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꾸미기 미학과 페미니즘
김주현 지음 / 책세상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어떻게 꾸미고 다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입을 옷을 선택하는 순간이야말로 이데올로기가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현장이며, 패션지를 보고 시도해본 새로운 화장 기법 역시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다. 이 책에서는 여성의 외모 꾸미기와 관련한 페미니즘적 전략으로서 '미적 금욕주의'와 '도취적 나르시시즘'을 언급하며 양자를 차례로 비판하고 있는데, 중성인간 혹은 명예남성을 자처하는 전자의 방식에 대해서는 자신의 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자기혐오의 정서와 그것이 보여주는 기형성과 인위성에 본능적으로 미적 거부감을 느끼며 애당초 관심도 없었지만, 후자의 방식 즉 도취적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동안 꽤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던 터라 자못 의외였다.

 

왜 나는 도취적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던가. 아니, 그 전에 먼저 외모 꾸미기와 관련한 페미니즘적 전략으로서 도취적 나르시시즘이란 무엇인가. 도취적 나르시시즘은 “전통적인 여성미를 여성의 긍정적 미덕으로 간주하여 이를 정교화하고 강화하려는 전략”이다. 도취적 나르시시즘은 가부장제의 해체를 겨냥하는 대신 가부장제를 ‘활용’한다. 즉 “도취적 나르시시즘은 여성, 신체, 미적 대상화를 본질적으로 연결하여 이를 여성들의 긍정적인 미적 자산으로” 삼는다. “도취적 나르시시즘 미학의 목적은 여성의 매력적인 외모를 통해 남성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므로 여성의 관능성을 의도적으로 최대한 노출”하기도 한다.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매력 자본을 적극적으로 계발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미학적 태도를 긍정적으로 여겼던 연유는, 가히 가부장적 춤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탱고, 그 탱고를 추는 탱고판에서 대부분의 땅게라 즉 여자들이 이런 식의 팜므파탈적인 전략을 능동적으로 채택, 학습, 내면화하면서 독립성과 주체성을 지닌 영리한 땅게라(아름다운 꽃뱀?)로 성장해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의 미학적 태도가 ‘패권적 페미니즘’의 한계를 극복한, 수정주의적인, 일진보한 페미니즘적 실천이라 나름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응시의 주체’만이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응시의 대상’도 권력을 가질 수 있고,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 역시 주체적 능력이고 권력이며, 보여지는 대상 역시 보여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페미니즘 문화이론가 앤 체트코비치의 견해(182)는, 외모 권력을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그 권력 효과를 충실히 향유하고 있는 탱고판의 땅게라들이라면 이미 누구나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도취적 나르시시즘이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체미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미적 권리를 발현하는 페미니즘적 외모 꾸미기 미학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도취적 나르시시즘이 결과적으로 산출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지각적으로 가부장제 여성 이미지와 일치하며 가부장제의 전제들에 의존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모순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도취적 나르시시즘을 페미니즘 미학으로 채택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외모 차별주의를 지지하게 만든다. 도취적 나르시시즘은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은 남성들로부터 더 많이 대상화될 것이고, 더 많은 대상화는 그 여성에게 더 많은 권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름다운 여성은 그 보상으로 가부장제가 제공하는 안락함을 확보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은 더 많은 억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따라서 도취적 나르시시즘은 여성들 간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p.198

 

“도취적 나르시시즘 미학에서는 여성이 지닌 미가 그 여성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부장제의 미학은 여성의 미를 영원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미란, 젊고 날씬한 여성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성은 늙고 그녀의 몸도 늙는다. 운동, 다이어트, 성형, 화장, 패션 같은 어떠한 미적 고안물들을 동원해도 가부장제 미적 이상이 고정되어 있다면, 여성들에게 주어진 미적 압력, 곧 ‘아름다울 것’을 영원히, 완벽하게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취적 나르시시즘의 미학을 통해 가부장제의 권력을 나눠가졌던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미적 투쟁의 한시적인 승리자에 불과하다.” -p.193

 

“도취적 나르시시즘을 통한 성별 지배의 역전은 아름다운 외모를 통해 누군가(남성들)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부장제”일 뿐이며, “가부장제 권력 관계 그 자체를 해체하는 데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여성들의 외모 꾸미기는 가부장제 권력 관계에 공모하는 외모 권력의 추구로 그치게 된다”는 저자의 언급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도취적 나르시시즘과 같은 수정주의의 가장 큰 결함이 자비로운 포용 정책을 내세운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미의 이상 그 자체가 정치적(남성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따끔하기도 하다.

 

이 책 후반부에서 저자는 “페미니즘 외모 꾸미기 미학의 과제는 여성들이 가부장제가 승인한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탈가부장제적 미적 세계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부장제의 미의 이상을 벗어나 다양한 미적 가치들을 고려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일찍이 근대 낭만주의가 발견했던 '숭고'라는 미적 가치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미’가 아니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찢고 나온, 그래서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숭고미’를 구현하기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 책에서는 남성적 숭고와 대비되는 여성적 숭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거칠게 요약을 하면 여성적 숭고라는 것은 기존의 가부장적 인식 체계의 한도를 뛰어넘는 추하고 놀랍고 끔찍한 미지의 요소들과의 결합을 통해 창출되는 새로운 심미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쁘게가 아니라 숭고하게 산다는 것’은 가부장제 관점에서 보면 곧 ‘기괴한 여성되기’ 내지는 ‘기괴한 여성으로 살아가기’이다. '당혹스런', '으스스한', '비위에 거슬리는', '독특한', '음란한', '그로테스크한', '꼴불견의', '구역질나는', '변칙적인' 등으로 수식되는 기괴한 여성이 됨으로써 기존의 표상 체계에 틈새와 균열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정체성과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다시 탱고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탱고에서 땅게라가 시도해볼 수 있는 바람직한 페미니즘적 실천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일개 땅게라가 강력한 남성중심적 규칙으로 이루어진 탱고라는 춤의 속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현실과는 달리, 춤판에서 춤의 참가자가 춤 자체의 규칙을 바꾼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탱고가 구현하는 가부장 권력구조가 싫다면 탱고판을 떠나야지. 한국무용 동호회에게 가서 승무를 추든가 살풀이를 추든가 해야지. 규범의 변화가 아예 불가능한, 현실보다 더 빡빡한 탱고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게라가 새롭게 시도해볼 수 있는 '기괴하고도 당혹스럽고도 변칙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한' 페미니즘적 실천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만삭의 몸으로 춤추기? 엄청나게 섹시하게 잘 추는 백발의 할머니 되기? 여러 가지로, 창의적인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한 문제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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