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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 두산동아 / 1991년 11월
평점 :
절판
1977년 미국 순회 강연을 돌면서, 슈마허(E. F. Schumacher)는 말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재구성의 필요성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는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신념을 명백히 밝혀 주려는 다시 없는 시도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인간 존재의 '큰 물음(Big Questions)'들이며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몰입하게 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아홉시에서 다섯시까지의 근무에 묶인 생활 형태에서는 이런 문제들은 많이 거론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런 물음들은 뉴턴 세계관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 단정하고 작은 표준화된 설명에 들어맞질 않은 까닭에 '과학 이전(prescientific)'의 것이라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큰 물음'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저低엔트로피 세계에서 다시 제기될 운명에 있다.
저低트로피 에너지 환경은 인류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경향으로 유도할 것이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에서의 지배적인 윤리 원칙은 에너지 흐름을 극소화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물직적인 부는 세계의 귀중한 자원을 복원하 수 없는 상태로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저엔트로프 사회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것(less is more)'이라는 구호가 광고 문구가 아니라 최고의 진리가 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물질의 소비를 억제한다. 검소가 슬로건이 된다.
인간의 필요는 충족되겠지만, 변덕스럽고 탐닉하는 욕망-전국 각지의 모든 쇼핑센터들이 영합하고 있는-은 절제되어야 한다.
모든 위대한 세계적 종교에 구현된 전통적인 지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허망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우주의 형이상학적인 일체를 이루는 데서 얻는 해방감의 경험이다.
그 목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the truth that will set us free)'를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한데 묶고 있는 '절대 원칙(Absolute Priciple)'과 일체화하는 것이며,
신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에서 가장 간명하게 표현된다(Tat tvam asi;그것은 그대이다).
이것을 우리 존재의 가장 밑바탕부터 이해하고 이러한 초월적 현실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는 태도는 전통적인 지혜를 고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절도를 모르는 소비와 소유와 물질적인 것에 대한 통속적인 애착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가들이 억제해 왔던 것이다.
진행 과정과 미래의 완벽한 상태를 향한 진보나 진화를 혼동하는 것 역시 인간의 오류이다.
우리는 활짝 핀 장미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훗날 언젠가 피어날 보다 완벽한 꽃의 불완전한 조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장미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가치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미의 완벽함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왜 인간에게는 똑같은 논리가 성립되질 않는가?
인간은 근 200만년 동안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이 크게 변하지 았다.
송이마다의 장미가 장미이고, 그러므로 그자체로서, 즉 주체적 현상으로서 완벽하다면, 모든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하다.
[엔트로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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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주장하는 논리가 옳고 그름을 떠나 얼마나 많은 딴지걸기가 있을지는 쉽게 예상이 된다.
진실은 불편하기때문이다. 그리고 불편함이란 것은 그것이 진실이어도 비난받는다.
이 에세이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내 멋대로의 삶에 대한 성찰"이 먼저여야 하지,
"협박하는 거냐!"라는 딴지걸기가 먼저라면,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 하나도 없소."라고 하는 다소 경악할 만한 오만이 가득찬 사람의 배설일것이다.
빈약하다고 비난받는 리프킨의 과학 지식이 단지, "제대로가 아닌" 점 때문에 비난받는것은 당연지사라 할 말이 없지만,
그런 빈약한 과학 지식에도 리프킨이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과학 기술들에는 그럴만한 "뭔가"가 있다는 역성을 들고 싶다.
그것은 리프킨의 감수성이 내 감수성으로 소통이 되기때문이다.
계속 얘기하고 싶어하는 "예민함"과 더불어 "감수성"이란 것도 똑같이 요즘 무게를 두며 생각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대한 감수성은 취향의 문제라 찬탄받거나 비난받을 만한 여지가 별로 없지만,
선악, 정의와 불의, 도덕과 패륜에 대한 감수성은 차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고 다른 어떤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질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일상다반사.
말이 잘 통하지 않을때는 두 어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마음이 닫혀 있을때
- 감수성이 달라 언어의 활용 범위가 다를때
거리를 따져 보자면 감수성은 지식과는 좀 멀고 인성과는 가깝다.
작고 가는 막대형 실험기구로 난자에서 핵을 분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젓가락으로 난자를 쑤셔서 핵을 빼내다니"라고 경악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굉장한 첨단 핵분리기술이로군"하면서 감탄하는 사람이 있을것이고,
"놀라운 기술이지만 역시나 잔인하군."이라며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짚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첫번째와 세번째 사람하고는 뭔가 소통을 할 수 있겠지만,
두번째 사람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소통을 해야할지 암담해서 안면 바꿔 무시해왔는데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는 슬슬 그 방법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이다.
읽지는 않았지만 리프킨이 비판하는 소유, 육식에 대해 그 단어만 들어도 내 감수성은 그의 의견을 지지하게 된다.
오늘같이 맑은 하늘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머리속에 그릴텐데
양산 장사를 할 생각을 하거나 썬블록 크림을 바르지 않은 것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감수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게 아니라 어찌 그따위 천박한 감수성을 갖고 있냐고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면서, 그런 시선을 보내는 나자신조차 경멸할 것 같기 때문에 도망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