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 상 - 세계의문학 17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조홍식 옮김 / 을유문화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서론 서구 언어에서 남자라는 단어는 인간 전체라는 단어와 동시에 쓰인다. ‘남성’이라고 하는, 주체이자 절대이자 본질적인 존재, 인간의 절대적인 전형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남성이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로서 정의한다. 남자의 규정에 따르면 여자는 우발적인 존재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며 타자이다. 그러나 이는 납득할 만하다. 어떠한 집단도 ‘타자’와 직접 대립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대립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며,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타자를 비본질적인 객체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확립시켜 나간다.

 

그렇다면 응당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자를 타자로 설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체로서 구축해나가야지 않을까. 각자가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의식의 투쟁, 바로 그 투쟁적인 교호작용 속에서 '적의'가 '협력'으로 변화하고 서로가 관계의 상호성을 점진적으로 인정해 나가는 그러한 부단한 경과야말로 주체가 또 다른 주체와 만나 더불어 살아가는 온당한 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남녀 사이에는 한 쪽만이 유일한 본질로서 긍정되고 그 상호 관계의 상대에 대해서는 일체의 상대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순수한 타성으로 정해버리는 것일까. 왜 여자들은 남성의 절대력에 대하여 따지지 않는가.

 

어떠한 주체도 단번에 자발적으로 비본질적인 객체로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타자’로 정하는 ‘타자’가 ‘주체’를 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주체’에 의하여 ‘타자’는 ‘타자’로서 세워진다. 그러나 타자가 주체로 반전(反轉)하여 되돌아갈 능력이 없게 되면 그 타자는 그런 상태의 관점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본질로서의 여자가 본질로 결코 복귀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힘으로 그 반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반전을 이루어낼 힘이 없을까. 여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현실적인 수단이 없다. 여자들은 자신에 고유한 과거도, 역사도,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이해의 연대성도 없다. 여자들은 주거, 노동,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매이거나 아니면 사회적 신분에 매여있기 때문에 여자들끼리보다도 남자들 사이에서 더욱 긴밀하게 분산하여 살고 있다. 부르주아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보다 부르주아 남성과 연대성이 있고, 백인 여자는 흑인 여자보다 백인 남자와 연대성이 있다.

 

이는 일종의 '공모(共謀)'다. 영주인 남자는 가신인 여자를 물질적으로 보호해주고 그 생존의 도덕적 정당화를 책임진다. 그러므로 여자는 경제적 위험도 회피할 수 있고, 동시에 혼자 힘으로 자기의 목적을 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위험도 회피할 수 있다. 사실, 모든 개인에게는 자기의 주체를 확립하려는 개인의 윤리적 충동과 더불어 자유를 피하여 자기를 사물로 만들려는 유혹이 존재한다.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이고, 소외되고, 버려진 그 사람은 초월(超越)에서 이탈되고 모든 가치를 상실하여 다른 사람의 의지의 제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이한 길이다. 마땅히 인수해야 할 실존의 고뇌와 긴장을 회피해버린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우리가 채택하는 전망은 실존주의 모럴이다. 모든 주체는 투기(投企)를 통하여 자기 초월로써 구체적으로 확립된다. 주체는 부단한 자기 초월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유를 완성한다. 무한히 열려있는 미래를 향하여 자기 신장을 도모하는 것 외에 목전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길은 없다. 초월이 내재로 떨어질 때마다 실존은 ‘즉자 존재’로 타락하고, 자유는 사실성으로 타락한다. 이런 전락은 만약 그것이 주체에 의하여 동의된다면 하나의 도덕적인 과실이다. 만약 그것이 주체에 강제된다면 그것은 좌절과 압박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그것은 두 가지 경우에 다 절대악이다. 자기 실존의 정당화를 희구하는 모든 개인은 이 실존을 자기 초월의 무한한 욕구로 경험한다.

 

그런데 여성의 상황이 특수한 점은,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매순간 투기를 통하여 자기 초월로서 실존하는 주체이면서 또 한편으로 여자는 남자들이 타자로서 살도록 강제하는 세계에서 (최초의)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여자의 비극은, 부단히 본질적인 것으로서 자기를 확립하려는 모든 주체의 기본적인 요구와, 여자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형성하려는 상황의 요청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여성성과 인간성(내지는 주체성)이 상호 모순되기 때문에 여성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분열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의 신분에서 어떻게 인간 존재가 완성될 수 있을까? 어떻게 종속의 한가운데서 독립을 찾아내야 할까? 이 문제를 이제부터 구명하려 한다.     

 

1 숙명 생물학, 정신분석학, 유물사관에서 여성은 각각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먼저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 생명 현상에는 영속과 창조라고 하는 서로 결합하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 생명은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즉 생산함으로써 종을 유지하여 나가고, 또 자기를 유지해 나가는 조건에서만 창조한다. 생명의 형태가 진화할수록 생식은 이러한 양면성을 뚜렷하게 갖는데, 포유류에서 성역할을 살펴보면 보통 암놈은 생명의 연속과 양육에 힘쓰고 수놈은 분열과 생산과 창조를 야기한다. 그 결과 개체로서의 암놈은 수놈에 비해 종의 이해관계에 훨씬 더 예속되어 있고 종의 권력의지에 의해 수놈보다 훨씬 더 소외되어 있다. 그에 비해 수놈은 종의 생명력을 자기의 개적 생명에 일치시킨다. 이런 점에서 헤겔이 여성은 종 속에 갇혀 있는 데 비하여 남성에게는 주체적인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은 옳다.

 

종의 연속을 위해 개체로서의 여성이 자기소외를 초래하면서까지 감내해야하는 생물학적 고난은 다양하다. 생의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생리, 그로 인한 호르몬의 불안정, 고통을 수반하는 임신, 출산, 그에 관련된 각종 질환 등등. 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은 생물학적 조건은 중요하다. 육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파악하는 도구이며, 세계는 파악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생물학적 조건이 여자에 대하여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조건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현상을 만들어간다. 인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닌 역사적인 관념이고 여자는 응고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이다. 생물학적 고찰만으로는 남녀의 계급을 결정하는 데 결코 충분하지 않고 또 왜 여자가 타자인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로 여성에 대한 정신분석적 견해를 살펴보자. 어렸을 때 여자는 아버지와 동화하려 하고 그 다음에는 남자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고 그러한 열등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남성화하기도 하고 아니면 사랑의 순종 속에서 지배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면서 자신의 행복의 성취를 찾아내고 대신 그 보상으로 어머니가 됨으로써 새로운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식의 여성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시나리오는 그 정교함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진리로 행세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다를 바가 없다. 현상을 본질로 착각하는 이론인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이다. 아울러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고 또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녔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듯이 보인다. 정신분석이론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에서의 고찰만 있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그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선택, 자유의지 이런 것에 대한 인식은 누락되어 있다. 개인에서 사회로 통하는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유물사관의 입장. 유물사관 이론은 프롤레타리아와 더불어 여성 역시 해방의 전기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물사관은 성적 특질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을 노동자로 단순 환원시켜버릴 뿐만 아니라 양성의 대립을 계급투쟁에 귀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남녀불평등 문제와 계급 갈등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노동에 있어서 노예는 주인에 대하여 자기를 의식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반항 속에서 항상 자기의 조건을 체험한다. 이렇게 해서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서 자기의 착취자를 위협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노리는 것은 계급 소멸이다. 그러나 여성은 성(性)으로서의 자기를 말살할 수는 없다. 여자의 상황은 프롤레타리아와 다르다. 여자는 비본질적 처지에서 본질적인 상태로 돌아가 자신의 착취자를 위협하는 것이 어려운 구조에 놓여있다. 여자는 생활과 관심이 공통적인 이유로 남자와 연대 의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남자와 공모를 통해서 존재하는 측면이 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생물학, 정신분석학, 사적 유물론의 인식틀이 여성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여성은 가치의 세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총체적인 전망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2 역사 원시 유목사회에서부터 지속되어온 일반적인 남녀의 포지션: 내재, 유지, 존속, 보존, 양육, 명맥잇기, 자기반복 vs 초월, 생산, 창조, 혁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음, 새로운 가치 창조, 세계의 외연을 넓히기, 미래를 형성해 나가는 일.


3 신화 
주체가 자기 확립을 모색하자마자 그 주체를 제한하고 부정하는 타자가 곧 필요하게 된다. 즉 주체는 자기가 아닌 이 실재를 통해서만 자기에 도달할 수 있다. 주체가 자신의 참된 존재를 완성하고, 초월로서, 목적으로 향하는 탈출로서, 투기(投企)로서 자기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른 인간의 실존이다. 그러나 나의 자유를 확실케 하는 이 다른 사람은 또한 나의 자유와 충돌도 한다. 의식은 제각기 자신만을 최고의 주체로 인정하려고 한다. 의식은 제각기 남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킴으로써 자기완성을 시도한다. 그러나 노예도 또한 노동과 공포 속에서 자기를 본질적인 것으로 느끼고 있다.

 

이 연극은 양쪽이 상대의 개체를 자유로이 인정하는 것에 의하여, 각자가 서로 자기와 상대를 객체로서, 그리고 주체로서 인정함으로써 극복될 수가 있다. 이는 부단히 형성되면서 부단히 소멸되는 투쟁의 진실로써, 인간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자기 초월을 계속할 것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인간은 존재를 포기하고 자기의 실존을 짊어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태도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회심(回心)이다. 회심은 부단한 긴장과 노력, 위험의 감수를 요구한다.

 

그러나 남녀 관계에서는 이러한 도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자는 모반을 꿈꾸는 투쟁적인 노예와 달리 남자의 지배권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여자로부터 남자는 자기를 객체로 변경시키려는 반항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남자에게 여자는 결코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본질처럼, 상호성이 없는 절대적인 타자처럼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자는 남자의 실존과의 대조에 있어서 하나의 충실한 보충물적 존재로 보여서, 여자를 통하여 자기합일을 이룸으로써 남자는 자기를 달성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보충물이든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든 여자는 언제나 남자와의 관계에서만 규정된다는 점이다. 영원한 타자인 것이다. 

 

여자라는 것의 애매성은 ‘타자’라는 관념의 애매성 바로 그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규정되는 한, 인간 조건의 애매성이다. ‘타자’란 ‘악’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에게 필요할 때는 ‘선’으로 된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서 전체에 도달한다. 그러나 여자를 전체에서 분리시키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는 무한에의 문(門)이기도 하고 여자의 유한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자는 어떠한 고정된 개념도 구체화하지 못한다. 여자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희망에서 실패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선에서 악으로, 악에서 선으로 부단한 진자 운동이 이루어진다. 어떠한 각도에서 여자를 보더라도,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 상반성이다.

 

여자는 기만적인 이중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남자가 필요로 하는 전부이면서 남자가 도달하지 못하는 전부이다. 여자는 자연과 남자 사이의 지혜로운 중개자이다. 그런가하면 모든 지혜에 반항하는 분방한 자연의 유혹이다. 선에서 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덕적 가치와 그 반대를 여자는 육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자는 행위의 실질이며, 행위를 방해하며, 세계에 대한 남자의 파악이며, 남자의 실패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의 실존에 관하여 성찰하거나 그에 관해서 표현하거나 하는 경우 항상 그 근원에 있다. 남자는 여자 속에 자기가 원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미워하는 것을 투입한다. 여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남자가 여자 속에서 자신의 전부를 추구하며, 또 여자가 추상적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 있어서 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는 까닭은 여자를 늘 전체적으로 요약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성스럽거나 천하거나 하는 따위로. 이런 인식의 태도는 서로 모순되는 숱한 신화를 양산할 뿐이다. 여자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는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는 대신 마치 여자를 둘러싼 신비라는 것이 있는 듯이 말한다. 설명될 것 같지 않던 모든 것들이 신비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거뜬히 설명된다는 점에서, 여자에게 신비의 베일을 씌우는 일은 남자의 여자에 대한 이해 태만과 허영심을 숨기는 알리바이다. 여자가 신비스럽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여자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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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6-06-2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보부아르의 논리에 따르면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 규정한 타자로서의 여성상을 여성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실존주의 모럴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그러나 젠더 권력의 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게 오늘의 여전한 현실이라면, 이 안에서 작동하는 젠더 권력 게임의 룰을 철저히 파악 숙지하여 이 게임 안에서 내가 맡은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전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내 권력의지를 효과적으로 관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또한 주어진 조건에서 개체가 능동적으로 자기 신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실존을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자기가 동의하는 소외 속에서 자기를 본질로서 실현하는 것˝(p.113)이며 ˝자기를 기정의 피동적인 비바람에 부대끼는 것으로 파악할 때조차 그는 역시 초월과 투기로써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것˝(같은 페이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보부아르가 말하는 몹쓸 ˝공모˝일려나. 그러나 그런 혐의를 얻을 지언정 나는 여전히 약자가 지닌 영악하고도 건강한 교활의 힘, 반작용의 힘을 주목한다.

수양 2016-06-22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보부아르는 왜 여성이 유적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겪는 생물학적 현상들을 비극적으로 볼까. 왜 신산하고 고통스럽게만 여길까. 생리는 비록 번거롭지만 한 달에 한 번의 거사로 인해 생식기가 자연정화되니 얼마나 좋으냐. 출산 역시 마찬가지다. 그간 축적되었던 노폐물이 태아와 함께 빠져나가고 뼈구조가 새롭게 재구축되는 등 그야말로 대대적인 정화, 재생, 재탄생의 순간이 아닌가. 잉태는 오로지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우주적 신비 체험이자 유사-신 체험이기도 하다. 여성만이 잉태와 출산을 통해 직관적으로 신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왜 보부아르는 생리와 임신 출산 육아를 개체로서의 인간을 예속하는 종의 이해관계로만, 기투 속에서 실존하는 주체를 좌절시키는 방해 요소로만 볼까. 보부아르한테서는 미묘한 남근 선망이 느껴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을 그다지 긍정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보부아르를 극복한, 더 큰 긍정의 페미니즘, 호쾌한 페미니즘을 만나고 싶다.

수양 2016-06-2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여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소외된 타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기분 감정 욕구 생각 의견 입장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반드시 자기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말하게 해야 한다. 서툴고 낮고 희미한 목소리로라도. 그리고 또 누군가가 내는 그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부단히 말하기-듣기 연습을 해야 한다.

수양 2016-07-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 탱고라는 춤에서 땅게라는 여성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몸짓과 표정, 몸매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을 온몸으로 구현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이 보부아르의 표현대로 마냥 수동적이고 패배주의적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녀들은 여성미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활력이 넘치고 관능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격정적으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찬란하게 표출한다. 보부아르의 관점에서 보면 지독히도 한심하게 여성적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싱싱하게 살아있다. 심지어 춤을 결정적으로 완성하는 임무는 땅게라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탱고라는 춤에서 전체적인 패턴을 구상하고 리드를 맡은 쪽은 땅게로다. 땅게로(남자)가 리드하고 땅게라(여자)가 팔로우한다는 커플댄스의 일반적인 규칙은 탱고에서도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할 대전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땅게라를 마냥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탱고라는 춤에서, 아니 모든 커플댄스에서 수동과 능동은 아주아주 모호한 것 같다. 대단히 오묘하다. 능동이지만 능동이라 할 수 없고 수동이지만 마냥 수동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해야 언어로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내 짧은 언어가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어쩌면 춤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능동형 같기도 하다.

땅게로는 리드하고 땅게라는 팔로우한다는 규칙은 그저 임의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그러한 규칙 자체가 결코 실체가 아니다. 규칙이란 어쩌면 하나의 시니피앙이고 텅빈 명분일 뿐인 것도 같다. 그렇다면 실체는 무엇일까. 춤 안에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내 생각엔 게임의 규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임의적인 규칙 속에서, 그리고 규칙이 야기하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효과적으로 피력하고 관철할 것인가 하는 게 실질적인 관건이자 핵심인 것 같다.

탱고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걸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땅게라와 땅게로 모두 각자 맡은 역할 속에서 바로 그런 요령, 전략, 기술, 전술, 재주, 기예를 깨우쳐나가는 것이다. 만약 보부아르가 탱고를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녀의 페미니즘은 날카로운 호전성을 다소간 상실하고 대신 좀더 입체적이고 모호하고 난해해지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적고나서 <제2의 성> 하권을 읽는데 내 생각이 경솔했던가 모르겠다. 책은 역시 잠자코 끝까지 읽어봐야.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지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여성은 남성과 정면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그녀는 인간의 권리요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여성적인 성질을 손상시킬 의도도 없다. 그녀는 남성적 세계에 접촉하여 그것을 자기에게 합병시키려고 생각한다. 그녀의 강인한 감각성은 남성의 난폭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신경이 굵은 동물적인 여성은 성교의 수치 같은 것은 처음부터 느끼지 않는다. 과감한 성향을 지닌 지적인 여성은, 자기가 이길 자신이 있는 그 대결에 과감히 나선다.

(...) 남성의 종속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여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에게서 도망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자기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고 한다. 조건이 대단히 좋을 경우에는 (그것은 주로 상대방 남자의 인간됨에 의해 결정되지만) 경쟁의식까지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남성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여성의 입장을 완전한 형태로 사는 것을 즐기게 된다.

(...) 지배욕이 강한 여성의 경우에는 동성애가 언제나 완전한 만족을 주는 해결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여성은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자기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성애적 관계는 굴욕적인 동시에 자기를 윤택하게 하는 것도 된다. 성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을 거부하면, 한편으로 자기를 제한하는 것도 된다.˝(p.62~63)

보부아르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이 그 한계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대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은 각자 자유롭게 그것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그 자유가 여성에게는 추상적이고 허망한 것이므로, 반항의 형태로밖에 올바로 행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열린 길이다.˝(p.367)

보부아르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의 한계로 인해 여자가 자신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범위의 최대치가 고작 `반항`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보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스케일이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한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경제적인 진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