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만담>을 내고 두 번 째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예상 질문지를 무시한 송곳 질문에 진땀을 흘린 경험을 토대로 이번엔 작가 선생에게 ‘대본대로’ 가자고 요구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우린 거의 대본대로 갑니다”라는 작가분의 답변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고 이 나이 먹도록 여의도에만 있을 줄 알았던 방송국이 상암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기해하면서 택시를 탔다. 


약속된 시간이 10분 앞으로 다가오자 지금껏 유유자적하듯이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작가분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역시 방송국 직원들에게 ‘약속 시간’은 금인 모양이다. 아무리 촌놈이라도 방송국 정도는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있다면서 작가분을 안심시켰고 내 눈앞에는 방송국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다. 


방송국 앞이라는 기사 양반의 말을 듣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동네의 시청처럼 군계일학의 건물이 아닌 여러 내로라하는 건물이 꽉 차 있는데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내가 촌놈이라는 것을 익히 아는 작가분은 적절한 시기에 또 전화를 걸어왔다. ‘초록색 동상’이 세워진 곳 근처란다. 그 동상을 지나면 ‘물방울 조형물’이 보일 텐데 바로 그 뒤 건물이 바로 내가 갈 곳이라는 것. 


문제의 초록색 동상은 쉽게 찾았다. ‘물방울’이 보이지 않는다. 물방울이라고 하길래 빗물을 생각했다. 빗물만 한 크기의 물방울이 마치 보석처럼 엮어져 있는 조형물을 상상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입안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눈앞에 웬 집채만 한 조형물이 보이긴 했다. 물방울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서 뒤로 물러서서 그 ‘괴물체’를 다시 보았다. 어찌 보면 물방울처럼 생기긴 했다. 작가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했다. “물방울처럼 생겼는데 집채만 한 크기에요 ‘라고 말이다. 


다행히 방송작가 선생은 나를 발견했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진행자분은 푸근한 아저씨 스타일이셨고 도저히 대본에도 없는 질문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독서 만담>을 꺼내시는데 물을 쏟아서 책표지가 물에 넣어진 라면 사리처럼 불어 있었다. ‘너무 열심히 보시다가 물을 쏟았다는데’ 책을 열심히 보는 것과 물을 쏟는 행위의 상관관계가 언뜻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분명 내 책을 꼼꼼히 보신 것은 확실했다. 


내가 책 수집가라는 것을 알고선 본인이 너무나 아껴서 ‘집 밖으로 절대 가져 나오지 않는 희귀본’을 노란 봉투에 서너 권 넣어오셨다. 자연스럽게 ‘뭘 또 이런걸’이라며 그 책들을 내 가방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려는 순간 똑똑한 작가분은 나를 대신해 적절한 질문을 던지셨다. 

“와, 이 책을 박균호 선생님에게 선물하시는 거예요?” 진행자분은 단호했다. ‘그냥 구경만 시켜드릴’ 것이란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 했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초판본을 비롯한 여러 권 보여주셨는데 애써 ‘진귀한’ 물건을 보는 시늉을 했다. 녹음이 시작되었다. ‘우린 대본대로 해요’라고 듣고 왔는데 첫 질문부터 ‘우리도 대본대로 하지 않아요’는 식이다. 억만금을 남기는 부모의 유언보다 더 집중해서 진행자분의 질문을 들었다. 


예상 질문지에 맞춰서 생각해둔 ‘주옥같은’ 멘트를 하나도 하지 못해서 분했다. 심지어 책 내용의 일부를 나더러 낭독하란다. 군대 시절 말고는 경상도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구사하는 사투리로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글을 쓰고 나면 낭독해봐야 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이 맞다. 글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너저분한지 읽다가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권투라면 수건을 던지고 싶었고, 야구라면 패전처리전문 투수를 올릴 터였다. 당황하고 창피해서 차마 스튜디오 밖의 P.D 양반의 얼굴도 못 쳐다봤다. 방송국 물을 한두 해 먹은 것도 아니어서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면 딱 견적이 나올 텐데 녹음은 계속 이어진다. 듣기로는 녹음이라 언제든지 ‘끊어 갈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그로기 상태가 되었는데도 ‘끊지’ 않는다. 


치욕스러운 시간은 끝은 났다. 고통의 시작이 다가왔다. 저자 서명을 해달란다. 붕괴한 정신을 간신히 가다듬어 서명하는데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진행자분이 말을 건넨다. 이건 마치 뇌수술을 하는 의사에게 중국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것과 진배없다. 대답하지 않았다. 서명하기에도 너무나 힘든데 진행자의 방송시간외에 하는 질문에 대답할 여력 따위는 없다. 


방송작가분은 나의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었다. 작가분은 촌놈의 안위가 걱정되었는지 방송국 밖까지 배웅을 해주었고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다. 본인이 맡은 다른 프로그램에도 <독서 만담>을 소개하시겠단다. 


다음 날 저녁 세 번째 라디오 출연이 이어졌다. 지역 프로그램이라 편안했고 예상 질문지 따위는 주지 않았다. 이미 부 번을 속은(아니 농락당한) 나는 질문지를 받았다고 해도 연습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질문지와는 상관없는 질문이 쏟아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속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이번엔 속을 일이 없었다. 원래 사전 질문지를 주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란다.


진행자분은 과연 편안하게 대화하듯이 인터뷰를 이어나갔고 속은 것에 대한 분노가 없었던 나는 지난 두 번의 방송보다 훨씬 더 잘 인터뷰에 응했다고 자평할 만 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작가분은 ‘어쩌면 이게 제일 어려울 수 있어요’라며 한가지 미션을 주셨다. 일일 d.j가 되어서 동네 주민들에게 노래 한 곡을 선택하고 ‘추천의 변’을 남겨 달라신다. 


“안녕하세요? 포항시민 여러분, 일일 D.J 박균호호 입니다. 제가 들려드릴 곳은 국카스텐의 ‘나비’입니다. 평소 아내가 좋아하는 곡이에요. 저와 함께 국카스텐의 ‘나비’를 들어보아요”라는 논평을 뱉어낸 나는 거의 토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방송국에서 듣기 거북한 사투리로 노래를 신청한 분들의 ‘위대함’을 알겠다. 


역시 다정하고 내 책을 진심으로 좋아해 준 진행자분의 배웅을 받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심각한 손상을 입어서 혀끝만 닿아도 아픈 오른쪽 어금니로 삼겹살을 씹어버렸고 골프연습장에서는 공을 맞히고 싶었으나 허공만 세 번 가른 다음,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숙소로 향했다.


방송 내용 듣기 : http://www.podbbang.com/ch/70 후반부에 나와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7-03-12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맛 겸손이셨네요. 친근한 목소리로 방송 잘 하셨는데요.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저랑 같은 생각 많으셔서 막 웃으면서 들었습니다. 호호^^

박균호 2017-03-16 18:54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해요 ㅠ

오해관 2017-03-13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송을 먼저 듣고 책 구매하려고 하네요^^
포항이 고향이라... ㅎㅎ 잘들었습니다^^

박균호 2017-03-16 18:5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해요 더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