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제너레이션 - [할인행사]
노동석 감독, 김병석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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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묘비 앞에서, 내 첫사랑의 묘비 앞에서, 내 찬란한 시간의 묘비 앞에서, 절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내 희망이라는 묘비 앞에서, 젊음이라는 거대한 묘비 앞에서, 이 시대의 나와 너는 살아간다. 

   청춘 그 끔찍한 무덤.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있는 평생 단 한 번도 들어올리지 못할 납덩이 묘비여. 아무 글자도 새겨 넣지 못한 그 민둥의 돌덩이여. 그대는 왜 이렇게 나약한, 연약한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 수 많은 길들 중, 껌처럼  버려진 그 길을 걷는 것도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깡패처럼 내 청춘의 삥을 언제까지 뜯어 볼 셈인가. 지독한 칼잡이 보스도 아니도 양아치에게 내 이 치졸하고 온통 연약해빠진 이 청춘을, 이 청춘의 시간을 흔들려야 하는가. 대답해 봐라. 그 나락의 밑 바닥은 언제쯤인지. 얼마나 더 견디면 내 연약해 빠진 무릎, 쉴 수 있겠는가.

  내 청춘을 너는 쓰레기라 말하고 있다. 내 희망을 무덤이라 말하고 있다. 아니 너는 나를 방관하고 있다. 멱살잡고 뒤 흔들어 보는 내 손아귀기 독기를 너를 휘파람 한번으로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있다. 그래, 너는 꿈쩍도 하지 않는데 나만 이렇게 흔들리는 구나. 나만 미친년 치마자락처럼 펄럭이고 있구나.

  그는 말한다: 오늘 나는 카메라를 팔았다. 내 방식으로 세상보는 그 눈을 파내었다. 내 이 처절한 두 손으로. 오늘부터 나는 장님이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희미하던 희망이여, 이젠 너를 볼 수 없다. 박수 소리로 너의 존재를 알려 주어라. 너 거기 있다고 나를 불러라. 곧 내 귀도 잘라내야 할 그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너 거기 있다고 나를 불러라.  제발, 제발, 제발.

  그녀는 말한다: 오늘 나는 배나무 아래서 온종일 배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배, 배, 배, 배, 배. 수 십번을 외쳐도 떨어져 주지 않은 내 배여. 까마귀 날지 않은 하늘이 무심하기만  하구나. 내 청춘의 허기를 그렇게 간절히 불러도 채워지지 않는구나. 나는 영양실조 인간. 하루만에 나간 직장에서 짤리고, 피라미드 회사에서 사기 당하고.  내 생활의 영양실조. 영양실조 청춘은 오늘도 노래를 부른다.  "하늘이 노래요, 누래요. 하늘이 나일롱 스타킹처럼 자꾸만 팽팽해지더니 빙글빙글 돌아요."

  장례식에 다녀왔다. 85분의 장례식. 내 청춘의, 내 친구들의, 내 첫사랑의, 내 희망의 무덤 그리고 그 묘비를 한참 바라보았다. 세상을 향한 통로를 만들기 위해 나와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장례지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묘비를 가슴에 새워두고 살아야 하는가. 청춘 그 끔찍함에는 이미 낳은 무덤들이 기생하고 있는데. 절망이 모자라 절망한다고? 절망의 그 후카시가 근사해보여 절망한다고? 아무거나 되고 싶으면서 괜히 희망 어쩌구 저쩌구 지껄인다고? 아니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괜히 청춘을 들먹인다고? 약해빠져 이렇게 휘청인다고? 마주설 자신이 없어 그렇게 살아간다고? 대답하지 않겠다. 울컥거리며 그 질문을 던진 당신에게 덤벼들지 않겠다. 시퍼런 도끼를 들고 당신을 겨누지 않겠다.  

  <마이 제너레이션>! 우리는 등뼈에 다이나마이트를 하나씩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구나. 불빛이 사그라들기만 하는. 차라리 펑 터져주었으면. 그래서 이 우울한 내 등 뒤의 그림자 좀 날려줘 버렸으면. 오늘 우리의 청춘을 희망의 무덤 앞에서 그렇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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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dts] - 할인행사
소피아 코폴라 감독, 빌 머레이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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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말을 내뱉고 있지만 그 말을 멈춤 잠시 잠깐 혹은 그 말에서 벗어나 혼자가 된 시간 허무함이나 공허함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등 뒤의 봉의 무게와 부피가 커져가는 그 순간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지 않는가. 소통의 부재. 그건 어쩌면 태어나서 부터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인지 모른다. 낙타 등뼈에 볼록히 쏟은 봉처럼 사람들은 소통의 부재, 그 부재에서 상실감과 외로움을 저마다 하나씩 등에 붙이고 살아간다. 등에 불어져나온 봉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그 봉을 보는 경우도 있다. 소통의 부재가 가져오는 그 상실감과 고독이 깊어져 쌍봉인 사람도 있고 하나인 사람도 있다. 혹은 아주 낮은 그 흔적만이 간신히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속 샬롯과 밥.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그들은 소통부재를 넘어선 소통불능을 느낀다. 그로인해 불면의 밤들을 보낸다. 무심히 텔리비전 화면 쳐다보기, 창 밖 쳐다보기, 음악 듣기, 낯선 거리와 사람들 속을 걸어보기. 그들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을 소외시키는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가가려고 나름의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하나의 또 다른 소통 부재, 불능이라는 또 다른 봉 뿐이다.

  물론 감독은 소통부재와 불능의 모습을 극적으로(내겐 극단적으로 보였음) 보여주기 위해 영화 속 공간을 자국이 아닌 타국(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보여줌으로써 혹 밥과 샬롯의 근원적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관객을 조금이라도 이해시키려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런 공간 설정은 어설픈 면이 있었다. 또한 샬롯과 밥이 경험하는 일들이 동양인적 관점(조금은 깐깐하게 생각한다면)에서 보면 불편한 부분도 있었다. 문화적차이를 질적차이 혹은 동양문화(일본)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작가는 소설 속 인물에게 감독은 영화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한다고 보면 이 감독의 폐쇄성 혹은 서양 우월주의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란, 약간은 격양되고 전투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내게는 그런 의도적 설정이 영화를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감상적 문제를 뒤로하고서도 영화의 공간과 그 공간의 낯선 경험들은 밥과 샬롯의 근원적 문제가 무엇이었나, 라고 자문하게 될 정도로 영화적 핀트를 자꾸만 어긋나게 하는 장치였다.  밥과 샬롯이라고 대표되는 낙타들의 보여주기 위해 일본이라는 사막의 공간. 그 공간은 영화를 보는 내내 버석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모랫바람 처럼 버석이는 그 것을 감독이 노렸는지도 모르만. 

   밥과 샬롯은 일본이라는 타국의 어느 호텔에서 머루르게 된다. 호텔이라는 장소. 그 장소는 정착이 아닌 유동의 타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이다. 진흙처럼 질척이지 않게 모래처럼 가벼운 바람에도 쉽게 자신의 존재를 옮길 수 있는 그런 타인들의 집단 거주지. 일본이라는 타국적 공간 만큼 호텔이라는 장소 역시 영화 속 밥과 샬롯에게는 소외의 공간이 된다. 

  소외와 상실감 그리고 소통의 부재와 불능이 모래 바람이 부는 공간에서 샬롯과 밥은 만난다. 아니 서로 알아봤다고 해야 더 옳을 듯 싶다. 상태방 등 뒤에 붙어 있는 커다란 봉을 보았다. 자신의 크기만큼 커다른 그 봉에 그들은 끌렸다. 끌린다는 의미가 이성적 호기심 혹은 성적 호기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듯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의 끌림은 인간적 끌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한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막 하고 난 후 거울을 겹쳐 놓는 등의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뒷모습을 볼 경우는 극히 적다. 자신의 등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간, 그 시간의 어느날 샬롯과 밥은 타인의 등을 통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등에 붙은 쌍봉.  그 커다란 크기는 자신의 소외감과 고독, 상실감인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둘의 관계를 로맨스적 관계라고 명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 우연히 여행에서 만나 7일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라며 이야기 하는 건 좀 우습지 않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  밥과 샬롯은 어찌보면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앞면의 영혼이 뒷면의 영혼을 보지 못하다 보게 되는 경우처럼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뒷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일탈적 행위를 한다는지, 농담을 통해 그리고 걸러내지 않고 쏟아내는 말들을 통해 밥과 샬롯은  단절이 아닌 소통을 하게 된다. 며칠 계속되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깊은 숙면에도 이를 수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보다 그것의 치료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소통의 부재와 불능에서 벗어나 진심어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1분동안의 잠이 1시간의 잠보다 달콤했던 기억. 일본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짧은 만남이 그들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영화 끝 장면, 밥이 샬롯에게 귓속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관객들은 밥이 어떤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귓속말은 그 두 사람만의 이야기이며 어느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되는 둘 만의 비밀이다. 엔팅 크레딧과 자막이 올라가는 내내 관객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그 귓속말.  감독은  통괘하게 관객을 소통에서 부재자로 만들었다. 혹 영화를 다 보았음에도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관객에게 내가 할말은 바로 이런거 였어요, 라고 웃으면서 바이바이, 손짓을 하듯이. 귓속말이 궁금하지요, 소통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이제야 좀 알겠지요?라고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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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
이와이 슈운지 감독, 스즈키 안 외 출연 / 엔터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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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색 교복을 입었던 그 해 4월. 넘들과 다른 나를 보여 줄 수 있는 거라곤 짧거나 유난히 길게 내린 치마길이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누가누군지 구분이 안갈만큼 똑같이 보이는 그 모습이 싫어 암모니아를 뿌려 탈색시킨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나, 누구요! 하고 외쳤던 그 해 4월. 반성문을 쓰라는 말에 학생부실로 잡혀 온 나. 먼저 와 반성문을 쓰던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삼십분 동안 반성문도 쓰지 않고 서로를 멍하니 처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런 말들을 던졌다. 빈정 상하는지도 모르고, 빈정 상할꺼라 생각도 하지 않고 마른 빵부스러기처럼 그렇게 건조하게 이런 말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밀가루 반죽처럼 지루한 얼굴이군. 소금기 없는 바닷물처럼 싱거운 목소리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 없는 발걸음이군. 삭정 가지처럼 바람에 툭 하고 부러질 듯한 몸이군.  풍선껌도 한번 씹어보지 못한 재미없는 입이군.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이군.  깊은 우물처럼 속내는 도통 보이지 않는 눈동자군.

 
   영화< 하나와 앨리스>속의 예쁘장한 두 소녀들의 하루하루는 밀가루 반죽처럼 지루하고 싱겁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첫사랑에 빠지고 자기정체성 찾아가기도 시도한다. 그녀들의 중심에는 첫사랑과 그로인한 갈등이 중심에 놓여있고 그 변두리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통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찬람함과, 나름대로의 청춘 상행 곡선을 그리고 있는 소녀들에게는 그 정도가 딱인걸까? 더 이상의 깊은 사고의 성장통, 그 시간을 감독은 왜 허락하지 않는걸까. 그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교복을 입고도 등교길이 유쾌할 수 있고, 신날수 있고, 설렐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둘의 우정이  가능하다니. 교복을 입고도 환희 웃을 수 있고 속삭일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행동의 제약없이 끊임없이 혹은 마구 움직일 수 있다니. 과연 교복 예찬자,  이와이 šœ지야! 라고 나는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비꼬는 듯 한 중얼거림을 던지면서도 재채기 할때마다 들썩거리는 마은 한켠이 들썩거리는 건 아마도 하나와 앨리스의 모습에서 그해 4월, 학생부실에서 만났던 그 아이와 나를 발견 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쩌면 우리도 하나와 앨리스처럼 중심엔 성적, 대학입학(사랑이 아니라니, 비극이다)을 주변엔 자기 존재와 내가 보증선 삶의 무게들을 두었을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나는 감독의 깊이와 중심의 순서를 오해한 것을 꼬집고 싶다.)

   철학이 무언지, 연기하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하나와 앨리스 그리고 4월의 나와 그 아이. 욕망하는게 뭔지, 안에서 꿈틀 거리는게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궁금하던 그 느낌의 공통점은 아마도 무게를 넘어 뛰어오르고만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하나와 앨리스가 발레 동작인 아라베스크를 하며 날기를 꿈꾸웠다면, 토슈즈를 신지 못하고 종이컵에 테이프를 동여맨 채 춤을 추어도 그 어설픈 움직에도 최선을 다했다면, 나와 4월의 그 아이는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깜깜한 운동장을 또 달리고 달렸다. 중력을 지워 날수 있을 때 까지 달려보자며.  

   4월의 소녀들은 그‹š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천역덕 스러운 연기자가 되었고 내 다리를 움직여 달리는 것 보다는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에 더 익숙해 졌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록 잘 알아채고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이게 챙긴다. 세월이 흐른 어느날 <하나와 앨리스>도 그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시간이 올까. 뼈가 굳어 발레 동작을 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남들이 시선이 두려워 아라베스크 동작을 잃어버렸다하고 혹은 자신 아이들의 발레 동작을 보며 위안을 얻겠지. 그리고 만담을 하면서 웃었던 그때가 유치해져 이제는 만담을 하는 것도 아니,  만담을 들을때 웃음에도 인색해져 살아가겠지. 주위는 여전히 어지럽고 복잡하고 변한게 없지만 비밀 하나씩을 가슴에 담아가며 성장하던 시간을 봉인 시킨듯 영화는 어른이 된 나와 마주섰을때 그리고 어른이된 하나와 앨리스를 상상하는 순간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과대평가 되고 있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들. 스타일리쉬로 포장한 네러티브의 빈약성. 그리고 감독 이름 자체의 상품성.(물론 그의 영화 전부를 본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단적으로 평가내리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내가 본 영화들의 몇 편은 그리했으니.) 그래서 나는 매번 그의 영화를 보면서 뭔가 씹을꺼리를 찾아보려 한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이 감독의 영화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지독한 감상과 봉인 된 추억을 들먹거려 이렇게 꼼짝 못하게 하다니. You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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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0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와 앨리스는 극장에 가서 볼 만큼 끌리지 않더군요.
이와이 šœ지 감독이 우리나라에서 좀 과대평가되고 있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가 예쁘장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러브레터의 겨울풍경은 참 좋았어요.^^

비로그인 2005-02-0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하나와 앨리스는 별로였음. 스왈로우테일버터플라이는 언제 개봉하는 거지 기대하고 있는데 드레곤 피쉬도 마찬가지고 그게 바로 이와이의 결정판인데

어항에사는고래 2005-02-04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영화 포스터 속의 두 소녀가 끌려 아니 사실은 제가 감독을 예전부터 짝사랑하던터라(좋아하던 사람이랑 너무 닮아...그런데도 항상 영화평은 짜죠.)봤더랬죠. 러브레터의겨울 풍경...음...생각납니다, 그 첫사랑에게 그 눈밭에서 외쳐보고 싶네요. "오겡기 데스까?"

혓바닥, 우리 예전에 시네마테크에서 스왈로우테일버터플라이 보지 않았던가? 가물가물.


하루(春) 2005-02-0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러브레터와 4월이야기를 집에서 비디오로 봤는데, 집중이 안 되더군요. 특히, 러브레터는 내용을 봤는데도 내용을 전혀 모르고.. 그런데 이번 하나와 앨리스는 포스터가 참 맘에 들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어항에사는고래 2005-02-05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브레터의 인물, 풍경이 모두 정적이라 어쩌면 집중하기 힘드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집중이 잘 안된다는 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와 앨리스의 인물들은 러브레터의 인물들보다 좀 더 동적이라 어쩜 덜 지루할 수도 있겠네요. 두 소녀의 움직임이 어떨땐 정신없기까지 하다니까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재미있었다, 라고 그냥 말해야 될 둣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죠.

2006-12-1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6-12-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lkor님, 글 제대로 읽고 시비조의 말씀 던지시지 그래요?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 다시 읽어보시지요.
 
피아니스트 SE - 비트윈 2disc, 할인행사
미하일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뻬르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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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가끔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푸석하고 헝클어진 머리에는 새치가 듬성듬성 있고, 남자와 한번도 접촉해 보지 못한 기름기 없어 보일 정도로 깡마른 몸피를 가지고 있는 그녀. 피아노 레슨을 할 때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서서 학생이 박자나 음표를 틀릴 때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건반에 잘못 착지한 손을 찰싹찰싹 때리곤 한다. 세계 꼬집는 듯한 그녀의 손맛과 신경질적인 톤 높은 목소리. 오늘도 레슨을 마친 그녀는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간다. 푸석거리는 여자는 어떤 의욕도 없이 길을 걷기 시작한다. 

관계의 결과물, 감독 미하엘 하네키의 시선

  영화 <퍼니 게임>의 미하엘 하네키 감독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스크린으로 옮겨 <피아니스트>란 영화를 가지고 돌아왔다. 휴양지에서 단란한 한 가족이 달걀을 빌리러 온 두 젊은이에 의해 이유 없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 <퍼니 게임>은 예상과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해 비평가는 물론 관객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들고 나온 <피아니스트> 역시 <퍼니 게임>처럼 당혹스럽고 불편한 여정을 따라가로독 관객을 이끌고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여자 주인공 ‘에리카’의 행동에 적극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즉 어떤 장면에서도 ‘에리카’가 왜 이런 행위를 하느냐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감독은 연상의 여인과 연하의 남자가 만나는 운명이 예정된 멜로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난다. 결국 미하엘 하네키 감독은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메스로 자르듯 예리하게 갈라내어 이질적인 행위와 인물과 그들의 삶의 표정의 몽타주를 통해 끝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심연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피아노 치는 여자의 이야기 이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전문가인 주인공 ‘에리카’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건조한 하기 그녀의 삶의 목표는 피아노로 이미 결정 내려져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오직 피아노 치는 주체로서의 역할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피아노로 영토화 되어 있는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탈 영토 화하려는 접속을 시도한다. 그러던 중 ‘에리카’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제자 ‘클레메’와의 피아노 레슨이라는 접속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에리카’는 ‘클레메’를 만나기전 숨진 채 행했던 욕망들을 ‘클레메’를 통해 욕망의 문턱 넘어서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위치는 바뀌게 된다.‘에리카’가 ‘클레메’에게 집착할수록 그는 끊임없이 ‘에리카’라는 영토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어머니로 인해 코드 화된 ‘에리카’의 욕망은 ‘클레메’를 만나면서 욕망의 여과장치를 부셔버리지만 그녀는 결국 어깨에 칼을 꽂으며 돌아선다. 즉 그녀는 끝까지 전쟁기계가 되지는 못한다. 다 쥐어짜서 남는 마지막 한 방울은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음악’이라고 말하면서 박자도 무시하고, 음표도 무시한 채 거리를 걸어간다.


연주되는 욕망의 공간

  영화 <피아니스트>의 공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가 생활하는 공간인 집과 ‘에리카’가 ‘클레메’와 접속하는 공간은 피아노 레슨 교실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공간에서 ‘에리카’의 욕망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 다른 공간으로는 ‘에리카’의 욕망이 여과장치 없이 쏟아지는 집의 한부분인 욕실과 포르노 샵 그리고 ‘클레메’와 키스와 오럴섹스를 나누는 화장실이 있다.

  집이라는 공간은 ‘에리카’에게 끊임없는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녀는 집에서 수많은 문들을 열고 닫는다. 그러나 어느 하나 그녀에게 소통 가능한 문은 없다. 문들은 끊임없이 ‘에리카’를 감싸며 그녀의 모든 욕망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한다. 집이라는 홈패 인 공간에서 그녀의 욕망은 영하의 냉장고에 저장해 놓을 수밖에 없다. 집이라는 공간의 권력자인 그녀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에리카’의 삶을 통제 한다. 그녀에게 피아노만을 강요한다. ‘에리카’에게는 절대 화장이마 화려한 옷들은 허락되지 않는다. 늦은 귀가 역시도 금지된다. 결국 집은 ‘에리카’에게는 냉동 창고 이며 피아노는 그녀의 또 다른 냉동고가 되어 그녀의 여성성을 모두 얼려버리고 만다.

  ‘에리카’는 집에서 새로운 공간을 찾는다. 동결시킨 그녀의 여성성을 찾기 위한 공간인 욕실에서 그녀는 스스로 질에 상처를 낸다. 다리 사이로, 욕탕 사이러 번지는 붉은 피는 창백한 그녀의 삶과 집이라는 공간에게 던지는 그녀 나름의 복수이다. 그러나 강제적인 월경의식이 코드화 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삶과 삶의 공간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그것은 텅 빈 신체를 만들어 낼 뿐이다. 강제적 월경의식은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강밀한 힘들을 비워버리는 행위이다.

  화장실이라는 공간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에리카’는 욕망이 치솟을 때마다 요의를 느꼈다. 욕실에서의 의식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요의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몸 속 가득 꽉 차 있는 뜨거운 것을 오래도록 쏟아낸다.

  이전 까지 그녀는 포르노 샵을 들락거리며 그녀의 쌓아둔 욕망을 분출했다. 여성적 판타지를 감추고 살아가는 그녀 나름대로의 안전한 방식의 욕망분출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요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집이라는 공간과 대립되는 공간은 피아노 레슨 교실이다. 물론 이 공간은 제자 ‘클레메’를 만나기 전 집고 같은 홈패 인 공간으로 그녀에게 복종과 욕망의 억압을 강요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권력자가 어머니 이었다면 레슨 교실에서는 피아노가 새로운 권력자가 되어 그녀의 욕망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클레메’와 접속함으로서 이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이 되려고 한다. 그녀의 욕망들은 선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첫 시작이 되는 공간으로. 그녀의 욕망들은 더 이상 코드화 되지 않고 여과 없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윤곽선을 그리게 된다.

  그러나 ‘에리카’와 ‘클레메’는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그녀는 혼동하게 된다.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화장실이란 공간이 과연 그녀에게 진정한 탈주를, 그녀를 붙들고 있는 것을 너머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영화를 고문에 가까운 퍼니 게임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레슨 교실을 벗어난 에리카의 탈주는 멈추고 말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그녀의 욕망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창조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텅 빈 신체로, 황량한 신체로 만들 뿐이다.   

  레슨 교실에서 ‘클레메’와의 접속이 ‘에리카’자신의 삶에 다양한 배치를 가져다 줄 수 있음에도 그녀는 스스로 멈추고 말았다. ‘에리카’에게는 슈만과 슈베르트의 피아노 곳은 너무나 쉬울지 몰라도 리좀의 간주곡은 연주하기 결코 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집과 ‘클레메’가 오기전의 레슨 교실은 ‘에리카’의 삶의 영역 중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을 크게 보면 국가장치로 이해 할 수 있다. 가정이라는 가족제도는 근대 국가장치가 만들어낸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다. 레슨 교실 역시 ‘에리카’를 선생이라는 직업으로 분류하려는 국가적 장치이다. 가정이라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녀의 모든 욕망을 통제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강요되어 온 그 통제에 익숙해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순응하며 살았다. 그러나 ‘클레메’ 를 만남으로서 근대적 국가장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클레메’의 사랑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고문으로 다가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감독 미하엘 하네키는 예술 자본론과 국가장치에 종속되어 투쟁하지 않고 살아가는 관객에게 통렬한 비판의식을 감독 나름의 퍼니 게임을 통해 제시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자웅동체의 욕망과 억압

‘에리카’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성을 가로지는 형태로 무성(insexualite)의 은밀한 형태로 지배되어 왔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끝임 없이 여성적 장신구들을 그녀에게서 제거하려 든다. 새로 산 드레스를 빼앗으면서 유행을 지나면 입지 못할 천박한 옷이라며 빼앗은 어머니와 그녀는 옥신각신 하다 머리채를 잡고 싸운다. 그러면서 집안일에 대한 것들을 그녀에게 제외시켜 준다. 피아노 하나만을 위해서라는 하나의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두 모녀는 한 침대를 사용한다. 나란히 잠을 자는 모습에서 부부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녀는 일종의 남근 적 상징이 되고 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텍스트 <소돔과 고모라>를 분석하면서 태초의 자웅동체를 언급했다. 원래 자웅동체는 동일한 식물 안에서 두 개의 성이 현실적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하나는 양성이어어서 두개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두 성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자웅동체 개념은 횡단적 성으로 부연될 수 있다. 성의 횡단이란 개인 속에서 두 가지 성이라는 두 파편의 공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적 대상들의 공존을 가리킨다. 즉 한 주체 속에서 하나의 성이 아니요, 두 개의 성이 아니라 n 개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여러 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적 성도 나타나지 않고 메말라 있는 ‘에리카’는 끊임없이 어머니가 강요하는 남성적 성을 벗어나려 애쓴다. 그래서 강제적인 월경의식이나 포르노 영화를 통해 오르가즘도 느껴보려 시도한다. 그러나 여성적 욕망들의 웅성거림은 결국 ‘클레메’와의 접속을 통해 확연히 들어난다. 그리고 그와의 접속을 통해 그녀는 두 성 사이에 공통된 것이 없지만 횡단적인 방법으로 끊임없이 두 성이 서로 교통할 수 있게 시도한다. ‘클레메’와의 접속을 통해 늑대들의 웅성거림 같은 그녀의 욕망과 무의식은 하나의 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다양한 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지시한다. 그럼으로써 어머니에게 강요되었던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 거부를 벗어나고 관음증으로 병든 여성성을 치료함으로써 다양한 성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녀 스스로도 자유로워지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현대인의 정체성이라 규정한 정신 분열 자에게 주체는 중심에 있지 않다고 했다. 즉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고정된 자기 동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들뢰즈는 인간은 온갖 형태로 온갖 종류의 생명과 접촉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율적이고 자유롭고 확고하게 정의된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의 욕망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이다. ‘클레메’를 만난 ‘에리카’의 성감대는 유기체의 단편이 아니라 개체 이전의 단일한 것들의 분포상태이다. 그것은 하나의 분산되고 무전부적인 순수한 다양성이요, 통일도 전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에리카‘는 ‘클레메’를 통해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요 둘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라 수천수만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 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이다. 그러나 미리 말하겠지만 그녀의 그런 깨달음은 장치들에 의해 너무나 길들여져 그녀가 끝까지 놓아버리지 못한 것들에 의해 결국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피아노 건반 88개에서 연주되는 욕망

  ‘에리카’가 포르노 테이프이나  ‘클레메’의 남근을 관음(觀淫)하는 동안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피아노 연주곡을 관음(觀音)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에리카’는 생계를 위해, 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사회적 위치에 의해 등등 너무도 많은 이유를 가지고 피아노 위 건반위에 손을 내려놓는다. ‘에리카’의 수많은 다른 제자들은 학점을 위해, 명예를 위해 피아노를 친다. 즉 인정받기 위해 손을 내려놓는다. 다양한 원인들에 의해 피아노 위에 손가락을 내려놓지만 88개 건반 위에 내려놓는 손가락의 원인들은 욕망하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다. 그들의 욕망은 근대 사회장치가 만들어 놓은 결핍 때문이다.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진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욕망한다.

  이들과 ‘클레메’의 욕망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 일까? 분명 ‘에리카’를 포함한 그녀의 제자들의 피아노 연주곡의 느낌과 ‘클레메’의 연주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음악의 선곡 역시 이전 사람들이 느리고 무거웠다면 그의 연주곡은 경쾌하고 따른 느낌의 곡이었다. ‘클레메’의 욕망은 ‘에리카’를 사랑하고자 함이다.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전공한 그는 ‘에리카’의 관심과 사랑을 위해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에 내려놓는 그의 손은 결국 기관 없는 신체가 될 수 있다. 손이 어떤 이웃 항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그의 손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건반 88개에 내려놓는 ‘클레메’의 손은 무수한 욕망의 웅성거림을 가지고 ‘에리카’를 향햐 간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과 접속하는 순간 둘의 욕망은 모두 구부러지고 만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죠? 라고 아무리 ‘클레메’가 외쳐 보아도 ‘에리카’는 대답할 수 없다. 결국 에로티즘 본연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클레메’에게 보일 뿐이다.


길들이려는 욕망, 그 구부러짐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에리카’와 ‘클레메’는 육체적 접속을 한다. 정사는 늙은 여자에 대한 젊은 남자의 사랑의 아름다움 모습을 기대한 관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멜로라는 장르적 관성이나 에로라는 외설을 완벽하게 거부한다.    둘의 관계는 ‘에리카’가 주도하는 쾌락의 도구로 남성의 성기를 화면에 위치시킨다. “니 꺼 보지 말고 내 얼굴을 봐.”라고 요구하는 그녀는 삽입을 하지 않고도 쾌락을 느낀다. ‘클레메’는 마지못해 응하면서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손은 새로운 기계로 작용한다. 새로운 건반 위에 손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사디즘과 마조히즘적인 행동으로 변하게 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마조히즘적인 행동을 원한다. ‘클레메’는 마지못해 그녀의 부탁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조히즘적인 위치를 고수하려고 든다. 그것은 그녀 안에 가득 들어찬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의 충동을 들어내는 것이다. 근대적 국가장치에 길들여진 모습을 다 토해내려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삶이 어떤 것도 변화 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복수의 한 방법으로 그녀는 텅 빈 신체를 지니기 위해 마조히즘적인 위치를 고수하려고 든다. 

  들뢰즈는 마조히즘을 연구한 저서에서 사디즘은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으며 마조히즘은 쾌감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스스로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 즉 사디즘은 양적 되풀이에 의해 작용하며 마조히즘은 질적 긴장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클레메’는 사디즘 적 행동을 함으로서 고통을 겪고 ‘에리카’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발을 붙들고 있는 영토 화되고 코드 화된 것들에 의해 고통을 겪는다.

  <냉정함과 잔인성>이란 저서에서는 마조히스트가 자신의 특이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박해자를 교육시키고 설득한다고 서술했다. 사디스트가 계약을 혐오하고 파괴하는 것과는 반대로 마조히스트는 계약을 선호한다. ‘에리카’역시 먼저 그런 행동들을 제안해 왔으며 ‘클레메’의 거부에 그를 끊임없이 설득해 왔다. 한 두 차례 그는 그녀의 계약을 이행했지만 매번 그것을 그만두고자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붙잡아두려고 만 했다. 여기에서 보면 소유는 사디스트 특유의 광기이며 계약은 마조히스트들의 광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의 성기를 보고 구토하는 ‘에리카’의 행동에 ‘클레메’는 그녀의 육체에 강간과 폭력을 자행한다. 돌연 “네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얻는 극단적인 자기 우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섹스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을 치며 수줍게 사랑이라는 어떤 숭고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자와 선생의 사랑, 늙음과 젊음의 사랑이라는 소수자의 사랑을 그는 이루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정이라는 사회라는 국가적 장치를 벗어나기 위해 ‘클레메’를 택한 ‘에리카’.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위해 ‘에리카’를 선택한 ‘클레메’. 그들은 코드화 된 것에서 탈주하려 노력했으나 결국은 텅 빈 신체 기관으로만 남아버렸다. 다시 근대적 장치 속으로 녹아 들어가 그 삶을 다시 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클레메’와 ‘에리카’의 접속은 전쟁기계가 되지 못하고 쾌락기계도 아닌 황폐함만을 남긴 채 끊나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의 욕망은 결국 일상 속으로 돌아가 정지선 위에 머무를 것이다. ‘에리카’의 욕망은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고 어깨에 칼을 꼽고 집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는 마지막 장면처럼 다시 홈패 인 공간들 속에서 움직일 것이다. 가끔 칼리 꼽힌 자리가 따끔거릴 것이다. 원래 기억이란 잔인성의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에필로그

   영화<피아니스트>는 창백하고 묘한 분위기의 영화였다. 또한 숨 막히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영화였다. 젊은 남자 제자와 늙은 여자 선생의 사랑이라는 생각에 정통 멜로를 생각했던 나에게 감독은 예술자본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사도마조히즘을 빌려 섹슈얼리티에 대한 직설법으로 텅 빈 자본주의의 맨살을 드러내보였다.

  이 영화에서 ‘에리카’는 스무 번 이상 문을 열고 닫는다. 내러티브 전개상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한 장면인데. ‘에리카’는 문을 열고 닫을 때 마다 다른 페르소나를 쓴다. 한 가정의 딸로, 교수로, 포르고 즐겨보는 천박한 여자로, 마조히스트로, 질투하는 여자로 등등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그녀는 다른 공간에 접속되고 다른 인물이 된다. 또한 문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에리카는 끊임없이 문을 열고 닫았지만 아직도 닫고 열어야 할 문들은 그녀를 수천 겹으로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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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4-10-1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