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제임스 러브록 지음,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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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임스 러브록이 보는 생명체의 정의는,
<개방적 또는 연속성의 시스템으로서 외부 환경으로부터 취한 자유에너지와 물질을 사용하고,
더불어 이의 분해산물을 체외로 배출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부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갖는 구성원>이다.
가이아 이론에 대한 이 전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면 그 이론을 반박할만한 근거가 별로 없을 듯하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학계에서는 가이아를 놓고 "생명체"라고 칭하기 자존심 상하니까 같은 말임에도 "유기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가이아가 생명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로봇에 비유한 것(이는 말하나마나 아마 현재 시점에서는 비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과
"1.생식 기능이 없고 2.진화능력이 없다."는 것인데,
가이아의 개체수가 1개뿐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생식기능을 운운하기엔 통계학면에서 그 비판을 수긍하기 어렵고,
진화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선 그 내용을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반론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며 그것이 학계에서 제대로 인정을 제대로 받았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목적론적이다라는 주장은 단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비판이 아닐까 싶다. "이것 저것 살펴보니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데 그게 목적인 듯 보인다."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러브록은 서론에서,
<이 책을 쓴 내 일차적인 목표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지적 만족을 제공하는 데에 있다. 가이아 가설은 자연 속을 산보하거나 또는 단순히 자연 속에 서서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지구에 대하여 그리고 지구의 생물들에 대하여 감탄을 발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또 이 가설은 지구에서 인간 존재의 의의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라고 썼다.
그럼에도 그의 거시적인 이 이론은 에덴 동산에 쫓겨난 사람이란 존재가 이 지구에서조차 주인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오만한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도 한다.(웃음)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대하여 (결과가 아닌)"원인"을 비판한 것이나, 원자력 사용에 대한 러브록의 지지가 그러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가 가는 부분은,
1. 생물들과 그 주위 물질적 환경과의 견고한 관련성
2. 자연적으로 존재불가능한 분자들의 규칙적인 분포, 일상적 분자들의 존재 불가능한 분포
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는 한 형성되거나 지속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이란 것이 한 두 가지 정도의 물질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엔 지구의 여러가지 신기한 "이상 상태"가 너무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얽혀 있다.

이 책과 이론의 현재 위치가 어떻든,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인 생각과 신비감이 오만한 사람 몇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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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피에르 부르디외 외 지음, 최연구 옮김 / 백의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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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게 좋은 것"은 나쁜것이다. 
자신있게 말하건데, 누군가가 당신에게 농담할 때가 아니라
어떤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타협하는 때에 저런 말을 꺼내면서
악수하고 마무리 지으면 마음 속에 뭔가 찝찝한 앙금이 남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근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엄격함"이라는 단어를 싸구려로 취급해왔다.
구닥다리를 부여잡고 늘어져 발전을 저해하는 종류의 것으로 분류해왔다.
더불어 "엄격함"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급진적인 과격함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

프리바토피아 - 사유화의 유토피아가 낳은 사회의 여러가지 폐해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헤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해한 방향은 "지킬 것은 지키자"는 엄격함이다.

p195
전통적 노동운동이 보여주는 국가주의적, 나아가 민족주의적 특성과 단절해야 한다.
또한 비판적 사고와 행위를 폄하하며, 사회적 합의를 너무 추켜세우는 통에
노동운동가들이 피지배자들로부터 복종을 얻어내려는 정책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려고 나서게 할 정도인,
타협적 사고와 단절해야 한다.
'세계화"의 필연성과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임을 감추려 할 때 애용하는)
금융시장의 영향력에 관한 언론과 정치권의 담론이 부추기고 있는 경제적 숙명론,
그리고 주요 사항에 있어서 보수당 정부의 정책을 연장하거나 갱신함으로써
이러한 정책을 유일한 가능성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작업이 부추기고 있는 경제적 숙명론과도 단절해야 한다.
또 부당한 근로계약서의 뻣뻣한 요구사항들을 "유연성"이라는 포장을 가리기에 능한 신자유주의와 단절해야 한다.
고용주 측의 주장을 강화하는 규제완화 조치를
진정한 사회정책이 낳은 눈부신 업적으로 내세우려는 정부의 "사회적 자유주의"와도 단절해야 한다.

이런 과격함이 정당한 이유는 아래의 가치를 지키려는 엄격함때문이다.

p227
전지구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증진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은,
경제적 이익만을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가치평가가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형편없이 깎아내리는 가치체계를 다시 부상시킬 수 잇는 집단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삶의 기쁨, 연대의식, 타인에게 베푸는 인정등 사라져가고 있는 감정들은
보호하고 생기를 불어넣고 여러가지 새로운 방향으로 재추진해야 할 감정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합의된 제도와 절차를 따르라"고 매장 점거자들을 비난했던 친구에게 내가 한말은,
"난 믿어지지 않아. 국민소득 2만불인 시대에도 저임금에 항의하는 노동운동이 계속되고 있다니."였다.

21세기가 되면 "노동권"의 뜻이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돈을 벌기위해 노동할 권리'라는 의미대신
'자기가 원한다면 어느 분야에서든 자원활동 노동을 할 권리'같은 것으로 바뀔 줄 알았다.
는 것은 역시 지나친 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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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 두산동아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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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미국 순회 강연을 돌면서, 슈마허(E. F. Schumacher)는 말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재구성의 필요성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는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신념을 명백히 밝혀 주려는 다시 없는 시도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인간 존재의 '큰 물음(Big Questions)'들이며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몰입하게 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아홉시에서 다섯시까지의 근무에 묶인 생활 형태에서는 이런 문제들은 많이 거론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런 물음들은 뉴턴 세계관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 단정하고 작은 표준화된 설명에 들어맞질 않은 까닭에 '과학 이전(prescientific)'의 것이라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큰 물음'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저低엔트로피 세계에서 다시 제기될 운명에 있다.
저低트로피 에너지 환경은 인류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경향으로 유도할 것이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에서의 지배적인 윤리 원칙은 에너지 흐름을 극소화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물직적인 부는 세계의 귀중한 자원을 복원하 수 없는 상태로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저엔트로프 사회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것(less is more)'이라는 구호가 광고 문구가 아니라 최고의 진리가 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물질의 소비를 억제한다. 검소가 슬로건이 된다.
인간의 필요는 충족되겠지만, 변덕스럽고 탐닉하는 욕망-전국 각지의 모든 쇼핑센터들이 영합하고 있는-은 절제되어야 한다.

  모든 위대한 세계적 종교에 구현된 전통적인 지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허망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우주의 형이상학적인 일체를 이루는 데서 얻는 해방감의 경험이다.
그 목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the truth that will set us free)'를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한데 묶고 있는 '절대 원칙(Absolute Priciple)'과 일체화하는 것이며,
신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에서 가장 간명하게 표현된다(Tat tvam asi;그것은 그대이다).
이것을 우리 존재의 가장 밑바탕부터 이해하고 이러한 초월적 현실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는 태도는 전통적인 지혜를 고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절도를 모르는 소비와 소유와 물질적인 것에 대한 통속적인 애착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가들이 억제해 왔던 것이다.

진행 과정과 미래의 완벽한 상태를 향한 진보나 진화를 혼동하는 것 역시 인간의 오류이다.
우리는 활짝 핀 장미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훗날 언젠가 피어날 보다 완벽한 꽃의 불완전한 조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장미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가치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미의 완벽함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왜 인간에게는 똑같은 논리가 성립되질 않는가?
인간은 근 200만년 동안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이 크게 변하지 았다.
송이마다의 장미가 장미이고, 그러므로 그자체로서, 즉 주체적 현상으로서 완벽하다면, 모든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하다.

[엔트로피] 중에서

********************************************

책에서 주장하는 논리가 옳고 그름을 떠나 얼마나 많은 딴지걸기가 있을지는 쉽게 예상이 된다.
진실은 불편하기때문이다. 그리고 불편함이란 것은 그것이 진실이어도 비난받는다.
이 에세이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내 멋대로의 삶에 대한 성찰"이 먼저여야 하지,
"협박하는 거냐!"라는 딴지걸기가 먼저라면,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 하나도 없소."라고 하는 다소 경악할 만한 오만이 가득찬 사람의 배설일것이다.

빈약하다고 비난받는 리프킨의 과학 지식이 단지, "제대로가 아닌" 점 때문에 비난받는것은 당연지사라 할 말이 없지만,
그런 빈약한 과학 지식에도 리프킨이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과학 기술들에는 그럴만한 "뭔가"가 있다는 역성을 들고 싶다.
그것은 리프킨의 감수성이 내 감수성으로 소통이 되기때문이다.
계속 얘기하고 싶어하는 "예민함"과 더불어 "감수성"이란 것도 똑같이 요즘 무게를 두며 생각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대한 감수성은 취향의 문제라 찬탄받거나 비난받을 만한 여지가 별로 없지만,
선악, 정의와 불의, 도덕과 패륜에 대한 감수성은 차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고 다른 어떤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질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일상다반사.
말이 잘 통하지 않을때는 두 어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마음이 닫혀 있을때
- 감수성이 달라 언어의 활용 범위가 다를때


거리를 따져 보자면 감수성은 지식과는 좀 멀고 인성과는 가깝다.

작고 가는 막대형 실험기구로 난자에서 핵을 분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젓가락으로 난자를 쑤셔서 핵을 빼내다니"라고 경악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굉장한 첨단 핵분리기술이로군"하면서 감탄하는 사람이 있을것이고,
"놀라운 기술이지만 역시나 잔인하군."이라며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짚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첫번째와 세번째 사람하고는 뭔가 소통을 할 수 있겠지만,
두번째 사람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소통을 해야할지 암담해서 안면 바꿔 무시해왔는데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는 슬슬 그 방법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이다.

읽지는 않았지만 리프킨이 비판하는 소유, 육식에 대해 그 단어만 들어도 내 감수성은 그의 의견을 지지하게 된다.
오늘같이 맑은 하늘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머리속에 그릴텐데
양산 장사를 할 생각을 하거나 썬블록 크림을 바르지 않은 것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감수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게 아니라 어찌 그따위 천박한 감수성을 갖고 있냐고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면서, 그런 시선을 보내는 나자신조차 경멸할 것 같기 때문에 도망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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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햇빛출판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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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교수의 변호와 엮어서...)
(늘 서평보다는 독후감을 쓰지만 이번엔 심하게 독후감이다.)

관계와 시간과 상황에서 마주치는 매 순간 매 상황마다 그가 내리는 판단은
포용적이고 윤리적이고 올바르고 핵심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읽었을때나 지금 읽었을때나 감흥없이 공감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르다.

이전에 감흥없이 공감하는 것은 이 편지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서 그렇다.
학창시절의 당시의 나는 내 삶과 시간에 우매할 정도로 충실했기때문에 물리적 환경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학교가 감옥하고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그렇다, 나는 지금 내 경험을 작가의 그것과 등치시키고자 하는 어처구니 없는 객기를 부리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왜 신영복 교수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변호가 내게는 밋밋한 맛뿐이 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가 되겠다.
감옥이나 학교나 시간표, 생활패턴, 행동반경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는 생활 전반에 대한 분석이 용이하다.
무엇이 좀 더 옳은가, 진리는 뚜렷하게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그것들은 눈에 쉽게 보인다.
나는 이미 신영복이 높은 인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의 그의 사색을 놓고 신영복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그런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신영복을 깎아내리는 것이리라.

지금의 감흥없는 공감은,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시 읽기전에 강준만 교수의 변호를 읽어서 그렇다.
말장난으로, 영원한 진리가 없다고 치자. 그러나 현재 이순간의 진리는 있을 것이다.
설마 지금 진리라고 주장한 것이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까봐 몸사리는 것이 아니라면
어른으로서 현재에 충실한 지표, 시각, 방법에 대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래디칼한 표현이거나 혁신적인 내용일 필요는 없다. 단지 "말(=표현)"은 필요하디.
함구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내가 그것을 몰라서 안했겠느냐.", "나도 그런 생각이었다."라고 한다면 엊그제 내가 친구와 말다툼한 수준의 혐의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도 철학도 엉망인 요즘 세상에서는 루시디의 말처럼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쓰레기를 정당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를 비켜갈 수 있는 점잖음이 통용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가 변호한 소통의 문제는, 일단 소통하기 위한 꺼리를 언급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어떤 어른이 옆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을때도 웃고 있고, 싸우고 있을때도 웃고 있고, 잠잘때도 웃고 있고, 다쳤을때도 웃고있다면 어떻게 그 어른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감옥밖을 나와 있는 신영복 교수가 감옥과 달리 자유로운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온 지금에도,
어리석고 갈피못잡는 우리의 모습을 감옥에서 사색한 이 책에서처럼
포용적이고 윤리적이고 올바르고 핵심적이고 인간적으로 분석하고 이끌어줄 수 있는 어른이었으면 한다.
어른이라고 해놓고 이끄는게 오만이라니, 어른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

어쨌든 서평 ; 인간을 위한 인간이 쓴 불경이나 성경으로 추켜세워도 되는 훌륭한 책. 단, 개인적으로 감흥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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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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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이 물질의 풍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물질은 얼마 만큼일 때 풍요라고 할 수 있을까.
물질이 "측정"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사람들마다 욕구의(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구라고 한정하더라도)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어쩌면 그 기대치에 대한 한계는 끝이 없을 듯 하다.
경제활동을 놓고 합리적인 것과 효율에 대해 생각해본다.

재화와 용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자면 일찌감치 성장 정책은 멈추었어야 한다.
善이라든가 道德을 차치하고라도 사람도 동물이라면 종족 번식의 본능에 따라 제 자식 살아갈 환경을 걱정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추악하게도 당장 자신의 세대만을 위해 탐욕적으로 움켜쥐고 소비하고 있다. 

경제 활동의 원칙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이다.
굉장히 효율적인 이 원칙은 경제활동에 있어서 絶對善이다.
모든 인류를 위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했어야 하지만,
우리들이 자기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하고 말았다.
경제의 절대선은 이제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파렴치한 원칙이 되었다.
공동체적 입장에서가 아닌 혼자만을 위한 입장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도둑놈심보와 다를게 없다.
경제 발전과 성장이란 것이 다른 형제의 몫을 강탈하고 다른 형제의 노동을 착취해야만 가능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진실로 합리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 않으면 경제 발전, 성장의 실패는 명약관화하다.

그러니 이제 경제성장은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 성장을 위해 나아가야 할 때다.
그래서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 책에서 수치를 놓고 성장과 풍요를 얘기하기보다는 이념, 단어의 의미, 생활상,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는 풍요에 대한 반성,
물질적 정치적 권력과 폭력의 침전이 점점 두꺼워지는 경제적 풍요,
새로운 물건의 등장으로 인한 인간 심성의 부정적인 변화와 이기적인 생활태도,
그러면서도 자신감을 잃고 무력감만 느끼는 껍질뿐인 민주주의 속의 인간군상, 등등이
인류가 치명적으로 잘못선택한 경제방식임을 주장한다.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고 주제는 날카로우나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설명때문에 우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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