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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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개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나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때로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겨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22,23쪽

눈물의 횟수

내 집 낡은 뻐꾸기시계는 제 울음의 횟수가 따로 있다
밤 한시에 갓난애처럼 열 번 스무 번 깨어 울거나
아홉시에 달랑 한번만 탁, 침 뱉고 들어가거나
다음날 정오엔 절마당 동백꽃 속에 빠진 채 아예 잠잠하거나

나 또한 나만의 눈물의 횟수가 따로 있으니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
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
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
한낮의 버스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

스무살에는 서른을 대고
서른엔 스무살인 척했거나

첫눈에 눈물의 횟수를 알아맞힌 그 새와 나,

번번이 땅에 떨어지는 얼굴이며, 다음날 야속을
전날에 나가 자처하는 이별 통첩이며, 내일의 줄거리를
다 발설하고 마는 어제 따위까지

다른 시간들은 다 아무래도 좋았다
-54,55쪽

문 밖의 문

당신들에게 있든 내게도 있고
내게 있듯이 당신들에게도 있는 것

문밖 강물과 물고기들 어룽대는 소리
어깨보다 큰 귀에 잡히는 바람의 무늬
물푸레나무 밑의 나무의자
촘촘한 그물과 십자방아쇠
숨기고 싶다가도 슬쩍 들켜버리고 싶은 사진
슬프므로 떳떳한 흉터 끌고 가다가다 버릴 이름
흰구름의 유랑의 전설

세상에 없듯
당신들에게도 없고 당신들에게
없듯 내게도 없는

-80,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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