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으로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코엘료가 그렇다.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매혹적인 표지에도 끌렸지만 코엘료라는 이름 때문에 그런 것에 끌리기도 전에 샀다. 코엘료니까 그렇다.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코엘료의 소설에 나왔던 여자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마녀라고 불린다. 그녀가 마녀로 불릴 까닭은 없지만 포르토벨로의 기득권이 그렇게 단정 짓고 모함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솔직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그녀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여자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 부조리함, 황당한 일. 지금도 그런 여자들은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겠지. 소설과 황당한 세상이 오버랩되면서 여자들이 안쓰러워졌다. 하지만 코엘료는 그녀들을 위해 길을 열어줬다. 그 길을 가는 것이 험난하기야 하겠지만 안 가는 것보다는 낫다.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그녀는 그것을 알고 움직였다. 이 황당한 세상에 여자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녀들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면서 코엘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지구 반대편에 있을 그 사람, 땡큐 베리 머치!
소설이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가! ‘제비를 기르다’를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진 순간은 어찌 이리 많은가. 8개의 단편소설이 있는 ‘제비를 기르다’는 나를 울다가 웃게 만들었다. 아! 그것들은 하나같이 제 색깔이 뚜렷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매혹’이다. 그렇다. 윤대녕 소설집은 매혹, 그 자체다. 숨을 멎게 만드는 그것이 소설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그러니 아름답다는 느낀 것도 당연한 것일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진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연’을 보면서 미선의 붉어진 얼굴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 살뜰할 정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얼레’라는 단어가 주는 여운은 또 무엇인지. 윤대녕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제비를 기르다’는 지나간 시간 속에 몸을 던지는 소설이다. 윤대녕은 과거와 현재를 아름답게 엮었다. 윤대녕답지 않은 농담까지 사용하면서도 그 끈을 아름답게, 정확히 말하면 숨이 막힐 것처럼 매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탱자’는 재밌는 소설이다. 윤대녕소설을 두고 재밌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 소설만큼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늙은 사람의 즐거운 인생타령은 재밌다.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이 소설의 힘인가. 소설 속의 화자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 하다. 그 마찰은, 분명히 매혹적이다. ‘편백나무숲 쪽으로’는 아름다운 영화를 닮았다. 아름다운 분위기, 그 사이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내밀한 이야기는 내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씁쓸함과 정겨움이 오가는 그 기묘한 줄타기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윤대녕 소설인가 싶은 그 맛, 정말 놀라웠다. ‘고래등’도 그랬지만, ‘못구멍’은 정말 대단했다. 누군가에게 꼭 건네주고 싶은 소설! 직접 읽어주고 싶은 소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그 간절함! 내가 이 소설 읽기를 잘했다는 확신을 준 그 짜릿한 순간을 어찌 설명할지 모르겠다. 소설의 끝에 여자가 아이브로우 펜슬로 적어놓은 ‘글자들’을 읽을 때, 그 매혹적인 글자들에 내가 살아있어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을 축복했다. 정말 좋은 소설을 봤을 때 나오는 그 감정이 이 소설의 끝에서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이 매혹적인 소설들이 계속되는데, 정말 소설이 끝날 때에는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이 아쉽고 속상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매혹적인 소설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몰라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아직 한 달하고도 반이 남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 책은 내가 올해 본 책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 중에 하나라는 것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사랑한다. 아이들의 모험이 인상적인 책, 모험의 끝에서 만져지는 진주알 같은 메시지! 마음에 든다. 너무 좋아해서 어른이 돼서고 계속 보는 책 중에 하나다. 그 책을 볼 때마다 즐거우면서도 속상했다. 국내 책 중에 이런 것이 왜 없나 하는 그런 아쉬움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시야가 좁았다는 걸 알아버렸다.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라는 보석이 숨겨져 있었다.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 좋다? 맞다. 너무 좋은 책이다. 왜 좋은가 하면 말이다. 읽는 동안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을 만큼 모험이 인상적이고 재밌기 때문이다. 모험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감동소나타는 또 어떤지!! 감동소나타를 만드는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들 슬픈 사연들이 하나씩 있다. 그 사연들을 간직한 채 이상한 우연으로 모두 트럭 위에 탄다. 사람들 모두 민감하다. 아이나 어른 상관없이, 민감한 사람들일수록 서로를 경계하며 지지고 볶고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니 트럭 위는 난장판이 되고만다. 트럭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그렇다. ‘개’가 있어서 그런지 더 정신없다. 그래도 그들의 정신없는 난리가 조금씩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기묘하게 시작된 모험으로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는 그것이 나를 찡하게 만들었다. 정말 그랬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마음은 훈훈해지는데 그것은 마치, 책을 읽는 동안 어떤 따뜻한 손이 내 몸을 감싸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당연히 이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너무 좋다, 고 앞에서 강조해 말해버린 것이다. 또 강조할 필요가 있다. 너무 좋다! 그 말이 아깝지 않다. 별표를 다섯 개밖에 주지 못하는 것이 속상할 뿐이다.
조경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녀의 소설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워낙에 그녀의 고집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혀’는 참... 혀가 빙글빙글 돌아가 버리네. 변신. 나는 그것을 생각했다. 요리사 여자의 무지막지한 이야기 실타래가 퍼져나가는 걸 보면서 오밀조밀한 글을 쓰던 조경란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고 자극적인 변주곡을 울려대는 그 모습에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아니 ‘변했다’가 아니라 ‘변신’했다고 판단했다. 그 변신... 어설픈 변신이면 고개를 돌리고 싶었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이 변신은 내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그 변신이 버림받은 여인의 사연에서 태어난 것이라 그런 것 같기도. 버림받은 여인. 여인은 요리에 몰두하다. 몰두하는 요리. 참으로 다양한 요리 이야기를 보면서 즐거웠는데 어디서부턴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하는 행위 이면에 담긴 뭔가가 있다는 에네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분명한 정체가 있었다. 조경란의 소설이다. 조경란의 소설이라 낯익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다. 놀랍다. 놀라운데 그것이 나쁘지 않다. 괜찮다. 즐겁게 받아들였다.
한승원의 ‘추사’를 읽고 추. 사. 라고 천천히 발음해봤다. 미세하게 공기가 흔들리는 것 같다. 손을 내밀어 추. 사. 라고 써봤다. 분명하게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림 사이로 쓸쓸함이 물 밀듯이 밀려온다. 추. 사. 당신은 그곳에 있는 것인가요?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고 만다. 다시 책을 본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내 마음을 이리 쓸쓸하게 흔들리게 하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낱 책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고도 야릇한 이것에 처음 손을 뻗었을 때, 묘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내 행위가 ‘독서’의 그것이 아니라 벽 하나를 뚫고 지나가는 듯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추사라고 불렸던 그 사람을 바로 옆에서 또렷이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문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추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가까웠다. 너무 가깝게 느껴져 이게 바로 한승원의 소설이구나, 하는 감탄을 하면서도 소름이 돋기도 했다. 만져서는 안 되는 금기를 만진 듯 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놀라면서 책을 읽고 또 읽을 무렵, 나는 ‘추사’가 다른 역사소설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은 착하다. 좋게 평가받게 된다. 어찌할 수 없이, 작가들이 그들에게 동정표를 던져주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한승원은 추사를 비난받게 만들기도 했다. 저 무엄한 녀석!, 하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좋게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히 비난도 받도록 했다. 무슨 조화일까. 어째서 그렇게 한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그것이 독자를 향한 최대한의 친절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다. 써놓고 보니 뻔한 말 같다. 인정한다. 뻔하다. 결론은 독자가 만들고 유추하고 상상을 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역사소설들은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결론을 만들어놓고 있다. 그러고 나니까 독자들이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꼴이 된다. 독자들은 작가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읽고 마는 것이다. ‘추사’는 아니었다.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추사는 오만한 천재인가?, 시대의 불우한 희생자인가? 그 답을 독자가 내릴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쓸쓸하다. 내가 응원하고 싶은 이 사람이 내 소망과 달리 ‘불우’한 인생이라고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불러본다. 추. 사. 이 이름은 쓸쓸하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 ‘추사’를 불러볼 때는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역사소설 만났다는 생각에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현재 구조를 반복한 것이 조금은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추”/“사” 떠오르는 사람 이름과 책 제목에 가슴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책을 읽는 건 단순히 독서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로 걸어갔다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