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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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데, 난 이상한 습관이 있다. 주연보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게 자꾸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건, 그러니까 남들은 조연 내지는 엑스트라의 감정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기숙사 친구들끼리 톰크루즈 주연의 영화 <탑건>을 보러 갔는데, 톰크루즈가 적군을 모두 물리치고 귀환하는, 웅대한 배경음악과 이글거리는 태양을 뒤로 하고 착륙하던 그 멋진 화면에서 난 전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했다.
적국의 조종사들, 그러니까 단지 주인공의 상대편에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자비한 폭격을 맞고 죽어야 했던, 그들도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건만 관객들로부터는 죽어서 참 잘 된 인간들이 되고 만, 그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내 이런 조연병?은 최근의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더 깊어져간다. 이젠 도저히 회복 불가능이다.)

다시, 탑건으로 돌아가서, 그때 친구들은 황당해했다. 기분 좋은 영화를 보고 왜 눈물을 짜는지 그들은 다소 난해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약대생이던 친구는 진지하게 심리상담을 권유하기도 했고, 특수교육과에 다니던 다른 친구는 그 순간 내가 다른 일로 기분이 울적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날 이후로 난 같은 문제로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의 뇌 구조가 바뀐 건 아니었다. 확실하게 선과 악이 구분되는 영화만을 골라봤고, 혹시 그런 느낌이 들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기분대로 움직이는 편이 서로를 편안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은희경이 소설 <마이너리그>를 출판했다는 얘길 듣자마자 난 도서구입 예정 목록 맨 위에 그 책을 올렸다. 나를 위한 소설인 것 같았다. 세상의 조연 혹은 엑스트라들의 이야기에 난 기대가 컸다. 나에게 조금만 문재가 있다면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그런 주제였다.(물론 요즘은 비슷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봤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비슷했다.)

책을 잡으니 생각보다 쉽게 빨려들어간다(사실 그동안 은희경의 소설에 난 잘 몰입하지 못했다. 그동안 게시판에 끊임없이 추천되었던 은희경의 소설들을 애써 외면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58년 개띠인 4명의 고등학교 동창생(형준, 승주, 조국, 두환)과 그들 모두의 우상이었던 한 여학생(소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교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소설 속에서 일어났고, 그 시대의 굵직했던 사건들은 모두 담겨 있었다.
무협지 흉내만 잔뜩 내다가 어설프게 끝나는 폭력조직,
펜팔책을 베껴서 외국 학생들과 펜팔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베낄 책이 없어서 외국과 교류가 끊어지는 동아리인 국제펜팔부,
숙제를 해가지 않은 학생들에게 행해지는 온갖 종류의 고문(?)들과 모셔오라는 부모님 대신 나타난 중국집 주방장 아저씨까지...

비주류로서의 삶, 마이너리그에 속한 그들의 삶은 고등학교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까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없는 잔머리까지 굴려가며 최선을 다하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항상 소설을 읽으면서 마이너의 인생에 호기심을 표하던 나마저, 정작 그들을 대할 때는 마이너의 인생으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 마땅한 세상의 배려라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소설은 객관성을 가장한 냉소를, 기분 나쁘지 않도록 유쾌한 문체로 무장하고 있었다.

권투선수로 얘기하자면, 맞으면서도 달려들던 김태식보다는 가벼운 풋웍과 재치있는 플레이로 상대방을 쉽게 제압하던 박찬희에 가깝다고나 할까.
(은희경 덕분에 나도 나의 유년시절을 기억해냈다. 아주 어렸을 때 난 프로권투의 팬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치 그들은 마이너요, 나는 그래도 그들보다는 좀 낫다는, 그러니까 나는 메이저까지는 안된다고 하더라도 트리플 에이는 되지만, 그들은 더블 에이도 못될 것 같은 우월감까지 갖게 된다.
난 작가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통속적이지만 심오한 얘기들이 보인다.
그저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책장을 덮었을 땐 나도 모르게 그들의 삶에 진한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그들의 삶에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사회적으론 조연급도 못 되는, 그러니까 거의 엑스트라 급인 그들이지만, 최소한 은희경의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었던 그들 네 명의 삶을 느끼고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 보니, 어떤 독자들은 '당신이 남자들의 삶을 얼마나 아느냐', '58년 개띠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등등의 비난을 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혹은 자신의 세대가 마이너에 속한 것이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은희경은 얘기한다.

'이 소설은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탐문이 아니다. 그냥, 사람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삶이란 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사회 속에서 모양이 만들어지고 구부러지고 닳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은 한때 나로 하여금 남성성에 대한 신랄함을 갖게 했다.
이제 나를 세상의 남성과 화해하게 만든 것은 삶의 마이너리티 안에서의 동료애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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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6-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너리그를 읽을 때, 한창 영화 <친구>가 뜨고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영화 속에서 책가방을 들고 질주하던 그 장면이 오버랩 되었지요.
지금은 기억에서 아득해졌는데, 책보다 호랑녀님 리뷰가 더 좋습니다.^^

호랑녀 2004-06-03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진우맘님이 늘 인심이 후하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칭찬들으니 좋습니다. 고맙습니다.(칭찬 맞쥬?)
이 리뷰는 사실 마이너리그가 출판되자마자... 읽고 쓴 건데, 한군데 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손봐서 올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