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명령하기를 딸아이의 입장에서 겪었을 지도 모르는 성차별적인 에피소드를 써보란다. 양성평등 교육을 직접 가정에서 챙기겠다는 말인 것 같다. 딸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라면 이런 고민을 한 번은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문이 막혔다. 내가 여자도 아닌데 경험하지 않은 일을 타인이 어떻게 상상을 해서 만들어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조심스럽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는데 아내가 ‘글 쓰는 재주가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한다.


아내도 이젠 교사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사람을 움직여서 일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노하우가 생겼나 보다. 하루에 대략 아내에게 20번 정도의 꾸지람을 듣는 처지라 아내로부터 ‘글 쓰는 재주가 있는 남자’라는 공인을 받으니 ‘여성이 겪은 성차별 에피소드에 관한 101가지 글쓰기’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생겼다. 


우선 딸아이가 겪었을 성차별에 대해서 맹렬히 상상력과 기억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나에게는 무남독녀이자 할아버지 가계로 따지면 30년 만에 태어난 자손이다. 비록 내가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면서 졸지에 대가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우리 집안의 그 누구도 ‘아들을 낳아야지’라고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딸아이를 보면서 평생 의지할만한 동기를 낳아주지 못해서 안타깝기만 했지 딸아이가 아들이 아니어서 서운하다거나,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따라서 집안에서 딸아이가 겪었을 만한 에피소드를 상상하고 기억해내기는 어려웠다. 다음은 학교로 가보자. 요즘 학교는 ‘여자가 말이야’라는 식의 말을 했다가는 24시간 내 교육청에 신고 되고 경찰 수사를 거쳐서 성범죄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얻게 된다. 


남학생, 여학생이라는 단어 자체를 쓴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역시 학교에서 겪었을 만한 성차별 요소도 내 능력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은 것은 단 하나의 가능성이다. 남자인 나와 여자인 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험. 나로 말하자면 성차별적인 언사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상적인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경상도 시골 출신의 50대 초반 남자. 게다가 잔소리하는 것이 주요한 업무 중의 하나인 교사.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도 딸아이에게 ‘여자가 자고로’라든가 ‘여자는 그라면 안대’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냥 자식이지 아들이나 딸이냐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포기하지 않고 더 깊게 생각해봤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딸아이에게 교대를 가서 초등학교 선생이 되라고 조언을 서너 번 한 적이 있다. 겪지 않은 일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 자식이 아들이라면 교대를 권하지 않고 공대를 권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한 성차별적인 행위가 아니었나 말이다. 유레카를 외치며 금방 딸아이가 겪은 성차별 경험담을 완성했다. 어찌나 집중해서 작성했는지 고분 분투하는 남편을 위해서 아내가 옆에 두고 간 머루 포도를 발견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딸아이에게 좀 더 넓은 진로에 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단지 취직이 용이하고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권했던 과오를 치열하게 반성을 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딸아이가 아버지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하고 ‘아트 앤 테크놀로지’라는 이상한 전공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공부라고 하니까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딸아이가 살아가면서 뀌는 방귀 횟수와 ‘그게 뭘 배우는 과에요?’라는 질문을 받는 횟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큰 수가 될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딸아이가 겪었을 한 줌의 좌절, 실망, 분노에 대해서도 극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써 내려갔다. 완성된 글을 보니 거대한 나의 반성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쓴 반성문을 퇴고하다 보니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서 새삼 후회를 하게 된다.  능력 이상의 상상력과 기억력을 소진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평생을 보낸 할아버지와 그 형제분들은 이런 순간에 늘 칭찬을 내리셨다. 옛 추억이 현실화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숙제를 마쳤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연 아내의 의도대로 여성에 대한 배려심이 금방 아내의 답변이 날라 왔다. “거봐, 할 수 있잖아. 추가로 한 네 개만 더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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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10-22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으면서 내내 웃습니다. 행복한 따님으로 잘 키우셨네요 존경합니다^^

박균호 2019-10-22 14:26   좋아요 0 | URL
웃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제가 딱히 잘 키운 것은 없고 그냥 혼자 잘 자란 것 같아서 다행스럽네요. 따뜻한 말씀 고맙습니다.

마태우스 2019-10-22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버지가 그리 글을 잘쓰시는데, 따님이 글을 못쓴다니 뜻밖입니다. 아무튼 이 글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막판에 답이 나오네요. 역쉬 작가님답습니다!

글구 저한테 이런 미션이 주어졌다면, 저와 누나가 다른 대접을 받은 경험을 쓸 거 같아요. 수능, 그러니까 학력고사가 끝났을 때 누나는 아무도 마중을 안나가서 제가 나갔지만, 이듬해 제가 봤을 땐 부모님이 모두 정문 앞에서 기다렸지요. 이것이 그땐 몰랐지만 큰 차별이더라고요.

박균호 2019-10-22 15:37   좋아요 0 | URL
딸아이를 디스하는 것이 좀 불편하지만 입시 때 자소서를 도와주려고 해도 어디서 부터 손을 봐주어야 할지 몰라서 포기했습니다. ㅎㅎㅎ근데 그 나이 때 저는 훨씬 더 글을 못 썼으니 ㅠㅠ 저와 누나의 차별성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지요 ^^ 다만 2000년생 무남독녀인 제 딸아이의 입장에서 써야 하는 글이라 ㅎㅎㅎㅎ 제 딸아이는 마중으로 모자라 전날 수능장까지 태워주는 예행연습까지 했었어요 ㅎㅎㅎ 혹시 길을 잘 못 들어서 늦을까봐요. 그리고 신간 출간 하신 것 거듭 축하드립니다.

10030223 2019-10-22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말 글재주가 좋으시네요!~

박균호 2019-10-22 22:17   좋아요 0 | URL
아..별 것 아닌데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