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후기 차례가 아니긴 한데 그냥 또 몇 자 적어보고 싶어서 게시판도 활성화 시킬 겸^^ㅋㅋ 글 남겨 봅니다. 오늘 세미나 때 제 현재 정신 상태(?)를 임상 사례로 소개한다는 게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일단 말을 꺼내놓고 나니까 오히려 선생님들께 조언도 얻게 되고 저로서는 멋쩍으면서도 감사한 시간이었네요.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일이란, 자본 권력의 전략에 일방적으로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대타자의 욕망을 나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며, 자기 소외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꿈꾸고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일 테죠. 이렇게 인문학이 주체로 하여금 환상을 가로지르도록, 그래서 증상을 재배치하도록 도와주는 분석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바람직한 역할일 거구요.

근데 세미나 도중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 같은 경우에는 한편으로 인문학이 분석가가 아니라 대상a의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계속 아니라고 하는데도 제가 환상횡단을 자기계발 사례와 연관시켜볼 수 있다고 고집했던 건, 제 자신이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는 어떤 자괴감 때문이기도 했던 거 같아요.

저는 어쩌면 저에게 부여된 직업인라는 사회적 기표를 신경증적으로 자꾸만 거부하면서, 그러니까 사회적 책임감을 지닌 성숙한 어른이 되길 자꾸만 미루면서, ‘나 <> 라캉’, 혹은 ‘나 <> 인문학’과 같은 병리적인 환상의 구조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에게 요구되는 주체의 윤리란, "어쩌다 보니까 인문학이 몹시 재밌더라구. 나를 변화시키는 이 공부를 계속 하고 싶더라구"라는 언술로부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직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타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지겨워서 어떻게든 알리바이를 만들어서 도망쳐 보고자 일종의 현실도피로서 인문학에 빠져들었던 거였어"라는 언술로 옮겨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인문학이 분석가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대상a에 불과한지는 지금으로서는 명확히 알 수가 없겠죠. 제가 추구해야 할 환상횡단이 '인문학을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고 자유를 상상하는 일'인지, 아니면 '인문학을 탐했던 게 지적 허영심에 의한 현실도피였다고 뼈아프게 시인하는 일'인지도 마찬가지로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겠고요. 우리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언제나 의미는 사후에 소급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니까 한 십 년쯤 지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알 수가 있을까요. 그렇담 십년 쯤 지난 뒤에 저는 오늘 세미나를 어떻게 회상하게 될까요. 주말마다 인문학 공부를 하러 다녔던 삼십대 초반의 저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요. 궁금한 일입니다.

무엇을 환상횡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저의 물음에 오늘 M선생님이 '전제'가 중요한 것 같다고 하셨죠. '내가 무엇을 진심으로 욕망하고 있는가', '나의 진정한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전제가 된다고요. 이 글 적는 중에도 계속 선생님 말씀을 곱씹어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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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7-01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 년이 지나 이 글을 다시 읽는다. 이제는 확실히 '나의 진정한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 스스로 잘 알겠다. 모 아니면 도가 아니라, 나는 실은 둘 다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유능함과 인문학적 세계의 향유- 이 두 가지 모두를. 집중력과 밸런스가 필요할 것이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철학의 정원 7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김동규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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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을 읽다보니 현상학이란 걸 간략하게라도 짚고 가야할 것 같아 이 책까지 흘러오게 되었지만 철학적 용어들의 섬세한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질 못해서 어설프게 읽었다. 가령 본질이라는 낱말이 철학적 텍스트 안에서 쓰일 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보다 엄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철학용어사전을 읽어본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일거에 습득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 같고. 좋은 책인 줄은 알겠으나 엉터리로 읽은 것 같아 아쉽다.

 

일단 중요하게 생각되는 지점은 저자가 후설이 철학자이기 전에 수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학자는 이념적 가치나 본질을 조작한다. 이념적 가치나 본질이 사실적 실재성에 상응하는가 하는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말이다."(35) 왜 라캉이 그토록 줄기차게 각종 기호를 동원해 수학 공식과 같은 표현을 고안해 냄으로써 "수학적 절차를 확장"(세미나 21)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념적 본질'이란 무엇일까. 수학자가 창안하는 이념적 본질이란 아마도 연산 법칙이나 함수 공식 같은 것일 게다. 게임을 ‘현상’하게 하는 룰도 마찬가지로 게임의 ‘이념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섣불리 연결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와 유사한 철학적 개념들을 열거해 보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자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 라캉 식으로 말하면 언어적인 질서로 이루어진 상징계, 이데올로기, 푸코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선험 조건 등등 이런 성질의 것들을 후설이 말하는 '이념적 본질'과 유사한 개념(혹은 후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개념)으로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상학은 실재성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념적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현상학은 잠정적으로 경험에 침묵을 고하고, 그 주의를 오로지 단순하게 의식 안에서의 현실성, 요컨대 후설이 이념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식을 통하여, 그리고 의식 안에서 지향되는 한에서의 대상으로 그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상적 실재성이나 실재적 내용의 문제를 제쳐두는 것이다."(35) 이렇게 현상학은 실재성을 '제쳐두고' 의식 안에서 그 자신을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현상들만을 주목한다.  

 

한데 그렇게 되면 현상학은 독아론(집단적 독아론?)으로 빠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현상학이 탐구하는 ‘이념적 본질’이 심리학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주관적 표상들도 아니고, 의식에 주어진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실체화시킨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념적] 본질은 이념적 현실성이나 심리학적 현실성이 아니라 이념적 지향, 의식의 지향적 대상, 의식에 내재하는 것이다."(36) 이 부분은 뭔가 나로서는 선명하게 이해가 되질 않지만, 아무튼 심리학으로도 형이상학으로도 전락하지 않는 방법론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 칭하고 있다.

 

현상학적으로 환원된 세계에서 실재성은 의식에 내재한다. "환원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는 그 사실이나 현존의 실재성(이것은 괄호로 묶인다)에서가 아닌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관계한다." 우리는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로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파악되는 세계, 즉 환원 이후 남겨진 현상으로서의 세계란, "이러저러한 지식의 영역 속에 있는 사실이나 '실재적'인 것", "우리가 자연적 태도로 세계에 대해 나타내는 경험적 판단", "이성적이고 그 자체로 과학적인 판단의 세계" 및 그 총체로서의 세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의식과 세계의 본질적인 지향적 연결"(39)을 말한다. "사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이고 일차적인 항, 그 의미의 지지대 내지는 정초로서의 주체"는 세계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작용의 일차적 항으로서 자아가 근본적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분절이 불가능한, 라캉의 용어로 하면 상상계적 상태 같은. 따라서 후설의 사유에서의 자아는 데카르트적 자아와는 다른 위상에 놓이게 된다. 데카르트적 자아보다 좀 더 상호적이고 동태적인 자아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막연하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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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zendental 2013-03-24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이념적 본질은 '노에시스' 작용으로 구성된 '노에마'일텐데요, 현상학계 내부에서도 노에마가 대상이지, 의미인지 그 지위가 불분명하여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노에마는 칸트의 사물도 아니구요, 그렇다고 심리학적, 주관적 표상도 아닌 것인데, 사태적으로 이해하면 황금산은 사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념적 현실성은 결여하지만 이념적 본질은 가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상학이 애매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쓰신대로 의식에 나타나는 이념적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점도 있지만, 그 이념적 본질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사물자체에서부터 출발하기도 하거든요. 전자를 정적, 후자를 발생적 현상학이라 부르구요.
현상학은 피에르테브나즈처럼 인식론으로 이해하거나,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적으로 보기보다 리쾨르처럼 하나의 철학적 기술론, 방법론으로 보는게 지금은 더 의미있는 것 것 같아요. 영미철학 전통과 대비되는 사태 자체에 대한 기술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으로 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양 2013-03-25 14:39   좋아요 0 | URL
아... 어둔 밤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ㅠ_ㅠ 후설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접근법이 있다는 것도, 철학자들이 이렇게나 깊고 촘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고 신기합니다. 사유의 시원으로의 후설을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Transzendental 2013-03-25 17: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저야말로 현상학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 있는 존재랍니다. 후설 글은 또 얼마나 난삽한지요. 어떤 분에게 후설 글이 안 읽힌다고 했더니 그 분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후설의 언어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탓'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의 언어 세계는 도대체 입구가 어딘지,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지도 교수님께서는 모든 철학자들의 고향이 후설이라 후대의 철학자들이 하는 말도 전부 후설이 한 말이라고 하시더라요. 그것이 얼마나 타당하지는 전공자인 저도 모르겠지만 후설이 어떤 수원지가 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듯 합니다.

수양 2013-03-2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인 제가 까막눈으로 피상적으로나마 가늠해 보기에도 뭔가 격이 다르신 분 같아요^^; 데카르트 급 아우라가 느껴져요...-ㅇ-;;; 그래서 평생 미로 속에서 헤매이시더라도 아름다운 구속일 거 같은데요 하하
 

현상학에서 더 나아간 논리철학자들은 실재에 괄호를 쳐버리고 오로지 논증 가능한 언어의 의미 속에서만 진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언어의 회로 속에서만 운신하겠다는 그런 태도야말로 철학적 소극주의가 아닐까. 새벽까지 우리의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건 미지의 실재다. 그것은 마치 신발 뒷굽에 달라붙은 껌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붙잡고 끝내 놓아주질 않는 것이다.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예술적 성취의 적지 않은 부분은 실재에의 예감과 그에 대한 직관적 상상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창조와 영감의 원천이 되는 궁극의 관심사에 괄호를 쳐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결벽을 가장한 철학의 자기억압인지도 모른다. 자신 없는 보류이며 딴청 피우기인지도. 결국 인간은 다시 또 그 괄호의 내용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침묵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눈짓과 몸짓, 탄성과 비명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체험한 것에 대해서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말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던 함민복 시인의 말처럼 어딘가에 분명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긴장 속에서 조우하는 찬란한 점이지대가 있을 것 같다. 세 영역 모두를 아우르는 경이로운 인식의 접점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비록 철학의 영역 안에서는 변방에 해당하더라도) 인간의 기나긴 탐구의 여정이 당도해야 할 궁극의 장소는 거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기호학에서 출발한 라캉이 후기에 이르러 기호 세계 너머의 실재를 주목하게 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더라도, 하여 망설이며 우물거릴지언정 우리는 이마에 손그늘을 드리운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영원히 그곳을 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카로스처럼 우스꽝스럽게 추락할 지라도 우리는 결국. 하지만 각설은 이쯤에서 관두자. 정작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이렇게 딴생각만 모락모락 피워내는 게 이카로스보다 더 가엾은 일인가 싶으니. 어설프게 이해한 걸 가지고 썰을 푸는 이런 짓이야말로 얼치기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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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 Nevermind [2CD][Deluxe Album] - Nevermind 20주년기념앨범
너바나 (Nirvana)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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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우리 문단에서 아주 우수한 업적을 남긴 작가들 몇 명을 보면, 저 사람은 절대로 시인은 못 되겠구나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체질적으로 그래요. 그건 약점이 아니에요. 그러나 시인은 안 돼요. 농담 섞어서 얘기하자면 하여튼 시인은 조미료 근처에도 가면 안 돼. 조미료 치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런데 소설가는 그 유혹에 잘 넘어가요, 사실은. 한국 소설이 제일 느끼하게 느껴질 때가 바로 그런 미원 같은 맛이 날 때예요.

 

프랑스 소설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부분은 누보로망 덕분에 조미료 제거 작업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는 점이죠. 누보로망의 공로는 그들의 실제 작품 이상으로 문학사적 청소를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문학평론이나 산문을 쓰니까 형용사도 쓰고 그러지만,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형용사가 적은 소설, 어떤 사물이 여기 있다고 서술하는 투명한 작품들이에요. 카뮈의 <이방인>이 좋은 예죠. 시도 좀 그렇지만. 그래서 소설가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사람은 그런 거 잘 안 쓰잖아요. 먼 길 가는 사람이 그런 장식 할 틈이 어디 있어요."

 

세계문학 100호 기념 대담집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에서 김화영 번역가가 이런 얘길 한다. 너바나도 그렇게 들린다. 조미료 빠진 이방인처럼. 시처럼. 하지만 패시미즘에서 발로한 분노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고, 커트 코베인은 그 사실을 너무나 정직하게 자살로서 증명해버렸다. 그는 심해에서 좌초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좌초라는 사건에 대해 죽음으로써 충실했던 것이다. 자기답기 위해 자기를 버려버리는 이런 식의 극단성을 락덕후들 표현대로 순교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순교라는 사후적인 평가에는 뭔가 낭만적인 뉘앙스가 풍기는데 그것 자체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을 왜곡하는 표현 같기도 하다. 그는 낭만적이었던 게 아니라 지나치게 '리얼리즘'적이어서 자살한 거니까 말이다. 무심하리만치 차갑고 건조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리얼리즘이 문득 오싹하게마저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건, 기만적으로나마 심해를 건너게 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 느끼한 조미료의 힘, 낭만적 허위의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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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3-03-2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배인 형님은 자살이 아니라구요~!!!!(라는 음모론의 신봉자입니다 ㅎㅎ-_-v)

수양 2013-03-21 19:15   좋아요 0 | URL
하하 살아 계신거죠^^;;
 
젊음의 코드, 록 Art@Culture(북하우스) 3
임진모 지음 / 북하우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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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부적인 음반 소개 보다는 힙합에서 테크노까지 아우르며 대중음악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록적인 것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 대중음악의 식민주의 역사(?)를 구구절절 확인하게 된다는 점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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