
6.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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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행복해지기는 외부와 나의 권력 배치를 바꾸는 일이다. 내가 당장 행복해지면 바깥의 상황은 힘을 잃는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것은 바깥의 권력에 주도권을 주지 않는 나의 힘 의지의 실현이다. 내가 행복해지는 순간 나를 에워싼 세계가 행복의 자장으로 끌려들어 온다. 즉시 권력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주도권을 내가 쥐면 바깥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주체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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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묘수는 없다. 힘들더라도 실존을 살아내는 것이다. 여기다가 약간만 다른 실천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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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매일매일 조금씩 바꾸면 생각도 바뀌고, 몸의 감각도 바뀐다. 내 삶을 굳건히 지키면서 평소 하던 것과는 다른 실천들을 조금씩 하다 보면 습관이 바뀐다. 안 하던 짓을 해보는 거다. 그러면 업이 바뀌고 업장이 소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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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루치의 삶을 지켜내기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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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괴로움 따위가 근접하지 못하게 하면서 내가 일상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262~2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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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기로 마음먹으면 우리는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 내 마음에 따라 행복은 찾아왔다가 금세 빠져나갈 수도 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불행에 마음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더불어 일상을 지켜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일매일을 굳건히 지키고, 여기에 더해 약간의 변화를 주어 삶에 활력을 더해보자.
그러다 보면 불행이나 괴로움 따위에 마음을 내어줄 일은 없을 것이다.
7. 여가시간 갖기와 공부하기를 통해 창조적인 삶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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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세네카는 시칠리아의 지사로 가 있는 루킬리우스에게 직무 수행 중에도 여가와 면학을 강조했다. 면학이란 독서, 글쓰기 등 문예활동이다. 이것은 루킬리우스가 자신을 '총체적인 정치적 군주'로 착각하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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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고, 법을 넘어서 네 권한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세네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여가생활과 문예활동, 즉 심심할 시간 갖기와 공부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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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시간 갖기와 공부하기는 시선을 전환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일을 멈추고 자연인으로 돌아오면,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풍경들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시야에 낯선 것들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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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현재 과잉 몰두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 현재 등 돌리고 있는 지점을 바라보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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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반성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한 지점에 매이게 된다. 그러면 평생 자신이 보는 것만 보게 된다. 스쳐가는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
269~27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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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과 창조의 시간은 현실의 나와 거리 두기를 할 때 가능해진다. 멈추고 바라보기, 공부하기는 다른 나를 창조하는 행위다.
27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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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어쩌면 휴식과 여가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멈춰서 시선을 전환해 보면, 이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집중하던 것에서 잠시 멀어지는 것,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으로 우리는 평소 못 보던 것을 보는 것은 물론,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부터 당장 현실의 나와 거리 두기를 해보면 어떨까?
8. 기억 훈련과 습관을 혁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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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또한 습관의 동물이기도 하다. 고대인에게는 '인식주체'와 '행동 주체'의 일치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행동 규칙과 원칙을 체화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몸 따로, 생각 따로인 사태가 벌어지기 쉽다. 의식 점검은 '진실의 윤리적 주체를 구축하는 데 지속적인 지표이며 매일 저녁 재평가해야 하는' 자기 테크놀로지였다.
27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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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고치기도 망각을 막기도 어렵다. 망각은 필요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습관이 되도록 훈련할 것, 수시로 습관을 혁명할 것, 매 사태마다 새로운 습관을 구성할 것. 그것은 매일의 실천이 보여야 가능하다. 크고 작은 구도의 행위들, 즉 자기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존재는 도약한다.
2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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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훈련을 통해 학습하고, 습관을 통해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은 곧 몸과 생각의 일치를 의미한다. 인간은 종종 망각하며, 매번 새로운 상황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수시로 의식 점검과 매 상황마다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훈련을 통해 자기 테크놀로지를 하나씩 구축해 나가면 어떨까 한다.
9. 모욕 권하는 자에게 대처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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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예를 몸이 터득하는 것, 이는 가해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상대의 비윤리적인 삶을 멈추게 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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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서 소리 내어 연습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머리가 알고 있어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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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당하지 않는 자로 설정하고 미리 연습하는 것. 이 수련이 필요하다. 될 때까지 거듭 훈련해야 한다.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주인이 된다. 주인은 자기의 주인이면서 타인 역시 그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자다.
281~28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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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나와 제대로 관계 맺기다. 내가 내 행위와 의지의 주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이 나를 넘볼 수도, 모욕할 수도 없다. 내가 나를 넘보고 모욕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이 나를 넘보고 모욕한다면 내가 나를 넘보고 모욕하는 삶을 살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시길 바란다. 나를 바꾸어야 한다.
28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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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모욕을 당하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처 그 순간에는 대처하지 못하거나 미숙한 처리로 인해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평소 나를 잘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나 자신과 관계를 제대로 맺어야 한다. 내 행위와 의지의 주인이 되어야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내가 나를 잘 컨트롤할 수 있다. 그리고 연습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스스로를 귀한 사람으로 설정하고 인지하는 훈련, 그리고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봄으로써 언제든 바로 대처할 수 있게 준비해두면 무서울 게 없다. 그렇게 나를 바꾸어야 갑작스러운 모욕의 상황에서 현명하게 벗어날 수 있다.
10. 삶을 길게 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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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시간을 타인의 자유에 맡기지 않는 '시간의 가장 인색한 보호자'야말로 삶을 길게 사는 사람이며, 한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거라는 '신성하고 특별한 구분된' 시간 속으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자다. 이 시간은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난 부분으로' 어떤 '결핍에도 공포에도 질병의 습격에도 위협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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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세네카는 '게으른 바쁜' 자들 또한 문제성 인간이라고 지적한다.
288~28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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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와 함께 하는 자, 자기의 과거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자, 그는 과거의 자산을 향유하며 현재와 미래의 불안이나 위협에 끄떡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가한 사람이란 자기가 한가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고 자각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세네카는 재미있는 말을 한다. 예지를 지닌 사람만이 한가함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과거의 현자들에게 배우는 자들이다. 과거의 현자들이란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같은 자들인데, 이들은 아름다운 앎의 세계로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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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과 대화하는 자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누구와도 우정을 나누고, 크든 작든 온갖 문제를 상담해 준다. 그래서 과거를 만나라고 세네카는 힘주어 주장하는 듯싶다. 이것이야말로 짧은 삶을 길게 사는 방식이다.
2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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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위인들을 만나는 것은 삶을 길게 사는,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시험이며 전율이다.
2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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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짧게 느껴진다면, 길게 사는 방법이 여기 있다. 내 시간을 타인의 손에 맡기지 말 것, 시간에 흔들리지 말 것, 마지막으로 현자들을 통해 삶을 배우는 것이다.
특히 현자들을 통해 앎의 세계에 빠져든다면 온갖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덕분에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것은 물론, 엉뚱한 곳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
11. 죽음 명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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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언표와 연관된 무수한 기호가 나의 삶으로 쳐들어오는 순간, 카오스가 시작된다. 죽음을 명상하는 수련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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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더 젊은이들이 죽음을 명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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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명상을 자주 하다 보면 인간은 결단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298~29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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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더 많이 떠올리지만, 실상은 젊은이들이야말로 죽음을 떠올리는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더 빨리,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삶에 제대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완숙한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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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세네카는 사람들에게 서둘러 노년으로 가라고 주문할 정도였다. 고대문화에서 노년은 영예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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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시기의 노년은 '지혜이며 쇠약'으로 대표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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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노년은 '긍정의 시기, 완결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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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관계의 완결성에 도달한 자가 바로 노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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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되기 전에 서둘러 노년으로 가서 삶을 마무리하라는 것은 노년이 되기도 전에 죽음이 오는 사태를 막으라는 것이다. 즉, 노년이 되기 전이란 자기완성 상태에 도달하기 전이라는 의미다. 삶을 완결했으므로 죽음이 오더라도 두려울 것도, 더 완성할 것도 없는 완숙한 시기가 노년이다.
303~30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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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온 자의 노년은 아름답다. 자기 내부에서 만족과 완전한 기쁨에 도달한 상태. 그에게는 자기 고유의 실존 문제 따위는 없다. 그는 생로병사와 탐진치의 문제를 진작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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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라도 변하자. 한편, 젊은이와 중, 장년층들은 자기완성에 대해 생각하자. 인간이 사는 목적은 자기를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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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안부를 묻자. '잘살고 계신가?'
305~30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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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이라고 하면 힘없고, 초라한 행색을 떠올리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이미지였다. 노년은 지혜, 긍정의 시기, 자기 관계의 완결성에 도달한 자와 같은 도달하고 싶은 이미지가 더 강했다.
우리 또한 이런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매일을 잘 살아간다면, 노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 지금부터 변하면 가능하다.
13.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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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는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나는 찰나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내 삶의 주인공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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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다만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다. 저 흙도, 저 개망초 꽃도,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우리의 삶이란 저 노루 궁둥이 버섯의 고군분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노루 궁둥이 버섯도 가치 있고 눈물겹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309~31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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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중심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치 있고, 여기에 우위는 없다. 모두 공평하다.
그러므로 괜한 억측과 편견에 사로잡혀 '나'만 귀하다고 여기지 말자. 우리 모두는 귀하고 가치 있는 생명체임을 잊지 말자.
14. 내 안에 갇힌 에너지를 방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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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영성을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를 변형시키는 실천의 형식으로 본다.
31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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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냄은 온전한 나와 접속하는 것이며, 묶인 원초적인 강렬한 힘이 자기 길을 가도록 배려하기다. 묶인 자들은 이 에너지를 제대로 방출하지 못하기에 엽기적인 방식으로 이 에너지를 사용한다. 온갖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전쟁과 갈등, 싸움과 증오가 발생한다.
우울한가? 사는 것이 권태로운가?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는가? 누군가가 미친 듯이 미우신가? 묶여있어서 그렇다. 풀려남의 영성을 생각해 보자.
32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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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기뻤던 일을 떠올려 본 후 그것을 해보라! 위험한 일을 한 가지 해보라! 어렸을 때 하고 싶었는데 포기한 것이 있다면 작게라도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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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갇힌 에너지를 '잘' 방면하기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과제다.
3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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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도 풀어주지 않으면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내 안의 에너지 또한 마찬가지다. 종종 평소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보자. 어떤 것이든 좋다.
이를 통해 내 안에 갇힌 에너지를 잘 풀어내다 보면, 전쟁, 갈등, 싸움, 증오와 같은 것들은 언젠가 와해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지구 평화는 어쩌면 이런 소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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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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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정을 지나왔다. 처음 만나는 철학자를 허무하게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붙잡아 보았다. 언젠가 원문을 통해 제대로 만날 것을 희망하며, 미셸 푸코 실존의 미학 <주체의 해석학>을 깊게 다뤄보았다.
길게 펼쳐놔서 내용이 대단히 많아 보이지만, 실상 결론은 하나다. 무엇이든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자기 돌봄을 통해 삶과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 감정, 인식, 관계, 태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변화를 주고 즉각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나'보다 외부 상황이나 사람들에 비중을 더 많이 둔다. 내 의견보다 남의 의견, 내 상황보다 타인의 상황에 초점을 맞춰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항상 그 외의 것들에 밀리는 상황인 것이다.
푸코는 어쩌면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산업이 발달할수록, 도시가 커져갈수록 점점 '나'는 없어지고 외부에서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내'가 변해야 다른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