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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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한 에피타이저. 책을 통해 로마 천년의 비결을 꼽아보면, 정치 조직 운영에 있어서의 합리성과 유연성, 점령지 정책에 있어서의 포용력과 개방성,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방성이란 것도 추진하는 쪽이 호방한 대인배 마인드여야 가능한 정책 기조가 아닌가, 비록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번영의 비결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경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로 로마인의 태도나 기질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 책임의식, 니체가 그토록 칭송한 귀족(주인)정신 등등.

예전에 조선의 역사를 유심히 들여다봤을 때도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제 유지 동력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소위 선비정신 내지는 사대부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지점이었다. 일신의 안녕이나 개인의 영달보다 유교 이념이 중시하는 고결한 가치를 우선시 하는 마음. 그런 어떤 완고한 윤리준칙 속에서 빛나는 기개. 나라가 오래 가려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 경제를 선도하는 상위 계층의 의식 수준이, 정신 상태가, 삶의 철학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지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런건 당연하게도 어떻게 가르친다고 해서 습득하거나 강화되는 정신의 영역도 아니고. 가정 환경처럼 그저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집안 공기와 함께 자연히 흡수되는 문화의 한 부분일 뿐. 국민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에 있어서도 정신의 스케일, 깊이, 품격, 기품 이런 것들은 학습할 수가 없다. 그저 우러나올 따름이지. 감탄하기는 쉬워도 모방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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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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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응적인 힘들은 작용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지체시키며 방해한다. 반대로 적극적인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적극적 유형은 오로지 적극적 힘들만을 포함한 어떤 유형이 아니다.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으로 영향 받고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그런 반응적 힘들을 포함하는 관계임. 즉, 적극적인 유형은 힘들이 서로 경합하며 거침없이 분출하는 역동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표현한다. 원한은 이런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원한은, 작용하는 힘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영향 받길 중단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반응적인 힘이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 방식이다. 원한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어떻게 해서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가. 그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가.

 

2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흥분을 수용하는 체계가 있고 또 한편으로 흥분을 항구적인 흔적(=기억, 추억)으로 변화시키는 체계가 있다. 전자가 의식에, 후자가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는 이를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로 본다. 후자 즉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응적 무의식은 마치 생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고착시키고 흔적에 집중한다. 전자 즉 반응적 의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향 받고 학습하고 습득하고 훈련 받는, 말하자면 적극적인 반작용을 수행하는 영역이다. 반응적 의식이 가진 적극적인 능력은 바로 망각 능력이다. 망각의 능력이야말로 제동력이고 완화 장치이며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망각 능력=건강한 생체대사능력.

 

망각능력이 쇠약해지면 즉 완화장치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슷해진다. 이때 흔적들에 대한 대응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에 침투한다. 흔적들에 대한 반작용은 이제 (의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됨과 동시에 흥분에 대한 반작용은 영향받길 중단한다. 반작용을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적극적인 힘들은 실행의 물리적 조건을 잃고, 그것들의 활동을 실행할 조건을 더 이상 갖지 못하며,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 (아팠던 기억, 비난당했던 기억, 위험했던 기억, 맞았던 기억 등등 안 좋은 기억이 나면 순간 움츠러들면서 할 수 있는데도 더 이상 안 하게 됨. 반응하기를 단념하게 됨.) 흔적이 반응적 장치 속에서 흥분을 대신한다.

 

그런데 의식을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라는 이러한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의 그것보다 더 큰 하나의 힘을 형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힘들을 전염시키고 감염시켜서 그것들의 힘을 빼앗고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승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한의 정의를 재발견한다. 원한은 느껴질 수 있음과 동시에 영향 받길 중단하는 반작용이다. 원한은 질병이며 사실 모든 질병이 원한의 한 형태이다. 더 이상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혼자 누워서 속으로 끙끙 앓으며 참고 삭이면서 이만 갈고 있는 상태.

 

3 흔적들의 기억에 의한 의식의 침투, 기억의 의식 자체로의 상승. 의식으로 침투하는 기억의 장소 이동. 반응적 힘들의 이동. 이것이 원한의 일차적 모습이자 원한의 위상학적 측면이다. 원한은 그 다음으로 유형학적 측면을 보인다. 장소를 이동한 다음 어떤 하나의 유형(원한의 인간이 보여주는 가치 전복, 힘들의 관계의 전복)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형의 주된 징후는 놀랄 만한 기억력이다. 어떤 것을 잊는 데 있어서의 그 무능력.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그 무능력.

 

건강한 인간에게 흥분이 될 만한 모든 자극들이 원한의 인간에게 다가오는 순간 신속하게 얼어붙는다. 의식의 경직, 경화. 반응 불가능. 오로지 흔적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극적 대상에게로 전가시킨다. 대상이 주는 흥분에서 흔적들을 제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원한의 인간이 행하는 복수는 그것이 실현될 때조차 그 원리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4 원한의 인간은 악의가 아니라 적의를 갖는다. 적의=경멸하는 능력. (니체는 악의를 건강한 것으로 봄. 강자적인 것으로 봄. 거침없이 무구하고 천진하고 잔혹하고 공격적인, 그래서 건강한 악의.) 그는 친구도, 적도, 불행도, 불행의 원인도, 그 어떤 것도 찬미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에 건강한 악의를 갖는 강자는 어떠한가. 그는 상대에 대하여 정면 대결에의 의지를 갖는다. 싸움의 상대로 기꺼이 대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적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원한의 인간은 존중해야 할 모든 대상을 비난하고 비하할 뿐이다.

 

원한의 인간은 정면 대결할 힘도 의지도 없다. 무반응한 채 속으로만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한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평화로운 휴식의 상태에 잠긴다. 정신과 신체의 느슨한 마비상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제공되고 쓰다듬어지고 잠재워지기를 원한다. 그는 앓아누운 병자다. 기획할 능력, 맞서 싸우고 대결할 능력, 적극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 받기만을 원한다. 그는 누워서 그저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 만인에게 민주적으로 골고루 이득이 분배되기를. 그런 점에서 원한의 인간들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실리의 도덕.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두에게 고루 이득이 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 된다.

 

5 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너는 나와는 좀 다르구나) 그러므로 너는 안 좋다. 노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악하다. (난 그렇지 않은데)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강자는 자신의 좋음을 자각하기 위해 비교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스스로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는 사물들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들을 창조함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충만의 감정, 넘치고자 하는 힘의 감정 속에 있다. 그는 헌신하고자 한다. 주고자 한다. 왜? 자기 스스로 힘이 넘치기 때문에. 강자가 ‘너는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부차적 결론일 따름이다.

 

강자와 달리 노예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전제해야만 겨우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 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노예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쁘다(첫 번째 부정). 나는 너처럼 나쁘지 않다(두 번째 부정). 고로 나는 착하다. 이것이 노예의 기이한 삼단논법임. 노예의 기이한 가치 창조.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악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는 자이다. 자신의 행동이 제3자들에게 초래할 파괴적 결과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선한 자는?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관점에, 그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관점에 결부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좋음과 나쁨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판단으로 대체된다.

 

6 원한의 오류추리는 힘과 행동이 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허구에 근거한다. 가령, 번개란 곧 치는 것인데 ‘번개가 친다’고 표현한다. 번개가 안 칠 수도 있었는데 친다는 것인가? 의미의 실제 관계를 인과성의 가상의 관계로 대체하는 이러한 허구적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위해서보다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추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까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주체와 분리시키고 중립화시킨 힘을 약자는 더 나아가 도덕화시킨다. 좋음과 나쁨, 우월함과 저열함이라는 힘들의 성질의 차이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립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7 원한의 일차적 단계 즉 위상학적 단계에서 아직 원한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그렇다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이러한 상태를 질료로 하여 누가 원한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가치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원한의 구체적 형태를 창작해내는 위대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제다. 유태교에 있어서의 주인인 그는 노예에게 반응적 삼단 논법에 대한 생각을 제공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사랑을 고안해낸다. 불행한 자들, 가난하고 무능한 자들,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 선량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제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조장해나가는데, 실상 그가 지닌 권력의지는 바로 허무주의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가 반응적 힘들을 필요로 한다는 근본 명제를 발견하지만,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로 이끈다는 그것의 역 또한 발견한다. (15에서 이 이야기가 또 나옴)

 

8 사제가 창작해낸 허구에 의해 적극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이제 적극적 힘은 반응적으로 전락한다. 출구를 갖지 못한 힘이 내재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책의 기원이다. 한때 강자였던 자들은 반응적 인간들이 퍼붓는 비난을 내재화하면서 더 이상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고통을 생산한다. 고통과 불행에 빠져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이러한 상태야말로 원한의 인간이 결정적으로 승리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가책은 고통의 동력이며 기폭제다. 이제 이 새로운 노예들은 자발적으로 끔찍한 고행을 단행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고통은 이제 구원의 수단이 되고, 이들은 고통에서 회복되기 위해(구원받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한다.

 

9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새로운 내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고통은 원죄의 결과인 것이다. 가책의 첫 번째 측면이 앞서 보았듯 적극적 힘의 내재화로 인한 고통의 생산이라면, 두 번째 측면은 바로 고통의 내재화, 원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현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사 이래 강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늘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통은 누군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전쟁은 신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그들은 고통을 언제나 그것을 가하는 입장에서 사유했다. 고통은 삶의 흥분제이며 삶을 위한 미끼인 것이며 삶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하고 난 이후로 사람들은 이제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유한다. 고통은 괴롭고 끔찍한 것이며, 현존은 고통으로 인해 절하된다.

 

10 사람들에게 고통이 원죄의 결과라고 적극적으로 인식시키는 자가 바로 사제다. 원죄 개념을 고안함으로써 고통의 내재화를 주재하는 사제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가책이 원한을 계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원한과 가책 각각 위상학적이고 유형학적인 계기들을 갖고 있으며,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이행할 때 사제라는 인물이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이 사제는 항상 허구를 창작해내어 가치 전복을 이루어낸다는 점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책 속에서 원한의 방향전환, 즉 고통의 내재화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현상과 얽혀있기 때문에 한결 복잡하다. 고통이 원죄의 결과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런 생각이 단지 사제가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통의 기원을 역사적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것과 만나게 된다. 이제 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11 문화는 고문을 비롯한 잔혹한 훈련을 통해 폭력 속에서 탄생한다. 문화가 융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법에 복종한다. 복종에서 우리는 반응적인 힘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반드시 반응적인 힘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라는 것은 또한 어떤 적극적인 힘이 인간에게서 발휘될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을 처벌하고 복종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훈육하여 주권자적 인간으로, 자율적인 개인으로 양성해내는 법의 양면성.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사적 활동,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다. 문화는 인간에게 습관을 제공하고, 인간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킨다. 또한 문화는 인간에게 기억을 부여한다. 여기서의 기억이란 인간을 소화불량으로 만드는 흔적의 기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들의 기억을 말한다. 문화는 인간에게 약속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것을 실행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약속함으로서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인간만이 적극적이다. 약속하는 능력이야말로 문화의 효과다.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는 어떻게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육성해 내는가. 인간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렇게 만들어낸다. ‘고통’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정확한 등가물이다. 약속을 까먹음으로써 야기된 손실=감내한 고통. 인간관계의 기원은 교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원시적인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채권-채무의 관계였다. 니체는 교환 속에서가 아니라 신용 속에서 사회조직의 원형을 본다.

 

12 채무자는 약속을 망각해서 생겨난 부채를 체벌의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벗어난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거기서 쾌감을 느낌으로써 피해를 보상받는다. 이걸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 바로 문화가 구현하는 ‘정의’이다. 잘못했으면 맞는다, 가해자가 맞는 걸 즐겁게 지켜보면서 피해자는 보상받는다, 이로써 채무관계는 깨끗하게 해소되고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해방된다. 채무관계가 해소되는 이러한 과정 어디에도 복수나 원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정의는 결코 복수나 원한을 그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타와 체벌이라는 문화적 훈련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주권자인 개인, 자율적이고 초-도덕적인 개인, 더 이상 부채를 만들지 않는 인간, 책임이 없는 자, 자유로운 자, 가벼운 자, 주인이 된다.

 

13 그러나 인류 역사는 열등하고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해온 역사였고 결국 문화는 퇴행하고 말았다. 인간은 주권자 개인이 아니라 군서동물, 순종적이고 병적이며 하찮은 존재, 오늘날의 유럽인이 되었다. 문화는 반응적 삶을 보존하고 조직하고 파급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교회, 국가를 비롯한 규율권력이 인간을 반응적으로 만들었다.

 

14 반응적인 인간들은 국가, 신, 조상 등 모든 위대하고 신성한 것들에 대해 영원히 갚을 길 없는 깊은 채무감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채무자의 자기학대가 너무나 극심해져서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도달한 것. 이렇게 부채는 그것이 인간의 해방에 참여했던 적극적인 특성들을 상실하고 변형된다.

 

이를테면 기독교가 대속이라 부르는 것을 보라. 더 이상 부채에서의 해방이 문제가 아니라, 부채의 심화가 문제다. 부채를 갚느라 치르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다. 고통이 내재화되고 채무-책임성이 죄의식-책임성이 되면서 이제 고통은 부채의 이자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갚지 못한다. 적당히 고통 받고 해방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해방되지가 않음. 해방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종속으로서의 고통. 영원한 죄인이 됨.

 

내재화된 고통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못 견디고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사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어수단 또한 고안해낸다. 신에 대한 봉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함으로써 반응적 인간들로 하여금 소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15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이나 가책과는 관계가 없다.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 강자들의 종교가 있음을 말한다. 문제는 어떤 힘들이 종교를 독점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힘들이, 누가 종교를 탈취하는가. 가령 예수라는 개인적 유형을 보자면 그는 원한의 인간도 가책의 인간도 아니었다. 기독교의 진정한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성 바울이었다.

 

성 바울 같은 사제들이 금욕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낸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로써 고통을 근근이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든다. 반응적 인간은 이제 천국이라는 금욕적 이상 세계를 꿈꾸며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고 세계에 무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반응적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원한+가책+금욕적 이상이라는 삼단 복합체의 수립으로 마침내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완성되는데, 바로 이것이 사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반응적 힘들의 승리에는 무의 의지가 하나의 동력으로서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16 이와 같이 니체는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낡은 형이상학과 초월적 비판을 대체하는 권력의지의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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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낳은 아기를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류를, 온생명을, 세계를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정한 마음이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규모로 확장될 수 있을까. 역사에 남은 성인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을 떠올리면 가없는 존경과 경외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다.

오래 전에 딱 한 번 친구 따라 성당에 가본 일이 있다. 미사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던가, 신부님의 제안으로 지구 저편에서 오늘도 기아로 고통받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었다. 남을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도란 절박한 일을 앞두고 나 잘되게 해달라고나 비는 건 줄 알았는데. 그때 받은 뜨거운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 자신도 그다지 썩 사랑하지 않는 내가 이제 곧 아기를 낳게 생겼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자문해보면 머리만 가렵다. 자신을 비하하고 조소하고 경멸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내 몸에서 나온 아기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적 긍정을, 무조건적 사랑을 퍼붓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출산이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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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9-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가 출산예정일이신지 모르지만 건강한 아기 잘 출산하시기 바랍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축복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만한 댓가를 치르고 받는 축복이기는 하지만요 ^^

수양 2017-09-09 19:34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육아야말로 헬게이트라고들 하는데... 아직 겪어보질 못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얼만큼인지 상상조차 안 되고 있어요 (겪어봐야지만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ㅠ_ㅠ) 지금은 다만 폭풍 전야의 이 호사스런 고요와 평화를 열심히 누리고 있을 뿐이네요ㅋ

빵가게재습격 2017-09-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블로그에 낙서 저장하러 잠시 들렀다가 놀라운 소식을 보았네요. 건강한 아기 순산하세요.~~~~~

수양 2017-09-09 19:33   좋아요 1 | URL
재습격님 안녕하신가요^^ 감사해요~ 순산!! 해야죠^^
 

불과 몇 년 전부터다. 흰머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게. 내 나이에 흰머리라니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용납은 커녕 용서할 수조차 없다! 처음엔 악의에 불타올라 눈자위가 뻐근해질 때까지 두 눈 치켜뜨고 보이는 족족 뽑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많아져 뽑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숱도 없어져 가는 마당에 머리가 더 휑해질까봐 더 이상 뽑지도 못하겠다. 흰머리가 삐죽삐죽 보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여자는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왜 굳이 앞에 여자를 붙이느냐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늙어가도 밀롱가에서는 보여지는 게 다르더라니까.

 

똑같이 늙었어도 밀롱가에 앉아있으면 늙은 아저씨는 나름 멋있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늙은 아줌마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늙은 아저씨만큼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남성에게만 춤 신청권이 있고 여성은 거의 수동적으로밖에 처신할 수 없는 탱고라는 춤 자체의 속성에도 그 원인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밀롱가에서 늙은 아줌마는 어찌할 수 없이 쓸쓸해 보여. 화장을 안 하고 있으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으면 화장을 진하게 했다는 이유로 더 더욱 처량해 보여.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실제로도 밀롱가에 늙은 아저씨가 늙은 아줌마보다 더 많은 걸 보면.

 

젊었을 때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화근일까, 늙으면 반대로 너무나 애처로워지는 생물이 여자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아가씨는 꽃 같다. 아가씨가 걸어가면, 아기들도 어린이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심지어 아가씨도 아가씨만 본다. 모두가 아가씨만 본다고! 아가씨는 존재 그 자체로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그러나 늙으면? 쳐다도 안 본다. 밀롱가에서 남녀 막론하고 사람들이 쏘아대는 강렬한 시선들, 인기도, 춤 신청의 빈도를 추적해보면 여자의 일생의 이러한 생물학적 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 비정한 현실이여.

 

조지 클루니를 보라. 남자는 확실히 '외모' 이상의 어떤 것이 중요하다. 내뿜는 에너지, 카리스마, 매너, 제스처, 자신감. 총체적으로 말하면 외모가 아니라 풍모랄까. 매력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남자는 풍모 그러니까 간지가 중요하다. 밀롱가에서 관찰해보면 못 생긴 남자는 없다. 풍모가 찌질한 남자만 있을 뿐. 그리고 남자는 대체로 사회적 성취도가 높을 경우에 늙으면 늙을수록 간지난다. 개기름 잘잘 흐르는 사기꾼 춤선생 같은 간지 말고 정말로 중후함이 넘쳐흐르는 간지, 카이사르 같은 간지 말이다. 왜 밀롱가에서 늙은 남자는 도태되지 않는가.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하는가. 춤 실력도 실력이지만 늙은 남자들이 내뿜는 바로 이런 간지 때문이지. 아는 사람은 알지.

 

그러나 여자는, 내가 볼 때 여자는 정말로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한다. 간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자는 꽃 같아서, 젊을 땐 안 예쁜 여자가 없지. 젊으면 웬만하면 다 예쁘지. 화장 안 해도 예뻐. 움직이고 재잘대는 거 자체가 귀여워. 정확히 그 반대급부로, 늙으면 바로 그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웬만한 동년배 남자보다 더 처량해지고 만다. 속절없이 시들기는 쉽고 곱게 늙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젊은 시절이 너무나 화려해서일까. 그에 대한 응보일까. 여자의 경우 드라마틱한 생물학적 시듦 앞에서 간지의 항거는 무력하기 쉽다. 남자보다 더 그래.

 

좋음=예쁨=아름다움=싱싱함=생기발랄=생명력. 특히나 여자한테는 이게 다 같은 말 같다. 이 무슨 반페미니즘적인 무식한 발언이냐고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아, 이런 직관적 등식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냉철하게 재고해볼 만한 정신머리도 채 차리기 힘들 만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엄습하듯이 훅 예뻐버린다고.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예쁘기 때문에 이런 괴상한 등식이 너무나도 쉽게 본능에 호소력을 발휘하고 마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라. 그녀가 내뿜는 아름다움, 향기, 그 눈부심, 찬란함.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자를 생각만 해도 여자에 홀린다. 여자는 왜 이토록 예쁜가. 너무나 예뻐서 그 예쁜 것에 갇히고 마는 것이 여자인가.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스스로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늙어서도 정성들여 분칠하고 꽃무늬 스카프로 멋을 내는 할머니들도 물론 예쁘다. 티비에 나오는 프랑스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우신지. 김선우 시인의 <봄날 오후>라는 시에서는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새악시처럼 연지바르는" 할머니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려놓았던가. 그렇지만 늙어서도 애써 여자임을 주장하는 여자 말고, 어떻게든 여자임을 잃지 않으려 안달하는 그런 여자 말고,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까. 성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여자는 없을까.

 

도인 같은 할머니는 어떨까. 그러려면 일단은 장신구를 멀리하고 화장을 안 해야 한다. 화려한 꽃무늬 옷도 안 어울린다. 몸매는 마른 듯이 날씬하면서도 자세는 바르고 곧아야 한다. 눈빛이 형형해야 하고 피부는 깨끗해야 하며 몸에선 갓 말린 빨래 냄새나 솔향 같은 게 나야 한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는 너무 무섭지 않을까. 너무 금욕적이어 보이고 B사감 같아 보이지 않을까. 진주목걸이에 챙이 깊은 모자를 쓰고 홍차 마시는 프랑스 할머니는 고와보이지만 한편으론 늙어서도 끝내 여자임에 매몰되어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도인 같은 할머니는 니체가 말한 금욕적 이상주의자, 니체가 그렇게 비난한 '사제' 같잖아. 역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군. 머리가 온통 백발로 뒤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연구해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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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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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과학을 포함하는 근대 이후 모든 인간과학에서 과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행동과 적극적인 모든 것에 대해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행동을 실리에 의해서 판단한다. 저러한 행동은 (사회 전체를 위해) 유용한가 유해한가.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고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렇게 제3자적 입장에서 (마치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는 듯이) 실리를 따지는 태도 자체가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것. 그는 자신이 시도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가 시도하지 않는 행동을 주시한다. 행동하지 않는 그는 그 행동에 대한 자연권을 소유하고 있고, 그는 그것의 이득이나 이익을 이용하거나 거둬들일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힘과 힘의 의지를 파악하려면 언제나 그 힘이 발휘되고 있는 당사자, 즉 행위자, 화자, 독점한 자, 명명한 자 등등의 입장에서 살펴야지 제3자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제3자의 관점으로 보니까 왜곡이 생기는 것임.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기존의 과학을 비판하며 니체가 주창하는 적극적인 과학(=미래의 철학)의 3과지 분과는 징후학, 유형학, 계보학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징후들을 해석하는 의사이자 새로운 유형을 창조하는 예술가이자 새로운 계보를 정립하는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2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형이상학자들은 가령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식한 질문이다. 그렇게 묻는 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누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 고려되었을 때, ‘그것을 탈취하는 힘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 ‘누가 그 속에서 표현되고, 표명되고, 자신을 숨기기조차 하는지’를 묻는 것. 우리는 ‘누가?’라는 의문에 의해서만 비로소 본질로 인도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가'에 초점을 맞추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물을 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그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지를 묻는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들은 무엇이고, 그 힘들에 복종하는 힘들은 무엇인가. 혹은 그와 반대로 누가 그것에 저항하는가. 현상 파악에 있어서 이것은 관점주의적이고 복수주의적인 기술이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소유하고 그 속에서 표현되는 힘 속에서 발견되고, 그 힘과 유사한 힘들 속에서 발전되며, 그것에 대립하고 우월할 수 있는 힘들에 의해서 위태롭게 되거나 파괴된다.

 

3 우리가 질문의 방식을 전환하여 현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만들어내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때, 여기서 의지들이 원하는 것은 특정 대상이나 목표, 목적이 아니다. 대상, 목표, 목적, 동기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징후적인 어떤 것들일 뿐. 그렇다면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과 차이 나는 것을 부인하는, 바로 그 의지 자체의 성질이다. 의지가 원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질, 상응하는 힘들의 성질이다. 자기가 지닌 힘의 성질의 심화,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힘의 성질의 지속과 강화, 힘의 어떤 성질, 유형, 경향성의 심화. 이것이 바로 의지가 원하는 것.

 

반응성과 수동성은 인간과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성질 자체가 곧 인간이 보여주는 힘의 유형이다.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인간을 구성한다. 인간 자체가 반응적임. 계보학, 유형학, 징후학의 방법으로 우리가 힘의 성질에 주목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존의 힘의 유형 외에 또 다른 새로운 힘의 유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힘들의 유형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며 초인간적인 것이다. 대지를 긍정할 수 있는 의지이며, 그 자체로 대지의 성질인 그것은 바로 ‘가벼움’이다.

 

4 니체 이전에 권력의지나 유사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체 이전의 의지철학은 몇 가지 오해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권력을 그저 하나의 표상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홉스, 헤겔, 아들러의 철학에서 보여지는 권력은 항상 실질적으로 의식들의 비교를 가정하는 표상의 대상, 재인식의 대상이다. 투쟁해서 빼앗고 탈취하고 과시하고 인정받고 비교하는 대상으로서의 권력. 우월감이나 열등감, 허영심을 자아내는 권력.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을 전제해야 하는 이런 종류의 권력은 노예가 자기 자신에게 만들어주는 권력의 표상일 따름이다. 노예만이 이러한 권력 개념을 상상할 수 있다. 왜냐면 노예만이 항상 타인(주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권력을 표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면, 권력의지라는 건 기존의 사회 내에서 현행하는 가치들, 이미 인정된 가치들(돈, 명예, 권력, 명성)에 자신을 결부시키는 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거야말로 순응주의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권력의지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표상의 대상으로서의 권력 개념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서로 탈취하기 위한 투쟁을 상정한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 전쟁, 경쟁 이런 것들은 니체의 의지철학에서는 낯선 개념일 뿐이다. 이런 식의 투쟁과 전쟁과 경쟁은 결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때의 투쟁은 그저 약자들이 강자들을 이기는 수단에 불과하며, 그것이 창조하는 유일한 가치들은 승리하는 노예들의 가치들일 뿐이다. 니체는 투쟁을 배제한 권력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권력의지를 표상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필히 전쟁과 투쟁을 상정하게 되고 그 결과 권력의지를 탐구하면 할수록 비통해진다. 의지라는 것은 점점 더 참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무엇이 된다. 또한 권력의지 자체가 굉장히 가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허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에게 의지는 부인하고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되고 만다. 허무주의, 염세 철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6 권력의지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기원적이고 미분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허무주의적 해석술을 고안해내는 약자들의 권력의지조차도 얼마나 창조적 작업인가) 그것은 결코 표상되지 않고, 결코 해석되거나 평가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기원적 요소에서 파생된 것을 원한다. 기원적 요소(권력)는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힘들에게 성질을 부여한다. 조형적 요소인 그것은 그가 결정함과 동시에 자신을 결정하고 그가 성질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성질을 부여한다.

 

권력의지가 원하는 것은 그 같은 힘의 관계이고, 그 같은 힘들의 성질이다. 그리고 또 그 같은 권력의 성질이다. 즉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매 경우에 있어 변화하는 그 복합체는 주어진 현상들이 상응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모든 현상은 힘들의 관계들, 힘들과 권력의 성질들, 그 성질들의 뉘앙스들, 요컨대 힘들과 의욕의 어떤 유형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움직이고 변화하며 조형적인) 어떤 것이며, 권력은 뭔가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주는 것,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조형적이고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는 매 경우에서 분리될 수 없다. 영원회귀가 존재이지만 생성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인 것처럼, 권력의지도 하나이지만, 다수에서 긍정되는 하나이다. 그것의 통일은 다수의 통일이고, 다수에 의해서만 언급된다. 권력의지의 일원론은 복수적 유형론과 분리될 수 없다.

 

고귀하고 우아한 힘의 유형이 있고, 저속하고 비루한 힘의 유형이 있다. 사람들은 왜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지 물을 것이다. 긍정은 왜 부정보다 가치로운가. 해답은 영원회귀의 시련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즉 되돌아오는 것, 되돌아옴을 견디는 것, 되돌아오길 원하는 것이 보다 더 가치롭고, 절대적으로 가치롭다. 영원회귀의 시련은 부정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이 살아남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2장 말미에서 했던 얘기. 영원회귀의 지속적인 운동 속에서 어떤 원심력이 작용하여 부정적인 것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고 필연적으로 긍정적인 것만 잔존함. 이것이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라는 영원회귀의 원리) 

 

7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첫 번째로 원한, 두 번째로는 가책, 마지막으로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모두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모습이고, 또 허무주의적 형태들이다. 니체는 원한을 가상적 복수, 본질적으로는 정신적인 제재로서 제시한다. 또한 원한의 구성은 오류 추리를 함축한다. 즉, 못한 것을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혹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해버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 원한이 있기 때문에 그 짝패로서 가책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삼단논법은 금욕적 이상으로 완결된다. 금욕적 이상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신비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영혼의 오류추리 속에서 원한이 생겨나고, 원한 속에서 세계는 전도되어 도덕과 삶이 대립을 이루게 되고, 그러한 이율배반의 사태 속에서 가책이 생겨나고, 이 모든 부정적 허구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금욕적 이상이 도출된다.

 

8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종래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비판을 가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공손한 비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들을 믿으면서 그것들을 비판한다. 인식과 도덕과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참된 인식과 참된 도덕과 참된 종교라는 성역을 남겨둔다. 칸트의 비판은 그런 가치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반면에 니체가 덕을 고발할 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허위의 덕도 아니고, 덕을 가면으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바로 본래적인 덕 그 자체에 대해 고발한다. 참된 덕의 빈약함, 참된 도덕의 믿기 어려운 편협함, 참된 가치들의 저속함에 대한 비판. 우리가 상정하는 모든 참된 가치들이란 관점주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사실이나 도덕적 현상은 없고, 현상들의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인식 자체는 하나의 환상이며, 인식은 오류이고, 설상가상으로 왜곡이다. 저 진리의 참된 세계에 비할 때 이 삶은 가상과 오류투성이의 세계가 되겠지만, 사실 저 진리의 세계야말로 이 ‘가상세계’에 덧붙여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

 

9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비판이 이성 자체에 의한 이성 비판이어야만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다. 이성을 재판관이자 동시에 피고로 만드는 것이므로. 그가 말한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초험철학은 우리가 인식한 것들의 내적 기원의 원리가 아니라 단순히 인식 조건의 원리일 뿐이다. 이성이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할 여러 범주들과 절차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 자체의 기원은 따로 있다. 이성 속에 숨겨진 것, 이성 뒤에 버티고 선 것은 이성이 아니라 어떤 의지다. 권력의지라는 니체의 원리는 칸트적인 초험적 원리가 아니다. 기원적이고 계보학적인 원리, 입법적 원리로서 권력의지만이 진정한 내재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오성)의 올바른 사용법을 깨달으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단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다. 이성을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마음의 필요, 도덕, 의무를 끌어들이며 역시 복종을 강요한다. 그의 비판철학은 부활한 신학, 프로테스탄트적 취향을 가진 신학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칸트의 철학은 현행 가치들을 내재화하도록 만들 따름이다. 칸트에게서 능력들의 올바른 사용이란 이상하게도 그 기존의 가치들, 즉 참된 인식, 참된 도덕, 참된 종교 등에 맞물린다.

 

10 칸트와 대비되는 니체의 비판철학은 다섯 가지 점에서 근거한다. ①니체의 비판철학은 사실들을 위한 단순한 조건인 초험적 원리들이 아니라 믿음∙해석∙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기원적이고 조형적인 원리들이다. ②니체의 비판철학은 이성에 복종하는 사유가 아니라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이다. ③칸트가 기존의 가치들의 재분배를 감시하는 재판정의 법관, 평화의 법관이라면, 니체는 전쟁을 예고하는 계보학자이다. ④니체의 비판철학은 정신이나 이성, 자의식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취하는 비판적 심급은 권력의지다. 니체의 비판적 관점은 권력의지의 그것이다. ⑤니체의 비판의 최종목적은 초인, 극복되고 추월된 인간에 있다. 비판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성이 문제이다.

 

11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의 기원을 추적해보자. 진리의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 참된 세계를 지시하는 참된 인간, 그는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곧 길을 잃게 하고 속이고 감추고 현혹시키고 눈멀게 하는 어떤 것임을 전제한다. 그렇다, 이것은 삶이 가진 고귀한 거짓의 힘이다. 그런데 진리를 원하는 자는 이 고귀한 거짓의 힘을 비하하길 원한다. 그는 삶을 하나의 오류로, 세계를 하나의 외관으로 만들어서 삶에 인식을 대립시킨다. 현 세계를 피안의 세계와 대립시킨다. 그는 이제 도덕가가 되어서 현세와 내세를 선악으로 나누고 이 세상의 삶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이 세계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소위 참된 세계, 그것은 삶에 반대하는 삶이다. 그는 삶이 그 자신을 수정하고 외관을 수정하길, 고결하게 되길, 그것이 참된 세계로 이행의 구실을 하길 바란다. 삶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등 돌리길 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을 파헤쳤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이 같은 도덕적 금욕주의자의 모습이다. 금욕적 이상의 인간에게서 니체는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를 발견한다. 무의 의지에서 비롯한 반응적 힘들이 인식, 과학, 종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끊임없이 금욕적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

 

12 도처에 금욕적 이상이 있지만, 그것은 시류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고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한다. 처음엔 종교의 옷을 입었다가, 종교에서 도덕의 옷으로 갈아입고, 또 그 다음엔 도덕에서 과학으로. 끊임없이 출현하는 금욕적 이상을 발본색원하려면, 비판은 진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판결’은 금욕적 이상이 진리의지 너머에는 더 이상 은신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를 대신해서 대답할 그 누구도 데리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때 금욕적 이상은 자기 지위를 상실하며 가면을 잃고 더 이상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인물도 이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니체는 <다르게 느끼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상을, 다른 인식 방식을, 다른 진리 개념을, 다시 말하자면 진리의지 속에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의지를 가정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13 삶을 인식에 봉사하게 할 때 삶은 반응적인 것으로 바뀐다. 사유를 삶에 봉사하게 할 때도 삶과 사유의 모형이 되는 것은 반응적인 삶이다. 니체의 새로운 사유는 “삶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사유,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유, 삶에 대립하는 인식 대신 삶을 긍정할 사유”이다. 여기서 삶은 사유의 적극적 힘이고, 사유는 삶을 긍정하는 능력이다. 삶을 긍정하는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불확실성 속으로 끊임없이 투신하도록, 낯선 체험을 하도록, 정착할 새로운 장소를 끊임없이 찾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하는 자들의 삶은 위대한 항해자들의 탐험과 같다. 험난하지만 비범한 삶들. 그런 삶 속에서만 창의력, 사색, 과감성, 절망, 이상이 존재한다.

 

14 진리를 추구하는 금욕적 이상주의자의 의지와 그 성질이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의지다. 예술은 ‘사심 없는 활동’과는 반대이다. 예술은 사심을 없애지도 않고, 욕망과 충동과 의지를 중지시키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 예술은 오로지 적극적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극적 삶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냄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사유를 펼치는 자들이다. 삶의 활동은 원래 속이고 현혹시키고 유혹하는 거짓의 힘으로 점철되어있다.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류인 한에서의 세계를 확대하고, 거짓말을 신성화하고, 속이려는 의지를 우월한 이상으로 만든다. 예술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은 거짓을 더 고귀한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키는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은 죄다 헛된 거짓이고, 살 가치가 없고, 천국에 갈 일만이 관건이다’라는 반응적인 생각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거짓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거짓으로 만들자’는 적극적인 생각의 차이. 사고관의 차이.

 

15 우리에게 익숙한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가 있다. 사유는 그 안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본유관념) 정념에서 비롯한 오류를 피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사유하기만 하면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 이에 반하여 니체는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이다. 사유의 범주들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사유 자체를 독점하고 있는 힘들의 본성에 의한 우아함과 비루함, 고귀함과 저속함이다.

 

또한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부정적 상태는 오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이고 저속함이다.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지배된 정신상태. 노예의 승리를 표현하는 어리석고 저속한 사유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부정적 상태를 고발함으로써 사유를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임무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유, 반시대적 고찰이야말로 철학의 소명인 것.

 

그런데 모든 사유는 항상 사유를 독점하는 어떤 힘에 의존한다. 어떻게 사유하도록 훈련시키고 교육하고 강제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의 최종 목표는 삶을 긍정하며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안해내는 예술가와 철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를 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교회와 국가가 문화의 이러한 사유 훈련을 전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반시대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공격하고 체제비판적인 사유의 힘을 길러야 할 문화가 어용문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스적인 것에서 독일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문화. 문화의 퇴락.

 

이처럼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유는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존하는 바, 사유는 언제나 그 기저에 복잡한 힘들의 관계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여러 힘들의 유형, 힘들의 다양한 위상이 실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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