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하는 여선생 엿보는 이상한 문화대혁명
[조선일보 2006-04-22 02:58]    
오 나의 잉글리쉬 보이
왕강 장편소설|김양수 옮김|푸른숲|512쪽|1만2000원

[조선일보 김태훈기자]

중국 문화혁명기를 다룬 소설들은 문혁이 몰고온 광기를 고발하거나 그 아래 신음하는 영혼을 위로해왔다. 중국의 서북변방 톈산(天山)산맥 아래, 신쟝성의 성도 우루무치를 지나간 문혁도 잔인했을 것이다.

젊은 신예를 자처하는 소설가 왕강은 그 뻔한 비극 구도를 거부한다. 그는 “여전히 잔혹함이나 피비린내와 그 더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만으로 독자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 부족”이라고 갈파한다.

소설은 우루무치의 소년 류아이의 눈 앞에 펼쳐지는 문혁 이야기. 마오쩌둥의 옆얼굴 초상화를 그린 아빠는 귀를 한 개 밖에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 간부에게 따귀를 맞는다. 류아이의 엄마는, 아들이 ‘타도 마오쩌둥’이란 낙서를 썼다고 모함을 당하자 문혁과 개인숭배의 광기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교장과 배를 맞춘다. 어쩔 수 없이 부정을 저지른 엄마는 그러나 어이없는 격정에 빠져 제발로 교장을 찾아간다.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부조리는 인간의 이성과 문명을 비웃는다.

소년은 문혁을 고발하지 않는다. 그는 친구의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여자 선생님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본다. 우루무치 촌놈으로 남기 싫어 영어 공부에 매달리거나, 공개 총살형을 지켜보며 짜릿한 쾌감에 빠지고, 향수 냄새 풍기는 영어 선생님의 이상을 동경하며 살 뿐이다. 분노가 드러나지 않는 소설을 읽으며 문혁의 상흔을 보고, 소년이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김태훈기자 [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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