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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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 해당하는 교사의 뫼비우스 띠 설명이 끝나면, 난장이의 친구인 꼽추의 집이
쇠망치로 부서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투기 개발의 폭력앞에 꼽추의 집이 무너졌던 것은
40여년전에 나온 소설인데 현재 용산참사로까지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는 실제의 데이타 - 그것도 대체로 정부에서 조사한 통계로
한국 사회의 단면이 아닌 거의 전면이 매우 기형적으로 형성되어 병들어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성실하게 모은 자료와 그것으로 꼼꼼하게 한 분석을 독자가 쉽게 따져볼 수 있도록 설명했다.

한국의 땅값으로 사막이나 밀림이 아닌 캐나다를 6개 살 수 있다.
주택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은 1,083채를 갖고 있으며, 1만 '가구'가  살 수 있는 집을 30'명'이 소유하고 있다.
2002년에 주택 보급률 100%가 넘었고 2006년 한국의 주택수는 1,353만 채로 100만채가 남아도는데도 집값이 폭등하고 있다.
부동산 폭등으로 가계부담이 늘어 소비가 줄고 내수가 위축되면 경기하락으로 이어지고 노조의 요구와 저항은 거세진다.
한국 기업과 재벌들은 외국 기업들과 달리 부동산 투기쪽으로 자금을 몰아 연구개발비가 넉넉지 않고 따라서 경쟁력은 떨어진다.
부동산 투기로 불로소득을 늘린 땅부자 집부자들이 세금도 내지 않아 세수는 줄어 복지정책을 펼수 없고 빈부격차는 심해진다.

한국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나 늘 어이없게 생각했던 짓지도 않은 아파트의 선분양제도에 대한 지적에는 마음이 후련했다.

사람은 공중이나 물위에 떠서 살 수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투기는 땅과 땅위의 집뿐만 아니라
공중이나 물위의 집들에서도 극성을 부릴 것이겠지만.) 한정된 공간을 놓고
살아 있는 그것도 같은 종인 인류를 몰아세우며 "내집 내땅을 내맘대로"돈벌이를 하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벼랑위에 세워놓고 위협을 하는 것처럼, 사람을 그냥 죽이는 것보다 훨씬 잔혹한 짓이다.


제대로 광고를 못하고 있는 [삼성을 생각한다]도 팔려야겠지만,
손낙구의 이 책은 서민들, 중산층들에게 반드시 많이 읽혀서
한국 사회의 정치색과 문화색이 바뀌어야한다.
고 생각하지만, 이들 역시 일확천금과 불로소득을 꿈꾸며 로또의 확률에 신실하게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만 있다면 역시 내가 이 땅을 뜨는게 속 편한 희망이다.
 

통계이기 때문에 숫자가 정확해야 하는데 틀린 부분이 있고
'인구'와 '가구'의 개념이 혼동된 부분은 신경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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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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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를 기념하는 것-성탄절, 석탄절 등-에 익숙한 사람들이 역사 속 인물의 탄생을 기념한다. 그만큼 찰스 다윈이 인류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내가 매체를 보지 않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윈의 생월인 2월이 조용하게 지나간듯하고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의외다.
때마침 우리 과의 네이버 카페대문에서 <최재천의 서재는 모두의 숲이다>라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홍보를 따라갔다가 많은 좋은 책들을 소개받았고 몇 권을 구했다.

과학자 장대익의 창의력은 [다윈의 식탁]을 “재미있는” 소설로 만든다. 발칙하고 재기발랄하다.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진화론의 행로와 현재의 쟁점을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좋은 책이다. 글을 쓰던 시점에 생존하는 진화론의 거물급 학자들이 한 자리에서(가상이지만) 도킨스팀과 굴드팀으로 나뉘어 토론한 주제들은 자연선택의 힘, 협동의 진화, 유전자-환경-발생, 진화의 속도와 양상, 진화와 진보이다.

- 자연선택의 힘(첫째 날) ;
자연선택에 부합하기 위한 생명체의 적응 행태중 강간과 언어를 놓고 굴드팀이 약간 수위에 못미치는 의견을 펼치는데, ‘인간우월주의’에 집착한 탓이 크다. 이런 태도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상태에서 ‘안보이는데도 보고 싶은 것이 보인다고 우긴다.’로 발전할 수 있다. 저자가 정리한대로, 과학자라면 “어떤 능력이나 행동의 적응성 여부는 그것의 옳고 그름 여부와 별개라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적응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개체(유전자)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환경도 고려해야 하며, 발생 부산물(스펜드럴)이었던 것이 적응, 진화하면 주산물이 될 수 있다. 진화론이라는 말자체에 ‘변화’와 ‘시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진화론을 얘기할 때 어떤 시점만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오류일수 있다.
각 분야에 세계적인 대가이자 경쟁자인 토론자들 앞에서 놀랍게도 에드워드 윌슨이 과거 자신의 실수에 대해 인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책 [다윈의 식탁]이 온갖 참고서적과 각 토론자들에 대한 실제 모습을 고려하여 상상력을 버무린 점을 생각하면, 윌슨에게 그런 청렴결백한 인품이 있다는 것이고 과학이 바른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그 점이 희망 한 방울을 보탰다. 둘째 날에 도킨스가 보인 겸허한 모습이 윌슨이 발단이 아닐까 ㅎㅎㅎ

- 협동의 진화(둘째 날) ;
자연선택은 어떤 수준에서 작용하는가 - 도킨스의 주장은 간단하고 논리적이라서 확실해서 알아듣겠다. 그는 일단 개체가 유전자의 운반자라고 한다. 그러니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단위라는 것이다.
내 수준에서 알아듣기 쉬운 굴드의 반박인 “유전자의 수명이 도대체 얼마나 길답니까? 600만 살쯤 된 침팬지 종보다 더긴가요?”라는 비유는 매우 빈약하다. 실제 600만 살을 살고 있는 침팬지는 없다. 단지 침팬지가 600만년 동안 이어져 온 종이라는 얘기다. 침팬지의 털에 관한 몇 가지 유전자도 침팬지를 따라 600만 살을 살았다. 이쯤 되면, 도킨스가 얘기한 유전자는 물리적인 ‘분자’나 ‘가닥'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정보’라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둘째날 도킨스팀에 ‘세미나의 저승사자’라는 키처가 없었던게 굴드팀이 선방할 수 있는 배경중 하나일 듯.(웃음) 굴드팀이 주장하는 ‘다수준 선택론’은 ‘사실’이라는데 동의하지만, 그 매카니즘을 밝혔는다에 대한 얘기는 찾아봐도 없다.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뭔가 명쾌하게 설명되는 원리가 있으면 그 원리를 환원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비난을 위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 유전자와 환경, 그리고 발생(셋째 날) ;
유전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굴드팀이 내놓은 의견은 없었다. 도킨스팀인 저자가 굴드팀에 소홀했던 것인지 대체로 유전자의 정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이루어져 대립적으로 다루지 않은건지는 모르겠다. 굴드팀의 비가법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주장에서, 나는 굴드팀이 G1하고 G2를 정확하게 분류했는지의 궁금하다. 물론 도킨스팀도 진화론을 연구하면서 환경을 배제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오야마가 삼천포로 여러번 빠졌는데, 저자가 완벽한 작가일 수는 없고, 진화론에 완전 통달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그런 설정이 나온 것이리라.

- 진화 속도와 양상(넷째 날) ;
이만큼이나 진화론이 발전해 있는데 진화 속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이 의외다. 도킨스팀이 환경과 발생학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으니 ‘넓이 뛰기’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음에도 힘을 얻지 못하는 듯 보인다.

- 진화와 진보(다섯째 날) ;
생명은 진보하는가 - 박테리아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진보의 개념을 ‘질적 발생’에 둘 것인가 ‘양적 증가’에 둘 것인가에 관한 문제인 것 같다. 단순개체가 없어질 필요가 없으며 새로 출현, 발생하는 생물은 다양성 증가로 이해해야 한다. 복잡성이 주류가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반면, 다양성 증가는 진보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저자의 입장 때문에 책의 내용이 도킨스팀이 우세한 쪽으로 흘러갔는지 모르지만, 굴드팀이 좀 더 합리적인 자세로, 이념을 떨쳐버리고,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잡기 어려워 보인다. 도킨스팀은 이미 자신들도 모른채 실체와 정보를 함께 다루고 있고, 굴드팀은 정보부분을 아예 끼워넣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듯 하다.(그래서 아마 도킨스가 종교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게 아닐까.) 문제는 유전, 진화가 정보라는 것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두 팀의 미래가 가각 상반되게 밝을 수도 어두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잘못된 시간 설정, 문법의 오류등은 편집,감수팀에 문제가 있을 것 같고, 내용상의 착오는 저자의 실수인 듯 한데, 이후 판본에서는 정리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잘 안 될 듯. 내용 오류와 해당 문법은 해당되는 부분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집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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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제임스 러브록 지음,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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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러브록이 보는 생명체의 정의는,
<개방적 또는 연속성의 시스템으로서 외부 환경으로부터 취한 자유에너지와 물질을 사용하고,
더불어 이의 분해산물을 체외로 배출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부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갖는 구성원>이다.
가이아 이론에 대한 이 전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면 그 이론을 반박할만한 근거가 별로 없을 듯하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학계에서는 가이아를 놓고 "생명체"라고 칭하기 자존심 상하니까 같은 말임에도 "유기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가이아가 생명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로봇에 비유한 것(이는 말하나마나 아마 현재 시점에서는 비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과
"1.생식 기능이 없고 2.진화능력이 없다."는 것인데,
가이아의 개체수가 1개뿐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생식기능을 운운하기엔 통계학면에서 그 비판을 수긍하기 어렵고,
진화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선 그 내용을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반론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며 그것이 학계에서 제대로 인정을 제대로 받았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목적론적이다라는 주장은 단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비판이 아닐까 싶다. "이것 저것 살펴보니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데 그게 목적인 듯 보인다."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러브록은 서론에서,
<이 책을 쓴 내 일차적인 목표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지적 만족을 제공하는 데에 있다. 가이아 가설은 자연 속을 산보하거나 또는 단순히 자연 속에 서서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지구에 대하여 그리고 지구의 생물들에 대하여 감탄을 발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또 이 가설은 지구에서 인간 존재의 의의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라고 썼다.
그럼에도 그의 거시적인 이 이론은 에덴 동산에 쫓겨난 사람이란 존재가 이 지구에서조차 주인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오만한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도 한다.(웃음)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대하여 (결과가 아닌)"원인"을 비판한 것이나, 원자력 사용에 대한 러브록의 지지가 그러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가 가는 부분은,
1. 생물들과 그 주위 물질적 환경과의 견고한 관련성
2. 자연적으로 존재불가능한 분자들의 규칙적인 분포, 일상적 분자들의 존재 불가능한 분포
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는 한 형성되거나 지속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이란 것이 한 두 가지 정도의 물질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엔 지구의 여러가지 신기한 "이상 상태"가 너무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얽혀 있다.

이 책과 이론의 현재 위치가 어떻든,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인 생각과 신비감이 오만한 사람 몇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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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피에르 부르디외 외 지음, 최연구 옮김 / 백의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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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게 좋은 것"은 나쁜것이다. 
자신있게 말하건데, 누군가가 당신에게 농담할 때가 아니라
어떤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타협하는 때에 저런 말을 꺼내면서
악수하고 마무리 지으면 마음 속에 뭔가 찝찝한 앙금이 남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근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엄격함"이라는 단어를 싸구려로 취급해왔다.
구닥다리를 부여잡고 늘어져 발전을 저해하는 종류의 것으로 분류해왔다.
더불어 "엄격함"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급진적인 과격함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

프리바토피아 - 사유화의 유토피아가 낳은 사회의 여러가지 폐해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헤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해한 방향은 "지킬 것은 지키자"는 엄격함이다.

p195
전통적 노동운동이 보여주는 국가주의적, 나아가 민족주의적 특성과 단절해야 한다.
또한 비판적 사고와 행위를 폄하하며, 사회적 합의를 너무 추켜세우는 통에
노동운동가들이 피지배자들로부터 복종을 얻어내려는 정책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려고 나서게 할 정도인,
타협적 사고와 단절해야 한다.
'세계화"의 필연성과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임을 감추려 할 때 애용하는)
금융시장의 영향력에 관한 언론과 정치권의 담론이 부추기고 있는 경제적 숙명론,
그리고 주요 사항에 있어서 보수당 정부의 정책을 연장하거나 갱신함으로써
이러한 정책을 유일한 가능성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작업이 부추기고 있는 경제적 숙명론과도 단절해야 한다.
또 부당한 근로계약서의 뻣뻣한 요구사항들을 "유연성"이라는 포장을 가리기에 능한 신자유주의와 단절해야 한다.
고용주 측의 주장을 강화하는 규제완화 조치를
진정한 사회정책이 낳은 눈부신 업적으로 내세우려는 정부의 "사회적 자유주의"와도 단절해야 한다.

이런 과격함이 정당한 이유는 아래의 가치를 지키려는 엄격함때문이다.

p227
전지구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증진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은,
경제적 이익만을 고려하는 자본주의적 가치평가가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형편없이 깎아내리는 가치체계를 다시 부상시킬 수 잇는 집단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삶의 기쁨, 연대의식, 타인에게 베푸는 인정등 사라져가고 있는 감정들은
보호하고 생기를 불어넣고 여러가지 새로운 방향으로 재추진해야 할 감정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합의된 제도와 절차를 따르라"고 매장 점거자들을 비난했던 친구에게 내가 한말은,
"난 믿어지지 않아. 국민소득 2만불인 시대에도 저임금에 항의하는 노동운동이 계속되고 있다니."였다.

21세기가 되면 "노동권"의 뜻이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돈을 벌기위해 노동할 권리'라는 의미대신
'자기가 원한다면 어느 분야에서든 자원활동 노동을 할 권리'같은 것으로 바뀔 줄 알았다.
는 것은 역시 지나친 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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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 두산동아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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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미국 순회 강연을 돌면서, 슈마허(E. F. Schumacher)는 말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재구성의 필요성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는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신념을 명백히 밝혀 주려는 다시 없는 시도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인간 존재의 '큰 물음(Big Questions)'들이며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몰입하게 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아홉시에서 다섯시까지의 근무에 묶인 생활 형태에서는 이런 문제들은 많이 거론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런 물음들은 뉴턴 세계관이 우리에게 제공해 준 단정하고 작은 표준화된 설명에 들어맞질 않은 까닭에 '과학 이전(prescientific)'의 것이라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큰 물음'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저低엔트로피 세계에서 다시 제기될 운명에 있다.
저低트로피 에너지 환경은 인류의 목표와는 전혀 다른경향으로 유도할 것이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에서의 지배적인 윤리 원칙은 에너지 흐름을 극소화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물직적인 부는 세계의 귀중한 자원을 복원하 수 없는 상태로 감소시킨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저엔트로프 사회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것(less is more)'이라는 구호가 광고 문구가 아니라 최고의 진리가 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물질의 소비를 억제한다. 검소가 슬로건이 된다.
인간의 필요는 충족되겠지만, 변덕스럽고 탐닉하는 욕망-전국 각지의 모든 쇼핑센터들이 영합하고 있는-은 절제되어야 한다.

  모든 위대한 세계적 종교에 구현된 전통적인 지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허망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우주의 형이상학적인 일체를 이루는 데서 얻는 해방감의 경험이다.
그 목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the truth that will set us free)'를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한데 묶고 있는 '절대 원칙(Absolute Priciple)'과 일체화하는 것이며,
신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에서 가장 간명하게 표현된다(Tat tvam asi;그것은 그대이다).
이것을 우리 존재의 가장 밑바탕부터 이해하고 이러한 초월적 현실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는 태도는 전통적인 지혜를 고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절도를 모르는 소비와 소유와 물질적인 것에 대한 통속적인 애착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가들이 억제해 왔던 것이다.

진행 과정과 미래의 완벽한 상태를 향한 진보나 진화를 혼동하는 것 역시 인간의 오류이다.
우리는 활짝 핀 장미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훗날 언젠가 피어날 보다 완벽한 꽃의 불완전한 조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장미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가치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미의 완벽함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왜 인간에게는 똑같은 논리가 성립되질 않는가?
인간은 근 200만년 동안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이 크게 변하지 았다.
송이마다의 장미가 장미이고, 그러므로 그자체로서, 즉 주체적 현상으로서 완벽하다면, 모든 인간의 삶 역시 그러하다.

[엔트로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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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주장하는 논리가 옳고 그름을 떠나 얼마나 많은 딴지걸기가 있을지는 쉽게 예상이 된다.
진실은 불편하기때문이다. 그리고 불편함이란 것은 그것이 진실이어도 비난받는다.
이 에세이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내 멋대로의 삶에 대한 성찰"이 먼저여야 하지,
"협박하는 거냐!"라는 딴지걸기가 먼저라면,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 하나도 없소."라고 하는 다소 경악할 만한 오만이 가득찬 사람의 배설일것이다.

빈약하다고 비난받는 리프킨의 과학 지식이 단지, "제대로가 아닌" 점 때문에 비난받는것은 당연지사라 할 말이 없지만,
그런 빈약한 과학 지식에도 리프킨이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과학 기술들에는 그럴만한 "뭔가"가 있다는 역성을 들고 싶다.
그것은 리프킨의 감수성이 내 감수성으로 소통이 되기때문이다.
계속 얘기하고 싶어하는 "예민함"과 더불어 "감수성"이란 것도 똑같이 요즘 무게를 두며 생각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에 대한 감수성은 취향의 문제라 찬탄받거나 비난받을 만한 여지가 별로 없지만,
선악, 정의와 불의, 도덕과 패륜에 대한 감수성은 차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고 다른 어떤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질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일상다반사.
말이 잘 통하지 않을때는 두 어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마음이 닫혀 있을때
- 감수성이 달라 언어의 활용 범위가 다를때


거리를 따져 보자면 감수성은 지식과는 좀 멀고 인성과는 가깝다.

작고 가는 막대형 실험기구로 난자에서 핵을 분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젓가락으로 난자를 쑤셔서 핵을 빼내다니"라고 경악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굉장한 첨단 핵분리기술이로군"하면서 감탄하는 사람이 있을것이고,
"놀라운 기술이지만 역시나 잔인하군."이라며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짚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첫번째와 세번째 사람하고는 뭔가 소통을 할 수 있겠지만,
두번째 사람하고는 도대체 어떻게 소통을 해야할지 암담해서 안면 바꿔 무시해왔는데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는 슬슬 그 방법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이다.

읽지는 않았지만 리프킨이 비판하는 소유, 육식에 대해 그 단어만 들어도 내 감수성은 그의 의견을 지지하게 된다.
오늘같이 맑은 하늘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머리속에 그릴텐데
양산 장사를 할 생각을 하거나 썬블록 크림을 바르지 않은 것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감수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게 아니라 어찌 그따위 천박한 감수성을 갖고 있냐고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면서, 그런 시선을 보내는 나자신조차 경멸할 것 같기 때문에 도망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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