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보다 먼저 당신을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나날을 신경써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순한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EL, p.108.)

내가 ‘당신‘과 만날 때에, 나는 이미 ‘인식‘에 앞서 ‘축복‘을 행하고 있다.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피부색이나 눈빛이나 복장을 인식하고,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속성을 가진 자인지를 특정하고, 인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인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식에 앞서서, 인식을 초월해서, 나는 ‘당신‘에게 축복을 보낸다. 이때 축복을 보내는 자인 나는, 말하자면 ‘무로부터의 창조‘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장 그 자체를 열고 있다.
여기에 ‘당신‘을 향해 말거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 ‘당신‘에게 축복을 보내고, ‘당신‘과의 대화를 진심으로 바라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 그것을 전하는 것에 ‘인사‘의 본질은 존재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창조하는‘ 이 메시지를 레비나스는 ‘메시지로서의 메시지‘라고 부른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만들어진 다음에 거기를 통해서 오고가는, ‘의미작용‘으로서의 메시지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커뮤니케이션, 기호를 증여하는 기호‘(AQE, p.153)인 것이다. ‘말하기‘는 ‘윤리적‘이다. 이 명제는 이러한 문맥에서 도출된다.
‘인사‘를 보내는 것은 ‘파롤이란 선물‘이 ‘당신‘에게 보내지지 않고, 보내져도 묵살된다는 ‘리스크‘를 미리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자신의 취약한 옆구리를 우선 ‘당신‘에게 드러낸다. ‘당신‘은 나를 상처입힐 수 있다. 나는 ‘당신‘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다고 알리면서, ‘인사‘는 보내진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말하기‘에 의해 창시되는 ‘타자와의 만남‘을 내가 ‘타자‘를 찾아낸다는 능동적 모드가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폭로된다‘고 하는 수동적 모드로 기술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윤리‘라 부르는 것은 이 ‘폭로의 모드‘를 선택하는 결단을 말한다. 아니 ‘선택한다‘고 하는 식의 말은 이미 적절하지 않다. ‘윤리‘에 선행해 타동사적인 능동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가 결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결단이 내려진 다음에, 그러한 행위를 기동시킨 ‘시점始點‘이 사후적으로 확정되고, 그것을 사람들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 단락의 표현도 수정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내‘가 ‘타자에게 폭로된다‘고 하기보다, ‘타자에게 폭로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나‘와 ‘타자‘는 동시적으로 생기하는 것이며, ‘나‘에 앞서 ‘타자‘가 있는 것도, ‘타자‘에 앞서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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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과의 의견 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곧 핸드백이나 스웨터에 새겨놓은 머리글자, 은행 출납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가입하는 것 등은 개인적 차이의 표현이 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이와 같이 강화되는 것은 가장 발달한 산업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등의 개념 및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등은 종교적 맥락에서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며,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똑같은 신성한 천품을 갖고 있고, 우리 모두 일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평등은 개인 간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며, 우리 모두 일체임이 사실이더라도 우리는 각기 독특한 실재이고 각기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것도 사실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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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사실상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놓은 상像에 가깝다. 곧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그들은 헉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은 집단, 민족 또는 종교와 매우 흡사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개조하기에 바쁜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하면ㅡ아주 흔히 있는 일이지만―사랑의 관계는 상호 투사의 관계로 변한다. 만일 내가 오만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탐욕스럽다면, 나는 상대방의 이러한 점을 비난하고 나의 성격에 따라 그를 고치거나 처벌하려고 한다. 상대방도 이와 같이 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무시하는 데 성공하고 따라서 그들 자신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조치를 하는 데 실패한다.
투사의 또 다른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린아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우선 이러한 투사는 흔히 자식에 대한 소망과 관련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경우, 자식들에 대한 소망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자식의 문제에 투사함으로써 결정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의의가 없다고 느낄 때, 그는 자식들의 생활을 통해 의의를 느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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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진정으로 "나"라는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랑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며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살 경우에만 주어진다. 이렇게 참된나로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고 재물을 상실해도 정체성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를 실현하면서 자발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사고와 감정과 행위는 그들 자신의 표현이지 결코 자동인형의 표현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예술가는 예술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 집단을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낱알과 같다. 이 낱알들은 서로 낯선 것으로 존재하면서 이기적인 이익과 서로를 이용할 필요 때문에 함께 얽혀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소외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결과 고립과 고독으로 괴로워하지만, 그러한 고립과 고독을 서로 간의 연대와 사랑을 통해서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국가와 민족 또는 민중이란 추상적인 존재와 그들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인기 정치가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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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시대에서 히틀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층 중산계급은 이러한 적개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향락에 빠져 사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질투심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의분으로 합리화했다. 프롬은 증오나 시기심은 ‘종교적 · 도덕적 의분‘으로 위장할 때 가장 파괴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는 ‘종교적 · 도덕적인 의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른바 ‘타락한‘ 인간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은채 잔인하게 공격하고 살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양심의 소리를 천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요구가 내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양심의 지배는 외적 권위의 지배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양심의 명령을 자기 자신의 명령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적 권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경우에 죄책감을 품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을 어긴 사람은 평생에 걸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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