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수없는 며느리 VS 파란 눈의 시아버지
전희원 지음, 김해진 그림 / 모티브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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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했다 늦게 들어온 우리를 시아버지가 반갑게 맞으시며 너희 주려고 수프 끓여놨다 하시는데 불길한 예감에 얼핏 휴지통을 보니 그냥 라면도 아닌 너구리 봉투가 보였다. 라면을 오래 끓일수록 구수한 맛이 나는 파스타 수프와 같은 거로 생각하신 시아버지께옵서 두 분이 식사하시던 두 시간 전부터 너구를 미리 끓여놓으신 거였다.

해맑게 미소 지으며 냄비 뚜껑을 열어 자랑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동통한 너구리가 우둥퉁한 너구리가 되어 냄비 안을 하얗게 채우고 있는 게 보였다. 오, 주여....!
-30-31쪽

친정 식구에게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고 낯선 타국에서 새 삶을 꾸려간다는 공통점은 우리를 고부간이라기보다는 같은 아픔을 지닌 동지로 묶어줘서, 우리의 산책길은 집에선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우리만의 야자타임이 되었다.

한.프 양국의 먹거리 자랑을 한참 하다 보면 시아버지에게 부엌을 뺏기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해먹지 못하는 팔자 타령으로 이어져 한숨을 내쉬지만, 시아버지가 전 세계 요리를 당신처럼 해내라며 주리를 틀었으면 어쩔 뻔했느내? 그래도 먹여가면서 괴롭히니 다행이다라는 한결같은 결론을 내리고 하산을 하곤 한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땐 우리 부부도 여러 가지 일로 싸움이 잦아서 어머니께 하소연하며 함께 껴안고 울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곤 하셨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울고 있지만, 그래도 잊어선 안 돼. 'La vie est belle'(인생은 아름다워)"
-94쪽

유럽인들이 시에스타를 즐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댁에 와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의무가 아니라 선택인 줄 알고 까불다가 두 분 낮잠을 깨운 적이 있는데 옛날 스페인에서는 낮잠 깨우는 사람은 죽여도 정당방위로 간주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살해 위협 속에 억지로 낮잠을 청하곤 했는데, 지금은 나도 흉기를 머리맡에 두고 낮잠을 잔다. zzz...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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