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게 말이야, 그게 진짜 용기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거야. 근데 솔직히 나는 그 때 엄청 비겁한 자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첫사랑을 눈 앞에서 포기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악물었지. 이런 못난 병신 같은 내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사랑은 타이밍이라고들 하는데 이놈의 타이밍이 개떡같아. 꼭 아주 배드하게 온다구 배드하게. 기껏 힘들게 잊어 놨더니만 다시는 못 볼 거 같더니만 그렇게 우연히 마주치질 않나, 힘들게 다시 시작한 사랑으로 이제 막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는데 아, 정말 환장하겠더라.

결국 그 때 나는 첫사랑을 포기하고 현재의 사랑을 선택한 건데 돌아보면 그게 또 아니야. 중간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당시의 그 사람한테 마음도 다 들켜 버리고 완전 바보 되어서는 참 볼만했다 그때 나. 엉망진창이 되고 나서 제대로 그렇게 둘 다 연애 한 번을 제대로 못해보고 끌탕이나 하다가 2년 반쯤 지나서야 정말 연애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어. 얼마 전에 동창회에 나갔는데 결혼해서 애 하나 키우면서 제법 알콩달콩 하게 잘 산다고 소문난 여자 동창이 술 한 잔 하더니만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하더라. “나는 세상에서 연애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 그 때는 그냥 그 말이 묻혀버렸는데 지나고 나니 가끔씩 그 말이 떠올라, 그리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가 갈 것 같아.

연애를 할 때는 말이야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모든 게 막 행복하고, 가슴 벅차고 설레고 그러잖아. 약속 시간 다가오면 오늘은 머리를 어떻게 할까, 무슨 신발을 신을까, 향수를 뿌릴까 말까 고민하고, 어떤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더 즐거워할까, 오늘은 만난 지 몇 일째인데 이런 생각들 하고 말이야.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 한 마디씩 연애하나 보다고 얼굴이 확 폈다고 해주면 그렇게 뿌듯하고 뭐 그런. 나도 그런 연애를 그 때 처음 해봤다고. 내 나이 스물 둘, 그리고 스물 셋의 딱 그 시절이었지. 내가 아까도 타이밍 이야기를 했지만 그게 이번에도 또 그러더라구. 하필 그 때가 내 인생이 아주 바닥을 치다 못해 땅굴을 파고 들어갈 때였어요. 식구 다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하고 집안은 아주 박살이 났지. 그 와중에 내가 연애를 어찌 계속 하겠냐. 그리고 앞 길도 암담하기 그지 없는데.

야, 너 같으면 관처럼 좁은 고시원에 겨우 몸 의탁하고 살면서 연애란 것을 할 수가 있겠니? 등록금하고 밥값, 그리고 차비 벌기 위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가면서 알바 뛰기 정신 없는데 연애는 무슨 얼어죽을 연애냐고.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비겁해졌다. 중요한 건 그 사람 인생도 그리 순탄치 않았다는 거였어. 변명 같지만 거기다 내 인생까지 얹어서 서로 더 힘들어지는 건 원치 않았고. 그 때 나는 졸라 유치한 방법 까지 동원해 가면서 나는 내 연애를 스스로 시궁창에 처넣고 있었던 거야. 그 사람에게 씻지 못할 상처까지 여러 번 주면서 난 내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 엉망이 된 연애를 뒤늦게 후회하며 1년 넘는 시간 동안 다시 잘해보려 무지하게 애를 썼지만 깨진 그릇은 다시 붙지 않는다는 진실만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지.

이미 헤어진 애인 붙잡고 괴로워서 아침 저녁으로 우는 청승맞고 미련한 짓거리를 접게 된건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서였어. 그러고 나자 세상이 좀 달라보이더라. 그 때부터 나는 좀 달라졌어. 아니 아주 많이 달라졌지. 난 내 인생이 스물 둘, 셋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길래 그게 최악일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지 뭐냐. 스물 다섯 이랑 여섯은 아주 나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난 가족을 잃었어. 너, 가족을 잃은 심정이 어떤 건지는 백번 말해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건 잃어본 사람만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어. 그 때부터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다였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그런 거. 씨발, 자존심이고 뭐고 그런 거 다 버리고 나는 정말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스물 일곱이 지나고 또 스물 여덟이 되더라고. 근데 상처라는 게 말이야. 시간이 좀 지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게 아니더라. 어떤 날은 말이야, 피곤해서 곤죽이 되어서 겨우 집에 들어와 뻗어 누웠는데 잠이 안 오고 말똥말똥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몸은 파김친데 머리만 숨 안 죽은 날 배추인 거지. 그럴 땐 별 수 있냐? 그저 깡 소주나 마시는 거지. 그런 날은 꼭 울다가 잠들어. 어떤 때는 운이 좋아 어찌 어찌 엮여 가지고 신나게 떡치고 나서도 불쑥 생각이 나. 그럴 땐 정말 기분이 드러워져. 드러워져서 아주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은 다 아작 내고 싶고 길가다가 내 어깨랑 부딪히는 놈이 한 놈만 나와도 그 놈의 면상을 바닥에 갈아버리고 싶어져. 그게 다 못난 내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건 나도 알아.

저기 저 건너 테이블에 앉은 한 쌍, 너 저 인간들 어디까지 간 거 같냐? 딱 보면 모르냐. 아직 서로 자기 전이야. 겉 보기에는 굉장히 친밀해보이고 스킨 쉽도 있지만 조금 더 지켜봐. 여자가 은근히 경계를 하고 있잖아. 남자도 선을 넘지 않게 스스로 자제하고 있고. 딱 거기까지인 거지. 너 요즘 애들 연애하는 게 어떤지 아냐? 저거랑 똑같아. 자기 선이라는 게 명확하게 있어. 그래서 그거 넘어오면 아웃이야. 아이씨, 자는 거 말구 새끼야.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야. 그래서 이것들은 양다리를 걸치더라도 답이 명확해.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고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면서도 오케이라면 가는 거고 아니면 안 가. 떡 두 개 손에 다 쥐고 지 맘대로 계속 주무르겠다는 심보지. 졸라 약삽하고 더럽게 이기적이지. 뭐 들키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들켜도 크게 신경 안 쓰는 애들도 있고 하여튼 참 황당하더라.

양다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전에 전과 10 몇 범의 누구누구 말이야. 그 놈이 도피 중에 계속 여자들을 꼬셔서 연애행각을 벌였다잖아. 여자를 여섯 정도 동시에 사귀었대. 말이 동시지 이 여자 집 저 여자 집을 옮겨 다니며 숨어 산 거지. 여하튼 나중에 그 놈이 검거되고 나서 동거했던 여자 여섯들의 반응이 나한테는 충격이었어. 그 남자가 그렇고 그런 범죄자라는 사실과 더불어 자신 말고도 다른 여러 여자들과 동거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여자들은 대부분 크게 놀라긴 했지만 그 남자의 욕을 하거나 격분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오히려 그 여자들은 처음에는 강력하게 부인했대. 그 남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그러다가 사실이 다 드러나자 그들은 아, 그 사람이 그랬다면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요.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저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라고 하면서 하나같이 정말 슬프게 울더란다. 햐, 그 자식 정말 죽이지 않냐? 완전 프로도 그런 프로가 없고 선수도 그런 선수가 없다 싶어서 어이가 없었다.

한데 나 요즘 들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넌 사랑이 뭔 거 같냐. 그게 믿음이 없으면 완전 헛 거 아니냐. 상대를 믿지 못하는데 뭘 할 수 있겠냐. 사랑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관계가 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하물며 사랑이라면 말이다. 거 왜 수시로 핸드폰으로 전화질 해대면서 어디서 뭐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꼭 확인하려고 들고, 연락 안되면 의심하고 그런 것들은 얼마안가서 반드시 깨진다. 이 사람은 이러이러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관계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거 아니겠냐. 그러니 저 여자들을 봐라. 자기가 잠시 동거하고 사랑했던 남자가 전과가 헤아릴 수 없는 범죄자이며 자신 말고도 여러 여자들과 동시 다발적으로 동거했다는 거 뻔히 알고서도,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며 자신을 정말 아끼고 사랑했다고 말하며 슬피 울고,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잖냐. 아이씨, 그게 바로 사랑인 거야. 그 여자들은 남자에 대한 확고한 신뢰, 믿음이 있었던 거고 그게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졌냐? 남자가 여자에게 준거야.

근데 나는 여전히 비겁하기 짝이 없다. 너무 비겁해서 살다 보니 어째 구색 맞추기 식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처자식까지 딸려버렸다. 가끔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쪽팔려, 쪽팔려서 견딜수가 없어. 아, 오해는 마라. 내 처랑 자식이 그 개별적 존재가 부끄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구질구질한 현실에 엮인 내가, 더 강인하지 못한 내가 쪽팔리다는 거다. 너 와이프랑 자는 기분이 꼭 근친상간 하는 기분 같다는 말 들어봤지? 그거 아주 무서운 거다. 와이프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나한테는. 애 엄마고 며느리고, 동서고 그래. 가족인 거지 가족. 나랑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싸우고서도 다음날이면 지나다가 양말 세일한다고 내 양말 사 들고 들어오는 여자야. 사랑도 연애도 그렇게 다 인생에서 놓아버리고 난 후면 혼자 조용히 외로움을 견디면서 비겁했던 결과를 달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좋으련만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게 진정으로 부끄러워. 근데 그나마 다행인건 나만 이렇게 부끄러운 건 아니더라고. 돌아보니까 대부분 다 이런 식으로 살더라구. 그게 위안이 되냐고? 전혀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된다.

사랑이란 게 피비린내 나는 누와르에 달콤하고 보드라운 로맨스가 짬뽕 된 영화 한 편 같다. 아, 이런 날은 정말 확 어디로 도망가버리고 싶다. 비겁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냐. 튀어버리는 거지, 그런데 그럴 용기도 없다 나는. 그냥 저냥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 추억도 이제는 희미해져 가고 한없이 쓸쓸하구나. 아이, 새끼.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졸고 지랄이냐. 에이, 미안하다. 너무 길게 나불거린 내 탓이다. 들어가 자라.

2005.04.03 , by 낡은구두

* 오래된 글을 열어보다가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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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05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중간에 낡은구두님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라는 두갈래 길을 발견했습니다.^^

이리스 2008-02-05 13:11   좋아요 0 | URL
으흣.... ^^

2008-02-05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5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8-02-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스스로를 바닥까지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이리스 2008-02-05 13:12   좋아요 0 | URL
글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