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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햇빛출판사 / 199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강준만교수의 변호와 엮어서...)
(늘 서평보다는 독후감을 쓰지만 이번엔 심하게 독후감이다.)
관계와 시간과 상황에서 마주치는 매 순간 매 상황마다 그가 내리는 판단은
포용적이고 윤리적이고 올바르고 핵심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읽었을때나 지금 읽었을때나 감흥없이 공감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르다.
이전에 감흥없이 공감하는 것은 이 편지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서 그렇다.
학창시절의 당시의 나는 내 삶과 시간에 우매할 정도로 충실했기때문에 물리적 환경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학교가 감옥하고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그렇다, 나는 지금 내 경험을 작가의 그것과 등치시키고자 하는 어처구니 없는 객기를 부리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왜 신영복 교수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변호가 내게는 밋밋한 맛뿐이 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가 되겠다.
감옥이나 학교나 시간표, 생활패턴, 행동반경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는 생활 전반에 대한 분석이 용이하다.
무엇이 좀 더 옳은가, 진리는 뚜렷하게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그것들은 눈에 쉽게 보인다.
나는 이미 신영복이 높은 인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의 그의 사색을 놓고 신영복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그런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신영복을 깎아내리는 것이리라.
지금의 감흥없는 공감은,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다시 읽기전에 강준만 교수의 변호를 읽어서 그렇다.
말장난으로, 영원한 진리가 없다고 치자. 그러나 현재 이순간의 진리는 있을 것이다.
설마 지금 진리라고 주장한 것이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까봐 몸사리는 것이 아니라면
어른으로서 현재에 충실한 지표, 시각, 방법에 대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래디칼한 표현이거나 혁신적인 내용일 필요는 없다. 단지 "말(=표현)"은 필요하디.
함구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내가 그것을 몰라서 안했겠느냐.", "나도 그런 생각이었다."라고 한다면 엊그제 내가 친구와 말다툼한 수준의 혐의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도 철학도 엉망인 요즘 세상에서는 루시디의 말처럼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쓰레기를 정당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를 비켜갈 수 있는 점잖음이 통용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가 변호한 소통의 문제는, 일단 소통하기 위한 꺼리를 언급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어떤 어른이 옆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을때도 웃고 있고, 싸우고 있을때도 웃고 있고, 잠잘때도 웃고 있고, 다쳤을때도 웃고있다면 어떻게 그 어른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감옥밖을 나와 있는 신영복 교수가 감옥과 달리 자유로운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온 지금에도,
어리석고 갈피못잡는 우리의 모습을 감옥에서 사색한 이 책에서처럼
포용적이고 윤리적이고 올바르고 핵심적이고 인간적으로 분석하고 이끌어줄 수 있는 어른이었으면 한다.
어른이라고 해놓고 이끄는게 오만이라니, 어른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
어쨌든 서평 ; 인간을 위한 인간이 쓴 불경이나 성경으로 추켜세워도 되는 훌륭한 책. 단, 개인적으로 감흥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