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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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경제 성장이 물질의 풍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물질은 얼마 만큼일 때 풍요라고 할 수 있을까.
물질이 "측정"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사람들마다 욕구의(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구라고 한정하더라도)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어쩌면 그 기대치에 대한 한계는 끝이 없을 듯 하다.
경제활동을 놓고 합리적인 것과 효율에 대해 생각해본다.

재화와 용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자면 일찌감치 성장 정책은 멈추었어야 한다.
善이라든가 道德을 차치하고라도 사람도 동물이라면 종족 번식의 본능에 따라 제 자식 살아갈 환경을 걱정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추악하게도 당장 자신의 세대만을 위해 탐욕적으로 움켜쥐고 소비하고 있다. 

경제 활동의 원칙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이다.
굉장히 효율적인 이 원칙은 경제활동에 있어서 絶對善이다.
모든 인류를 위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했어야 하지만,
우리들이 자기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하고 말았다.
경제의 절대선은 이제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파렴치한 원칙이 되었다.
공동체적 입장에서가 아닌 혼자만을 위한 입장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도둑놈심보와 다를게 없다.
경제 발전과 성장이란 것이 다른 형제의 몫을 강탈하고 다른 형제의 노동을 착취해야만 가능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진실로 합리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 않으면 경제 발전, 성장의 실패는 명약관화하다.

그러니 이제 경제성장은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 성장을 위해 나아가야 할 때다.
그래서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 책에서 수치를 놓고 성장과 풍요를 얘기하기보다는 이념, 단어의 의미, 생활상,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는 풍요에 대한 반성,
물질적 정치적 권력과 폭력의 침전이 점점 두꺼워지는 경제적 풍요,
새로운 물건의 등장으로 인한 인간 심성의 부정적인 변화와 이기적인 생활태도,
그러면서도 자신감을 잃고 무력감만 느끼는 껍질뿐인 민주주의 속의 인간군상, 등등이
인류가 치명적으로 잘못선택한 경제방식임을 주장한다.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고 주제는 날카로우나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설명때문에 우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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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DTS-ES 3disc)
봉준호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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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

최근 1, 2년동안 난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상당히 집착해있다.
이 단어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람에게서는 "신경질"로 표출되지만, 당연하게도
깊이있는 사람에게는 이해와 연민, 책임감을 자신의 내부에 배가시키게 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의 자살하는 사업가의 대사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들 살아"는 내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라는 암시였다.
영화의 소재는 괴물이었지만, 감독은 현재 이 순간의 한국사회의 초상을 스크린에 그렸고
그것도 얄미울 정도의 예민한 스케치로 영화의 각 장면마다 감탄할만한 솜씨를 보여준다.


[왜 "한국"사회인가]
한강(강, 다리, 매점, 컵라면과 오징어), 핸드폰, 활, 화염병, 장례식장,

["말"하는 영화]
뜻하지 않게 1년에 한 번 이상씩은 한강 시민공원에 가보게되었다.
몇 년 동안 나는 한강의 풍경에서 (내 감정에는 와.닿.지. 않.는.) 쓸쓸함과 허무를 느낀다.
두 세번씩 가본 놀이 공원과 덕수궁 돌담길에서 억지로 낭만을 느끼는 것이 연애방법의 전부이고
그것도 심드렁해져서 이제는 한강가까지 와 있는 커플.
맞벌이에 쫓기면서도 단란한 가정인척해야 하는 피곤한 부모의 아이들을 동반하여 가까운 곳이라 겨우 나올수 있었던 한강 나들이.
보이스카웃의 경험과 세계경찰 의식으로 무장되어 강두와 한편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성실하고 선하고 단순한 부루투스 - 미군 하사.
손톱이 이뻐보이기만 한다면야 손톱에 낀 더러운 때도 일상처럼 여기며 자연스레 제거하는 (마음만 깨끗하면 되니 클래식음악으로 정화하면 되나....) 헤드폰녀.
강두에게서 희봉으로 손님에게로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동전(돈).
끝없는 욕망이 그 한계를 넘어 퇴폐의 영역까지 두루 훑어 최종적으로 자가소멸하도록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중 가장 전염성이 강한 자본주의, 그것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고향을 떠나 돈을 좇도록 등을 떠밀려 한강공원에, 휴일에 갈 데 없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초상을 그려 놓는다.
괴물을 발견하고 맥주쟁반을 들고 있는 강두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구성을 보라, 정말 감탄스럽다.

이런 묘사들은
1. 감정없는 과학자의 정확하고 훌륭한 고증
또는
2. 고뇌하는 섬세한 철학가의 명료한 문제의식
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으면 연출되기 어렵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우연이다.
그리고 이 셋을 구분하는데에 주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영화 상영 시간내내 그 답이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도 한강 공원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와 오징어를 뜯었던 나는 영화의 그 장면들이 사실과 너무 흡사한데서
그리하여 내가 느꼈던 쓸쓸함이 너무 정확하게 표현된 것에 대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범하고 솔직한 영화]
영화제작엔 대자본이 투입되었다. 전체 제작비 약 100억원, 그 중에 괴물CG제작비 약 40억원.
이쯤되면 보통 영화에서는 제작비 투입을 과시하느라 괴물의 전체 모습은
영화 종료 10분전에야 구경할 수 있다.(CG가 사용되지는 않았겠지만 에일리언은 면죄부 발부하겠다.)
어렸을때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질질 끌려가는 플롯, 감질나는 연출의 공포영화등엔 취향이 아니었다.
찔끔찔끔 내지는 쫄딱쫄딱 효과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스트립쇼"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라던대로 괴물은 영화 초반에 홀딱 벗었다.

남일을 통해 화염병의 추억-"내 손으로 직접"-을 그리면서도
현재의 데모대가 강두를 "영웅"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을 질타하기도 한다.

"솔직함"에 이웃하고 있는 "노골적"인 설정이나 장면에서도 유머까지 동반하여 불편함 없이 통쾌할 수 있었다.
기발한 작명 - "에이전트 옐로우"!
까메오로 출연한 아나운서의 시치미떼고 하는 심각한 멘트.
미국과 국제기구의 유별남, 무능함, 음흉함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동시에 결코 비열함이 풍기지 않는 분위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봉감독 그는 진정으로 선수다.


[겸손한 영화]
영화는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영화 스토리 라인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동시에 관객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교묘하게 배치한다.
그 모습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면 제작진이나 관객 서로가 소화하기 힘들고 뻘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감독의 전략인것 같다.
그 문제들은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이나 소설 한 편을 써낼 수 있는 문제거리들이다.

장례식장 : 시간에 쫓기며 사는 가족들은 한 구성원의 "죽음"이나 있어야 한자리에 모이고,
엄숙한 장소에서 남주를 툭 치고 지나가며 의식도 못하는 무례함이 있고,
슬픔에 빠졌으면서도 희봉가족이 일으키는 소란스러움에 대한 주위의 천박한 호기심이 행동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떼죽음에 아무런 감정없이 오로지 시청률에만 급급한 취재진이 있고,
와중에도 기관의 권력을 내세우며 대중을 하수로 보는 "손 번쩍"이 있고,
그 권력은 알맹이는 전혀 없어 문제가 뭔지 몰라 텔레비전으로 대신 때우려는 무지함이 있고,
높은 사람들의 행차에는 슬픔으로 뒤범벅된 상주들의 길 열어주는 행사가 있다.

믿었던 같은 운동권 출신 선배는 예상외로 타도의 대상이던 업체에 취직을 하고
그러면서도 세금을 탓하며 결국은 후배를 팔아먹을 생각을 한다.

수배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방송뉴스를 보며 이제는 너무 만연화되어 특징이 없는 구성원 - 4년제 졸업 백수를 가족들은 정겹게 놀린다.

현서가 동굴에서 앓고 누워있는 세주에게 힘이 될만한 존재들이라 생각하여
다 데리고 오겠다던 의사,119,경찰,군인....들은
한편에서 "내말도 말인데 제발 들어줘.  왜 자꾸 내 말을  잘라."라고 강두가 외치는 "힘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나 현서가 살아 있다는 "진실의 말"을 무시하며 각잡고 있다.
그리고 대국민 방송에서는 "피해자니까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협조를..."이라는 보도를 내보내며 민중의 지팡이라는 자들이,
서로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들처럼 이편과 저편에 멀리 떨어져 있다.
실은 가까이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다. - 강두가 수술실을 탈출해서 어렵게 출구에 손을 대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그 장면이다.
방송에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던 음성변조는 남일이 "나 저년 알아." -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 하나마나한 장치이고
그래서 뉴스를 놓고 강두와 세주는 "밥먹는데 잼없다, 끄자."면서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의 상징인 리모콘을 찾다가 포기하고 발가락으로 텔레비전을 끈다.

위의 장면들과 더불어 유기농이 부자들의 웰빙 스타일로 전락한 것을 꼬집는 거나,
서리는 배고픈자의 특권이라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세주형을 통해 자연스레 나열하는
- 이렇게 정신없이 많은 것을 얘기하는 장면들이 괴물을 소재로하는 SF영화에서 왜소한 대사와 장면으로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아마도 이 많은 것을 버거워하는 나를 위해 배려된 연출이다.


[유머있고 따뜻한 영화]
강두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세주가 자는척 하는 장면을 저만큼 따뜻하고 예쁘고 유머있게 연출해 낼 수 있는 심성에 무한한 애정이 간다.
승리의 활을 쏘고 돌아서는 남주의 머리 흩날리는 모습을 왼쪽 코너에 조그많게 몰아넣는 익살스러움,
강변에 쓰러진 아버지한테 어찌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돌아오는 강두.
탈출한 가족이 매점에서 컵라면 먹을때 귀신처럼 나타난 현서가 음식을 받아먹는 장면은
공포가 따뜻함으로 전환되는 의외성을 띄는 독특한 영화언어이다.

"가족애"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는 장면은 무엇보다 인상깊다.
강두가 의식을 회복하는 세주에게 눈물을 삼키며 묻는다. "너 현서 알아? 누구니, 같이 있었니?"
- 얼굴을 아는
- 누군가와
- 함께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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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마시는 괴물의 상징이나 에이전트 오렌지를 패러디한 에이전트 옐로우 혹은 포르말린의 한강방류 장면으로
반미적이다 뭐다하는 분석은 "분석"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것을 놓고 영화의 촌스러움을 말하기보다는
한국 사회를 살아오면서 조금이라도 예민한 구석이 있다면
영화에서 한 장면 쯤은 경험과 부합하여 "그랬었지" 라고 공감하는게 맘 편한 감상이다.
나같은 경우는 마치 봉빠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시선을 확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독감 바이러스가 만연한 도시에서 침뱉은 물이 나에게 튀기지 않을까하는 것보다 더 예민하게
평온한 일상에서도 사회의 온당하지 않은 모습들이 바이러스보다 더 자연스레 만연해있는 것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영화가 장면마다 그것을 집어내버렸으니 말이다.

감독은 [둔해빠진 새끼들]을 미워하지만 둔해빠진 강두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오징어 굽는것과 가스버너를 아버지 희봉이 환상의 타이밍으로 사고를 추스리며 고생한다.
그런 강두가 밉지 않은 이유는 둔한 강두임에도 딸 현서의 책배낭이 무거울까봐 자연스레 받쳐들고 뒤를 졸졸 따르는 모습이 영화 마지막에 예민해지는 아빠가 될 떡잎이었기 때문이었을까나 어쨌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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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에
스기이 기사브로 감독 / 대원DVD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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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리뷰랄 것도 없습니다.
1. 늑대 매니아 관람요
2. 지브리와 곤조외 다른 재패니메이션 관심관객 관람요
3. 수준높은 사고의 아동들 관람가
4. 동인녀 관람필!
되시겠습니다.


이 아동용 애니를 반드시 보기로 결심한게
저 그림과 포스터의 문구-에서 생각나버린
시신덴님들의 찰스다윈에 끼워넣어진 늑대와 양(염소가 아닌) 에피소드때문입니다.

저 두 녀석은 수컷인데요, 늑대 가브가 심하게 마초형인거야 그렇다치고
염소인 메이녀석의 생김새는 반칙입니다.
이 애니의 흥행 성적은 알 수 없지만 만약 별볼일 없었다면
기획부터가 헷갈리고 타겟이 엉뚱하게 설정되었기 때문일거라고 봅니다.

겉으로 스토리만 봅시다. - 로미오와 줄리엣의 동물버전으로 진부하지않습니까.
주제를 봅시다. - 개나 소나 늑대나 염소나 다 아는 박애주의로 진부하지않습니까.
근데 꼬맹이들을 타겟으로 우정에 대한 그리고, 차이의 수용에 대한 교육때문에
스토리에서 주인공 둘이 함께 목숨을 버리다니, 애들이 감당하기 벅차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애니는
동인녀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릴 수 밖에없는 마이너의 운명인것입니다.

메이같이 상황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상대에게 아무생각없이 맡겨버리는 타잎
개인적으로 왕짜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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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덫 세미나리움 총서 1
한스 피터 마르틴 외 지음, 강수돌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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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지나 전개 그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 방법을 이용하여 비겁한 글이 될 수 있는 유형의 논지가 몇가지 있겠다.
식견이 좁은 나로서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양비론이고 하나는 절충론이다.
정치, 경제, 사회의 굵직한 이슈들이 터질때마다 쏟아지는 비평과 분석, 칼럼들은
문제점을 짚어내어 "양심 있는 척"하려 하지만 이내 결론은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자신의 입지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 식자들의 비겁하고 얄팍한 처세때문이다.
세계화가 무엇인지 아직도 헷갈린다면 읽어볼만한 책들 중 하나이다.

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에서 지면 갖고 있는 물건을 이긴사람에게 줘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다.
한 아이가 많이 져서 이제는 소유한게 없다.
게임을 계속하고픈 그 아이는 예쁜 꽃이나 특이한 모양의 조약돌, 깨끗한 포장껍데기등을 주워모아 판돈(?)을 확보한다.
중국사회의 어마어마한 GDP가 저 아이가 한것과 같이 무소유의 자연물까지 모조리 금전으로 환산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유형의 것에 이어서 무형의 것도 모두 그 대상이겠다.
게임에서 가장 크게 이기고 있는 아이는 가장 많은 물건을 갖고 있게 되었다.
값나가지는 않지만 엄마한테 중요한 물건이라 돌려받고 싶은 다른 아이가
마지막 물건인 초콜릿을 주고 이긴 아이가 갖고 있는 자기 물건을 돌려받길 원하지만
이긴 아이는 초콜릿 열개를 원한다고 말한다. 초콜릿의 아이는 손을 털고 포기하고 만다. 게임 끝.
그러나 교활하게도 자본주의에선 이렇게 일찌기 끝났어야 할 게임을 끝나지 못하게 유도한다.
초콜릿 아이가 가버리면 다른 아이가 게임에 끼일테고
물건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게임을 계속할 수 있게게끔 자기 물건의 교환가치를 (높이되) 주위 아이들이 간신히 감당할 정도까지만 높인다 - 초콜릿 3개 정도로.
이제 초콜릿 3개는 지고 있는 아이들과 이기고 있는 아이에게 각각 그 체감적인 의미가 달라진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필요없는 단어이다.
태어나서 걷고 먹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고 좋은 생각을 하고 동시에 그 좋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다가 명이 다해 죽는다.
여기에 세계화는 필요하지 않다.
세계화를 필요로하는 것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다수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거기에 휩쓸렸다. 그리고 많은 우리들은 세뇌되었다.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펼쳐진 책처럼 읽히는 주의깊은 사람들에 의해 쉽게 설명된 이 책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해준다.

-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다국적기업들의 이익과 물가 상승률에 비해 왜 우리 임금과 소기업인 우리 회사 이윤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지,
- 다국적기업들의 이익이 "생산"에서 뿐만 아니라
- 주식시장에서 어떻게 천문학적으로 그 규모가 늘어나는지
- 그렇게 GNP나 GDP 가 늘어나는데 왜 국가는 복지정책을 축소하고
- 경제학자들이 설명하고 경제정책자들이 약속한 나눠먹을 파이는 커지지 않는지
- 우리 소득에 비해 너무 많이 걷힌 세금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소모되고 있는지
- 그리고 저 많은 것들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지...

등을 쉽고 흥미롭게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며 폭로하고 있다.

여하간에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면 안된다.
아무것도 없는 아이는 게임에 끼일 수 없고,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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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 어느 의사의 고백
로버트 S.멘델존 지음, 남점순 옮김, 박문일 감수 / 문예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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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종교 이단자의 고백 - 이것은 이 책의 원제이다.

이 선정적인 제목이 물리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의학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와 환자와 의사는 계속 물리적인 문제들을 놓고
비난이나 변명의 공세를 펼치고 있음이 심히 안타깝다.
하물며
감수자인 의학박사가 책 뒤에 쓴 후기는 쪼잔함을 지나치게 드러내서
그 변명을 들어주기가 인상찌푸려진다.

처음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망상하기를, 현대 의사들은 의학,의료교육을 졸업함과 동시에
그 선서 내용중에서
-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이 두가지만을 뇌리에 남겨두고 다른 것은 몽땅 잊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나는 현대의학의 여러방면에서 기술적인 면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기술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며 그 완벽이란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사실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인류 봉사"를
"최첨단 의료기술의 발전을 통한 인류 봉사"로 의사들이 착각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의사들이 너무 똑똑한 나머지 좌뇌 주름만 쭈글쭈글 잡혀있어 우뇌의 훈련이 필요하다면
오래되서 고리타분한 고대 서양의 다짐을 우주 밖에 갖다 버리고
차라리 아래의 다섯가지 계명을 요약하여 아침 진찰 전에 한번씩 읽도록 하는 법률을 만들면 어떨까.

이 다섯 가지 계명은 17세기 초 중국의 '첸 시쿵'이라는 의사가 만든 '다섯 가지 계명과 열 가지 수칙' 중에서 다섯 가지 계명만을 번역한 것으로서 당시 의사의 윤리적 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1. 의사는 환자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환자의 요구에 응할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모든 환자는 동등하게 치료받아야 하며 의사는 경제적이 보상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의사들의 양심은 유지될 것이며 의업은 날로 번창할 것이다.

2. 의사가 숙녀, 과부, 수녀와 같은 여성환자를 방문해야 할 경우 혼자 방문하지 말 것이며 보조자와 함께 방문해야 한다. 여성의 은밀한 곳을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바른 태도로 하여야 할 것이며 의사 자신의 부인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이 환자의 신체부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3. 의사는 약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진주라던가 금과 같은 귀중한 물건 등을 보내도록 요청하여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환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환자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탐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4. 의사는 산책이나 음주를 위하여 진료실을 비워서는 안 된다. 환자는 자세히 그리고 인격적으로 진찰 받아야 하며 처방은 공인된 처방에 의하여 행해져야 한다. 이렇지 못할 경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5. 창녀를 진찰할 경우이거나 좋은 집안의 자녀를 진찰할 경우이거나 같은 태도로 하여야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도 최선의 진료를 베풀어야 한다. 환자를 비웃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의사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진찰이 끝난 후에는 신속히 환자의 집을 떠나야 한다.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면 방문회수를 줄임으로써 온당하지 못한 것을 요구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통해 물리적 상황, 통계, 실례를 든 일화에 대한 사소한 의심 분노등은 너그러이 넘기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인간애의 회복을 되새기며
이를 바탕으로 의사와 환자간에 상호 신뢰와 존중이
의료계에 따뜻하게 넘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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