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투르크메니스탄과 이란의 국경을 이루는 코페트 산맥을 넘어섰다. 민둥산의 삭막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푸르름 짙은 초원이 펼쳐진다. 양떼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평화롭다. 약 165만㎢(한반도의 7.5배)에 달하는 이란 국토는 절반 이상이 산악지대다. 평지의 4분의 1 또한 황야와 사막이다보니, 경작 가능한 땅은 국토의 4할도 채 안된다. 그런 땅마저도 주로 변두리 산맥들 언저리에 몰려있다. 남북으로는 메마른 루트 사막과 카비르 사막이 한가운데의 이란 고원을 에워싼다. 불리한 자연환경이지만, 슬기로운 이란 사람들은 박토(薄土)를 옥토로 일구고, 페르시아 문명을 꽃피워냈다. 우리는 그 향훈을 맡고자 불원천리를 찾아온 것이다.
국경에서 한 시간 반쯤 달려 쿠찬이란 소읍에 도착했다.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식당은 붐빈다. 알고 보니, 오늘은 쥼아(금요일)라 정오예배를 마치고 가족끼리 회식을 즐기는 날이다. 주 메뉴는 첼로케밥이다. 짐승들의 먹이풀이 좋아 케밥이 유명한 고장이라 한다. 이란말로 ‘첼로’는 ‘쌀’이고, ‘케밥’은 ‘꼬치구이’다. 꼬치는 소고기, 양고기, 닭고기 가운데 고를 수 있다. 양고기 케밥을 청했다. 녹진녹진한 케밥 맛은 일품이다. 쌀밥 말고도 ‘넌’(혹은 눈)이란 이란식 빵이 나왔는데, 이스트를 넣어 부풀리지 않고, 얇게 노릇노릇하게 구운 것이다. 넌에 모든 음식을 싸서 먹는데, 이란인들에겐 주식 중 주식이다.
8대 이맘 레자 순교 뒤 성지로 매년 1200만명 순례객 발길
다시 두 시간쯤 달려 이란 첫 목적지인 마슈하드에 도착한 뒤 라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라레’는 ‘꽃’이란 뜻이다. 호텔을 꽃처럼 아름답게 꾸민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마슈하드는 이란 28개주의 하나인 호라산주의 주도다. 인구는 200여만명을 헤아려 이란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마슈하드는 이슬람 시아파 3대 성지의 하나로, 이란어나 아랍어로 ‘순교의 땅’이란 뜻의 보통명사로도 통한다. 이곳에 시아파 주류인 12이맘파의 8대 이맘 레자의 묘당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곳을 ‘마슈하드 무깟다사’, 즉 ‘신성한 마슈하드’라고 부른다. 한해 나라 안팎으로부터 1,200여만 순례자들이 몰리는 세계적인 시아파 순례지다. 매해 200여만명의 순례객이 모이는 메카보다 몇 배나 큰 규모다.
매해 6~8월은 순례가 한창이어서 우리는 때맞춰 온 셈이다. 8월 6일, 이른 아침부터 거리는 순례객들로 물결친다. 이맘때면 밤낮 없이 순례객을 맞는다. 시아파 성지라서 비무슬림들은 참배를 불허했으나, 지금은 개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외국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현지 안내원은 전날부터 단정한 옷차림과 정숙을 거듭 당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들머리에서 소지품은 물론, 옷차림부터 단속한다. 남자라도 반바지 착용은 불허된다. 여자는 더욱 엄격해서 차도르(외국인은 스카프) 위에 옛날 우리네 장옷 비슷한 검은 겉옷으로 얼굴 외의 전신을 가려야 한다. 외국인은 여권까지 맡겨야 하니, 어이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지켜야 하는 터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75㏊나 되는 터에 자리잡은 성소는 일괄해 ‘성역광장’(聖域廣場:팔라케이 하라메 무탓하르, 약칭 ‘하람’)이라고 칭하는데, 하나의 복합 문화도시 같다. 중심부 레자 묘당을 비롯해 나디르 샤 묘당, 의학자 샤이크 하킴 모멘 묘당(일명 곤바데 삽즈, 즉 녹색돔), 고하르 샤드 마스지드(사원), 3개의 박물관(꾸르안 박물관, 중앙박물관, 융단박물관), 아스탄 고드스 중앙도서관, 라자비 신학대학 등 어마어마한 종교 교육 시설이 어우러져 있다. 크기나 화려함은 이슬람 세계에서 보기 드물 정도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 시설이 계속 확장하고 화려함을 보태간다는 사실이다.
시 중심부 하람은 동서남북 큰 거리와 연결되어 교통이 사통팔달하다. 주 입구는 서남쪽 메카 방향으로 나있는 이맘 레자 거리에서 들어오는 정문인데, 남녀 통로는 다르다. 영내 시설물들 사이에는 또 자그마한 5~6개 광장이 있다. 일단 들어서면 영상실로 안내되는데, 15분간 건물 복원 연혁 등을 영상물로 소개하는 홍보교육을 받는다. 마슈하드는 817년 레자의 순교를 계기로 성지로 부상했다. 이후 순니파와 몽골 침략군의 파괴, 티무르 군의 유린을 당했으나, 번번이 복원을 거듭했으며 16세기 사파비 왕조시대 수도가 되자 성지로서 지위를 굳혔다. 천도의 촉발제가 된 것은 샤 압바스1세가 당시 수도 이스파한에서 1,300㎞ 떨어진 이곳까지 걸어서 순례한 장거와 뒤이어 시아파가 국교화하면서부터다. 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은 적도 있으나 곧바로 회복되고, 30년대부터 현대도시로 건설되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뒤 위상이 더욱 높아져 현재 대대적인 증축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성역광장 화려함·크기에 놀라 지금도 대대적 증축공사 진행
먼저 들른 곳은 고하르 샤드 마스지드다. 티무르의 맏며느리 고하르 샤드 여왕의 명에 의해 1405~1418년 사이 지어졌다. 부지만도 16㏊에 달한다. 예배 방향을 알리는 미흐랍(벽감)이 벽 아닌 땅에 움푹 패여 있고, 순결과 경외를 상징하는 흰색 문양과 푸른 빛의 돔 천장이 이채롭다. 중요성으로 치면 레자 묘당을 우선 찾아야겠지만, 비무슬림들에게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건너뛰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황금돔 아래 놓인 그의 관은 촛불 속에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다. 순례객들은 울타리 쳐놓은 주위를 돌면서 순교자의 원혼을 달래고 축복을 기원한다. 여럿이 흰 천으로 덮은 주검 한 구를 운구해 와서 묘당 앞에 내려놓고 장례기도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건물 벽장식에서는 여덟 닢의 꽃문양을 가끔 발견하게 되는데, ‘여덟’ 숫자는 레자가 8대 이맘이었음을 상징한다. 그만큼 성인에 대한 소망과 추앙은 간절하다.
들머리에 몰린 박물관 3곳 중 가장 큰 것은 중앙박물관이다. 눈길을 끈 것은 16세기 황금판에 돋을새김해 만든 레자 묘당의 문짝과 ‘신성한 7개 도시 융단’이다. 이 대형 융단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나자프, 가르발라, 마슈하드, 곰 등 시아파 성지 7개 도시의 이름으로 짠 것인데, 코만도 무려 3천만 개에 달한다고 하니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옛부터 후라산 지방은 융단 등 모직물로 유명한 고장이라 그럴 법도 하다. 하람 주변에는 레자 바자르를 비롯해 주로 순례행사용 물품들을 파는 여러 바자르(재래시장)가 성황이다. 이색 물품 중에는 시아파들이 예배 때 땅바닥에 놓고 이마를 맞대는 ‘모후르’란 자그만 돌이 있다. 돌에 이마를 맞대는 것은 돌 같이 굳은 신앙심을 다지는 의미라고 한다.
황금돔 아래 레자 묘당 주위 원혼의 씻김 같은 기도들이…
이 모든 성역화 작업의 장본인은 이맘 레자(765~818)로 알려진 이맘 알리 알 리다이다. 그의 순교에 관해서는 설들이 엇갈린다. 어쩌면 그 엇갈림 때문에 전설적 성인으로 회자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압바스조 5대 칼리파 하룬 라시드의 아들로 메디나에서 태어나 35살 때 8대 이맘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다 6대 칼리파 마문이 시아파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돌연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의 부름을 받고 바그다드로 가는 도중 급사했다는 게 정통사의 기록이나 시아파는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사실이라면 레자는 당시 정권을 잡은 순니파와 재야 시아파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교권 다툼의 희생양인 셈이다. 오늘날도 이라크에서 ‘순니’와 ‘시아’의 이름으로 재현되는 또 다른 패권 다툼의 일그러진 현장을 착잡하게 그려보면서 하람 광장을 나섰다.
약 30분간 달려 도착한 곳은 민족시인 피르다우시(940~1020)의 고향 투스다. 시인의 대리석 영묘는 아담해 보인다. 그 옆에 유품 전시관이 있다. 묘비 면은 그의 민족적 대서사시 <왕서(王書)>(샤흐나메) 의 책장들로 촘촘히 부조되었다. 영묘는 1933년 지었는데, 너무 허술해 증축했으며, 이슬람 혁명 때 그가 이슬람에 거슬리는 정서를 지녔다는 이유로 일부 파괴당하기도 했지만, 곧 되살렸다고 한다. 피르다우시는 신화시대~아랍 정복기의 이란 역사를 35년간 무려 6만 편의 시로 엮어 책에 실었다. 그는 당시 가즈니조 술탄 마흐무드의 소외에 불만을 품고 풍자시를 썼다 추방되기도 했다. 시인은 가도 시는 영원하다. 오늘날도 꽃다발 든 추모객들이 영묘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시아-수니파의 뿌리와 교리
시아파- 4대 칼라파만 적통 인정 신비주의적 색채 짙어
수니파- 다른 칼리파도 계승자로 현세적·합리적 신관 취해
이슬람 시아파는 이란 인구의 98%, 이라크 인구의 60%를 넘지만, 전체 이슬람권에서는 5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소수파다. 주류 순니파와 함께 중동발 외신에 자주 나오는 시아파는 흔히 과격파로 비춰지지만,지나친 이분법적 구분이다. 두 교파의 분열은 역사적·신학적 뿌리가 깊은 까닭이다.
순니, 시아파의 대립은 7세기 이슬람교를 일으킨 예언자 무함마드의 정치적 후계자(칼리파)를 둘러싼 논란에서 싹텄다. 무함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후계자도 정하지 않은 채 급서했으므로 적통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사위인 4대 칼리프 알리 이븐 탈리브를 정통으로 보고, 그의 후손들만 후계자로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바로 시아파의 원조다. 반면 1~3대 칼리파, 알리 사후 등극한 무아위야 1세 등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칼리파들의 적통도 인정한 세력이 수니파가 된다. 이후 제국의 정권을 잡은 것은 주로 수니파 칼리파들이었고, 이란·이라크에 기반한 알리의 후손들은 반란을 꾀하다 학살·처형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알리가의 비극을 시아파는 적통을 회복하려는 성전, 순교로 해석한다.
교리면에서 현세적이고 합리적 해석을 중시하는 수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신비주의 교단인 수피즘과 연관을 맺어 영성 체험을 강조하는 등 신비적 색채가 짙다. 칼리파, 예언자와는 별개로 알라의 메시지에 숨은 신비스런 뜻과 지식(바띰)을 전하는 종교 지도자 ‘이맘’을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아파는 4대 칼리파 알리의 자손을 대대로 이맘(교주)으로 추앙했으나 7대 이맘을 6대 이맘의 차남 무사로 할 것을 주장하는 주류 ‘12이맘파’와 요절한 장남 이스마일의 아들 무하마드를 주장하는 비주류 ‘7이맘파’(이스마일파)로 다시 갈렸다. 12이맘파 신도들은 873년 12대 이맘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이맘의 대가 끊어졌지만, 말세에 다시 세상을 구하러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있다.
실크로드 역사에서 시아파는 종종 전란의 격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11~13세기 맹위를 떨친 극단주의 시아파 집단인 아사신파는 무자비한 암살활동으로 1253년 몽골 장군 홀레구의 아랍 대원정을 촉발시킨 요인이 된다. 반대파 살해를 성스런 의무로 삼은 이들은 이란 북쪽 알라무트에 요새를 지어놓고 암살단을 보내 유럽 십자군과 몽골 관리 등을 닥치는대로 살해하면서 공포의 대상이 됐다. 이런 소문이 몽골제국 대칸의 귀에까지 들어가 아사신파 소탕이 원정 구실이 되었고, 그 결과 아사신파는 물론 압바스 왕조까지 몰락하게 된다. ‘암살자’‘자객’을 뜻하는 영 단어 어새신(Assassin)의 말뿌리는 바로 이 교파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서구 언론들이 시아파를 과격집단으로 폄하하는데는 이런 역사적 피해의식이 깔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