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세의 팡세 - 김승희 자전적 에세이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적 나는 위인전을 읽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여타의 수많은 전기 속의 위인들을 말하는 친구들이 이상하게만 생각 되었다. 어린 마음에 경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한 친구에게는 "그런 널 경멸해"라는 말을 해 그 친구와 된통 싸운적도 있다. (그냥, 그런 너가 참 이해가 안되네, 라고 말했으면 되는 일을)그렇게 나는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위인전들을 거쳐 평전과 자서전 그리고 소소한 자기 삶의 기록들을 나는 그렇게 거부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가끔 펼쳐들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착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착하고 대단하게 살 위인도 못되는데. 아이큐는 100아래에서 간신히 퍼덕이고, 품성은 남에게 욕 먹지 않고 살아갈 만큼 뿐이고, 봉사정신이라든지 희생 정신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국가에 대한 인류에 대한 사랑은 그저 꿈 속의 솜사탕 같은 말인데.  나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싸울만큼의 결단력이라는 무기도 없고 치열함이라는 마음가짐도 없는데.

그런 그런 류의 책들은 나에게 그런 것들을 강요했고 나를 컴플렉스 가득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리도 요즘 대부분의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드는 자전전 에세이의 책들(요즘은 방송에서도 그런 류의 물을을 많이 내보내고 있다)을 읽을 ‹š 마다(볼 때마다)  자신만의 생의 古와 삶의 무게가 범람하는 것을 볼 때 마다 콧웃음을 치곤 한다. 저만 그렇게 사는게 힘든가. 인간이란게 원래 자신의 고통이 가잔 큰 절대값이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의 고통값이 있을까라는 의심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김승희 시인이 이 책 "33세의 팡세"를 읽기 전 나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요즘은 소설을 쓰고 있지만 시인으로서의 김승희의 시들을 좋아하는 터라 혹시라도 그녀의 기록들을 읽어가며 여타의 책들에서 느꼈던 그런 반감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란 생각에 나의 고민은 계속 되었다.   80년대 중반에 출판되었던  에세이. 지금은 50을 훌쩍 넘어버린 시인의 33살의 흔적.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고 한줄한줄 읽어가면서 혹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들 때면 얼른 책을 덮을 것이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유년의 기억부터 서른 셋까지 살아온 흔적들. 그녀 삶의 어느 단편들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나는 내 몸에 어느 한 곳이 훅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빠져나간 것은 내 안에 오랫동안 권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게으름과 오만으로 포장된 내 형편없는 내 삶의 태도들이었다. 그리고 무덤 속에 묻힌 것 처럼 낯설기만 한 내 어느 한 기억기억들. 물론 책을 읽다 조용히 덮은 적도 여러번 있다. 시인이기에 자신 삶의 무게를 더 절실하게 느꼈을 그녀. 그래서 지나칠 정도 민감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신경질적 모습이 보일 수 밖에 없는 그녀. 그런 그녀의 숙명을 생각하며 깊은 숨 한번 크게 들이 쉬고 나는 그 책을 다 읽어냈다.  

열 아홉살엔 스무살이 까마득 했다. 스무살에 서른 살이 까마득했다. 서른엔 마흔과 쉰이라는 나이가 까마득 하겠지. 스물일곱, 서른이 그렇게 낯설지 않고 까마득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지금, 이십여년전의 그녀의 기록들을 아껴아껴 읽는 며칠의 밤을 나는 내 서른 셋의 나이 어느 겨울날, 기억할 수 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3-10 0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5-03-1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다른 분들의 서재에서 이름을 뵐 때마다 인사하고 해야지, 해야지 마음만 가던 터였는데 이렇게 먼저 알은채를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고래가 잠에 뒤척이고 있을 신새벽에 말이에요.
이런저런 일들이 쏟아져 책을 읽어도 리뷰 쓸 정신이 없는 요즘의 저지만 얼른 자리로 돌아와 님을 놀래키는 고래가 되어야 겠네요. 기대해 주실꺼죠?
 
로모로 쓴 일기
신승주 지음 / 눈빛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책장의 한칸을 차지하고 있는 카메라들. 캐논EOS5, 미놀타X-30, 올림푸스EE3, 로모, 삼성 자동카메라, 그리고 삼성8mm비디오카메라와 JVC6mm비디오카메라(모델명 일부러 찾아보기 귀찮다) 어머니 말 그대로 옮기면 "국 끓여 먹을라고 이 놈의 카메라 덩어리들 많이도 있다."  뭐 사진을 전공하거나 아주 애호가인 사람들이라면 뭐 저정도 가지고 그러냐 싶지만 나처럼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고철 덩이리들(어머니 말 그대로 옮김)을 버리지도 못하고 끼고 살아간다는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먼지 쌓이면 닦아주는 일도 지겹고, 가끔 상하지 않았을까 찍어보는 일도 해야 하고,누가 빌려달라고 하면 싫은 마음에 자꾸만 망설이다 핑계를 대기도 하고. 이래저래 애물단지이면서도 이렇게 끼고 살아가는 건 뭣때문인지.

그 애물단지들 중 그래도 나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게 로모가 아닌가 싶다. 여행 때 마다 내 옆구리를 빠져나간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생긴 것 부터가 워낙 무식하고 단순한게, 대강 거리만 맞추면 사진도 그럴듯 하게 찍힌다. 사막의 모래바람에 속속들이 망가지는 디카와는 달리 그 얼마나 건강을 자랑하던지... 사막여행 때는 동료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카메라. 사실 나는 로모가 유명한 카메라고 매니아를 만들어 내는 카메라인줄 몰랐다. 그저 튼튼하다는 이유 하나로 들고 다녔던 나. 그렇게 과소평가했던 로모 카메라. 지금은 디카가 판을 치는 때이고 예전엔 괜히 크고 근사해 보이는 수동 클래식 카메라가 무게잡고 있었으니 로모의 자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인터넷 동호회 자체에 관심 없던 나의 무식함 탓이기도 하지만 정말 로모 매니아들이 지천에 있는 줄은. 중학교 사촌 동생까지 어느날은 알은체를 한다. 자기도 이번 설에 세뱃돈 받으면 살꺼라나 뭐라나. (내게 달라는 말은 절대 안한다. 누이, 나 줘!라고 하면 생각은 한번 해볼텐데.)

어쨋거나(왜 나는 매번 리뷰를 쓸 때마다 한참을 뺑뺑이 돌다 이렇게 본론을 시작하는지)이 책, <로모로 쓴 일기> 는 로모 매니아 중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책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봤던 책. 그 자리에 서서 훓어냈던 책. 로모로 찍은 사진들과 짧게 쓴 글이 전부였던 참 심심했던 책.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이야기 한다. 싱거운 국물에 설익은 밥을 말아먹은 기분이라고,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대는 기분이라고, 치즈 굳은 피자를 입으로 베어먹는 기분이라고. 저자의 그저그런 사진들과 글은 정말이지 깊이나 독특한 시선없이 나른하고 지루했다. 물론 그냥 괜찮은 사진도 몇장 있었다.(그렇게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너는 얼마나 잘찍어대서?라고 누가 물을지도 모르니)훑어내고 나선 오랫만에 나로 돌아와 "출판사 돈지랄 하는 구만."하고 말하면서 책꽂이에 그냥 그대로 꼽았다. 기대를 한것도 아닌데 실망이 너무나 컸다. 좀 더 근사하게 찍고 그 사진과 어울릴 근사한 글을 써 넣을 순 없었을까. 글빨이 안된다면 어디 좋은 글귀라도 옮겨와서 붙여보지. 왜 내가 아쉬움과 미련이 생기는지. (응큼한 속샘)

렌즈의 왜곡 때문에 혹은 색감 때문에 수동이라는 클래식함 때문에 별의별 핑계로 로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별것 아닌 오브제를 찍을 때 확연히 로몬 디카와 다르다. 그 별것 아닌게 괜히 근사해 보이게 한다. 후카시 효과가 정말 짱인 로모 카메라. 난 가격 싸고, 튼튼해서 쓴다. 그러나 지난 사이판 여행서 더위를 먹었는지 아님 늙어 수명이 다 했는지 고장이다. 고쳐야 하는데 뭐 카메라 들고다닐 기력도 없고 굳이 그것 아니여도 되고. 어쨌거나 애물단지다, 로모!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현림의 희망 블루스
신현림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신현림. 그 이름 석자만 들어도 가슴 철컥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 초반 그녀의 시는 내 지루한 일상, 내 나른한 사고와 시선에 핵폭탄이었다. 그때 나는 그녀의 시가 던져주는 그 핵폭탄을 몸이 부서져라 받았다.  재수, 삼수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겪은 그 낙방, 추락의 불안함이 주는 외소감에서 나는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까. 노량진의 어느 재수학원 구석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시를 웅크리고 읽었다. 그녀의 시는 참이슬이었고, 천원짜리 디스 였으며, 100원짜리 오락실의 테트리스였고, 학원 앞 붉은 고추장칠을 한 닭꼬치 였으며, 엉덩이가 예쁜 어느 남학생이었고,  어느 봄날을 어지럽게 만들던 꽃가루였다. 나는 맹목적 신앙심(?)을 가지고 그녀의 시를 그리고 글들을 읽었다. 혹자는 거칠다, 뻑뻑하다, 젠체한다, 잡스럽다며 그녀의 글들을 손사치며 밀어내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글이 좋다!!! 물론 다량의 책을 내면서 그 질이나, 격이 조금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글발 떨어졌나, 라는 괜한 오해를 가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책을 어김 없이 손에 잡는다. 그녀의 글들이 조금씩 미적지근해지지만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그 삶의 무게가 무겁지 않은가. 이십대 초반 나는 그녀가 보았던 그림과 사진을 찾아서 보고 그녀가 들었던 음악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읽었던 시들과 소설을 찾아 읽었다. 그래, 나는 이효리 따라하기가 아니라 신현림 따라하기를 한동안 시행했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어쨋거나,) 이 책 "희망 블루스"는 작가의 일기를 옮겨 놓았다라고 보면 될 듯 싶다. 자신이 읽은 책의 어느 한구절 혹은 들었든 음악의 한 소절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연작처럼 자신의 생각들을 코멘트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들을 담아 놓고 있다. 그녀의 일기장 한 귀퉁이를 슬며시 훔쳐보는 느낌이 들면서 쓰지 못하고 책상 서랍속 깊이 넣어둔 내 일기장의 한부분을 채우는 것 같았다. 독서와 새로운 소리듣기(음악이라는 단어가 한참동안 생각나지 않았음)에 게으른 나로써는 여러권의 책과 여러 곡의 소리를 들어낸 것 같아 잠깐 동안의 포만감에 어찌나 두둑했는지. 분명 누군가는 이런 식의 글 모음이 너무나 안일하고, 식상하고, 상술에 절여진 단무지 같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장수나 양장으로 된 표지에 비하면 책 읽는 시간이 너무나 짧으니 말이다. 그러나 읽고난 포만감을 시간으로 변용시켜 계산할 수 있을까. 시에서 보여준 신현림만의 치열함을 산문이란 형식에서 기대한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대감이 너무 큰 것을 아닌가하고 되묻고 싶다. 사랑니를 뽑아내듯 모든 이빨을 몽땅 뽑아낼 순 없지 않은가. 그러니 뽑아낸 사랑니, 그 이야기에만 주목하자.

 "희망 블루스"!!! 지루박, 차차차, 맘보, 탱고, 왈츠, 살풀이에 승무 ...그 다양한 춤사위를 두고 블루스라니. 촌스러운 어느 캬바레(카바레지만 나는 이상하게 캬~라고 말하고 싶다)의 싸구려 조명 아래에서 어설프게 흐느적 거리는 춤을 연상하게 되는 블루스. 희망을 그 블루스처럼 추라는 이야기? 희망이 그 블루스란 이야기? 어찌 뭔가 어울리지 않을 듯 싶은 두 단어의 결합에 나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지 않지만 깊이와 여러 생각들을 동반하는 글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희망, 그것이야 말고 블루스 리듬이 가장 적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희망 역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잣거리 어느 술에 취한 아저씨의 바딧자락 끝에서 펄럭거리는 블루스처럼, 관광버스의 어깨춤 들썩이는 블루스처럼, 어느 캬바레의 촌스러운 움직임처럼 희망이라는 것은 어렵지도, 우아하거나 폼을 잡지도 않고 가까이에 있다. 때로는 "저런 촌스러운, 저런 경박한", 이라고 약간은 우습게 보는 블루스처럼 희망은 그리 고매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우러러 보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망이여 촌스러운 블루스처럼, 촌스런 조명과 무대의  블루스처럼 그렇게 오라. 가볍고, 경박하게, 스텝이 좀 영켜도 오케이 그러나 느끼면서 신나게 쉬지말고... 희망이여 그렇게 오라.  

이 책은 희망으로 가는 블루스 스텝, 그 스텝을 알려주는 교본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피필름 2005-02-17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현림 시인을 굉장히 좋아해요. 시를 좋아하게 해준 시인이죠.. 산문집들도 사진집들도 좋구요.. 힘들때 외로울때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

어항에사는고래 2005-02-1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참이슬보다, 디스보다 아니 예쁜 엉덩이의 애인보다 더 위로가 되죠. 스타피님두 그러셨군요.

진진 2005-02-2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옛날 대학도서관에서 신현림의 에세이를 읽은적이 있는데..참 좋았어요..제목은 가물..ㅋㅋ..님 덕분에 신현림 글을 한 번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어항에사는고래 2005-02-25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해짐님, 옛날 대학 도서관이란 단어가 어렴풋하면서도,아련하면서도 참 따듯하게 들립니다. 낡은 책장과 낮은조도의 불빛 아래가 잘 어울리는게 신현림의 에세이가 아닌가 싶어요.

비연 2005-02-2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리뷰로 뽑히셨네요. 축하드려요^^

어항에사는고래 2005-02-26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드려요, 비연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E. 프랭클 지음 / 제일출판사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혼자서 극장 갈 때가 빈번하다. 누군가의 방해받지 않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싶다는 뭔가 근사해 보이는 핑계를 달지만 사실은 극장을 함께 갈 주변 사람들이 없어서 이다. 한 두 번의 혼자 간 극장 출입은 자연스레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고 처음의 그 어색함과 낯설음도 이젠 하나의 극장 찾는 즐거움으로 익숙해졌다.
 

몇 해전 여름,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극장을 찾았다. 3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동안 단 한번의 움직임도 없이 구석자리에서 숨죽여 보던 영화...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뒤에도 젖어 있는 눈시울을 닦지 못했던 영화가 슬그머니 기억에서 빠져나온다. 스필버그의 "쉬들러 리스트"는 그 해 여름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던 영화였다. 상업영화에 익숙해져 있던 다수의 관객들은 스필버그라는 생산공장의 잘 포장된 영화에 신선함을 느꼈고 그 영화가 예술 영화인양 떠들어댔다. 그리고 흑백Film으로 잘 포장하고 역사의 상처를 리본 끈 삼아 관객에게 내민 "쉰들러 리스트"에 지구는 열광했고 싸구려 눈물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나 역시 그런 범민(凡民)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물론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상처를 싸구려 감상쯤으로 처리했어야만 했을까? 상처의 흔적을 연고로 발라버린 식의 스토리전개와 감상은 공증 받은 천재라는 스필버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어쩌면 상처 건드리기에 망설이는 것이 스필버그의 가장 약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후속작인 "아미스타드"를 보면.)유태인들의 강제 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전혀 아름답지 않는, 아름다울 수 없는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주연을 맞았던 감독은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행복하게(?) 표현했다. 강제수용소에 가게 된 어린 아들과 아빠. 그리고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남편을 따라 나선 부인. 그들의 수용소 생활은 "쉰들러 리스트"의 수용자들의 생활처럼 처절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낭만적으로 유쾌 하게까지 해 보인다. 어린 아들에게 수용소 생활이 게임이라고 말한 아버지의 말에 관객은 체면에 걸린다. 지금은 게임 중.그러나 목구멍을 애이게 하는 쓰림에 침을 삼키는 순간 흐르는 눈물이 있다. 상처의 깊숙한 곳까지 들춰내는 상처에 연고를 바를 수 있는 능동형 동사를 관객에게 던진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인생의 상처이지만 관객은 연고를 바름으로써 감독의 역설적 표현에 수긍이 간다. 유태인들의 강제 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당대의 문제를 다룬 영화만이 아니라 그들 후손들의 차별을 다룬 영화들도 있다. 여전히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있는 후손들에게 남겨진 그들의 상처가 있는 한 역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고 상처 역시 쉽게 아물 것 같지 않다. 지나온 세월의 절반이 지나더라도. 요즘 이산가족의 상봉이 남겨주는 안타까움과 그들 가족들에게 다시 남겨진 그리움처럼. 역사의 상처를 감히 건드리면서도 영화를 예를 들 수밖에 없는 내 짧은 식견이 부끄러워 희롱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이여서 그런지 더욱 절실하고 인상적이었다. 수용소 생활의 어려움이 뼈 속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처절한 수용소 생활에서 인간들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놓은 책이지만 난 정신분석보다는 수용소 생활의 끔찍함을 더욱 주시하게 되었다. 하루가 한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수용소.죽음이 언제 내 앞으로 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암담하기만 한 미래에 실낮 같은 희망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서술한활자 하나 하나를 따라 읽어 가는 동안 어떤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전생의 모습이 아니 였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하게.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내뿜는 인간을 태워 눈발처럼 날리는 재. 강제노동과 구타. 그리고 소량의 음식. 수용자들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다. 소량의 빵을 나눠 먹으며, 동상에 부어 들어가지도 않은 신발에 이미 발이 아닌 발을 쑤셔 넣으며 개, 돼지 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화에서 보면 살아남으려고 노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 보이려고 손에서 피를 짜내 얼굴에 발라 생기 있게 보이려는 노력까지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왜 그토록 살아남으려 몸부림 쳤던 걸까? 그리운 가족들 때문에? 고향 때문에? 그들은 이미 삶의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아니, 이 현실을 견디기는 너무나도 끔찍하지 않은가?


내 생각과 삶에 대한 입장이 짧고 철이 없어서 인지 그들의 그런 억척스러움을 이해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들 중 누군가가 날 설득하려 덤볐다면 난 그들을 바보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그런 현실 속에서 망가져 가는 내 모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물리적 억압과 압박만이 아닌 내 정신적 황폐화에 난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죽음이 모든걸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편안해지고 싶다. 그렇다고 그들을 모함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내 현실이라면 난 그렇게 선택할 뿐이라는 소신을 이야기 한 것뿐이다. 수용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어갔고(자살이든 타살이든)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꿈꿔왔다. "죽이지 않으면 난 더욱 강해진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은 강하게 현실을 견뎌내었다.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에서 그들은 하루하루 그 선에 올라서서는 줄을 타듯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비록, 선택은 그들에게 있었지만 선택 후의 현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졌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잔인한 사람들은 더 잔인해져갔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더 큰 감수성을 가진다. 사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극한 상황에서야 느껴지고 아름다움을 배운다.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의 이상한 이분법적 관계가 정리된 후에도 수용소의 기억은 쉽게 정리되지 못하고 그 흔적을 남긴다. 먹지 못해 긂주린 배는 매일을 먹는 걸로 소비하게 하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꿈은 수용소 시절의 끔찍한 악몽을 그린다. 잠들지 못한 자, 잠든 자 모두 악몽의 현실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런 현실을 지나쳤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롭다고.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는 우리는 현실에서 존재할 이유를 가지게 한다. 그렇게 보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 고통은 사랑, 행복처럼 삶의 한 부분의 형태임이 분명하기에. 그래서 일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들의 선택이 자살이 아니었던 것은. 그들을 존재케 해주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유태인을 도와준 쉰들러의 무덤에 도움을 받았던 유태인들이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던 그 모습.그들을 학대하던 나찌당원의 한 사람이었던 사람,쉰들러. 사실, 쉰들러는 그들에게 취할 것은 다 취하면서 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태인을 학살하는 도시를 지나다 유난히도 붉은 코트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의 시체를 본 뒤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유태인들에게 남은 것은 없다. 자유.그 어색함뿐이다. 마지막까지 쉰들러를 위해 이를 뽑아냈다.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은 게임 종료와 함께 탱크에 타게된다. 아이의 아버지는 죽음으로. 아이와 아이 엄마에게 남겨진 것은 앞으로 닥쳐올 또 다른 암담함뿐이다. 자유라는 모순이 만들어낸 구속과 절망. 그들은 또 다시 얼마만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들이 지불한 희생의 절반이라도 자유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에겐 이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는데. 가족, 재산, 건강.

 어쩌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고통은 계속 치료해야 할 그들의 현실일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leinsusun 2004-11-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나 같은면 자살을 하겠다.

그런데....생명을 향한 사람의 의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상황이 어려워 질 수록...

나치는 유태인들을 의도적으로 더럽고 짐승같은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야 독일군들이 유태인을 학대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데요.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게,

이 비참한 상황에서 짐승 보다 못한 생활을 하면서 생명을 구걸하는 비루한 인간들로 보이게 하면, 가해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나....

슬픈건....수용소에서는 자살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조차 없다는거죠.

나치에 의해 죽지 않는한,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이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4-11-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다보니 감정이 조금 격해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뜻없는 죽음 그리고 소용없는 학살 속에서 결국 얻으려던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득 아직도 그런 죽음들과 폭력들이 내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씁쓸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수선님! 근데 이상하게 왜 자꾸 전 수선님을 수선화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걸까요?^^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적 삼촌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을 얼마전에서야 읽었다. 워낙 책과 담쌓고 지내는 지라 이제야 책을 집어든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책을 읽어갔다.

책을 읽는 동안 한 영화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타임투킬>이라고 96년도에 개봉한 그 영화가 언저리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혹시 그 영화의 원작이었나하고 뒤져보니 그 여화의 원작자는 존그리샴이었다. 어쩌면 흑인문제를 다루어서, 백인의 폭력적 횡포 그 우월주의가 뭍어나는 영화와 소설이어서 비슷한 코드가 보였는지도 모른다. <타임투킬>이란 영화를 볼 고등학생이었던 당시는 어찌나 영화 속 백인 우월주의와 횡포에 부아가 치밀던지 금방이라도 인권운동가로 나서야 되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만만치 않은 두께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란 소설은 두께가 주는 거북함과는 다르게 잘 읽혀나가는 소설이었다. 잘 읽힌다는 것은 단순히 가볍다거나 경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 읽기의 편안함은 화자의 나이, 어린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특성 때문이다. 어린이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  어린 화자의 서술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세계의 아이의 목소리처럼 듣기 좋게 들린다. 그러나 귓바퀴를 돌고 그 안으로 들어가 머리속에 입력되는 순간 그 세계는 결코 편안하지도 경박하거나 가볍지도 않은 처절한 현실이 된다. 폭력과 이기심 그리고 우월주의가 팽패한 세계. 그 세계는 추악하며 구토를 하게 만든다.  어쩌면 작가 하퍼리는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눈을 통해 듣고 본 세계의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 그 세계는 공포이며 지옥이라는 것을 더 강하게 독자에게 접근시키고자 했던것 같다.

나와 너의 교집합. 그 교집합이 아닌 부분은 타자일 뿐이다. 타자라는 것은 냉정함과 냉소의 타탕성을 갖게 해준다.  그 타자의 세계를 너와 나의 교집합은 끝임없이 사살한다. 목을 비틀기도 하고 칼을 드리대기도 하고 독가스를 살포하기도 하면서. 소설 속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앵무새, 흑인들은 백인들의 거만한 우월주의에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들어나는 죽음만이 아니다. 호적등본에 붉은 줄 긋는 사망선고만이 아닌 것이다. 타자와 그 타자의 세계에 대한 소외, 무시등의 찰과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기심과 욕심 거만한 우월주의 그리고 편협한 사고.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을, 우리가 아닌 것들을 타자로 만들어 버린다. 포함되지 않은 세계는 영원한 타자로만 존재되어지고 타자에 대한 냉정함과 냉혹함은 타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나가 아닌 우리가 아닌 것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나와 우리는 타자의 또 다른 타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그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앵무새를 죽여야 타인을 나 혹은 우리의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도 끝이 없는 살인행위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는 결정해야 할 것이다. 매일매일을 손에 피 뭍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타인이라는 구분 그 경계선을 지우고 접근할 것인가.

 이럭저럭 글을 마치는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오늘 또 얼마나 많은 타자를 만들어 내 옆에 세워 두었는가, 하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11-11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좋아하는 책이라서요 ^^ 저도 이 책을 읽으며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어항에사는고래 2004-11-11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도 좋아하시는 책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