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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아노 감독, 제인 마치 외 출연 / 그린나래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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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영화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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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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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종류의 허무주의가 있다. 먼저 ①부정적 허무주의: 초감각적 세계의 관념,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의 관념이라는 허구를 창안함으로써 삶 전부를 무가치한 것으로, 외관에 불과한 것으로 비하함. 삶보다 우월한 것으로 창안된 허구적 가치들 속에서 의지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바로 거기에 강력한 ‘무(無)의 의지’가 관철되고 있음. 권력의지를 부정하는 바로 그 의지.

 

②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대체된 혹은 연장된 형태이다. 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에서 창안된 허구적 가치들조차 부정한다. 현실보다 우월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 박탈. 신, 선, 진리, 모든 형태의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 모든 의지의 부정(부정적 허무주의가 반응적 허무주의로 나아가도록 이끈 동력이었던 무의 의지조차 부정, 무의 의지와의 동맹의 결렬). 삶의 혐오. 나약성의 비관주의. 신의 살해자.

 

2 반응적 허무주의 속에서 신은 죽었다. 어떻게? 연민으로 질식해 죽었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zero)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 다시 말해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반응적 삶의 승리를 필요로 하는 자, 삶 속에서 적극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는 자만이 연민을 느낀다. 허무주의의 실천으로서의 연민. 한마디로 신이 반응적 삶에 감염되어버린 것이다. 감염되어 연민하다 질식해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이 죽은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다. 반응적 인간이 바로 그 빈자리를 꿰찬다. 그리고는 진화, 진보, 만인의 행복, 공동체의 선, 개혁, 자유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등 그의 고유한 가치를 파급시킨다. 신이 죽고 천국도 없어졌지만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허구적 진리들이 양산된다. 신 대신에 도덕적 인간, 진실한 인간, 사회적 인간이 등장한다.

 

마지막 단계로서 차라리 고귀하기까지 한 일종의 불교적 상태인 ③수동적 허무주의가 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극단적 완성으로, 모든 허무주의의 최종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인도되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무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무. 신의 살해자의 자손인 수동적 허무주의의 인간은 이제는 죽기에도 너무나 지쳐버린 최후의 인간이다. 극도로 지친 삶은 수동적으로 꺼지듯 소멸을 바란다.

 

3 신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유대적인 증오의 신에서 기독교적 사랑의 신으로 거듭난다. 포악했던 구약의 신 대신 사랑을 설파하는 온화한 신의 탄생. 사랑의 신의 탄생과 더불어 반응적 삶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때 바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기독교를 구성하는 해석을 제공한다.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빚 많은 채무자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하여 영원한 죄의식(가책)을 가져야 한다. 영원히 죄의식과 부채의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증오가 사랑으로 은폐되는(=무의 의지가 좀 더 유혹적이고도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는), 원한에서 가책으로 방향전환이 되는 길목에 신의 죽음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 자신은 사실 또 하나의 부처였다. 허무주의의의 최종형인 수동적 허무주의, 그 고귀하기까지 한 수동적 허무주의를 체현한 자였다. 그의 죽음은 반응적 삶에서 침착하게 죽는 법을, 수동적으로 스스로 소멸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순한 타락자였다. 그는 불교도였다.

 

4 니체 저작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변증법을 반대한다. ①변증법은 구체적으로 현상들을 소유하는 힘들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에 현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또 그것은 ②힘들, 그것들의 성질들, 그것들의 관계들이 파생하는 현실적 요소에 무지하기 때문에 본질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은 ③추상적이고 비현실적 항들 사이에서의 교대, 이를테면 신학적 가치에서 휴머니즘적 가치로, 신에서 인간으로, 그렇게 신의 빈자리에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앉히는 그 끊임없는 바꿔치기를 행하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와 변형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불충분성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즉 변증법은 ‘누가?’라는 의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때문에 변증법은 해석에 실패하고 언제나 징후들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한다.

 

5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중세에 와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말씀으로 변형되고, 칸트에게서는 도덕적인 정언명법이나 양심의 소리로 변형된다. 헤겔에게서는 절대정신으로 변형되고, 포이어바흐에게서는 보편 인류로, 마르크스에게서는 민중 혹은 프롤레타리아로 변형된다. 기독교의 피안을 대신하여 이상적인 시민사회, 공산주의 사회가 등장한다. 예전에 신의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고 자신을 학대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듯이 근대에는 도래할 이상사회와 인류와 민중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고 억압되고 학살된다. 이 모든 변주는 바로 변증법적 운동의 양상이다. 변증법은 소외→소외의 제거→소외의 재점유로 작동한다. 격파되어야 할 가치들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경건하게 보존된다. 가치들이 포장만 바뀐 채 끝없이 회수된다. 

 

6 니체는 끊임없이 독일 철학의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특징, 신을 죽인 뒤에도 여전히 자아와 인간과 거대 관념들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는 철학의 무능함, 변증법적 변형들의 기만적 특징에 대해 비난한다. 헤겔, 포이어바흐, 슈티르너에 이르기까지 독일 변증법 철학자들을 열렬히 비난한 끝에 니체가 들고 나온 것은 초인과 가치전환이다. 초인의 관심은 무엇이 신의 자리를 대체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러한 연쇄적 자리바꿈의 패턴을 극복할 것인지, 반응적 힘들이 가면을 바꿔써가며 끝없이 보존되고 전승되는 이 고질적인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이다.

 

그러나 니체의 초인이 변증법적 인간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본성상 인간과 다르고, 자아와도 다르다. 초인은 새로운 감각 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인간과는 다른 주체이고 인간적 유형과는 다른 유형이다. 그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보여주는 자이다. 초인의 새로운 사유방식, 새로운 평가 방식은 바로 가치전환이다. 가치전환이란 가치들의 변화도, 추상적 교대나 변증법적 전복도 아니라,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 속에서의 변화와 전복을 말한다. 힘에의 의지의 성질 그 자체의 전복. 노예적인 권력의지에서 강자적인 권력의지로의 전복. 심층 해류 자체의 변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안경의 색깔을 바꿀 것이 아니라, 관점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처럼.

 

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4부에서 우월한 인간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우월한 인간이란 반응적 인간이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다. 니체가 묘사한 갖가지 인간 군상들은 공통적으로 두 측면을 갖는다. 즉 인간은 ①반응적 힘과 그것들의 승리의 대표자인 동시에 ②종적(種的) 활동(문화적 활동)과 그것의 산물의 대표자다. 차라투스트라의 적이면서 또한 동료이기도 한, 우월한 인간의 이중적 측면. 니체는 이렇게 갖가지 반응적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면서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를 인간과 역사 속에서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원한과 가책은 심리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허무주의는 역사의 한 국면이 아니라, 보편사의 선험적 개념이다. 반응적 힘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원한, 가책, 허무주의 이 모든 요소 자체가 바로 인간이기 위한 조건, 인간으로서의 조건인 것.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 자체가 질병이다. 따라서 허무주의를 정복하는 것, 즉 사유를 가책과 원한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인간을 극복하고 인간을 파괴하며 가장 선한 인간조차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비판은 인간의 본질 자체에 도전한다.

 

8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심오하다. 힘들이나 그 힘들의 성질보다 더 심오하게 힘들의 생성이나 권력의지의 성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힘들의 유형만이 아니라 ‘힘들의 생성’이기도 하다. 강자는 약자들에는 대립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 안에서 나오는 약한 생성 혹은 반응적 생성에는 대립할 수 없다. (왜? 자기 자신의 것이니까) 

 

이론적 인간에 의해 전복된 그리스 세계, 유대에 의해 전복된 로마, 종교개혁에 의해 전복된 르네상스처럼 적극적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반응적 생성이 운명처럼 약속되어 있다. 종적 활동이 있지만 그것은 반응적 힘들에 의해 금방 반응적 생성으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그저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대신에 가치들을 바꾸고, 그것들을 교대시킬 뿐이다. 그것들이 파생되는 허무주의적 관점을 지키면서 말이다. 물론, 인간의 적극적 힘들은 분명 존재한다. "인간사조차 적극적인 시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든 힘들의 반응적 생성의 자양분이 되고 만다. 우월한 인간이 두 측면을 갖는 건 이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왜 종적 활동은 대부분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반응적 생성으로 전환되어버리는가. 종적활동은 왜 결국 실패하고 마는가. 적극적 힘이 부정의 의지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적극적 힘이 반응적으로 오염, 변질, 전락하지 않으려면, 적극적 힘의 우월성을 담지해낼 수 있는 성질, 바로 ‘긍정하는 의지’가 요구된다. 무의 의지에 의해서만 반응적 생성이 존재하듯이, 긍정하는 의지에 의해서만 적극적 생성이 존재한다. 긍정하는 힘에까지 고양되지 않는 활동, 부정의 노동에만 기대는 활동은 실패가 약속되어 있을 뿐이다. 긍정하는 의지라고 하는 바로 이 긍정의 요소야말로 인간에게 결여된 것이고, 초인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인간에 결여된 그 긍정을 표현하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웃음과 놀이와 춤. 웃음은 삶을 그 고통 속에서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놀이는 우연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춤은 생성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9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되는 요소들을, 가치들의 가치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무의 의지의 개종이 바로 변화의 개시점이다. 균형이나 화해가 아니라 개종, 전환, 회심. 임계점에 도달한 후 일거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혁명에 가까운 어떤 형질 변환.

 

수동적 허무주의의 인간, 최후의 인간이 허무주의의 극단에 도달하면 이제 그는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파괴하고자 한다. 이 적극적 파괴는 무의 의지의 변환의 지점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완성된 허무주의=전환의 지점. 허무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곧 허무주의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파괴는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 사이의 동맹이 결렬될 때 후자가 개종하고, 긍정의 편으로 가면서 반응적 힘들 자체를 파괴하는 ‘긍정하는 힘’과 관계 맺는 순간에 적극적이 된다. 파괴는 부정이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되고, 개종됨에 따라 적극적이 된다.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생성의 영원한 기쁨’, ‘무화의 기쁨’, ‘무화와 파괴의 긍정’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철학의 결정적 지점이다.

 

10 가치전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권력의지 속의 성질의 변화. 가치들의 가치는 더 이상 부정이 아니라 긍정에서 파생된다. ②권력의지 속에서 ‘인식 이유’의 ‘존재 이유’로의 이행. ③권력의지 속에서의 요소의 개종. ④권력의지 속에서의 긍정의 군림. 긍정만이 독립적인 힘으로 존속한다. ⑤알려진 가치들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가치들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11 긍정과 부정의 관계: 긍정과 부정은 권력의지의 두 성질, 권력의지 속의 두 이유로서 서로 대립한다. 한편 부정과 긍정은 원인과 결과로서 이어져 있기도 하다. “자기 자신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직접적으로 뒤따르지 않는 긍정은 없다.” 마찬가지로 긍정이 뒤따르지 않는 부정도 없다. 부정은 긍정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가 서로의 직접적인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례로 나귀의 경우를 보자. 나귀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긍정할 수도 없다. 나귀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욕이 없다. 나귀의 긍정은 거짓된 긍정일 뿐이다. 긍정이 아니라, ‘무거움을 견디고 감당하는 것’일 뿐이다. 짊어지기에 무거운 것이 원래 삶이기라도 한 듯이 나귀는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현실을 예찬한다. 인간 역시 신을 대신하면서 모든 가치들을 스스로 짊어진다. 국가든 교회든 모든 것들을 자신의 등 위에 올려둔다. 모든 도덕에 대한 수락. 무게가 나가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긍정이고, 모든 것이 현실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의, 복종, 수락, 자족, 인내로서의 긍정. 나귀의 긍정은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키고, 삶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삶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러한 나귀의 거짓된 긍정은 곧 인간을 보존하는 방식에 속한다.

 

세계는 참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살아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계는 권력의지이며, 다양한 힘들 아래서 실현되는 거짓의 의지이다. 어떤 힘 아래서든지 거짓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항상 평가하는 것이다. 사는 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사유 세계의 진리도, 감각 세계의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진리, 현실 자체는 평가로서만, 말하자면 거짓말로서만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의 모든 평가들, 그 평가하는 힘에 깃들어있던 의지는 삶을 삶에 대립시키고 삶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게 만든 “권력의지의 성질로서의 부정”의 의지였다. 평가하는 힘들이 이제까지는 부정의 의지에 봉사해왔던 것. 그러나 삶이 긍정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거짓의 고귀한 힘, 바로 긍정으로서의 권력의지이다. 긍정도 물론 평가다. 그러나 이 평가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은 존재의 짐을 떠맡거나 현실에 책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해방시키고 짐을 더는 것이다.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긍정은 삶을 가볍고 경쾌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부재하다. 인간은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지점에서 부정을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킨다. 한마디로 인간은 극적인 전환까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긍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중의 긍정=디오니소스의 긍정)은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니체의 긍정은 ①진리나 현실이 아니고 평가(관점주의적 해석)이며, ②수락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창조로서의 긍정이며, ③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로서의 초인이다. 

 

12 긍정의 본질은 차이이다. 부정이 대립의 고통이자 노동이라면, 긍정은 차이와 향유의 놀이이다. 긍정은 처음에 다수, 생성, 우연으로 상정된다. 다수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차이이고, 생성은 자신과의 차이이며, 우연은 모두의 사이에서의 차이 혹은 분배적 차이이다.

 

13 영원회귀는 부정의 회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원회귀는 존재가 ‘선별’임을 의미한다. 긍정하거나 긍정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재생산’이면서 ‘적극적 생성의 생산’이다. 어떤 것도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생성. 차이야말로 순수긍정이다. 니체는 차이를 부정하고 차이를 의식의 불행으로 만들며 우연을 제거하려는 모든 철학적 신비화를 비판한다. 차이는 행복이며, 우연은 기쁨의 대상이고, 그 기쁨은 ‘되돌아온다는 것’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에 통용되던 모든 가치들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반응적 인간을 넘어선다. 그는 최후의 인간(=반응적 생성의 최후의 산물, 반응적 인간이 의욕하기에 지쳐서 자신을 보존하는 최후의 방식) 또한 넘어선다. 그는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이며 몰락하길 원하는 인간이며 극복되길 원하는 인간이다. 그는 긍정이며, 인간을 멸망하고 몰락하기를 원하는 적극적 존재로 만드는 힘으로서 긍정의 정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영원회귀와 초인과 관련해서는 아직 열등한 위치를 갖는다. 영원회귀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 소식을 전달하길 주저하는 선지자다. 초인의 아버지이며, 최후의 변신이 부족한 사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은 아직 가장 심오한 긍정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결심’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의 결심은 다른 본성에 속한다.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의 계보는 일치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주사위놀이는 저속함을 고귀함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춤은 생성과 존재의 생성을 긍정하고, 웃음과 폭소는 다수와 다수의 하나를 긍정하며,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긍정한다. 존재론으로서의 디오니소스와 윤리론으로서의 차라투스트라. 전환의 지점에 있는 차라투스트라와 긍정을 긍정하는 이중의 긍정 속에 있는 디오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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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하이데거 How To Read 시리즈
마크 A. 래톨 지음, 권순홍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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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치 정권에 부역했을까. 이 책은 하이데거 철학 전반을 쉽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치 정권에 협력하게 된 사정에 대해 잠깐 나오기는 한다.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해서 활동할 당시 하이데거는 기독교 세계가 출현하기 위해 예수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듯이 "새로운 세계를 개현하기 위해 본질적인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또한 "나치즘이 독일을 현대주의에서 구출하고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들을 활짝 열어주는 등 기존하는 세계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고 보았다"고. 그러니까 왜?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석연치 않은 설명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강력한 신념 속에서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독일 지식인들의 그 정교했을(?) 내적 논리에 대해 분석해놓은 책을 한 번 찾아 읽어보고 싶다. 인간이, 특히나 명철한 사고력을 자랑하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그토록 정교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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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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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한 에피타이저. 책을 통해 로마 천년의 비결을 꼽아보면, 정치 조직 운영에 있어서의 합리성과 유연성, 점령지 정책에 있어서의 포용력과 개방성,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런데 개방성이란 것도 추진하는 쪽이 호방한 대인배 마인드여야 가능한 정책 기조가 아닌가, 비록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번영의 비결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경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로 로마인의 태도나 기질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 책임의식, 니체가 그토록 칭송한 귀족(주인)정신 등등.

예전에 조선의 역사를 유심히 들여다봤을 때도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제 유지 동력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소위 선비정신 내지는 사대부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지점이었다. 일신의 안녕이나 개인의 영달보다 유교 이념이 중시하는 고결한 가치를 우선시 하는 마음. 그런 어떤 완고한 윤리준칙 속에서 빛나는 기개. 나라가 오래 가려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 경제를 선도하는 상위 계층의 의식 수준이, 정신 상태가, 삶의 철학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지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런건 당연하게도 어떻게 가르친다고 해서 습득하거나 강화되는 정신의 영역도 아니고. 가정 환경처럼 그저 어려서부터 무의식적으로 집안 공기와 함께 자연히 흡수되는 문화의 한 부분일 뿐. 국민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에 있어서도 정신의 스케일, 깊이, 품격, 기품 이런 것들은 학습할 수가 없다. 그저 우러나올 따름이지. 감탄하기는 쉬워도 모방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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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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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응적인 힘들은 작용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지체시키며 방해한다. 반대로 적극적인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적극적 유형은 오로지 적극적 힘들만을 포함한 어떤 유형이 아니다.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으로 영향 받고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그런 반응적 힘들을 포함하는 관계임. 즉, 적극적인 유형은 힘들이 서로 경합하며 거침없이 분출하는 역동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표현한다. 원한은 이런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원한은, 작용하는 힘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영향 받길 중단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반응적인 힘이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 방식이다. 원한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어떻게 해서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가. 그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가.

 

2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흥분을 수용하는 체계가 있고 또 한편으로 흥분을 항구적인 흔적(=기억, 추억)으로 변화시키는 체계가 있다. 전자가 의식에, 후자가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는 이를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로 본다. 후자 즉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응적 무의식은 마치 생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고착시키고 흔적에 집중한다. 전자 즉 반응적 의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향 받고 학습하고 습득하고 훈련 받는, 말하자면 적극적인 반작용을 수행하는 영역이다. 반응적 의식이 가진 적극적인 능력은 바로 망각 능력이다. 망각의 능력이야말로 제동력이고 완화 장치이며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망각 능력=건강한 생체대사능력.

 

망각능력이 쇠약해지면 즉 완화장치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슷해진다. 이때 흔적들에 대한 대응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에 침투한다. 흔적들에 대한 반작용은 이제 (의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됨과 동시에 흥분에 대한 반작용은 영향받길 중단한다. 반작용을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적극적인 힘들은 실행의 물리적 조건을 잃고, 그것들의 활동을 실행할 조건을 더 이상 갖지 못하며,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 (아팠던 기억, 비난당했던 기억, 위험했던 기억, 맞았던 기억 등등 안 좋은 기억이 나면 순간 움츠러들면서 할 수 있는데도 더 이상 안 하게 됨. 반응하기를 단념하게 됨.) 흔적이 반응적 장치 속에서 흥분을 대신한다.

 

그런데 의식을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라는 이러한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의 그것보다 더 큰 하나의 힘을 형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힘들을 전염시키고 감염시켜서 그것들의 힘을 빼앗고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승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한의 정의를 재발견한다. 원한은 느껴질 수 있음과 동시에 영향 받길 중단하는 반작용이다. 원한은 질병이며 사실 모든 질병이 원한의 한 형태이다. 더 이상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혼자 누워서 속으로 끙끙 앓으며 참고 삭이면서 이만 갈고 있는 상태.

 

3 흔적들의 기억에 의한 의식의 침투, 기억의 의식 자체로의 상승. 의식으로 침투하는 기억의 장소 이동. 반응적 힘들의 이동. 이것이 원한의 일차적 모습이자 원한의 위상학적 측면이다. 원한은 그 다음으로 유형학적 측면을 보인다. 장소를 이동한 다음 어떤 하나의 유형(원한의 인간이 보여주는 가치 전복, 힘들의 관계의 전복)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형의 주된 징후는 놀랄 만한 기억력이다. 어떤 것을 잊는 데 있어서의 그 무능력.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그 무능력.

 

건강한 인간에게 흥분이 될 만한 모든 자극들이 원한의 인간에게 다가오는 순간 신속하게 얼어붙는다. 의식의 경직, 경화. 반응 불가능. 오로지 흔적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극적 대상에게로 전가시킨다. 대상이 주는 흥분에서 흔적들을 제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원한의 인간이 행하는 복수는 그것이 실현될 때조차 그 원리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4 원한의 인간은 악의가 아니라 적의를 갖는다. 적의=경멸하는 능력. (니체는 악의를 건강한 것으로 봄. 강자적인 것으로 봄. 거침없이 무구하고 천진하고 잔혹하고 공격적인, 그래서 건강한 악의.) 그는 친구도, 적도, 불행도, 불행의 원인도, 그 어떤 것도 찬미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에 건강한 악의를 갖는 강자는 어떠한가. 그는 상대에 대하여 정면 대결에의 의지를 갖는다. 싸움의 상대로 기꺼이 대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적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원한의 인간은 존중해야 할 모든 대상을 비난하고 비하할 뿐이다.

 

원한의 인간은 정면 대결할 힘도 의지도 없다. 무반응한 채 속으로만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한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평화로운 휴식의 상태에 잠긴다. 정신과 신체의 느슨한 마비상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제공되고 쓰다듬어지고 잠재워지기를 원한다. 그는 앓아누운 병자다. 기획할 능력, 맞서 싸우고 대결할 능력, 적극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 받기만을 원한다. 그는 누워서 그저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 만인에게 민주적으로 골고루 이득이 분배되기를. 그런 점에서 원한의 인간들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실리의 도덕.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두에게 고루 이득이 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 된다.

 

5 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너는 나와는 좀 다르구나) 그러므로 너는 안 좋다. 노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악하다. (난 그렇지 않은데)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강자는 자신의 좋음을 자각하기 위해 비교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스스로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는 사물들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들을 창조함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충만의 감정, 넘치고자 하는 힘의 감정 속에 있다. 그는 헌신하고자 한다. 주고자 한다. 왜? 자기 스스로 힘이 넘치기 때문에. 강자가 ‘너는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부차적 결론일 따름이다.

 

강자와 달리 노예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전제해야만 겨우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 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노예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쁘다(첫 번째 부정). 나는 너처럼 나쁘지 않다(두 번째 부정). 고로 나는 착하다. 이것이 노예의 기이한 삼단논법임. 노예의 기이한 가치 창조.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악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는 자이다. 자신의 행동이 제3자들에게 초래할 파괴적 결과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선한 자는?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관점에, 그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관점에 결부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좋음과 나쁨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판단으로 대체된다.

 

6 원한의 오류추리는 힘과 행동이 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허구에 근거한다. 가령, 번개란 곧 치는 것인데 ‘번개가 친다’고 표현한다. 번개가 안 칠 수도 있었는데 친다는 것인가? 의미의 실제 관계를 인과성의 가상의 관계로 대체하는 이러한 허구적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위해서보다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추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까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주체와 분리시키고 중립화시킨 힘을 약자는 더 나아가 도덕화시킨다. 좋음과 나쁨, 우월함과 저열함이라는 힘들의 성질의 차이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립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7 원한의 일차적 단계 즉 위상학적 단계에서 아직 원한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그렇다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이러한 상태를 질료로 하여 누가 원한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가치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원한의 구체적 형태를 창작해내는 위대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제다. 유태교에 있어서의 주인인 그는 노예에게 반응적 삼단 논법에 대한 생각을 제공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사랑을 고안해낸다. 불행한 자들, 가난하고 무능한 자들,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 선량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제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조장해나가는데, 실상 그가 지닌 권력의지는 바로 허무주의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가 반응적 힘들을 필요로 한다는 근본 명제를 발견하지만,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로 이끈다는 그것의 역 또한 발견한다. (15에서 이 이야기가 또 나옴)

 

8 사제가 창작해낸 허구에 의해 적극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이제 적극적 힘은 반응적으로 전락한다. 출구를 갖지 못한 힘이 내재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책의 기원이다. 한때 강자였던 자들은 반응적 인간들이 퍼붓는 비난을 내재화하면서 더 이상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고통을 생산한다. 고통과 불행에 빠져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이러한 상태야말로 원한의 인간이 결정적으로 승리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가책은 고통의 동력이며 기폭제다. 이제 이 새로운 노예들은 자발적으로 끔찍한 고행을 단행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고통은 이제 구원의 수단이 되고, 이들은 고통에서 회복되기 위해(구원받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한다.

 

9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새로운 내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고통은 원죄의 결과인 것이다. 가책의 첫 번째 측면이 앞서 보았듯 적극적 힘의 내재화로 인한 고통의 생산이라면, 두 번째 측면은 바로 고통의 내재화, 원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현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사 이래 강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늘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통은 누군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전쟁은 신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그들은 고통을 언제나 그것을 가하는 입장에서 사유했다. 고통은 삶의 흥분제이며 삶을 위한 미끼인 것이며 삶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하고 난 이후로 사람들은 이제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유한다. 고통은 괴롭고 끔찍한 것이며, 현존은 고통으로 인해 절하된다.

 

10 사람들에게 고통이 원죄의 결과라고 적극적으로 인식시키는 자가 바로 사제다. 원죄 개념을 고안함으로써 고통의 내재화를 주재하는 사제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가책이 원한을 계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원한과 가책 각각 위상학적이고 유형학적인 계기들을 갖고 있으며,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이행할 때 사제라는 인물이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이 사제는 항상 허구를 창작해내어 가치 전복을 이루어낸다는 점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책 속에서 원한의 방향전환, 즉 고통의 내재화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현상과 얽혀있기 때문에 한결 복잡하다. 고통이 원죄의 결과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런 생각이 단지 사제가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통의 기원을 역사적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것과 만나게 된다. 이제 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11 문화는 고문을 비롯한 잔혹한 훈련을 통해 폭력 속에서 탄생한다. 문화가 융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법에 복종한다. 복종에서 우리는 반응적인 힘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반드시 반응적인 힘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라는 것은 또한 어떤 적극적인 힘이 인간에게서 발휘될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을 처벌하고 복종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훈육하여 주권자적 인간으로, 자율적인 개인으로 양성해내는 법의 양면성.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사적 활동,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다. 문화는 인간에게 습관을 제공하고, 인간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킨다. 또한 문화는 인간에게 기억을 부여한다. 여기서의 기억이란 인간을 소화불량으로 만드는 흔적의 기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들의 기억을 말한다. 문화는 인간에게 약속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것을 실행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약속함으로서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인간만이 적극적이다. 약속하는 능력이야말로 문화의 효과다.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는 어떻게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육성해 내는가. 인간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렇게 만들어낸다. ‘고통’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정확한 등가물이다. 약속을 까먹음으로써 야기된 손실=감내한 고통. 인간관계의 기원은 교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원시적인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채권-채무의 관계였다. 니체는 교환 속에서가 아니라 신용 속에서 사회조직의 원형을 본다.

 

12 채무자는 약속을 망각해서 생겨난 부채를 체벌의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벗어난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거기서 쾌감을 느낌으로써 피해를 보상받는다. 이걸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 바로 문화가 구현하는 ‘정의’이다. 잘못했으면 맞는다, 가해자가 맞는 걸 즐겁게 지켜보면서 피해자는 보상받는다, 이로써 채무관계는 깨끗하게 해소되고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해방된다. 채무관계가 해소되는 이러한 과정 어디에도 복수나 원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정의는 결코 복수나 원한을 그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타와 체벌이라는 문화적 훈련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주권자인 개인, 자율적이고 초-도덕적인 개인, 더 이상 부채를 만들지 않는 인간, 책임이 없는 자, 자유로운 자, 가벼운 자, 주인이 된다.

 

13 그러나 인류 역사는 열등하고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해온 역사였고 결국 문화는 퇴행하고 말았다. 인간은 주권자 개인이 아니라 군서동물, 순종적이고 병적이며 하찮은 존재, 오늘날의 유럽인이 되었다. 문화는 반응적 삶을 보존하고 조직하고 파급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교회, 국가를 비롯한 규율권력이 인간을 반응적으로 만들었다.

 

14 반응적인 인간들은 국가, 신, 조상 등 모든 위대하고 신성한 것들에 대해 영원히 갚을 길 없는 깊은 채무감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채무자의 자기학대가 너무나 극심해져서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도달한 것. 이렇게 부채는 그것이 인간의 해방에 참여했던 적극적인 특성들을 상실하고 변형된다.

 

이를테면 기독교가 대속이라 부르는 것을 보라. 더 이상 부채에서의 해방이 문제가 아니라, 부채의 심화가 문제다. 부채를 갚느라 치르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다. 고통이 내재화되고 채무-책임성이 죄의식-책임성이 되면서 이제 고통은 부채의 이자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갚지 못한다. 적당히 고통 받고 해방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해방되지가 않음. 해방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종속으로서의 고통. 영원한 죄인이 됨.

 

내재화된 고통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못 견디고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사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어수단 또한 고안해낸다. 신에 대한 봉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함으로써 반응적 인간들로 하여금 소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15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이나 가책과는 관계가 없다.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 강자들의 종교가 있음을 말한다. 문제는 어떤 힘들이 종교를 독점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힘들이, 누가 종교를 탈취하는가. 가령 예수라는 개인적 유형을 보자면 그는 원한의 인간도 가책의 인간도 아니었다. 기독교의 진정한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성 바울이었다.

 

성 바울 같은 사제들이 금욕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낸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로써 고통을 근근이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든다. 반응적 인간은 이제 천국이라는 금욕적 이상 세계를 꿈꾸며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고 세계에 무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반응적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원한+가책+금욕적 이상이라는 삼단 복합체의 수립으로 마침내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완성되는데, 바로 이것이 사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반응적 힘들의 승리에는 무의 의지가 하나의 동력으로서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16 이와 같이 니체는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낡은 형이상학과 초월적 비판을 대체하는 권력의지의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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