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 하 - 세계의문학 18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 을유문화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1 형성

유년기: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다움의 대표적 특질인 수동성은 생물학적 여건이 아니라 사회에 의하여 강요되는 숙명이다.

 

젊은 처녀: 여성에게 있어서 청년기는 어려운 시기이다. 인간이라는 조건과 여성이라는 천직 사이에 이반(離反)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성(無性)의 어린이로서 독립하던 시절과 여성으로서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녀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될 뿐만 아니라, 주체이자 능동이자 자유이기를 바라는 그녀의 선천적 욕구와, 한편에서는 그녀에게 수동적 객체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요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타자로서밖에는 자기를 완성할 수가 없는 상황과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에 대한 딜레마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그녀는 자기가 여성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객체로 만들어 자기 자신을 객체로서 자각한다. 그렇게 자아를 이중화시킨다.

 

성의 입문: 성교는 생물학적 구조상 남성(정확히는 페니스)의 의지가 없으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에 여성은 의식 없는 상태에서조차도 성교가 가능하며 또한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도 임신이 된다. 남녀 간의 이러한 생리적 특징은 곧바로 성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과 도덕적 기준에 반영되고 여성의 성을 비하하고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비록 성교 시 여성의 역할이 그 생물학적 조건상 수동적이라 하더라도, 남성의 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이 아니듯이 여성의 수동성은 마조히즘적도 아니다. 여성 역시 자기의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애무 흥분 돌입을 자기 자신의 쾌락으로 끌어갈 수 있다. 사랑의 행복한 형태는, 연애 애정 관능 속에서 여성이 자기의 수동성을 잘 극복하여 상대방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방식이어야 한다.

 

동성애의 여성: 여성 간 동성애는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으로부터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여성이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노력의 한 양상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동성애는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고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다. 이것은 상황에 있어서 선택되는 하나의 태도, 즉 동기를 갖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태도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처럼 동성애도 그것이 허위와 나태와 비진실 속에 사느냐, 아니면 명철과 관용과 자유 속에 사느냐에 따라 희극과 불균형과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풍부한 체험의 원천이 되는 경우도 있다.

 

2 상황
기혼 부인: 전통적으로 결혼은 여자의 유일한 호구지책이며, 자신의 생활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젊은 남자는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결혼할뿐더러 그들이 결혼에서 얻는 것은 생활의 신장과 확보일 뿐 결코 생존을 위한 권리 획득은 아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하나의 생활양식이지 운명이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으로 등록된다. 젊은 처녀에게 결혼은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성이 자신만의 직업을 갖지 않고, 즉 자신의 노동을 매개로 하여 사회와 교류하지 않고, 가정의 울타리 안에 갇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채 살아가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남자는 직업이라는 사회활동을 통해서 자기 확대를 경험하고 미래를 향해 비약할 줄 안다. 반면에 아내는 미래나 세계에 직접 도전할 어떤 계기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녀가 자기를 벗어나 공동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만 남편의 중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자가 진정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자주적인 일을 가져야 한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부부 사이에 성실과 우정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두 사람이 서로 자유롭고 구체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기생하는 여자는 필연적으로 남편의 가신이 될 수밖에 없다. 부부 간의 이러한 주종구도는 불쾌한 성생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즉 남편은 의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에서 냉담해지고 아내는 자기 자신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 몸을 맡긴다는 생각에서 수치를 느끼게 된다.

 

한편, 직업을 갖지 않은 기혼여성은 세계를 단념하는 대신 가정이라는 감옥을 소왕국으로 꾸민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정은 지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몫이며, 사회적인 가치와 그녀의 가장 내면적인 진실의 표시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속에서 열심히 자기를 탐구한다. 그렇게 주거를 관리함으로써 사회적인 정당화를 얻어낸다. 그러나 가사일이란,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투쟁 속에서 끝없이 거듭되는 피로밖에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가정주부의 일 만큼 시지프스의 형벌과 비슷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여성이 가정 안에서 하는 일은 그녀에게 조금도 자주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그런 노동은 사회에는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고 있지 않으며 아무것도 새롭게 창조하지 못한다. 그저 현재를 쾌적하게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노동이 그 의미를 갖고 품위를 갖는 것은, 그것이 생산이나 행동으로 사회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생활방식과 일치될 경우이다. 그런데 가사는 주부를 해방시키기는커녕 남편이나 자식에게 종속시킨다. 그리하여 주부는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시킨다. 결국 가정에 갇힌 여자는 결코 스스로 실존을 형성해 나갈 수 없다.


어머니: 낙태옹호론. 모성신화의 허구성. 어떤 모성애는 아이를 향해 자학적인 헌신을 베풀며 삶의 모든 공허와 결핍의 충족을 아이로부터 구하려고 하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완전한 한 인격체이고, 일과 집단의 관련 속에서 자기 완성을 이루는 여자이며, 아이를 통하여 억지로 그러한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여자여야 한다. 직업 여성은 자기 자신에게 매혹되어있지 않은 덕분에 오히려 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가장 풍부한 개인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여자야말로 아기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노력과 투쟁 속에서 참된 인간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여자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     

  
사교생활: 가사노동을 통해서 가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 듯이 여자는 좋은 옷을 입는 것으로 자기의 인격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사실 여자는 하나의 물체이므로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서 그 본질적인 가치가 달라진다. 여자에게 있어서 화장을 하고 맵시를 가꾸는 일은 무기 관리, 간판 관리, 호신술 단련, 추천장 받기 같은 것과 같다. 여자의 화장은 재산이고 자본이며 투자다. 선망과 감탄의 시선을 얼마나 모을 수 있는가에 의해, 여자는 자기의 아름다움, 우아함, 취미, 요컨대 그녀 자신의 절대적인 확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멋쟁이 여자의 노력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무익한 것이므로 그녀는 늘 자기의 가치가 결정적으로 인식되기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행색과 외모에 대한 남의 말 한 마디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괴로운 종속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사교생활은 몸단장과 자기과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여자들 사이의 진정한 유대가 맺어지기는 어렵다. 사교는 여자를 고독에서 구하지 못한다. 여자들이 사교생활을 통해서 맺는 우정은 남자들의 대인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갖는다. 남자들이 사상을 통하여 자기들 사이에 각자의 기획을 개인으로서 전달한다면, 여자들은 폐쇄된 생활이라고 하는 여자의 공통된 운명 속에서 일종의 ‘피차일반’이라는 심정에 의해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그녀들은 의견을 제시하거나 의논하지 않는다. 여자가 주고받는 것은, 마음속의 비밀이나 살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일종의 반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동맹을 한다. 이러한 연대가 진정한 우정으로 지향되기 어려운 까닭은 여자끼리의 관계가 개성에 의거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여자라는 일반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와 여자는 감옥의 친구이다. 서로 힘을 합쳐서 이 감옥 생활을 조금이라도 견디기 쉽게 하고 탈출할 준비도 함께 한다. 그러나 해방자는 남성의 세계에서 올 것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저마다 남성의 세계에 눈길을 돌리고, 그 세계의 가치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여자의 관계에는 곧 적의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사교생활은 결혼생활에서 기분전환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속박을 견디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요컨대 그것은 모두가 거짓 도피법에 불과하며 그것이 여자에게 인생을 올바로 개척할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매춘부와 첩: 성행위는 아내나 창녀 모두에게 하나의 임무이다. 전자는 유일한 남자와 종신 계약을 맺고, 후자는 각각 지불해 주는 몇 사람의 손님을 갖게 된다. 전자는 한 남성에 의해 다른 모든 남자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고, 후자는 모든 남자들에 의해 각각 배타적으로 속박되어 있다. 아내와 창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좀 더 억압을 받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중된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인격으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여성 노예제도의 모든 양상이 창녀 안에 요약되어 있다. 창녀가 양산되는 사회구조에 대한 서술.

 

최근에는 첩의 형태가 영화 스타로 나타난다. 이 두 부류의 여자들은 자기의 육체뿐만 아니라 자기의 전인격을 밑천으로 생각하고 이용한다. 이런 여자들의 태도는 자기를 초월하여 숙명을 뛰어넘고 타인의 자유에 호소하며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기생은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인간의 초월에 아무 길도 개척하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여자는 일종의 독립을 획득할 수도 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지만, 결정적으로는 어느 남자의 소유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물건 팔 듯 팔아서 경제적인 자립을 확보한다. 자기 자신을 물건처럼 남자에게 맡기는 성(性)에서 출발하여 자기를 주체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자처럼 자립할 뿐 아니라 거의 남성을 상대하여 살아간다. 그녀는 가정주부보다는 현명해지기가 더 쉽다. 왜냐하면 위선 속에 싸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노년기의 여자는 손자를 키우기도 하고 직업상의 후계자를 양성하기도 하지만 그런 활동 속에서 자기의 기울어져가는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바느질 역시 마찬가지다. 늙은 여성의 바느질이란 무서운 권태를 얼버무리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다. 양손은 자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움직이고 있으나 참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무상성 속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놀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무의미하고 불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반복적인 기계노동으로 현재를 소진시키는 활동일 뿐이다. 정신이 비어있으므로 기껏해야 알리바이(부재증명)가 되는 정도다. 초라한 심심풀이. 여성은 바늘로 그날그날의 허무를 따분하게 짜고 있다.

 

한 마디로 노년의 여성은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는 여성은 이 세계에 발판을 만들기 위해 뭘 짜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권태를 달래기 위해 아무거나 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는 행동성은 반드시 내재의 허무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나마 뭘 해본다고 여성들이 자선사업이네 협회네 무슨 조직을 꾸리는 것 역시 회의적이다. 이런 조직 역시 그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기생적인 생활이 낳은 여가 활동일 뿐이다. 그녀들의 노력은 일관된 건설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소설책을 많이 사들이는 것도 이런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독서는 혼자서 트럼프 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획에 투신하고 있는 사람이 더욱 넓은 미래를 향해 행동하는 것을 도울 때 문학은 비로소 의미와 품위를 갖는다. 그러나 여자는 책이나 예술작품을 그대로 삼켜서 내재 속에 묻어버린다. 그림은 장식품이 되고 음악은 상투어가 되고 소설은 벽에 걸어둔 모자처럼 공허한 몽상이 된다. 그녀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어떤 건설적인 기획을 세울 만한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이고, 새로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기생적인 존재인 한, 그녀는 보다 나은 세계의 건설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반면, 남자에게는 생계를 잇는 일이 큰 사명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책임과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세계 속에 던져져 결심하고 착수한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과 함께 세계로부터 너무 빨리 은퇴해버린다. 그녀에게는 활동력, 신념, 희망, 분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서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의 숙명이었던 생활의 되풀이 속에 도피한다. 그녀는 반복을 하나의 체계로 삼고 가사 일이 요구하는 극기주의 속에 자랑스럽게 갇혀버리거나 혹은 점점 신앙에 몰입한다. 그리하여 진부해지고 냉담해지고 에고이스트가 된다.

 

여자의 상황과 성격: 여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들만의 자주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를 형성한 적이 없다. 통일된 공동체를 형성할 만한 유기적인 연대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가 지배하는 집단 속에 편입되어 종속적인 지위만을 얻는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 속에 편입된 동시에, 이 세계에 불신을 표시하고 있는 영역의 양쪽에 걸터앉아 있다. 전자에 의해 분명한 신분이 주어짐과 동시에 후자 속에서 갇혀 지낸다.

 

남자는 자기를 초월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있으므로 역사를 하나의 생성으로 생각한다. 가장 보수적인 남자도 어떤 종류의 진화는 불가피하며 자기 행위나 사상을 거기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에 여자는 역사에 참가하지 않으므로 그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동적인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에 젖어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유의 능력을 체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해방을 믿지 않는다. 세계는 알 수 없는 숙명에 지배되어 있으며 그것에 반항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해도 그런 위태로운 길을 스스로 개척해본 적이 없으므로 열의를 갖고 달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에게 미래를 개척하는 체험이 한 번이라도 주어진다면 그녀는 더 이상 내재성에 매몰되어 지내지 않을 것이다.

 

여성에게는 기생적인 역할이 주어질 뿐이다.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향락을 즐기기 위해 생식하기 위해 남성을 필요로 한다. 성적 서비스에 의해 남성의 혜택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착취의 도구가 된다. 남자는 여자가 타자이기를 원한다. 남성은 여성을 객체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를 객체로 만든다. 그러나 모든 실존자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려고 해도 여전히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녀가 자진하여 객체가 되려고 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녀는 자유로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여기에 그녀의 근원적인 배신이 있다. 가장 수동적인 여성일지라도 역시 의식적이다. 의식적으로 연극을 한다. 수동적인 역할을 연기한다.

 

여자가 갇혀있는 영역은 남성의 세계에 의해 권한이 주어져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남자 역시 조종을 받고 있는 어떤 정체불명의 힘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 힘에 협력하면 여성도 권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애매하고 상반되어 있다. 상반된 태도 속에서도 여자는 대개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와 평온을 추구하고 자연 속에서 초월을 발견한다. 여성은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여기에 친근성을 갖고 있는 모든 사고방식을 기피한다. 그녀는 스토아 철학자나 16세기 신플라톤학파의 철학과 유사한 자연주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여성에게 사회가 제공하는 최고의 보상은 종교이다. 종교는 압박을 받고 있는 자의 마음에서 모든 반항심을 질식시켜버린다. 여성은 종교를 통해서 체념을 정당화하고 희생자로서의 자기성화작업을 이루어내며 종교활동을 하면서 공허한 시간을 메운다.

 

3 정당화
나르시시즘의 여자: 거울에 비친 반영이 자아와 동일화되는 것은 특히 여성의 경우이다. 자기를 능동성, 주체성의 소유자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남성은 자기 영상 따위 따위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성은 자기가 객체임을 알고, 또 자진하여 그렇게 되므로 거울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기 숭배와 자기 예찬에 몰두해있는 나르시스트는 완전히 실패하게 마련이다. 자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의존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답답한 노예상태에 빠지게 된다. 타인의 찬동은 신비롭고 변덕스러운 권위이다. 나르시시즘의 여성의 허영심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으며 애를 쓰면 쓸수록 세계와 타인의 의식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한 객체로 자기를 만들 뿐이다.

 

연애하는 여자: 연애란 남성의 인생에는 하나의 일시적 관계에 지나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인생 그 자체이다. 여성이 연애에서 생각하는 단지 헌신에 그치지 않고 육체와 정신 모두를 무제한으로 완전히 제공하는 것이다. 전적인 자기포기. 반면 격정에 사로잡힌 경우에도 남성은 결코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숨을 쉬는 한 언제나 독립적인 주체로 남아있으며 사랑하는 여성은 많은 가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런 여성을 자기들의 실존에 일체화시키려고 하며, 결코 그녀 속에 자기의 실존을 몰입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주체이며 자기 자신인 인간이라면 초월에의 고귀한 소원을 지닐 때에는 세계에 대한 행동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야심에 가득차서 행동한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존재는 자기의 주체성 속에서 절대를 발견하지 못한다. 내재를 운명으로 여기는 존재는 행위에 의해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의존의 영역 안에 처박혀서, 어렸을 때부터 남성의 예속물로 자랐기 때문에, 남성에게서 지배자를 발견하는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 지배자 앞에 자기를 소멸시키려고 한다. 연애는 그녀에게 하나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자기소멸의 꿈은 실제로는 존재하려는 강한 의지이다. 우상에게 자기를 완전히 맡겨버림으로써 여성은 자기의 소유와 우상 속에 요약되어있는 세계의 소유가 동시에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상숭배적 연애의 아이러니는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함으로써 세계의 전체를 얻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려는 전략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남성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때, 그를 독점하는데 실패할 때,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혐오나 굴욕, 자기에 대한 증오로 급변하여 그녀로 하여금 자기 형벌로 이끌어간다.

 

만약 그녀가 애인을 독점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녀는 맹목적인 정열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를 사슬로 묶는다. 이것은 곧 남성 위에 전제적으로 군림하기 위한 편집증적인 헌신이다. 그녀는 남성을 자기의 수인(囚人)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기의 초월을 남성에게 위탁하여 그것을 구제하고자 한다. 초조함과 기다림, 의존의 괴로움, 질투 따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미 자기의 존재 전체를 남자에게 투척해버린 여성에게 이제 애인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성직이 된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손아귀에 쥔 인간 앞에서 벌벌 떨면서 굴욕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대자존재로서 존재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며, 목적을 향해 자기를 투기하고, 대리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집단을 향해 자기를 초월하며, (연약한 처지에서가 아닌) 강건한 입장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연애는 비로소 생명의 샘이 될 것이다.

 

신비주의 여성: 신비주의에 빠진 여성은 자기의 육신을 파괴하여 자기를 없애는 데 몰두한다. 그녀들은 포기의 완벽성과 수동성의 열성적인 수락에 의해 빛나는 지고의 현존을 새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구제의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세계에 대해 발붙일 기반을 갖지 못한다. 자기의 주관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자유는 신비화된 채로 나아있다. 자유를 올바로 실현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능동적인 행동에 의해 그것을 인간사회 속에 투입하는 것이다.

 

4 해방
독립한 여성: 여성이 현대에 이르러 사회적인 노동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기생충 인생에서 벗어나 초월을 다시 회복하고 자기 기획 속에서 주체로서 구체적으로 자기를 확립하게 되긴 하였지만 현대 여성의 딜레마는 일하는 주체가 지닌 자주적인 능동성이 전통적인 여성다움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남근과 초월이 일체화되어있고, 그는 인간이라는 천직과 남성이라는 운명이 완전하게 조화되어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상황은 남성에 비해 매우 분열되어 있다.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확보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사회가 바라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구현하려는 상반된 의지로 인하여 인텔리 여성들은 종종 부자연스럽고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같은 독립을 획득한 여성은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성적 교섭을 갖는 큰 특권을 누린다.

 

현대 여성들이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자의 포부를 마음속에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를 하나의 자유로운 존재로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너무 치열하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젖을 필요는 없다.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가장 심한 고독 속에서 고개를 쳐들어야 한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과 초월의 훈련이다. 스포츠나 모험만이 세계와의 대결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의 고독 또한 세계 앞에 맞서는 훌륭한 기폭제가 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현실세계와 고독하게 대결해 나가는 것. 이것이 곧 하늘로의 비약이고 초월이다.

 

결론: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하나의 위로이고 쾌락이고 반려이며 비본질적인 재물일 뿐이다. 반면에 여성에게 있어서 남성은 실존의 의미이며 이유이다. 자립하지 못한 여자는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빨아먹는 기생충의 운명을 갖는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의 무게로 남성을 괴롭힌다. 여자가 이렇게 된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기회를 안 주고 그녀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포기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여성에게 자립적인 생명 조직을 제공해야 한다. 그녀가 세계와 싸우고 거기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취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의존성은 없어진다. 여성이라는 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호르몬이나 신비적인 본능에 의해 그 기질이 항구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면 여성은 그 책임감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남녀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면 섹스 역시 승리나 패배의 개념이 아니라 교환, 교류, 관계 맺기, 상호 능동성을 기반으로 한 상호증여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동등한 자로 인정하고 우애를 느끼면서 성생활을 할 수 있다. 우애가 흐르는 성생활이라고 해서 황홀과 정열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실존의 긴장, 격동, 희열, 실패, 승리 등은 역시 성본능 속에 구체화될 것이다. 요컨대 여성이 대자적으로 살아가더라도 역시 남성과 대립하여 살게 될 것이다. 서로 주체로 인정하면서 상대방에게는 어디까지나 타자이다. 남녀관계의 상호성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는 데서 생기는 기적, 즉 욕구, 소유, 사랑, 꿈, 모험 등을 없애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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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23-06-0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숨막히는 책이다. 워낙에 뭘 주절주절 방대하게 써 놔가지고 정말 안 읽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보부아르가 묘파한 전통사회 여성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내 은밀한 민낯의 정밀해부도 같아서. ‘여성으로서의 나’, ‘에로스와 성과 생식에 관한 방면에서의 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수양 2016-07-02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보부아르는 여성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자립을 필수요소로 여기고 있지만 글쎄 나는 허영스럽게도 페미니즘보다 그리스 귀족 정신에 보다 더 경도되어서인지 사회적 노동이 비본질적 존재에서 본질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필요 조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날 비로소 본질적 존재로서의 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내 노동은 사회에 유용하다. 그러나 내 노동이 나에게 ‘사회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가? 회의적이다. 내 노동의 종류는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초월이 아니라 내재의 영역에 속한다. 확장과 창조와 번성과 기투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의 유지와 안정과 존속의 영역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가사일과 같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해서는 보부아르가 주부의 업무에 대해서 표현한 대목과 마찬가지로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투쟁 속에서 끝없이 거듭되는 피로’를 주로 얻는다. 보부아르는 가사노동하는 주부를 시지푸스에 빗대었는데 시지푸스적인 노동을 하기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이 내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점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다. 그래,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는 성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하면 아무런 표시도 안 나고 안 하면 불쾌한 표시가 나는 집안일과도 같은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서일까,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하면서도 기투를 통하여 실존하는 주체성을 확보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여전히 비본질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만 든다. 어쩌면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업주부가 사노예라면 대부분의 노동자는 공노예가 아닐까 하는.

아무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라도 노동의 주체에게 그 일이 예술적이고 창조적이고 자기초월적인 가치로 실감되지 않는다면 일을 통해 독립된 주체성을 구축하기는 요원한 일 아닐까. 반면에 GDP에서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무용하게 치부되는 가사노동이라도 당사자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눈부신 창조적 가치를 발견한다면(이것은 매우 주관적 판단일 것이다) 주체적 삶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사회적 노동을 필수로 봤던 보부아르의 견해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하는 중이지만 여전히 종속과 억압과 불만족과 자기소외의 기분을 느끼는 나로서는 뭔가 시원치못하게 느껴진다. 그다지 내 문제점을 명쾌하게 긁어주는 날카로운 통찰이란 생각이 안 든다. 노동도 노동 나름이지. 진정한 자기해방을 위해서는 노동의 종류에 대해 좀 더 고찰하고 분석 비판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수양 2016-08-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 이 책도 그렇고 페미니즘 서적들을 몇 년에 한 번씩 간헐적으로 읽어보긴 하지만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을 지는 글쎄, 페미니즘을 지지하느니 차라리 맑시즘에 다가가겠다. 여성 문제보다 노동과 계급 문제가 보다 더 절실하고 본질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내가 맑시스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데. 그렇기엔 너무 염세적이고 개인주의적인데. 무슨 주의자로 분류하자면 나는 그저 먹고사니스트인 것 같다. 아니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무슨무슨 주의를 삶의 모토로 삼거나 지지하기에 나는 너무나 분열되어 있다. 이율배반적 가치와 지향들이 내 안에서 아무런 갈등도 없이 마치 에셔의 판화 그림처럼 터무니없이 기묘하고 정교하고 아름답게, 완성도 높게(?) 공존한다. 나이들면 자연스런 노화의 결과로 좀더 보수주의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수양 2016-08-13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그야말로 방대한 책이다. 초경과 폐경, 결혼과 이혼, 임신과 출산, 육아 등 일련의 다양한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 사건들을 통과해 나가고 있는 여성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아울러 보부아르를 여성운동의 사상적 선구로만 이해하기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 이 책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뛰어난 인류학자이고 심리학자이며 교육가이자 풍속학자 그리고 문필가였다. 문필가로서의 보부아르는 통렬하고 날카롭다. 가차없다. 매섭다. 한편으로 드는 확신은, 페미니즘의 원리는 실존주의 철학이며 실존주의의 뿌리는 단연코 니체라는 것. 니체를 읽어야 한다. 샅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