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E. 프랭클 지음 / 제일출판사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혼자서 극장 갈 때가 빈번하다. 누군가의 방해받지 않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싶다는 뭔가 근사해 보이는 핑계를 달지만 사실은 극장을 함께 갈 주변 사람들이 없어서 이다. 한 두 번의 혼자 간 극장 출입은 자연스레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고 처음의 그 어색함과 낯설음도 이젠 하나의 극장 찾는 즐거움으로 익숙해졌다.
 

몇 해전 여름,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극장을 찾았다. 3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동안 단 한번의 움직임도 없이 구석자리에서 숨죽여 보던 영화...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뒤에도 젖어 있는 눈시울을 닦지 못했던 영화가 슬그머니 기억에서 빠져나온다. 스필버그의 "쉬들러 리스트"는 그 해 여름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던 영화였다. 상업영화에 익숙해져 있던 다수의 관객들은 스필버그라는 생산공장의 잘 포장된 영화에 신선함을 느꼈고 그 영화가 예술 영화인양 떠들어댔다. 그리고 흑백Film으로 잘 포장하고 역사의 상처를 리본 끈 삼아 관객에게 내민 "쉰들러 리스트"에 지구는 열광했고 싸구려 눈물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나 역시 그런 범민(凡民)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물론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상처를 싸구려 감상쯤으로 처리했어야만 했을까? 상처의 흔적을 연고로 발라버린 식의 스토리전개와 감상은 공증 받은 천재라는 스필버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어쩌면 상처 건드리기에 망설이는 것이 스필버그의 가장 약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후속작인 "아미스타드"를 보면.)유태인들의 강제 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전혀 아름답지 않는, 아름다울 수 없는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주연을 맞았던 감독은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행복하게(?) 표현했다. 강제수용소에 가게 된 어린 아들과 아빠. 그리고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남편을 따라 나선 부인. 그들의 수용소 생활은 "쉰들러 리스트"의 수용자들의 생활처럼 처절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낭만적으로 유쾌 하게까지 해 보인다. 어린 아들에게 수용소 생활이 게임이라고 말한 아버지의 말에 관객은 체면에 걸린다. 지금은 게임 중.그러나 목구멍을 애이게 하는 쓰림에 침을 삼키는 순간 흐르는 눈물이 있다. 상처의 깊숙한 곳까지 들춰내는 상처에 연고를 바를 수 있는 능동형 동사를 관객에게 던진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인생의 상처이지만 관객은 연고를 바름으로써 감독의 역설적 표현에 수긍이 간다. 유태인들의 강제 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당대의 문제를 다룬 영화만이 아니라 그들 후손들의 차별을 다룬 영화들도 있다. 여전히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있는 후손들에게 남겨진 그들의 상처가 있는 한 역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고 상처 역시 쉽게 아물 것 같지 않다. 지나온 세월의 절반이 지나더라도. 요즘 이산가족의 상봉이 남겨주는 안타까움과 그들 가족들에게 다시 남겨진 그리움처럼. 역사의 상처를 감히 건드리면서도 영화를 예를 들 수밖에 없는 내 짧은 식견이 부끄러워 희롱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이여서 그런지 더욱 절실하고 인상적이었다. 수용소 생활의 어려움이 뼈 속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처절한 수용소 생활에서 인간들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놓은 책이지만 난 정신분석보다는 수용소 생활의 끔찍함을 더욱 주시하게 되었다. 하루가 한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수용소.죽음이 언제 내 앞으로 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암담하기만 한 미래에 실낮 같은 희망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서술한활자 하나 하나를 따라 읽어 가는 동안 어떤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전생의 모습이 아니 였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하게.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내뿜는 인간을 태워 눈발처럼 날리는 재. 강제노동과 구타. 그리고 소량의 음식. 수용자들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다. 소량의 빵을 나눠 먹으며, 동상에 부어 들어가지도 않은 신발에 이미 발이 아닌 발을 쑤셔 넣으며 개, 돼지 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화에서 보면 살아남으려고 노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 보이려고 손에서 피를 짜내 얼굴에 발라 생기 있게 보이려는 노력까지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왜 그토록 살아남으려 몸부림 쳤던 걸까? 그리운 가족들 때문에? 고향 때문에? 그들은 이미 삶의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아니, 이 현실을 견디기는 너무나도 끔찍하지 않은가?


내 생각과 삶에 대한 입장이 짧고 철이 없어서 인지 그들의 그런 억척스러움을 이해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들 중 누군가가 날 설득하려 덤볐다면 난 그들을 바보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그런 현실 속에서 망가져 가는 내 모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물리적 억압과 압박만이 아닌 내 정신적 황폐화에 난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죽음이 모든걸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편안해지고 싶다. 그렇다고 그들을 모함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내 현실이라면 난 그렇게 선택할 뿐이라는 소신을 이야기 한 것뿐이다. 수용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어갔고(자살이든 타살이든)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꿈꿔왔다. "죽이지 않으면 난 더욱 강해진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은 강하게 현실을 견뎌내었다.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에서 그들은 하루하루 그 선에 올라서서는 줄을 타듯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비록, 선택은 그들에게 있었지만 선택 후의 현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졌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잔인한 사람들은 더 잔인해져갔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더 큰 감수성을 가진다. 사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극한 상황에서야 느껴지고 아름다움을 배운다.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의 이상한 이분법적 관계가 정리된 후에도 수용소의 기억은 쉽게 정리되지 못하고 그 흔적을 남긴다. 먹지 못해 긂주린 배는 매일을 먹는 걸로 소비하게 하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꿈은 수용소 시절의 끔찍한 악몽을 그린다. 잠들지 못한 자, 잠든 자 모두 악몽의 현실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런 현실을 지나쳤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롭다고.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는 우리는 현실에서 존재할 이유를 가지게 한다. 그렇게 보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 고통은 사랑, 행복처럼 삶의 한 부분의 형태임이 분명하기에. 그래서 일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들의 선택이 자살이 아니었던 것은. 그들을 존재케 해주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유태인을 도와준 쉰들러의 무덤에 도움을 받았던 유태인들이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던 그 모습.그들을 학대하던 나찌당원의 한 사람이었던 사람,쉰들러. 사실, 쉰들러는 그들에게 취할 것은 다 취하면서 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태인을 학살하는 도시를 지나다 유난히도 붉은 코트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의 시체를 본 뒤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유태인들에게 남은 것은 없다. 자유.그 어색함뿐이다. 마지막까지 쉰들러를 위해 이를 뽑아냈다.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은 게임 종료와 함께 탱크에 타게된다. 아이의 아버지는 죽음으로. 아이와 아이 엄마에게 남겨진 것은 앞으로 닥쳐올 또 다른 암담함뿐이다. 자유라는 모순이 만들어낸 구속과 절망. 그들은 또 다시 얼마만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들이 지불한 희생의 절반이라도 자유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에겐 이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는데. 가족, 재산, 건강.

 어쩌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고통은 계속 치료해야 할 그들의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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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1-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나 같은면 자살을 하겠다.

그런데....생명을 향한 사람의 의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상황이 어려워 질 수록...

나치는 유태인들을 의도적으로 더럽고 짐승같은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야 독일군들이 유태인을 학대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데요.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게,

이 비참한 상황에서 짐승 보다 못한 생활을 하면서 생명을 구걸하는 비루한 인간들로 보이게 하면, 가해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나....

슬픈건....수용소에서는 자살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조차 없다는거죠.

나치에 의해 죽지 않는한,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이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4-11-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다보니 감정이 조금 격해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뜻없는 죽음 그리고 소용없는 학살 속에서 결국 얻으려던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득 아직도 그런 죽음들과 폭력들이 내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씁쓸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수선님! 근데 이상하게 왜 자꾸 전 수선님을 수선화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