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나를 배반해온 것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해도 인생은 나아지지 않았다. 직종에 따라 약간의 희미한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적성이 없거나 노동 자체를 혐오하는 비정직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얼 하건 언제나 뒤에 길다랗고 거대한 그림자로 바싹 붙어 나를 위협하는 건 일이 아니었다. 삶이란 참을 수 없이 고되고 무의미한 노동이다. 그에 비하면 일은 유희에 다름 아니다. 그걸 왜 몰랐을까. 일을 바꾼다고 인생의 성격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애매모호하고 이해되지 않는 할당량을 채워넣듯이 그냥 살아야 한다는 거다.
 

序詩  (이성복 )
 

  간이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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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9-2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선생의 부친상 소식을 오늘 들었는데... 괜히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아버님을 끼워 넣어보기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5-09-2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힘들어 보이세요... 일이 잘 안풀리세요?
삶이란 참을 수 없이 고되고 무의미한 노동이다. 그에 비하면 일은 유희에 다름 아니다. 그걸 왜 몰랐을까. 일을 바꾼다고 인생의 성격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공감이 제대로 되는 글귀입니다. 그래도. 인생의 성격.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전 그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디.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믿음으로.
물론 순간순간. 수 없이 많은 고민과 힘듦을 이겨내야 하지요. 그래도.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고싶습니다. -_ㅠ 힘내세요!!

릴케 현상 2005-09-2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란...

검둥개 2005-09-2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아 그런 소식이. 저는 몰랐더랍니다.

장미님 엄살은 저의 일상이야요. ^^;;;
사실은 머, 먹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고 있어요. 퍼, 퍼벅.

산책님, "삶은 돼지"! ^ .^ (앗, 썰렁했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