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를 좋아하면서 어쭙잖게 책을 다섯 권이나 냈다. 자연스럽게 저자와 독자의 입장을 동시에 경험한다. 우선 저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보자. 나의 경우에는 두껍고, 웅장한 장정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간 책을 내면서 늘 아쉬웠던 게 내가 만족스러울 만큼의 웅장한 체구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뭔가 거대한 작업을 했고 공부를 많이 한 느낌이 들기 위해서는 일단 책이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빽빽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뿌듯해하는 기분 말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원고지 900매 정도가 보통 크기의 책이 나오니까 내가 동경하는 벽돌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천 매의 원고가 필요하겠다. 내가 십 년 동안 매진해서 그런 원고를 완성했다고 한들 내 책을 내줄 출판사는 없을 터이고 그걸 읽어줄 독자도 드물겠다.

요즘 독자들은 두꺼운 책을 싫어한다고 한다.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200페이지짜리나 1,000페이지짜리나 책 한 권일 뿐이다. 독서에 있어서 성취감은 중요하다. 내가 한 해에 몇 권의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 말이다. 벽돌 책은 독자들의 ‘수치 계량학’적인 성취감의 적이다. 두꺼운 책은 독자들의 ‘유동성’에도 방해가 된다.

침대에 누워서, 지하철에서 또는 화장실에서 읽기 힘들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자세로 읽어야 하고 독서환경을 위한 별도의 ‘세팅’이 필요하다. 저자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내 책이 기왕이면 장정판 위에 소프트 커버를 또 덮고, 간지도 있었으면 좋겠다. 독자는 띄지가 귀찮다. 계륵에 가깝다. 버리자니 찜찜하고 그냥 두자니 책장을 넘기는 데 방해가 된다.

띄지를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의제는 독서가의 영원한 고민거리다. <독서 만담>을 내면서도 편집자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두툼하게’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책을 낼 때는 독자의 입장을 잊어버리고 저자의 입장이 된다. 편집할 때 삭제가 되는 구절이 있으면 마치 내 살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낀다. 내가 쓴 원고로 도대체 어느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것일까 하는 주제로 밤을 새워 추측한 적도 있다.

<독서 만담>은 저자보다는 독자의 입맛에 맞게 나왔다. 어쩌다 보니 원래 실으려고 했던 꼭지 4개가 누락이 되었는데 그 녀석들이 제 자리에 들어갔다면 저자의 입맛에 맞는 두께에 좀 더 가까운 책이 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독서 만담>을 읽은 독자에게는 후식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애피타이저가 될 집 나간 내 자식 한 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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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아내가 딸아이와 나를 두고 탕평책을 쓰고 있는 듯하다. 하긴 식구가 달랑 3명인데 한 사람을 소외시키면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그리고 딸아이가 너무 기고만장해지면 부모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으니 아내의 조치가 이해되기도 한다. 백화점에서 내가 멜 가방을 사느라 딸아이가 노래 부르던 바지를 미처 사지 못한 일만 봐도 아내가 적당히 딸아이를 견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더구나 며칠 전 내가 딸아이에게 뽀뽀를 하겠다고 덤볐는데 평소처럼 딸아이는 짜증을 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아내는 “왜 자꾸 애를 귀찮게 하느냐”고 나를 꾸짖고는 했다. 그런데 이날은 나보다 딸아이를 혼내면서 “몇 초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가지고 뭘 짜증까지 내느냐”고 되레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아내의 훈훈한 조치에 감격하고 결초보은할 기회를 찾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주방을 돌아보니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리고 TV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젊고 잘생긴 남자배우가 열연하는 드라마가 나온다. 나는 살며시 주방으로 향했고 아내가 드라마를 시청하는데 조금도 불편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일희일비

잘생긴 배우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상스러운 그릇 씻는 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설거지를 했다. 음지의 설거지를 마친 뒤에는 조용히 서재로 복귀했다. 아내가 드라마 속 멋진 환상에 맘껏 취해 있다가 현실세계의 꾀죄죄한 남편을 보고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책을 읽는데 아내가 빨래를 널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세탁기로 달려가서 냉큼 산더미 같은 빨래를 담아들고 을씨년스러운 베란다로 나갔다. 옷의 종류별, 크기별, 두께별로 엄격히 분류하여 세탁물을 건조대에 널고 있는데 마침 외출했던 딸아이가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가 딸아이에게 “너도 베란다에 나가서 아빠를 도와주거라”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딸아이가 “이제 막 집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일을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항했지만 아내는 “아빠 혼자서 저렇게 고생하는데 자식으로서 돕는 것이 도리 아니냐“고 호통을 친다. 빨래를 널던 나는 감격해서 눈물을 왈칵 쏟아지려고 했지만 눈물에 젖은 빨래를 다시 세탁기에 넣어야 할 걱정 때문에 간신히 참았다. 눈물을 닦으면서 빨래를 정성스럽게 건조대에 널고 있는데 아내의 명령에 마지못해 베란다로 향하던 딸아이가 “흐흑” 하는 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나는 본능적인 위험을 직감했고 딸아이가 베란다 문을 잠그기 직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 

아내는 무서운 사람이다. 일찍이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숭이를 닮은 소인배고, 감히 우리나라를 침략할 인물이 못 된다며 왕과 국민에게 말한, 노회한 정치인 학봉 김성일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그녀는자신을 위해 보은하려는 남편을 베란다에 가두고 장난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갑자기 베란다 문을 잠그기 위한 액션을 취하면 눈치가 없는 나라도 금방 탈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나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딸아이가 아버지를 도와주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활용했다. 

아내는 나를 속이기 위해 나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딸아이에게 나를 도와주라고 했다.  한편 딸아이에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속삭임으로 베란다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딸아이는 노회한 안동 양반의 후예가 니다. 딸아이는 지리산 자락 함양박씨의 후예다. 순박한 농부의 피를 좀더 많이 물려받았다. 딸아이가 아빠를 교묘하게 속인다는 긴장감을 감추고 불과 4m 정도만 베란다로 향했으면 아내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딸아이는 역시 순박한 지리산 자락의 농부 출신 함양박씨의 후손이다. 털끝만큼도 남을 기만하지 못하는 유순한 성격 탓에 민중을 맘껏 요리한 양반네 후손인 아내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희노애락이 담겨 있는 이야기 

아내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내게 절대 끌려 다니지 않는다. 나의 용도와 장점을 잘 파악하여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쓴다. 그리고 웬만하면 본인 스스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자신의 뜻을 잘 구현해줄 충직한 딸아이가 있지 않는가.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이 쓴 병원에세이 『만약은 없다』를 읽다가 아내 못지않게 현명한 사람을 발견했다. 

논산훈련소에는 4주간의 훈련을 마치면 공중보건의가 되는 전문의들만 모아 둔 중대가 있다. 대한민국의 10대 도시에 종합병원을 몇 개씩 세울 만큼 전공이 다양한 수백 명의 전문의들만 모아 둔 중대라서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 한다. 본인들이 모두 전문의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잡다한 질병을 다 달고 살아서 그 중대는 마치 질병의 경연장과도 같은 모습이라고. 수백 명의 의사인 동시에 환자인 그 양반들을 치료해야 할 군의관은 이제 겨우 인턴을 마치고 복무 중인 중위였다. 그 어린 군의관이 전문의 병사들을 치료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든가 혹은 교황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나 진배없는 웃기는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어린 군의관은 수백 명의 의술에 도가 튼 환자들을 짧은 시간에, 그것도 효율적으로 진료를 해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전문의 환자들의 불평도 전혀 없었다. 그 군의관의 비법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늘 하던 것처럼 서로 진료를 보시고 차트에 적어오시면 됩니다.” 

이 영민한 군의관은 전문의 환자끼리 서로서로 상대방을 진료하고 차트를 기록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전공이 각양각색이니 모든 종류의 질병에 대한 진료가 환자들끼리 셀프로 가능했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면 수백 명의 무리 중에서 피부과 전공의를 불러서 진료하게 하고 자신은 “피부과 선생님이 하신 말, 잘 들으셨죠?”라고만 하면 되는 일이다. 

『만약은 없다』는 이것 말고도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병원과 환자의 이야기가 많다. 애잔한데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득하기로 유명한 박경철의 병원에세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리더스북)과 비견되는데 그보다 드라마틱하거나 동화스러운 면은 적지만, 좀더 사실적이고, 치열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철학서나 자기계발서보다 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기도 하다. 평소 최상급 사용을 금기시하는 나이지만 이 책에만큼은 최상급의 찬사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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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3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반갑습니다 제가 이따가 보내드릴께요 주소 알려주세요

2017-02-13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요 증정본이 없어서요 포인터가 많으니 주문해드릴깨여

박균호 2017-02-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회되면 서명 해드릴께여

2017-02-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20부 받았는데 다 증정했고요 싸게 사는 건 불편해요 ㅎㅎ

박균호 2017-02-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책은 제가 나중에 사서 보겠습니다 ㅎㅎㅎ

2017-02-13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ㅎㅎ 오해 마셔요 경북 김천시 부곡동 우방아파트 108동 101호 박균호 01067767131 입니다 감사히 잘 읽을께요

2017-02-13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3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시고 간단한 서평 남겨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당

2017-02-13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럼요

박균호 2017-02-1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가 우리집 신주소도 아직 모르는 바보라 ㅠㅠ

stella.K 2017-02-13 14: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책도 내시고, 이사도 하시고.
올해 시작이 좋으신가 봅니다.^^

박균호 2017-02-1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해요

2017-02-14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4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여긴 시골이라 잘 들어올거에요 ㅎㅎ 감사합니다 잘 읽을께요

2017-02-14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4 18:55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착각을 해서 급하게 수정했어요...ㅎㅎ 편안한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