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보르헤스 > 착한남자(?)를 주제로 한 포토갤러리

 

 

난 너를 알아보고 선택했어. 내가 너에게 빠졌다거나 미쳐버렸다고 생각하지는 마.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어. 내 안에서 사랑이 피어났던 것이지

Toni Morrison의 Jazz 중에서

<Nakariakov의 지고이네르바이젠>

Blue Moon님이 자신만을 위한 착한 남자 사진전을 열어달라고 하셨다.

이 Paper는 그런 의도에 적합하게 제작되었으나, 그녀의 취향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그녀가 Hard-bop을 좋아한다는 것이 전부임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Mickey Rourke>

November rain, 던힐 라이트, 체스터필드 코트(chesterfield coat), 그리고 허무의 맛

난 그를 좋아했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에 반했고, 그의 낡은 모직코트에 반했고,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반했었다. 그의 사진은 새파란 중학교 시절에서부터 턱밑 수염이 거뭇할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내 방 침대 위 머리맡에 주욱 걸려있었다. 지금의 그는 그저 그런 배우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한때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James Stewart>

 

여성들과는 달리 남성들에게는 멋을 부릴만한 item이 사실상 없다. 남성들의 작업복(?)인Suit(양복)는 형태도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며, 색상 또한 매우 한정적이고 제한적으로만 사용되는 편이다. 일반 남자들이 기껏 멋을 부려봤댔자 와이셔츠나 넥타이의 색상이나 무늬정도에 그칠 뿐이며, 한 깔룽한다고 자부하는  치들도 겨우 와이셔츠 소매에 자그마한 커프스 링크를 달고서는 희희낙락하는 꼴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양복을 위한 변명>에는 참 재치있는 비유가 실려 있는데, “자유를 제한받는 곳에서 참된 자유가 가장 잘 발휘된다는 것은 예술 창작만의 과제가 아니다. 멋도 의외로 이 법칙이 적용된다.” 라는 말로 양복에 대한 일반 남성들의 예술적 창의성 부족을 질타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에게 남성을 대표하여 내가 한마디 변명하자면, “원판 불변의 법칙”은 비단 사진에만 국한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멋진 몸매를 타고난 치들은 주황색 츄리링에 쫄이를 신고 돌아다녀도 나름의 멋과 품격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괜한 소리로 선량한 대다수의 남성(멋진 몸매를 타고나지 못한 이)들에게 현시적(과시적)소비를 부추기는 흰소리는 그만 접어달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멋진 몸매는 어디까지나 비율이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한다고 해서 반드시 멋진 몸매가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

 

역대로 스파이 영화 007에 출연한 배우들은 다들 슈트가 몸에 착착 감기는, 일명 suit의 신이 내린 탁월한 몸매의 소유자들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비록 007에는 출연하지 않았지만, 게리 그란트와 함께 suit의 신에게 선택받은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게리 그란트가 헤링본 자켓등 잉글리쉬 슈트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다크 그레이 슈트가 너무나도 멋진 전형적인 American suit의 진정한 신봉자였다.




<Modigliani>

 

“원판 불변의 법칙”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 사람을 빼 놓을 수 없겠다. 36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궁핍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딜리아니를 말이다. 당대에 거칠 것이 없었던 피카소도 모딜리아니 앞에선 유난히 저열한 열등감을 드러냈었다. 그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재능에 있어서는 그 자신에 결코 뒤지지 않을뿐더러 작고 땅딸막한 볼품없는 외모의 자신과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의 귀공자라 불리웠을 황홀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니 말이다. 수중에 당장 한 끼를 해결할 동전 몇 푼마저 없는 모딜리아니였지만 그에게 자신의 침대를 기꺼이 내줄 여자들은 파리에 수없이 많았다. 스타일은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는 즉물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전적으로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언제나 잘나고 똑똑한 천재라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인 폐결핵으로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지저분한 자선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잔느 에뷔테른느(모딜리아니의 아내)는 임신 9개월의 만삭의 몸으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





<Albert Camus>

 

Magnum으로 잘 알려진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단 한 장의 스틸사진!

우리가 까뮈를 떠올릴 때면 항상 갖는 그의 이미지이다. 태양의 작가 혹은 지중해의 작가라고 불리는 그의 문학적 명성과는 달리 그의 사진에는 침울하고 고독한 도시적인 까뮈의 자화상이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이방인”과 “페스트”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문호이지만, 사실 내가 꼽는 그의 최고작은 “전락”이다. 전락은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크나큰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타자는 결코 이해될 수도 이해되어지지도 않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며, 그에게 있어 죽음은 단발마의 땀을 흘려 구원을(결정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권리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진실, 그 진실의 말살이었다.


멋진 놈이 머리까지 좋으면 짜증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다. 그에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주었으니 말이다. (너무나도 사악한 나 )





<Arthur Jean Nicolas Rimbaud>

 

랭보를 단순히 아름다운 미소년으로만 추억하면 곤란하기 짝이 없다. 그에게 시와 문학으로 대변되는 미소년의 시기는 1873년 베들렌느에게 권총으로 독하게 한 방 맞았을 때 이미 끝이 났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이미 그가 쓴 것처럼 그 이후의 삶은 “기후가 실종된 땅으로 가서 무쇠같은 팔다리, 청동빛 피부, 강렬한 눈빛으로 돌아오는” 무지 터프한 사나이의 삶이었다. 그는 누구나 가길 꺼려했던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로 건너가서 불법무기판매, 커피 밀수, 노예장사 등등 이른바 칼밥 먹고 사는 “비열한 거리”의 삶이었다.

그는 그 후 매독에 의한 정신질환으로 시달리며, 관절염과 풍토병으로 한 쪽다리를 잃은 채  37세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치게 된다.





<Sergei Nakariakov>

 

러시아의 트럼펫터 라카리아코프도 랭보에 버금가는 미소년이다. 내가 처음 그의 음반을 집어들 때만 하더라도 음악에 있어서 그의 빼어난 외모가 오히려 독이 되는 형국이었다. 나로 하여금 그의 타고난 미모가 오히려 그의 음반을 선택하는데 주저하게끔 만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Hummel의 Concerto for Trumpet and Orchestra in E-flat Major의 1악장을 미쳐 다 듣기도 전에 나의 선입견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훔멜이 작곡하여 1803년에 초연된 이 트럼펫 협주곡은 사실상 연주에 필요한 기교가 너무나도 난해해서 작곡된 당시 그대로의 악보로 연주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트럼펫터가 연주하기 비교적 평이하도록 악보를 재수정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의 훔멜 트럼펫 협주곡을 들어보라! 그럼 신이 얼마나 그에게 많은 축복을 안겨주었는지 직감할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

 

 엥! 그러면 요 녀석도 얼마 안 남았단 말인가. 흐흐 (다시 한번 사악모드 )





<Jacques Derrida>

 

철학계에도 착한 남자를 뽑아야 하는데, 이번 기회에 참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착한 남자가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창 파릇파릇할 때의 사진을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2004)년에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 눈부시도록 환한 빛깔의 백발에 파이프 담배를 지그시 물고 있는 그는 “나에게는” 정말 멋져 보였다.

 

뭐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꼬장꼬장한 “꼰대”처럼 보였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겨우 몇 권의 책(그것도 무지 부실한 번역본)으로 밖에 접해보지 못한 그이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접해볼 생각이다.(원서는 구해놓았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처럼 언제 읽을지는 정말 두고 볼 작정이다. 에휴!)

 

 

<바티스투타 특유의 기관총 세러머니>



<그의 마지막 월드컵 2002년의 눈물!>

<Batistuta>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난 그의 이름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인다. 내가 그를 처음 접하게 된 건 플레이스테이션용의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을 통해서였다. 위닝 일레븐이란 게임은 축구선수들의 능력치들을 상세한 패러미터로 기록하여 사실성을 아주 강조한 게임이었는데, 그 게임에서 바티스투타는 경이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top goalgetter였다. 어느정도였나 하면(위닝 패러미터에 기준하자면,100이 만점이다/공격력 98에, 슛팅력 99, 슛정확도 97, 슛 테크닉 98,거기다가 수준급의 헤딩력을 갖추고 있었다) 페널티 라인 근처에선 때리면 거의 백발백중이다. 중거리 슛의 경우 앞에 수비하는 선수가 없다면, 30-35미터 거리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함께 게임을 즐기다보면, 그 사기적인 능력치에 그를 상대하는 녀석들은 다들 혀를 깨물게 된다.

 

2006년 월드컵 개막식이 뮌헨에서 열렸다. 수많은 축구계의 인사 중 유일하게 수많은 관중으로부터 야유를 받은 사람이 있다. 그는 제프 블래터 FIFA회장이다. 누구나 공 하나면 맘껏 즐길 수 있는 모든 이들의 스포츠였던 축구를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키는데 누구보다도 열성이었던 까닭이었다.

오늘날의 스포츠 역시 거대 자본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버렸다. 막대한 자본의 힘 앞에 어제까지 함께 축배를 들었던 절친한 동료였던 선수들이 내일은 반드시 쳐 부셔야할 적이 되는 일은 이제 너무나도 흔한 일이 되버린 것이다.(프리메라 리가의 양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우 루이스 피구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과 루이스 엔리케의 바르셀로나 이적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런 축구계의 현실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여로는 더욱 빛난다.

바티스투타는 “Bati-Goal"이라는 애칭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공격수들의 무덤이라 불렸던 ”Seria-A"에서 94-95시즌 32경기 26골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득점력을 앞세워 피오렌티나의 “수호신”이라 불리웠다. 하지만 그의 소속팀 피오렌티나가 Serie B로 강등되고 말았을 때 그의 수많은 팀 동료들이 팀을 떠날 때에도 그는 끝까지 남아 1년 만에 다시 피오렌티나를  Serie A로 복귀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피오렌티나 시와 시민들은 그의 노고에 감사하며 피오렌티나 시내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오렌티나는 단 한번도 스쿠데토를 차지하지 못하여, 바티스투타는 그의 오랜 꿈이었던 스쿠데토를 위해 AS Roma로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피오렌티나 서포터즈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따뜻한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 꿈을 이루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그리고 친정팀을 상대로 한 종료직전의 천금같은 결승골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수많은 피오렌티나의 서포터즈들 앞에서 그는 세러모니 대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에 피오렌티나의 서포터즈들과 이탈리아의 축구팬들은 바티골이란 애칭 대신

그를 최후의 로맨티스트라고 화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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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6-1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 잘 받았다는 인사 드리러 왔다가 굉장한 음악 듣고 가네요.ㅎㅎ
놓친 글이었는데 님 덕분에 잘 읽고 잘 듣고 갑니다. 저도 보르헤스님에게 가봐야겠네요.ㅎㅎ
dvd 잘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이리스 2006-06-20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 앗, 잘 도착했군요. ^^ 그리고 이런 글은 보고 또 봐도 므흣합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