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쑥쑥 표현 쑥쑥 초등 사자성어 초등학생을 위한 고전 학습만화
송재환 지음, 인호빵(남지은, 김인호)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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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제일 어려워했던 과목 중에 하나인 한자. 학년이 올라가면서 한자가 교육과정에서 멀어지기도 했고, 이후에는 굳이 한자 공부를 할 일이 없어 관심 밖으로 밀려났지만, 성인이 된 이후 오히려 관심과 필요에 의해 더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한자 공부 중에서도 특히 사자성어는 그냥 한자를 읽고 쓰는 것, 뜻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전을 읽고 이해하거나 현시대의 상황이나 태도에 대해 빗대어 이야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 혹은 표현력에 여러모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효용가치가 크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특히 사자성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면서 그 가치에 대해 더 절감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어휘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인듯하다. 나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거나 글로 표현할 때, 그리고 어떤 문장을 이해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초등 사자성어> 책을 보고 궁금증이 일어 접하게 되었는데, 살펴보면서 '요즘 책 참 잘 만드네'라는 깨달음과 부러운 마음이 문득 든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옥편 사전을 뒤적이며 재미없는 한자의 음과 뜻을 찾고, 시험을 위한 사자성어를 줄줄 외우는데 그쳤는데, 실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자성어를 만화와 접목해 재미있게 만든 것을 보니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다시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55구절의 사자성어를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초등학생을 20년간 가르치며 강의와 작가까지 겸하고 있는 경력을 가진 이가 엮은 책으로, 그만의 내공이 가득 느껴졌다. 억지로, 강하게 '공부'시키기 보다, 자연스럽게 만화를 보며 실생활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단순히 사자성어를 엮어 낸 책이 아니라, 왜 사자성어를 배워야 하고 중요한 이유는 뭔지, 또 초등학생을 둔 부모님이 어떻게 접근하면 좋은지, 아이와 어떻게 소통하며 일상생활에서 사자성어를 활용해 어휘력을 키울 수 있는지 등의 실용적인 방안도 함께 제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습득'보다 '활용'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 아이들도 더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 좋게 다가왔다. 공부는 억지로 시키면 더 하기 싫기 마련인데, 만화를 통해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익히고, 또 사자성어를 활용한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상상력과 문법력까지 기른다는 점에서 참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을 어떻게 보면 되는지, 구성안에 대한 자세한 안내도 표기되어 있어 사전에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공부 계획서를 세울 때 참고하면 좋을듯하다.

 

55구절의 사자성어는 위의 2개 페이지를 기본 구성으로 사자성어의 음과 뜻, 풀이와 함께 만화를 통해 실제 활용되는 예를 쉽게 전달한다. 이후 해당 사자성어를 다시 한번 자세히 짚어주고 활용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시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자의 뜻과 음, 풀이를 다시 한번 정리해 주고, 이에 대한 고사 성어와 연결된 배경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이 사자성어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문장을 적어 확인할 수 있다. 한글과 영어를 처음 접할 때 그러하듯, 직접 한자 한자 써보며 익히는 시간도 가진다. 이후 퀴즈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의 클래스로 확인하면 된다.

 

저자는 꼭 이 절차를 따르지 않더라도 앞의 만화만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공부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데, 반복해서 보다 보면 저절로 학습효과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구성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55구절이후 마련되어 있던 '쉬어가는 마당' 부분이다. 다양한 학습방법으로 상상력과 문장력 등을 키울 수 있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 다양하게 사고하고 습득할 수 있게 이끌어 주어 재미와 학습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 이 부분을 잘 활용해 보길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을 살펴보면서 역시 공부는 재미있게 하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특히 노는 게 제일 좋은 초등학생 시절에는 억지와 강요로 붙들여놓기 보다 아이가 흥미를 끌만한 소재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이와 부모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 보니 어쩐지 학습 의욕이 뿜뿜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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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어머니
이명직 지음 / 좋은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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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재산상속'에 대한 어두운 이면이자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엄마와 어머니>.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배다른 이복남매가 얽힌 가족사까지 더하여 마치 드라마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권선징악,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우리가 어릴 적 보던 백설공주, 콩쥐팥쥐, 신데렐라 등의 동화 속 흔한 계모의 이미지와 함께 역시 악인은 벌을 받고 끝나는 해피엔딩을 바라게 된다. 특히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두 손 모아 제대로 된 마침표로 끝맺음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우리네 현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재산을 둘러싼 상속문제와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남의 것을 탐내기 보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성과와 성취의 맛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배다른 오 남매 중 장손인 이태종을 중심으로 내용을 바라보는 게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이자 책임을 지고 가야 하는 당사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재산 싸움을 벌이는 재산에 대해서 개인의 욕심과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자 가정과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서술되는 배다른 오 남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이 엄마 혹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사연들을 통해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각 인물에 대입해 보며 소설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것 같다.

 

본격적인 소설 이야기에 앞서 오 남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이들의 기본적인 관계성을 살펴보고 소설의 내용도 집중도 있게 살펴보자.

 

■이태빈
-태종보다 3살 위 친누나
-정실부인인 우에다 모모코가 낳은 첫 딸
-능력 없는 남편으로 인해 현재 부산 시장에서 생선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때 동생 이태종이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으나 남편이 오히려 이를 남발하여 바람피우고 다른 여자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이제는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이태종(장손)
-정실부인인 우에다 모모코가 낳은 첫째 아들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제조 수출하는 중소기업 사장
-아내 김세화, 딸 아해린, 아들 이세종
-현재 여의도 주상복합아파트 37층에서 거주 중
-5년 만에 연간 미화 100만 불 수출, 창업한지 10년에 공장을 세웠으며, 35년이 지난 지금은 직원 수가 200명에 연간 3천만 불의 수출을 달성하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3천만 불 수출 탑을 수상한 건실한 중소기업 대표다.

 

■이태수
-후처였으나 호적상 정실부인이 된 사금자의 첫째 아들
-미국에서도 유명한 내과 의사이며 그가 설립한 병원의 병원장
-가족들로부터 멀리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미국 유학 후 그곳에서 미국 아내 결혼해 아들 앤드류와 함께 35년째 생활 중이다.

 

■이정빈
-후처였으나 호적상 정실부인이 된 사금자의 첫째 딸
-LA 북쪽 변두리에 살면서 대학에서 아동 병리학 교수로 재직 중
-미국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과도 따로 살고 있다.
-현재 형편이 좋지 않음

 

■이선빈
-후처였으나 호적상 정실부인이 된 사금자의 막내딸
- 교수로 한국에서 생활 중
-남편하고 별거 중
-엄마 사금자와 가장 닮은 딸로, 현재 과거보다 100배 이상 오른 예지동 상가건물의 명의신탁을 맡고 있다.

 

■이성열
-이태종 외 4명 자녀의 아버지
-성종 임금의 둘째 아들 계성군의 17대 장손
-장자로 상속하는 재산을 담보로 종로구 예지동에 상가건물 구매

 

■우에다 모모코
-태종과 태빈의 친엄마, 일본인
-우에다는 태종의 아버지 이성열의 정실부인


■사금자
-이태빈, 이태종의 의붓어머니이자 이태수, 이정빈, 이선빈의 친엄마
-태빈과 태종에게는 '또 어머니'로 불림
-청주 사 씨로 1920년 함경북도 기흥군에서 영주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그녀는 그곳에서 여자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여 공무원 생활 2년 차에 같은 부서에서 과장으로 근무 중이던 유부남 이성열을 만나게 되었다.
-사금자는 태종의 일본인 친엄마 우에다 모모코를 일본으로 내쫓은 장본인이다.
-남편이 죽은 후 태종의 적금과 예지동 상가건물을 문서위조로 자신의 명의로 돌려 편취함. (예지동 상가건물의 지분은 1/2 태종, 1/4 남편, 1/4 사금자)

 

■자영이 엄마
-사금자와 의자매를 맺고 있는 관계로 60년간 친구이자 언니 동생 하는 사이
-현재는 서울 오장동에서 함흥 냉면 식당을 운영 중
-사금자는 부산에서 살던 시절 곤란할 때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오장동 건물에 있는 냉면 식당을 저렴하게 세를 주고 있음

 

■자영이
-뉴욕 대학에서 3년간 포스트 닥터로 연구 활동을 한 후 미국에서 체육학과 교수로 활동함
-엄마와 사금자를 알뜰히 챙김

 

■사금자 간병인
-52살의 조선족 간병인으로 약 2년간 사금자를 간병함
-정빈과 선빈 사이에서 사금자의 병실 정보통 역할을 맡음

 

■정한국
-당시 무진회사 지점장으로 근무(국민은행 전신)
-당시 40대 중반으로 사금자의 내연남으로 추측
-예치동 상가건물의 명의를 사금자로 돌리는데 협조하고 조력한 인물
-이성열을 죽음으로 몬 인물

 

 

사금자의 사망 소식부터 시작되는 소설의 스토리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과거 그들 사이에 얽힌 속 사정들을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다. 그들 부모님 세대에서부터 얽혔던 이야기와 다섯 남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읽다 보면 감정이 널을 뛴다. 

 

정실부인의 자리와 재산까지 탐하고 그 자리를 꿰찬 사금자의 인생은 불륜에서 시작해 온갖 악행과 도망으로 채워져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엔 수많은 미스터리와 비밀이 숨겨져 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은 이 이야기의 전반을 뒤덮고 있는 자식들 간의 재산 다툼의 본격적인 서막이나 다름없다.

 

=====
이러한 이성열의 결정은 일본인 처를 일본으로 밀항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
그녀가 두고 간 집과 많은 귀중품들은 모두 사금자의 몫이 되었다. 이때가 이태종의 나이가 열 살이고 이태빈은 열세 살 그리고 이태수는 일곱 살이었다.

18페이지 中
=====

 

사금자의 꾀에 정실부인인 우에다 모모코를 내쫓고 첩을 서류상 정실부인으로 입적하게 되면서 정실부인의 자식인 태빈과 태종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 자라게 되고, 오히려 사금자의 맏아들 태수는 가장 귀한 아들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나게 된다.

 

이런 환경은 오히려 자식들을 집과 멀어지게 만드는데, 성인이 된 이후 각자의 삶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만드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특히 더 이들이 멀어지게 된 계기에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후 소유하고 있던 태종의 적금과 문중에서 장자를 통해 내려오는 재산의 건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가 사금자가 개인 재산으로 갈취하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미스터리한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편취한 온갖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돌린 사금자는 태종의 고발을 눈치채고 일찍이 미국으로 도피한다. 그렇게 23년을 미국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어느 날 몸에 이상이 생겨 반신불수가 되고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면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한국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다시 사금자의 입국 상황이 알려지게 되고 그동안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잠시 스톱 상태였던 그녀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사금자는 꿈에서 호통치는 남편을 만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자신이 쌓은 과업에 대해 돌아보게 되면서 자신이 오래전 편취한 태종의 적금과 예지동 상가건물을 되돌려 줄 결심을 한다. 그러나 이미 그동안 100배나 오른 건물 시세에 오랫동안 이 건물을 관리하고 있던 막내딸 선빈은 자신이 혼자 독식할 생각에 증여를 강요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 건물을 이용해 한몫 챙길 생각에 다른 마음을 품고 남매들을 회유하는 정빈이 있다.

 

이들의 재산상속을 향한 집념과 의지는 지독한데,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거리낌 없이 행한다. 이 대상에는 온갖 질병(협심증, 신장병, 폐렴, 그리고 간경화 질환)을 앓으면서 죽음을 앞둔 그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병실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독설은 기본이고, 아무도 몰래 수면제를 쓰거나 녹음기를 설치하고, 문서를 위조하거나 사람을 매수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와 방법을 모색한다. 

 

추후 어머니 사금자가 죽고, 지난한 그들의 긴 법정 싸움 끝에 마침내 결말에 다다른다. 여기에는 판사의 판결문과 실제 법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적 묘사가 디테일하게 묘사되는데, 현실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두 손 꼭 모으고 '제발'이라는 말을 절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가족으로서의 인연과 과거는 끝을 맺게 되는데, 어쩐지 끝맺음은 개운치가 않다. 아직 이 소설 속에서 확인해야 할 몇 가지 떡밥과 제대로 된 죄를 받지 않고 죽는 순간마저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간 것만 같은 얄미운 사금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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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곳에 묻히기 위해서는 조상님들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종부로서 조상의 재산을 탐했고, 종손의 재산을 가로챘으며, 남편을 억울하게 죽게 했고, 본처를 일본으로 도망치게 했으며, 의붓자식을 괄시했으며, 자신이 난 자식들에는 온갖 정성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녀의 죄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대도 자영이 엄마에게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은 그래도 남편에게 떳떳함이 있었던가? 아니면 자영이 엄마가 태종에게 요청하면 이곳에 묻힐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사금자는 영리한 여자였으며, 언제나 도전의식이 강한 여자였다.

28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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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이것마저도 현실과 너무 닮아서 더 속이 터지는 부분도 있는데, 이 책의 제목처럼 현실과 이상이 이처럼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엄마와 어머니>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평생 외롭고 도망자의 신세로 살았지만 어쨌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욕망을 모두 이룬 사금자. 그리고 그런 엄마를 쏙 빼닮은 이선빈.

 

=====
그녀는 막내딸 얼굴을 꼼꼼히 올려다보았다.
(...)
사금자는 막내의 얼굴에서 그 옛날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전신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선빈은 엄마의 사십 대 중반의 얼굴 바로 그 얼굴이었다. 말하는 모습까지도 똑같았다. 선빈은 영락 없는 사금자의 분신이었다.
(...)
선빈 역시 자신이 늙으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 번 더 엄마의 얼굴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선빈은 엄마가 안쓰럽고, 불쌍해서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지금은 단판 승부가 더 중요했다.

8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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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거울처럼 닮은 이들 모녀의 모습을 보면서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선빈의 노후도 이와 같지 않을까 짐작만 해본다. 가장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태수는 정작 가족과 나라를 버리고 먼 이국땅에서 자신만의 둥지를 튼 걸 보면 인생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다시금 첫 페이지로 돌아와보니 사금자가 더욱더 괘씸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몇 가지 궁금증도 인다.

 

이정빈이 건설사와 협의한 계약사항은 원하던 대로 이행되었을까? 자신의 불륜을 덮기 위해 남편의 죽음을 방조한 정 지점장과는 또 다른 비밀은 없을까? 병실에서 일어난 일을 정빈과 선빈 모두에게 공유한 간병인에게 다른 의도는 없을까? 선빈은 왜 아무도 몰래 엄마 사금자에게 수면제를 먹게 했을까? 그 외 사금자가 한국과 미국에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으로 쫓겨난 태종과 태빈의 엄마 우에다 모모코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왜 한 번도 금쪽같은 자식들을 보러 오지 않았을까?

 

이 와중에 엄마도 재산도 뺏긴 태종이 건강한 가족과 튼튼한 사업체를 건실하게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더불어 의사와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더 많은 욕망을 갈구하는 이들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도 든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 마음이 복잡했던 <엄마와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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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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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이나 책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한 번도 그의 작품은 읽어보지 못한듯하다. 왜 유명한지, 어떤 작품을 썼는지 내심 궁금하던 차에 기회가 닿아 이번에 읽게 되었다. 일전에 작가들의 방과 특성을 소개하는 책을 통해 마르셀 프루스트가 대표적인 '와식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소개 글을 보고 누워서 글을 쓴다는 것에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게 다가왔던 작가 중 하나인데, 와식 생활을 통해 어떤 글을 썼을지 기대감이 한껏 올라갔다.

 

이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 7편 전권을 책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는 구성으로, 스토리는 그의 의식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과거 속 잃어버린 시간과 감각을 일깨워 사물과 사람, 풍경 등을 세밀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한 문체가 특징이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서 부록처럼 추가되어 있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구성 및 소개 글을 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처음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읽고 조금, 아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정 사물이나 생각, 상황적 묘사가 적나라한 것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서술되어 있어, 상황 자체를 파악하기 보다 문체를 쫓아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마치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고 버티고 있는 형상으로 글귀를 따라가게 되는 느낌이라 어디에서 끊어야 할지,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도래했었다.

 

그래서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지고 뒤편을 먼저 확인하게 되었는데, 뒤편에 잘 정리되어 있던 작가와 작품의 설명 덕에 한결 어려움을 덜 수 있었다. 더불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유튜브와 검색 등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서평을 쓰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했다. 일반적인 문학작품들과는 괴가 달라, 줄거리를 서술하거나 내용을 담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새삼 왜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소설을 20세기 소설 중 질적, 양적으로 최고로 평가하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더불어 만약 누군가 나에게 어떤 상황이나 생각들을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서술해 보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봤는데, 절대 그처럼 표현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어나 어휘, 문장력, 표현력을 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불릴 수도 없을뿐더러, 꼬리에 꼬리를 무는 표현력들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가 죽기 직전까지 누워서 쓴 이 귀하디 귀한 작품을 나와 같이 어려움을 겪는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기록해 보고자 한다.

 

이 작품은 소설을 읽기에 앞서 작가와 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데,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은 서술 방식 덕에 일반 소설처럼 무턱대로 접근하다가는 상황 파악은 고사하고 그의 문체에 갇혀 허우적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으니, 그의 삶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삶과 이 소설이 크게 동떨어지지 않다고 느꼈는데, 그의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사상이나 집안 배경, 과거의 기억들에서 비롯된 의식의 흐름을 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히 그의 가계도를 정리해 보았다.

 

 

프루스트 가문의 '아드리앙 프루스트'와 베유 가문의 '잔 베유'가 사랑으로 맺어지면서 프랑스 최악의 시기에 첫째 아들 마르셀 프루스트가 태어나게 된다. 아버지 아드리앙 프루스트가 의학 박사로 콜레라를 차단하는데 성공해서 출세했고, 외가의 외할아버지 역시 유복한 주식 중개인이라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게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두 가문의 분위기와 상반된 환경은 마르셀을 정신적으로 혼란함과 성숙함의 양가감정을 들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토착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아버지 쪽과 유태계 프랑스 부르주아의 다정한 어머니 쪽 사이에서 실질적으로는 평생 외가 쪽을 의지처로 삼아 살았다고 하니 여러 면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났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는 세상에서 어머니를 가장 사랑했으며, 가장 비참한 일은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만큼 약간의 철부지 성향도 보인다.

 

이 책의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으로를 읽다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묘사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드러나는데, 보수적이고 위압적인 아버지의 특성과 아들을 보듬어 주며 잠자기 전 키스를 해주는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와 더불어 마르셀이 얼마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지, 잠자기 전 키스를 꼭 받고 싶어 벌이는 에피소드는 소설이라기보다 현실감을 강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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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다가 어머니가 주무시러 올라올 때 내가 복도에 가서 서 있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복도에서 어머니에게 또 한 번 저녁 인사를 하기 위하여 그대로 일어나 있는 것을 어머니가 보기라도 한다면, 집안 사람들은 이제는 나를 집에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내일 나를 학교의 기숙사로 보낼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좋다! 설혹 5분 후에 창 너머로 이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될지언정, 역시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에게 저녁 인사를 하는 거다. 이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길에 나는 너무나 깊이 들어갔다. 이제는 되돌아올 수 없다.

3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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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약했고, 그래서인지 예민했으며, 응석 부리는 애정으로 늘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다. 이만큼 그에 대해 파악하고 보니 왜 그가 '와식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짐작이 가는 바다.

 

그렇게 일평생 늙어가는 어머니 품에서 서른 살이 넘도록 빈둥거리며 응석받이로 산 그가 자신의 요양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요양지 에비앙에 갔을 때 어머니가 심한 요독증으로 발작 증상을 일으키면서 남동생 로베르가 어머니를 파리로 모셔가게 되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사망하게 되면서 그의 시간은 멈춰버린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마치 죽기 전에 이 작품을 끝마쳐야 하는 게 소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져누운 상태에서도 원고를 추고하고 가필하고 손질하면서 병약한 몸을 돌보지도 않고 그는 끝끝내 이 작품의 원고를 마무리 짓고, 폐의 종양이 터져 동생의 품에서 "엄마"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눈을 감게 된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의 생에 최초이자 최고로 자신의 의지를 모두 다 바친 인생을 투영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무의식과 의식 너머 '나'를 담아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쓰고 또 썼을 것이다. 그가 쓴 이 7편의 소설 히스토리를 살펴보다 보면, 처음 소설의 내용과는 다르게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내용이 덧붙여져 불어났다고 하는데, 어쩌면 죽음을 앞둔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삶과 생각을 다 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쩐지 병중에 누워서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갔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복잡한 감정이 인다.

 

1편을 쓰고 어떤 출판사에서도 출간을 해주지 않아 첫 출간을 자비로 진행했던 그. 다행히 큰 성공을 거두면서 유명 인사가 되지만, 그 영광을 오래 누리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마르셀 프루스트. 오랜 시간 자신의 삶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 보이며 무의식의 기억을 다듬고, 써 내려가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픽션(허구)을 빌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기억들을 되짚어 기록하고 되새기며 잊힌 그날의 사고, 추억, 느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여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놓쳐버린 그때 그날의 그것을 적확하게 눈에 그리듯 이처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그의 더없이 소중하고 경건한 의식행위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써 내려간 7편의 소설은 그의 내면의 심리가 버무려져 하나하나 의식의 흐름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태로 전개된다. 그래서 그 어떤 표현도 단순하지 않다. 복잡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저마다의 색이 하나씩 덧입혀져 색을 띠고 형체를 만들어간다. 그만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성실하게 쌓은 그가 그린 세계 속에서 나만의 잃어버린 시간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순서대로 따르지 않아도 좋다. 손이 가는 페이지부터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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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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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들리지 않던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들려온다면 어떨까? 신기할까? 아니면 두려울까? 처음에는 이런 재미있는 상상과 질문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사물들의 소리를 통해 환상적이고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는 메타버스 공간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삶의 의미와 통찰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끔 우리는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진짜일까?', '이게 맞나?', '진짜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되뇔때가 있다. 그 질문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만족 혹은 불만족에서 기인한 믿기 어려운 현실 혹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표현할 때 떠올리곤 하는데, 평온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도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해 진짜 삶과 의미, 본성에 대해 깨달으며 점차 성장해가는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는데, 철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실질적인 질문이기도 한 이 질문들을 통해 슬픔과 괴로움, 상실속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 우주로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소년'의 관점과 '소년의 책'의 관점이 번갈아가며 전개되는데, 대부분의 이야기는 책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소년의 책은 소년을 졸졸 따라다니며 가장 민망한 순간까지도 기록하고 전부 이야기 함으로써 우리에게 소년이 태어나기 전의 일부터,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감정상태까지 세세하게 전달한다. 덕분에 우리는 소년의 입으로 전해듣지 못하는 디테일한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들여다볼 수 있다.

 

책은 소년과의 대화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3인칭 관점에서 모든것을 낱낱이 서술하기도 하며, 때로 책 자신의 의견을 전해주기도 한다. 덕분에 다양한 관점과 객관적인 시각에서 삶과 사물, 사람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 순간들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스토리를 살펴보면, 가난하지만 꽤 행복했던 단란한 세가족에게 어느날 갑작스레 불행이 닥친다. 다정하고 세심했던 아빠이자 남편인 켄지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트럭 사고로 사망하게 된것이다. 그때 나이 열두살이었던 베니는 또래에 비해 항상 작은 소년이었고, 발육이 더뎠지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의 체중이 불기 시작한 그 해 성장이 거의 멈췄다. 그리고 이내 베니는 일년이 지난이후부터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것을 시작으로 점차 온갖 물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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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이 곧바로 들리기 시작한건 아냐. 아빠가 죽고 1년쯤 지났을 때까지는 그냥 아빠 목소리뿐이었어. 그냥 밤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화장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부르는 정도였어.

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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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목소리들은 꿈속에서도 나타났어. 그렇게 시작된 거야. 마치 한 목소리가 문을 열자, 나머지가 따라 들어온 것 같았어. 꿈은 문과 같아. 또 다른 현실로 들어가는 관문 같은 거지. 그리고 일단 그 문이 열리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6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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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둥이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던 켄지의 죽음은 이 가정에 혼란과 슬픔을 남기게 되면서 서서히 이들의 일상은 무너져 간다. 이 상황을 잘 이겨내보고자 나름 애는 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상황은 악화되어 간다.

 

1월에 열네 살이 된 베니는 중학교의 마지막 학년, 점점 더 많은 물건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치료사,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나중에는 병원에도 가게 된다. 엄마 애너벨은 남편의 유품, 재택 근무로 일하면서 쌓인 자료들, 각종 소품과 취미등을 계속 쌓아가면서 사물에 갇혀사는 일상을 보내게 되는데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부와는 단절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사춘기에 접어든 베니는 점점 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혼란속에 일탈을 감행하게 되고 그렇게 집을 벗어나 도달한 곳은 어릴적 좋아했던 공공도서관이다. 그곳에서 그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각종 소리들이 무한한 정적을 유지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계속해서 공공도서관을 방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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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그가 혼자 책을 읽을 때는 마치 책 함께 읽는 날에 아이들이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것처럼, 머릿속의 모든 목소리들이 점점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심지어 일과를 마치며 책을 카트에 반납하고 도서관 정문을 통과해 거리로 나간뒤에도 목소리가 조용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었다.
(...)
세상의 소리가 지워지고 물속에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책장에 쓰인 말들이 그의 머릿속 목소리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 조용히 숙고할 거리를 준것 같았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1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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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베니는 정신과 병원에 입원당시 주웠던 쪽지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고 이를 마치 하나의 계시라고 생각하며 지령을 읽고 따라하기 시작한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듯, 막연하지만 우연찮게 발견하게 된 쪽지는 어쩌면 당시 베니에게 작은 기쁨이자 희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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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의 주변에서 우주가 재배열되는 것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지령을 읽는 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그는 깨어난 것 같았다. 한때 그가 혼돈을 보았던 곳에서 이제는 질서를 인식하게 되었고, 한때 질서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 혼돈이 되었지만 그 방식이 이상하고 흥미로웠다. 앨리스는 이런 현실과 병동에서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통제하는 비밀스러운 규칙들의 키를 쥐고 있었다.

1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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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속에서 다양한 책을 읽고,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 앨리스(=알레프)와 B맨(=슬라보이=보틀맨)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반면 엄마 애너벨은 생계를 위해 아날로그 시대의 끝을 상징하는 직업을 붙잡고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쇼핑을 하던 중 우연히 쇼핑 카트 안으로 떨어진 책 한권을 구매하게 되고 이것을 읽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정리의 마법: 잡동사니를 치우고 삶을 혁신하는 고대 선불교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정리와 비움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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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순히 잡동사니 물건을 정리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 중 한 명이기도 한, '아이콘'이라는 이름의 일본 승려가 쓴 정신적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선불교적 방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8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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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와 엄마 애너벨은 이렇듯 각자 삶의 전환점을 맞을 기회들을 포착하지만, 중간중간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은 계속해서 뒤따르고, 그러다 포기하고 절망하고 싶은 순간들도 문득문득 다가온다. 그러나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이들 덕분에 다시금 일어나 두발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상에 나홀로 버티는 것 같은 외로움과 절박함속에서 그들의 작은 선의는 삶의 희망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가족이라는 인연이 끊어질 최악의 상황은 새로운 기회의 포문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굳건히 잠겨있던 내면의 사슬을 끊고 자유의지로 일어선 이들의 모습은 삶의 의지를 다시 다지는 첫발을 내디딘 모습처럼 보였다. 마치 우주비행사가 우주에 첫발을 내디딘 것처럼.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갑작스레 잃게 되면서 마치 대재앙 스노글로브에 갇혀 혼란에 빠진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우주 속 넓은세상과 나의 세상이 투명한 유리벽에 가로막혀 끊임없이 좁아드는 압박감속에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나를 압박하고 괴롭게 만들던 유리벽이 깨지면서 진짜 나를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깨짐으로 인해 알게 된 진짜 세상을.

 

어렸기에 세상의 중심이었을 아빠의 죽음은 소년에게는 커다란 상실감을 가져다 주었을것이다. 그리고 아내이자 엄마인 애너벨은 그보다 더 많은 책임감과 슬픔을 느꼈을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미처 슬픔을 표현할 시간도 없었을것이다. 더군다나 그와의 끝이 말다툼으로 끝나버린 상황이라 그녀에게는 죄책감까지 더해지면서 오히려 더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을거란 생각도 든다.

 

이 책은 끝이라고 말하는 죽음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또다른 시작으로 연결되어 다양한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인종, 종교, 사는 모습, 직업, 경제력, 삶의 가치 등 우리가 수없이 비교하고 기준으로 삼았던 것들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이외에도 책에 등장하는 인물과 물건의 소리를 통해 이 책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입체감이 드러나는데, 특히 괴짜같은 다양성을 지닌 인물들의 특성이 유독 눈에 띈다. 한국, 미국, 일본의 혼혈이면서 깔끔하게 정리를 잘하는 베니, 클라리넷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지만 섬세하고 재능이 많아 이것저것 할줄 아는게 많았던 켄지, 똑똑하고 매력넘치던 애너벨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것에 능력이 출중하지만 남편 켄지가 사망하면서 이내 수집벽으로 변모해버린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노숙자이지만 유명한 시인인 B맨, 중독으로 정신병동을 입퇴원하지만 스노글로브를 만드는 예술가인 알레프, 매번 공개열람실 맞은편에 앉아 타자를 치고 있는 어떤 여성, 나쁜 아들이라 '노 굿 선'으로 불리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할때는 손을 내밀어주는 노굿  등 한가지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두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입체적인 인물들 외에도 책을 매개로 담고 있는 교훈과 상상력, 선불교책에서 얻는 비움과 버림의 미학에 관한 깨달음 등은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내용들이다. 

 

삶과 다르게 책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우리네 삶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일방통행이라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거꾸로 사는 삶인 덕분에 삶을 거꾸고 되짚어가며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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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야기는 결코 처음부터 시작되지 않아, 베니.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삶과 다르지.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는 거야. 처음부터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말이야. 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 말하는 거야. 말하자면 이야기는 거꾸로 사는 삶이지.

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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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가 쓰이는 책 속 이야기의 실체 혹은 책 관점에서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꽤 많았다. 무생물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일때 느낄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마치 대화하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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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게도 몸은 있지만, 우리의 몸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한 기관이 결여되어 있다.
(...)
우리는 자신의 타자가 융합되는 무아의 황홀감을 느낄 수 없다.
(...)
우리는 우리를 구체화하기 위해 당신들에게 의존하며 당신들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책장을 넘기는 당신의 손가락을 인지하고 책장 사이에 쏟아진 쌉쌀한 커피의 맛이나 톡쏘는 소스의 맛, 짭짤한 정액의 맛을 말로 묘사할 수 있지만, 이런 감각들을 당신처럼 혀로, 피부로, 몸속에서 경험하지 못한다.

뭔가 빠졌다는 허전함을 느끼지 않기 힘들다.

5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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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때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미친 듯 당신들을 사랑한다. 당신들의 집착을 표현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구속받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같은 생각들이 게으른 비유들이며,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공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공상이라면 우리 책들이 아주 잘하지. 하지만 진짜 이야기들, 즉 일어난 이야기들은 당신들의 영역에 속한다.

5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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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가 사물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목소리를 구분하고 이해하는데 능숙해지는 시점에 서술한 내용은 베니의 성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물과 다른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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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나는 어조와 목소리를 이해하는 데 능해졌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조금 힘들었는데, 사람들은 거짓말과 농담을 하고 감정을 숨기고 진심이 아닌 헛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아서 처음 글 읽는 법을 배우고 음절을 소리내어 읽어야 할 때처럼 연구하고 연습해야 했다. 우선 사람들의 말소리를 익힌 다음 기계적으로 암기해야 했다.

 

사물들은 정직해서 더 쉬웠다. 그것이 사람과 사물 간의 차이였다. 사물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놀리거나 장난치지 않았다.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어떤 사물이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지루하거나 화가났으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27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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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물들에 비해, 감정을 숨기고 진심이 아닌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나란히 한 선상에 놓아두고 보니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똑똑하고 아는것이 많을뿐만 아니라, 친절하고 이타적인 B맨이 진짜 어른의 모습으로 베니에게 전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도 기억에 남았는데, 몸이 불편하고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불평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먼저 손 내밀줄 아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한번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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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지어!" 노인이 말했다. "철학적 질문을 생각해내! 그리고 자네가 둘 다 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그때 가서 진짜 미쳤다고 결론 내려도 늦지 않네."

29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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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이야. 아주 철학적이고"
"뭐가요?"
"진짜란 무엇인가"
"하지만 진짜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잖아요."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그게 훌륭한 질문인 걸세."

30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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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가 베니에게 전하는 말도 강렬하게 다가왔는데, 어쩌면 우리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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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야, 베니 오.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마"

4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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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의 정리책에서 얻은 교훈도 큰 깨달음을 주었는데, 진정한 본성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되짚어 보게 하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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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것이 한순간 휩쓸려 가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진짜란 무엇인가?'
해일은 우리에게 무상함이 진짜임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미 깨졌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무조건적으로 기대나 실망없이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삶이 훨씬 더 아름답지 않을까?

58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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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내용도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 늘 개인 열람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타이핑을 치던 작가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 활자로만 만날 수 있었던 말은 '글'로써 우리의 곁에 자리하고 있어 경계가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말'은 무분별하게 남발되었고 규율과 제약없이 풀어지면서 악성댓글과 무자비한 인신공격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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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세상에서는 더 이상 말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난 동의하지 않아. 말은 종이에 귀속되는 걸 좋아하지. 경계를 필요로 해. 어떤 규율과 제약이 없으면, 말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다닐 거야. 하지만 내가 좀 구식인가 싶기도 해."

68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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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세상과 교감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소리로 투영되면 어떨까 라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일단 처음은 신기하고 흥미로울것 같다. 그 다음은 글쎄, 시끄러워서 귀를 틀어막거나 아니면 오히려 이를 활용해 더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물건들이 또 침묵을 지키고 있는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베니에게 그랬듯 물건들이 속삭이진 않지만 가만히 귀기울여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 무언가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켜면 윙~하며 돌아가는 모터소리를 내고, 자판을 두드리면 타닥타닥 소리를 낸다. 책장을 넘기면 파라락 하는 소리를 내고, 컵에 물을 담으면 퐁퐁퐁 하는 소리를 낸다.

 

무시하고 지나쳤던 일상의 소리들에 귀기울여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듯 지휘봉을 휘둘러보면 어떨까? 퐁퐁~ 윙~ 타닥타닥! 어쩌면 나만의 멋진 연주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을 나에게 두고, 나만의 음악, 나만의 인생을 개척해보자. 그렇게 하나씩 음을 쌓고 소리를 섞어가면서 살아가다보면 삶을 보다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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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항공관제사와 같다. 아니, 지구상의 온갖 재즈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브라스 빅밴드의  리더와 같다.
(...)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지휘봉을 들고 온갖 열정적인 물건들에 둘러싸여서 말이다. 한 번의 빠르고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모든 목소리들이 당신의 지휘봉을 내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음악을 만들어낼 것이냐 미칠 것이냐. 그것은 순전히 당신에게 달려있다.

14~1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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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릴적 동화책을 읽어주던 사서, 맞은편 열람실에 늘 자리하고 있던 일면식도 없던 작가, 오며가며 만났던 부랑자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 옆집에 사는 뚱한 소년 노굿 등이 필요한 순간 나타나 이들 모자에게 도움을 준것처럼.

 

희망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기적은 늘 가까이에 있다. 우리가 세상에 귀 기울이면 기적은 서슴없이 다가와 또다른 기회를 제공해줄것이다. 마치 애너벨이 마음을 열어 새 삶에 한발 나아갔듯, 수많은 기회를 내것으로 만드는 또한 오로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것을 쟁취하는것 역시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마음을 열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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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노자 - 오십부터는 인생관이 달라져야 한다
박영규 지음 / 원앤원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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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인생이라 말하는 요즘. 어쩌면 그래서 딱 중간인 오십이라는 나이는 한 번쯤 멈춰서 돌아보기 좋은 나이가 아닌가 싶다. 오십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삶의 지표를 가늠하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딱 적당한 시기에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최근 노자, 장자, 제갈량 등과 관련된 인문고전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새삼 인문고전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절로 깨닫게 된다. 과거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저 어렵게만 느껴지던 것들인데 요즘은 현시대에 빗대어 대입도 해보고, 어려운 일이 생겼거나 고민이 되는 문제들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아 도움이 됨을 느낀다.

 

이 책은 저자가 나이 오십이 되면서 노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써 삶을 잠시 멈추게 되면서 얻게 된 깨달음과 지혜를 담은 책으로,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살고 싶은 저자의 소망을 담아 만든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일상의 충만함과 만족감이 엿보이는데, 읽으면서 진짜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1부당 10개의 꼭지(주제)를 담아 총 50꼭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인생관이 달라지는 삶의 변화의 방식의 순서에 따라 전개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인생을 잠시 멈추면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내 삶에 대한 성찰이 시작된다. 그리고 잊히지 않는 자신만의 마음의 짐은 용서라는 이름으로 내려놓아야 비로소 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둘 비움을 행하다 보면 삶에서 필요 없는 군더더기들이 떨어져 나가며 삶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진짜 필요한 것은 지니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유하고 있던 필요 없는 것들은 비워냄으로써 진짜 삶을 만나게 된다.

 

내가 차마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가까이에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비움의 미학과, 멈춤으로써 얻는 '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꼭 얻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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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손을 놓고 잠시 쉬는 건 게으름이나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 꼭 필요한 멈춤이고 가장 우아하게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1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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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노자를 만난 후 자신을 힘들게 하던 나쁜 습관을 많이 내려놓고 스스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게 되면서 대신 "그만하면 충분해" 라는 말로 스스로를 격려하고 응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추구하는 방향성과 잘 맞아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는데, 현재 비움과 멈춤의 ing를 실천하고 있는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도움 되는 내용들이 많았다. 충만한 삶을 위한 소유와 욕망의 버림, 욕심 앞에서의 멈춤을 저자의 삶 곳곳에 새겨진 인생 이야기와 만나며 삶의 성찰과 깨달음의 시간을 함께 했으면 한다.

 

 


<'한 걸음만 더' 하는 순간 멈추는 지혜: 정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지족불욕 지지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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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정도와 결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생 후반기에는 삶의 무게 중심을 공성보다 수성에 두는 게 현명하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지혜가 필요하다.

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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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의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생사를 가르기도 하고, 한신과 장량의 예처럼 역적으로 남을지 충신으로 남을지를 가르기도 한다.

(...)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 기업인들 가운데 '한 걸음만 더' 하다가 평생 쌓아 올린 명성과 재물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사례를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들은 노자의 말처럼 만족할 줄 몰라 치욕을 당하고, 적당할 때 그칠 줄 몰라 위태로움에 처했다.

2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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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앞만 보고 정신없이 지나온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멈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넉넉한 품성과 여유보다 오히려 배 빵빵한 욕심과 재물이 눈이 멀어 이기심을 발휘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멈춤'이다.

 

적당한 순간 만족하고 멈출 줄 알아야 치욕스러운 위태로움을 넘길 수 있음을 기억하자.

 

 


<지식은 버리고 지혜는 쌓아야 하는 이유: 통찰>
학문은 하루하루 더하고 도는 하루하루 덜어낸다.
(위학일익 위도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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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자갈, 큰 돌을 항아리에 골고루 담으려면 어떤 순서로 채워야 할까? 큰 돌을 가장 먼저 넣고, 다음에는 자갈을 넣고, 마지막으로 모래를 채워야 한다.
(...)
사람의 머리도 그렇다. 모래알 같은 자잘한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리에는 큰 지식을 담을 수 없다. 큰 지식이란 바꿔 말하면 노자가 말하는 '도'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지혜'다.
(...)
사람의 머리도 지혜를 채우기 위해선 자잘한 지식부터 비워야 한다. 그래서 노자는 '위도일손', 도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61~6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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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근대 과학혁명을 비롯한 혁신은 무지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생각했고, 관찰했고, 탐구했다. 지식이 많았더라면 그 지식에 함몰되어 새로운 걸 생각할 수 없고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기 때문에 궁금해했고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혁신이 탄생했다.

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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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자갈, 큰 돌을 예시로 하니 금방 이해가 되는 문장이다. 어쨌든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우리는 그저 욱여넣기에 바쁘다. 자잘한 지식에 얽매여 진짜 지혜를 채우지 못해 서성이지 말고, 하등 쓸모없는 지식들은 과감하게 비워내자. 비운 후에야 진짜 통찰이 이루어질 수 있다.

 

 


<큰 길 놔두고 샛길 찾을 필요는 없다: 정도>
큰 도는 지극히 평탄한데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대도심이 이민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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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곧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이 걷기도 편하고 탈도 없다. 샛길을 탐하다가 인생 후반기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전설적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의 노랫말처럼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원칙대로 정도를 지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길이고 노자가 말하는 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6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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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정도를 넘어서 부끄러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곧고 바른 길이 편하고 탈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과 이기심에 굳이 샛길을 이용해서 꼭 탈이 난다. 샛길은 샛길일 뿐이다. 결코 빨리 가는 지름길이 아님을 인지하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뽑히지 않는다: 토대>
제대로 세운 건 뽑히지 않고 제대로 품은 건 빼앗을 수 없다.
(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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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뿌리가 통째로 뽑혀나가는 일을 겪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던 사람도 막상 내 뿌리가 흔들리는 순간에는 속수무책으로 내 손을 놓아버렸다.
(...)
그 일을 겪은 후 나는 나를 철저하게 돌아봤고, 삶에서 결정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북한산 자락에서 들었던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내 존재의 기반과 삶의 토대를 튼튼하게 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작은 일 하나에서도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발견하면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내 마음과 머리에 오래도록 남기고자 문장의 의미를 여러 차례 반복해 읽었다. 무슨 일을 하든 오늘의 한 걸음이 쌓여 내일의 만 걸음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78~7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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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본 사람들은 절절히 와닿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삶의 결정적 위기가 도래했을 때 결국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작은 일 하나에도 온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작은 한 걸음이 내일의 나에게 큰 산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제가 오늘을 이루고 오늘이 내일을 이룬다: 연결>
유와 무는 서로를 생성시키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뤄준다.
(유무상생 난이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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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에게서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호의존적 존재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바뀔 수 있으며 그러한 변화는 역방향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
현재는 과거의 축적물이고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10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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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고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젊은 날의 내 삶이 지금의 나를 결정했듯 인생 후반기 초입에서 길들이고 있는 내 습관이 향후 내 삶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 독서와 산책을 하며, 저녁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삶의 패턴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습관을 만들면 습관이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10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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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름다웠다고, 내일도 아름다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래의 모습은 현재, 오늘의 모습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내일을 위한 오늘 나의 습관을 잘 들이는 것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간소한 삶의 원칙에서 나를 다잡는 법: 절제>
이름 없는 통나무로 욕심을 없앤다.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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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 얽힌 추억들 가운데 좋은 건 마음에 남기고 나쁜 건 내다 버린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는데, 앞으로도 이 원칙 하나만은 버리지 않을 것이다.

1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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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탐진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떠올리며 욕망을 절제하고,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어리석음을 다스린다. 매 순간 마음먹은 대로 절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과거처럼 무분별하게 내 삶이 흐트러지진 않는다.
(...)
인생 후반기 삶이 조금이라도 더 안락하고 맑아지려면 밖에서 만든 어두운 그림자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13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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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어려우면서도 행하면 좋은 비움이 '절제'가 아닌가 싶다. 무조건 물건으로 소유해야만 그 추억이 남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고이 간직하는 것으로도 오래 담을 수 있다. 실제로 실천해 보면 생각보다 개운하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여백을 두면 생각보다 훨씬 더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함에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다: 간결>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표준으로 삼는다.
(성인포일 위천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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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당시 자신의 일상을 <월든>으로 펴냈는데,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라.'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로는 소유를 줄이고, 일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그로써 번뇌를 줄여 간소하게 사는 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22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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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은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해진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고민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세상은 한없이 단순해지고 고민거리도 줄어든다.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기술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까 결정하는 기술이 행복에 더 필요하다. 이것저것 많은 걸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말한 것처럼 그러기 위해선 '언젠가는 쓰겠지' 하는 마음으로 쟁여둔 물건과 설레지 않는 물건들, 소용이 다한 물건들을 미련 없이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2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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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사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집중에 있다. 먹는 것, 입을 것, 신을 것, 사는 곳을 최대한 단순하게 줄이면 진짜 좋아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불필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쓰고 에너지를 덜 쓰면 중요한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그만큼 더 많아진다.
(...)
법정 스님은 말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23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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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핵심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단순하게 사는 것! 간결하게 사는 것! 이로써 진짜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 이것저것 많이 소유하고 생각할수록 삶은 복잡해지고 고민거리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것은 비우고,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자. 그것이 곧 행복의 비결이다.

 

 


<말이 많으면 처지가 궁색해진다: 묵언>
말이 많으면 처지가 궁색해지고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만 못하다.
(다언삭궁 불여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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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힘은 채찍보다 강하다.
(...)
말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아끼는 법,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말을 참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다. 말을 잘 하려면 먼저 침묵하는 법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25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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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신 래리 킹과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의 비결은 말을 적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말 수를 줄이는 대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다.
(...)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생각에 확증편향을 가지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보다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라며 겸손한 태도로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더 좋은 습관이다.
(...)
몸이 구부정하면 그림자도 구부정하듯 사용하는 말이 곧지 못하면 사람의 됨됨이도 곧지 않게 된다.

25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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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말이 많은 사람들은 실수가 잦다. 그리고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적당히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겸양의 마음이 없고 자존심만 앞세워 잘난척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구부정한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침묵을 먼저 배우자. 그럼 적어도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TV 편성표를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비움'에 대한 프로그램이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음이든, 물건이든 비우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비워야 또 채울 수 있다. 그리고 비운만큼 가벼워질 수 있다. 복잡한 세상, 단순하게 살아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물건이든 삶이든 내가 주인이 되려면 두 손에 쥘 수 있는 만큼만 가져야 진짜 내 것이 될 수 있다. 욕심과 욕망에 파묻혀 내 것이 내 것이 아닌 삶으로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기 보다 홀가분함으로 가벼이 내 인생을 즐겁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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